[설명자료] 큰 절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이 일주문이다.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으로서 절의 위용을 한눈에 느끼게 해 주는 일주문은, 곧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첫 관문을 상징하니 초발심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다.
신라시대에 절을 처음 세울 때부터 일주문은 지금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조선시대 세조3년 봄에 중수하여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는 기록만이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건축 양식은 조선시대 초기의 양식인 듯하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 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고종 11년(1874)에 판각한 것이다.
이 「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의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海印)이라는 낱말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가르키는 말이며 부처님 정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해인삼매는 또한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거친 파도,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여실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중생의 본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인 것이다.
청정도량 해인사, 이곳은 우리들 마음의 고향이다. 그래서 황량한 대지를 방황하는 현대의 이방인들을 다정한 고향의 손짓으로 부르고 있다. 팔만대장경, 높은 탑, 자연의 그윽함이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해인삼매의 한 생각, 맑은 마음 그 거룩한 도량이 바로 해인사이기 때문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말사(末寺)는 150여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20일 넘게 폭우가 내리는 날에 사찰 방문일을 잡았으므로 일단은 새벽 6시20분에 집을 나섰습니다. 폭우가 앞을 가로막아섭니다. 하지만 달겨가 봅니다.
그리고 일행을 만나서 출발하면서 논의를 하였습니다. 가까운 길을 나서서 멀리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만 오늘 해인사를 가리로 한 바가 있기도 하고 비가 조금은 원만해지면 계속 달려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나서니 조금은 빗물이 약해졌습니다. 결국 당초의 예정대로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일단은 안성휴게소에서 안셩국밥을 먹었고 추풍령휴게소까지 달려가서 휴식을 하고 다시 달려서 해인사에 도착하였습니다.
미리 공부한대로 해인사는 名刹(명찰)중의 古刹(고찰)입니다. 폭우속에 성철스님의 사리탑을 만났습니다. 지난날의 고승의 사리탑 뒤편 드넓은 자리에 성철스님의 사리탑이 건립되었습니다.
평소 성철스님의 뜻과 마음은 아닌 듯 한데 신도들의 마음이 더 큰 듯 보입니다. 사리답의 면적이 넓고 탑의 구성이 네모와 지구본 모습의 3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위로 만든 조형물인데 1,000년을 버티기에는 어려움이 있어보입니다. 네모난 돌을 낮게 쌓아 올렸으면 하고 평소 서민적인 스님의 모습과 연결되는 작고 평범한 사리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이 그러합니다.
점심은 맛집입니다. 반찬이 12가지가 넘겠습니다. 노부부가 운영하십니다. 푸짐하게 잘 먹고 다시 길을 나서서 직지사에 도착했습니다. 위풍당당한 건물이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산도 중후하니 멋진 곳입니다.
거대한 건물은 큰 비용이 들었겠구나 하는 걱정이 들고 넓은 화원은 가꾸는데 돈이 들고 인력, 손길이 필요하겠습니다.
세 번째 동학사에 5시40분경 도착하여 입구에서 좋은 대화를 한 결과 승용차를 통과시켜주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무원장의 지시를 받고 사찰을 방문 중인 듯 한 분위기를 준 것인가 반성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특권은 큰 희열을 줍니다. 입구까지 승용차로 올라가서 대웅전에서 예불시작 직전에 9배를 올리고 내려와 사진을 찍고 평온하게 돌아왔습니다.
길을 달리고 고속도로를 거쳐서 비가 내리는 길을 뚫고 공주를 지나 안성, 평택, 오산에 이르렀습니다. 오산시청 인근 부대찌개집에서 4인이 3인분을 주문하여 배불리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