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소주#사이다 병갈이 사건

  • 등록 2025.04.02 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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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소주#사이다#병 갈이 사건 ▦

1985년경 경기도청 새마을지도과에서 서무담당으로 근무했습니다. 1981년 8월 10일에 화성군 팔탄면에서 경기도청 소속의 사업소인 농민교육원으로 발령받아 1984년 9월18일까지 3년 동안 근무하고 새마을지도과로 전근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순찬 선배가 인사계 이인호 선배에게 이강석이를 인사계로 데려가면 잔심부름 잘하고 눈치있게 잘 할 것이라면서 推薦(추천), 薦擧(천거)를 했습니다. 그래서 발령 대상자로 내정하고 글씨 검증을 실시하였답니다.

 

그 즈음에 인사계에 최문용 계장님의 의료보험 신청서를 내러 갔던 바, 이강석의 글씨 테스트 임무를 진행하게 된 이인호 선배는 이강석을 말석으로 받으면 자신이 하던 잔무를 넘길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글씨를 받게 됩니다.

조금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였던 점이 있습니다. 이인호 선배는 의료보험 서식을 내주면서 이 자료는 電算(전산)처리되니 휘갈겨 쓰지 말고 正字(정자)로 적으라 하십니다.

 

도청을 방문하여 처리할 일이 많았던 상황이기도 하지만 1984년에 종이에 쓴 글씨가 전산이 읽어드린다는 말은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를 어리석게 보고 하는 말이겠다 생각하고 평소보다 더 급하게 내용을 적어 제출하고 나왔습니다.

차라리 자네를 인사계로 들이기 위한 글씨 테스트이니 또박또박 잘 쓰라 했으면 그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업무보다 글씨만 보는 인사계 8급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신명나게 뛰어다니며 심부름을 한 새마을계 서무가 더 나은 편이었다고 자평하는 바입니다.

 

더구나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경우 이미 오래전, 과거에 정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사계가 아닌 새마을계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새마을 분야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부서 세정과에서 좋은 분, 어려운 분, 불편한 분, 걱정해주시는 분 등 참으로 다양한 인품을 만나고 그 속에서 젊은 날의 마음속 소양을 쌓아갔습니다.

인사계에서 글씨를 시험하신다니 교회에서 들은 주기도문을 찾아봅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자료검색] 주님의 기도는 기독교의 기도문이다. 천주경(天主經, 라틴어: Oratio Dominica), 주의 기도, 주기도문(主祈禱文)으로도 부른다. 예수가 직접 가르쳐준 기도문이며 교파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기도문이다.

주기도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만 저의 악필이 심무섭 차석의 시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즉결, 탈락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좋은데 글씨가 아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인사계로 가지 못하고 새마을과 서무담당이 된 것입니다. 인사계가 아닌 새마을계로 배속되면서 인생과 운명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연이어서 떠올립니다.

결론적으로 42년 공직을 원만하게 마친 것도 인사계가 아닌 새마을계에 배치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사계로 갔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마을지도과에 발령이 되고 이상윤 과장님으로부터 새마을계 서무담당으로 배치되어서 강영시 선임으로부터 서무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범관 계장님을 만나서 인생을 배우고 최병석, 이종덕, 김성호, 황호종, 곽상현, 이용섭, 한태원, 허창만, 조혜경, 강언숙 선후배를 만났습니다.

庶務(서무)라는 말을 꺼내면 비봉면사무소에 근무한 1977년 5월부터 6월까지 1개월을 총무계에서 근무하고 산업계로 좌천된 사건을 떠올리게 됩니다.

 

첫 월급을 타서 자전거를 사고 열심히 근무하겠다는 다짐을 하는 터인데 庶務(서무)를 書務(서무)로 誤認(오인)하는 바람에 큰 사건이 났습니다.

당시 홍 주사라는 분이 군청 통계계에서 행정업무와 관련한 공문서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비봉면사무소에서 선배들이 작성한 각종 보고서와 자료를 가져갔습니다. 매송, 비봉, 남양, 마도, 송산, 서신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신규발령 후 선임에게 배운대로 문서를 접수하고 부면장님 先決(선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문서를 총무계, 산업계, 재무계, 호병계 중 한 곳에 배포해야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서무담당이니 모든 서류는 서무담당이 가지고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이주일, 삼주가 흘러갔고 수시보고통제 도장이 찍힌 문서는 대략 3일 안에 처리해서 부면장의 통제를 받아서 군청에 제출해야 하는 중요사항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군청 8급의 전화를 받은 면사무소 6급 고참 계장이 그렇게 절절 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당대에 군청 행정계장은 같은 6급이지만 면사무소 계장과는 天壤之差(천양지차)입니다.

정말로 하늘과 땅입니다. 별정5급 면단위 유지가 면장을 했는데 행정계장은 면장은 되어야 통화해서 일을 부탁하거나 동향을 보고하던 시절입니다. 공무원으로서 6급도 해보고 5급 사무관에 승진하여 일했지만 도무지 당시의 행정계장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4급 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수시보고가 늦어진 것이고 사유서를 작성하여 지참보고에 이른 것입니다. 지참보고란 말 그대로 持參(지참)해서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담당자가 직접 문서를 들고 군청 부서에 전달하는 것을 지참보고라고 합니다.

遲參(지참)은 늦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持參(지참)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참석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정조대왕의 御駕(어가)가 내려올 때는 늦는다고 교꾼들이 야단을 맞았고, 돌아갈 때는 왕의 눈물로 御駕(어가)가 한없이 지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원-의왕시 경계 언덕은 지지대고개이고 지지대비가 서있습니다.

 

총무계장님 지참보고 사건이후에 산업계, 재무계에서도 수시보고 지연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야단법석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서무담당 이강석은 후임 동기의 발령일에 산업계로 밀려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저녁에 공무원 사표를 냈습니다. 저는 공무원을 그만하겠습니다. 이렇게 적고 도장을 찍어서 권병춘 선배에게 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나기가 후드득 거리는 밤길을 달려와서 식구들에게 공무원을 그만두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서울 광화문학원의 재수생 가방을 마루 끝에 놓고 시내버스 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09:30분경에 어제 사표를 드렸던 권병춘 선배가 민병일 부면장님에게 보고하였습니다.

49cc오토바이를 타고 두분이 오셨습니다. 민병일 부면장님은 입담이 좋으신 분입니다. 현장행정, 통일벼 행정, 퇴비행정을 하시던 당대의 공무원들은 입담이 좋고 말이 없던 이도 공무원이 되면 아나운서, 앵커가 됩니다. 100분 토론이 가능한 인물로 발전합니다.

 

“어머니, 귀한 자제분을 제대로 잘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부면장님의 명언입니다. 이분은 군청 8급이 6급 고참 부면장에게 전화를 해서 당면 보고서를 빨리 보내라고 채근을 하면 알았다 답하고 전화를 끊으면 담당자에게 한마디 합니다.

 

“이놈아, 네가 안만 나를 괴롭혀도 한 달 버티면 너보다 3배는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명언입니다. 담당자에게 보고서를 빨리 보내라는 말입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던 행정환경, 분위기였습니다. 현장행정이 중심이었던 1977년 지방행정의 현주소와 본 모습을 보여주는 부면장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분이 실력이 없어서 만년 6급으로 부면장하시고 정년퇴직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공직자의 자리가 부족해서 5급 승진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세월이 좋아지고 직급이 인플레이션이 되면서 9급으로 들어와서 서기관으로 잡았던 공직의 목표를 넘어서서 부이사관, 이사관 자리를 넘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고시를 통해 들어온 젊은 공무원들이 경기도청에 대거 포진하면서 다시 비고시 경기도청 공무원의 목표가 서기관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제가 도전할 당시의 서기관은 임명직 군수이고 지금의 서기관은 시청의 국장급입니다.

 

이렇게 세월속에 공직을 담당하다보니 1984년에 새마을과 서무담당이 된 것입니다. 9급으로 비봉면에 근무하다가 국방의 의무자가 되어서 지역방위로 예비군중대본부 기간요원이 되어서 14개월간 근무했습니다.

방위 근무기간은 1979년~1980년인데 79년 10.26이 발생합니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경호실장을 국가예산으로 지급한 총으로 쏘고 이 총으로 대통령을 弑害(시해=부모나 임금 등 윗사람을 죽이는 것)한 엄청난 사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다행스럽게도 방위근무 14개월을 채우고 소집해제가 되어서 화성군청에 복직신청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군청에서는 팔탄면사무소에 발령했습니다.

당시 집안의 당숙 이기화씨가 군청 행정계에 근무하면서 교육을 담당했는데 인사담당자에게 행정계장이 이강석을 양감면이나 팔탄면으로 발령하라고 하는 것을 둘이서 홀딩을 하고 있었다 합니다.

 

조카를 생각해서 좋은 곳으로 발령되도록 하기위해 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지만 제대후 1개월가량을 놀다보니 아무 곳에나 발령을 받아서 공무원으로 열심히 근무하고 싶었습니다.

“아저씨, 아무 곳에나 발령 내 주세요.”

이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奧地(오지=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마을이라도 가겠다는 의사를 분면히 표명했고 결국에는 비봉면 고향마을 만큼이나 교통이 불편한 팔탄면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집에서 7km를 걸어가는 동안에 들판과 고개를 넘고 지나서 비포장길을 걸어서 면사무소에 갔습니다. 비봉면이나 팔탄면이나 면사무소는 大同小異(대동소이)합니다. 청년 공무원들은 집에 가지 않고 숙직실을 숙소로 삼고 있습니다.

1980년 5월10일에 발령을 받아서 근무를 시작했고 일주일의 대부분을 숙직실에서 자고 세수하고 건너편 식당에서 밥먹고 다시 출근해서 일했습니다. 숙직을 수시로 대신하고 선배들은 집으로 보냈습니다.

 

80년 9월경에 당시 총무계 회계담당이었는데 서무담당 오영진 군이 공문 하나를 넘겨주었습니다. 우리 면사무소에서는 이 서기님만 해당된다고 합니다. 경기도청 전입시험 응시원서입니다.

마침 사진이 두 장 있으므로 껍질을 벗겨내고 물풀을 칠해서 붙이고 악필로 작성해서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경기도청 고시계 앞으로 보냈는데 다행스럽게도 인사계로 들어갔습니다. 그 인사계에는 당시 8급 공무원 심재인 선배가 있었습니다.

 

심재인 선배는 화성시청 심응섭 내무과장님의 아들이고 수성고등학교 13회인데 이강석은 20회이니 7년 선배가 됩니다. 이분이 전입시험 담당자였던 것입니다.

담당자가 합격·불합격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경기도청에 아는 사람이 없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공무원 동기생이고 오산부시장에서 퇴임하면서 후임으로 추천해준 김필경 선배가 있습니다.

 

이분은 공무원에 들어오면서 면사무소가 있고 그위에 군청이 있으며 군청에 근무하다가 도청으로 가는 전입시험이라는 제도를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3살 위인 1955년생인데도 30년치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군청으로 들어오라는데도 아니갔고 자신이 갈 곳을 선택헤서 갔으며 군청근무중에 발빠르게 전입시험을 통해서 오산소재 임업시험장을 거쳐서 경기도청 양정과, 사회과, 외자유치과, 예산담당관을 거쳐서 오산부시장, 경기도시공사 부사장으로 공직을 지내신 분입니다.

 

지금 화성출신 공무원 등 인사들과의 모임에서 만나는 선배이고 최근에는 화성시청 인사위원회에서 자주만나고 지난번에는 최원호 안산부시장, 김필경 오산부시장, 이필광 감사관과 함께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은 바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80년 10월 13일자로 전입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곧바로 도청 공무원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시 군사정권이 되었고 그해 5.17광주민주화운동, 12.12사태로 군부가 충돌하는 직극히 어지러운 시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행정조직은 축소되고 업무는 정체기를 맞습니다. 당연히 경기도청의 인사발령도 지연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981년 8월 1일에 8급 공무원이 됩니다. 전입시험에 합격한지 10개월이 지났지만 도에서는 발령소식이 없었습니다.

얼결에 면장님으로부터 지방행정서기 8급 발령장을 받고 기분좋게 근무를 이어갔습니다. 8월8일경에 비상출근하여 구장1리에서 퇴비증산 행정지도 작업에 동참하였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말이 좋아서 행정지도이지 면사무소 직원들이 가가호호 농가를 다니면서 짚단을 퇴비장에 쌓아놓고 분뇨를 퍼서 뿌려주는 작업입니다. 그냥 짚만 있으면 발효되지 않으니 물기가 가득한 분뇨통을 퍼담아서 그 위에 섞어주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행정지도 작업을 마치고 이장님댁에서 아침을 얻어먹는데 동동주를 내주십니다. 훗날 농민교육원에서 만난 최종학 주사님의 친동생 최종춘 이장님입니다. 젊은 공무원 몇 명이 동참한 바이니 이장님이 내오신 동동주를 여러 잔 마시고 면사무소 회의실의 장의자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단잠을 자고 있는데 선배 강영호 형이 잠자는 이강석을 발로 차면서 깨웁니다.

 

“야!!! 이강석!! 너 발령냈단다!!!”

 

잠결에 발령이 났다고 하므로 팔탄면사무소에서 15개월 근무했으니 고향인 비봉면으로 다시 보내주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영호 선배에게 ‘제가 비봉면사무소로 가나요’ 물었습니다.

그런데 경기도청에서 발령이 났다고 합니다. 아!!! 전입시험에 합격한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럼 경기도청에 가서 공무원을 하겠구나.

 

정구채 행정계장님이 전화를 하라십니다. 마침 행정전화가 수리중이어서 경찰파출소의 경비전화로 군청을 연결하여 어렵게 행정계장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면사무소 총무계장이 군청 8급 직원에게 전화하면서 예예!!!를 반복하던 시절에 8급에 승진한지 8일된 햇병아리가 화성군청 행정계장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물론 행정계장님이 직접 전화를 하라고 했다니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테니스 선수라는 별명을 가진 정구채 계장님은 이강석의 전화를 받으시고 물으십니다.

“네가 8월1일에 8급 승진을 하였는데 도에서는 9급으로 발령이 났으니 어찌하겠느냐?”

 

나중에 알고보니 군청에서 이강석의 8급 승진을 도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는 9급으로 받을 수 밖에 없으니 군에서 알아서 조치를 하도록 지시를 한 것 같습니다.

인사기록 원본을 보면 1981년8월1일자 8급 발령을 동일자로 취소한다고 적었습니다. 만약에 8월1일 승진을 즉시 도에 문서로 보고했다면 8월10일자 도청 발령에서 빠지고 6개월 후인 1982년 2월1일자에 도청발령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1981년 8월10일자에 화성군청 8월1일 8급을 취소하고 9급으로 도청에 발령받은 경우와 1982년 2월1일에 화성군 팔탄면에서 경기도청 농민교육원으로 간 것의 경우를 볼 때 어느 것이 더 유리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982년 2월 1일자에 도청발령이라면 농민교육원이 아니라 도본청의 어느 과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주지 인근인 화성군이 아닌 가평이나 이천이나 김포에 소재한 가축위생시험소로 갔다면 주거와 근무에서는 농민교육원보다 더 거칠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관수 선배는 전입시험 동기인데 1982년 2월1일에 화성시 8급으로 6개월 근무한 후에 도청으로 전입 발령되었습니다. 하지만 행정착오로 8급을 내려놓고 9급으로 도청에 와서 6개월 후에 8급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정구채 행정계장님은 필요하지 않은 질문을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8급으로 승진하였는데 다시 9급으로 가야하는 안타까움에 전화를 하신 것이고 눈치 빠른 이강석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예 그것은 계장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9급으로 도청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니 그리 하도록 하자”

 

1981년 8월 10일에 경기도청 전입을 명 받습니다. 팔달산에 자리한 경기도청에서 근무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침에 시골집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역을 지나 세무서 앞에서 내리면 도청 정문으로 출근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2시간을 기다려 15:00경에 받은 발령장에는 도전입을 명하는데 농민교육원에 근무하라고 합니다. 팔달산 도청이 있지만 경기도청이 호락호락한 규모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본청, 외청, 큰 사업소, 작은 사업소가 수원, 화성, 이천, 의정부, 김포, 가평 등 도처에 있습니다. 화성출신이라고 화성군 태안읍 기산리 315번지에 있는 농민교육원에 발령한 것은 도지사님의 善處(선처)였습니다.

경기도농민교육원에서 3년간 근무했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왔다가 가고 그 송별회에서 술 마시고 고생하고 다시 근무하다가 드디어 1984년 9월 19일에 새마을지도과 서무담당으로 발령을 받은 것입니다.

 

장황하게 새마을과 서무담당에 이른 이야기를 끌고 온 이유는 당시의 소주병#칠성사이다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1984년의 공직구조를 보면 사무관 계장에 사무관 과장이 근무하는 30명 규모의 조직입니다.

지방행정사무관 이범관 새마을계장, 지방행정사무관 문성제 개발계장, 지방행정사무관 정언양 교육홍보계장, 지방행정사무관 김진흥 자연호보계장, 지방행정사무관 김연수 국토미화계장. 그리고 행정사무관 이상윤 새마을지도과장입니다.

 

국비 사무관은 과장이고 지방비 사무관은 계장입니다. 같은 5급인데 봉급을 주는 재원이 국비, 즉 나랏돈인가 지방비인 도비인가의 차이입니다. 돈을 그리 받는 것이 아니라 과장은 국비에서 월급을 주고 계장은 지방예산에서 봉급재원을 지출하게 됩니다.

국비과장은 관보에 이름이 나고 지방비 계장은 경인일보에 인사발령 기사가 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국비과장이 되어서 관보에 이름이 올라가면 당시의 총무처에 주무 차석이 찾아가서 금일봉을 상납하고 과장님의 국비 인사발령장을 받아왔습니다.

 

대통령의 직인이 찍힌 발령장을 복제해서 아크릴로 제작하여 드리면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전시를 하던 시절입니다. 나랏님의 옥쇄를 받았으니 가문의 영광이고 몇 년동안 일하면 군수영감으로 영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청에서 선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대통령 발령으로 화성군수, 시흥군수로 출세하는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과장의 위상이 참으로 높았고 그래서 대부분의 과장들은 권위와 권위주의를 둘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權威(권위)란 그냥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면 경기도청 과장이라는 포스가 보이는 것이니 긍정의 모습인 것이고, 權威主義(권위주의)란 내가 과장이요 하면서 폼을 잡으니 도대체 도민을 위한 공무원인지 자신을 위하는 공무원인가가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민원을 듣던 시절입니다.

당대의 공무원들은 아마도 대부분이 그러하니 요즘 말로 민주적 리더십이나 발렛(ballet), 하인형 공직자 노릇을 했다면 권위는 추락하고 오히려 이상한 공무원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의 문화나 세상이 그러하다면 거기에 맞게 처신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합니다만, 반면 아무리 세태가 그러해도 후배직원 고생한다고 사무실 키를 복제하여 아침에 문 열고 들어가는 과장도 있었다합니다.

어떤 과장님은 아예 국장실에 수첩을 두고 퇴근했다가 아침에 곧바로 국장실에서 회의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전달사항을 이야기하고 필요한 출장을 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배들을 위하는 이 같은 과장님의 선처는 당시 대다수의 간부 공무원들에게는 공직자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처사로 치부되었던 것입니다.

 

가수 나훈아가 좋아하는 소크라테스형은 독배를 마시면서 ‘악법도 법’이라 했다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1980년대 도청 과장님들의 행태는 2022년판으로 보면 대부분 노조의 비판 대상이고 인터넷에 매일 비판하는 글이 올라올 정도였다고 보입니다.

회의한다고 민원인을 기다리게 하고 민원인들은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듯 여기던 시절입니다. 당시에 과장님, 계장님 눈치를 보느라 민원인에게 불편하게 한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성을 합니다. 당시 간부 공무원들은 회식장에 늦게 오는 것이 권위인 양 여겼습니다. 30분 늦게 와서 사과도 안 하십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왔으니 그대들이 저녁을 먹는다고 생각하시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30분을 기다리면서 식탁의 음식을 몰래 먹었습니다. 대표적인 몰래 먹는 음식은 과일 사라다입니다. 사과, 감, 파프리카 등을 소스에 버무린 음식인데 처음에는 요지로 몇 개 먹다가 아예 숟가락으로 다 먹고 빈 접시를 상 아래에 숨겼습니다.

 

더러는 주방의 여사님에게 인사를 하고 더 얻어다가 채웠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과장님이 계장님들을 대동하고 회식장소에 오십니다. 어렵사리 시작된 저녁식사는 곧바로 25도 독한 소주잔이 춤을 춥니다.

지금 2022년의 소주는 20도, 19도로 내려가는 중입니다만 1984년 공무원의 소주는 25도입니다. 두꺼비가 취해서 병 밖으로 나오던 시절입니다. 실제로 소주병 디자인이 변하면서 훗날에는 큰 두꺼비가 작아지고 상표 윗부분에 자리 잡았습니다. 병을 손으로 감싸서 잡으면 엄지와 검지사이에 두꺼비가 위치하는데 술을 따를 때 두꺼비가 인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가 큰 상표를 감싸고 술을 따라야 하고 술병으로 술잔을 걸지말고 잔과 병 입구는 1cm간격을 유지하라 했습니다. 술은 오른손으로 따르고 오른손으로 받으라 했습니다.

얼결에 신입이 술 따르는 실수를 하면 과장님은 술잔을 받지 않습니다. 신입은 투명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과장님 앞에 존재가 없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담당 차석이 신입에게 술잔 권하고 받는 주법을 설명합니다.

 

차석의 교육을 받은 신입이 다시 과장님 앞에가서 正法(정법)으로 술을 드리면 호쾌하게 잔을 받아 마신 후에 한잔을 권하십니다. 신입으로서는 오늘 과장님께 한잔 올렸으니 공직 평생 내내 기억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2008년에 박신흥 의회사무처장님의 말씀을 骨格(골격) 삼아서 폭탄주제조 및 음용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습니다.

 

 

경기도청 공무원 주법조례 (이강석제정판)

제1조(목적) 이 조례는 폭탄주의 제조법과 주류의 음용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을 정하여 폭음을 예방하고 가급적 음주량을 줄여 나가도록 함으로써 경기도청 공무원과 시민 그리고 도민, 대한민국 국민건강을 보호하고 사회전반에 건전하고 품격 있는 음주문화를 전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제2조(용어의 정의) ① 이 조례에서 쓰이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주(酒) : 시중에서 판매되는 임의의 술로서 알콜 농도가 5에서 50도까지 인 것을 말한다.

2. 폭탄주(爆彈酒) : 위 1호의 술을 2가지 이상을 컵이나 식당의 각종 그릇에 함께 부어넣은 것을 말한다. 군인화, 구두, 재떨이 등은 그릇으로 보지 않는다.

3. 제조주(製造主) : 폭탄주를 만드는 자를 말하며 반드시 함께 식사하는 일행 중 1명이며, 좌우 참석자는 폭탄주 제조 시 助力(조력)의 의무를 진다.

4. 폭탄사(爆彈辭) : 제조주의 권유에 의하여 폭탄주를 받은 참석자가 마시기 전에 남기는 말이다. 일명 ‘遺言(유언)’이라고도 한다.

5. 흑기사(黑騎士) : 본인이 폭탄주를 마실 수 없는 경우 도움을 청하여 대신 마셔 주는 참석자를 말한다.

② 이외에도 다양한 용어가 있을 것이며 추후 조례 시행규칙에서 보강 설명하고자 한다.

제3조(제조주) ① 폭탄주의 제조권자(이하 ‘제조주’라 한다)는 좌중의 선임자, 연장자, 식사 초청자가 우선이나 경우와 상황에 따라서는 누구나 자발적 제조주가 될 수 있다.

② 제조주가 되려는 자는 좌중에 자신이 제조주가 되겠다는 의견을 말하고 참석자 ⅔이상의 묵시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4조(폭탄주의 제조 및 배분) ①제조주는 첫 번 폭탄주 제조시에 술의 종류와 배합의 비율을 좌중에 공지하여야 한다. 다만 몇 순배 이후에는 그러하지 않을 수 있다.

②제조주는 정성을 다하여 폭탄주를 제조하고 첫 번째로 제조된 폭탄주는 본인 혼자 공개적으로 마심으로써 위험성이 적다는 점을 좌중에 공지하여야 한다.

③제2항의 폭탄주를 마시고 1分(분)이 지난 후에 좌중 다른 참석자에게 폭탄주를 권할 수 있다. 제조주가 그 술을 마시고 쓰러지거나 사망하면 식사와 폭탄주 행사는 중단한다.

④폭탄주는 1잔씩 전달을 원칙으로 하나 인원이 8명 이상이거나 2명 또는 3명씩 의미를 부여하여 권할 수 있을 경우에는 다인식도 가능하다. 의미부여의 방법으로는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는 호감형, 평소의 감정을 풀기위한 회포형 등을 제시할 수 있다.

⑤제조주는 상대방에게 폭탄주를 먹여주는 ‘천국주’제도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아울러 단합주, 회오리주 등 좌중을 즐겁게 하면서 동시에 술을 조금 마시도록 시간을 끄는 戰略(전략)개발에 노력하여야 한다.

제5조(폭탄주 음용방법) ①폭탄주를 받으면 우선 제조주에게 감사의 目禮(목례)를 하고 폭탄사를 하여야 한다. 폭탄사의 내용은 살아오는 동안 고마웠던 가족, 부모, 직장동료, 회사의 상사 등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어야 한다. 폭탄주를 마신 후 사망하는 경우 동석자들은 그 폭탄사를 유언으로 간주하고 가족에게 서면으로 전달하여야 한다.

②2인이 폭탄주를 받은 경우에는 각각 폭탄사를 하며 연장자, 상급자가 먼저 하는 것이 좋다.

③폭탄주 잔은 식탁에 내려놓을 수 없으며 일단 폭탄사를 마치고 마시기 시작하면 중지할 수 없다. 폭탄주 마시기를 다하지 못하면 같은 폭탄주 1개를 더 받을 수도 있다.

④ 폭탄주를 다 음용한 자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음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 위 15cm 상공에서 잔을 뒤집고 3초 동안 머물러 한 방울의 술도 떨어지지 않음을 좌중에게 확인시켜줄 의무가 있다. [2016. 1. 27 박신환 국장님 제안으로 신설]

⑤ 2인이 마시고 난 잔은 그 중 1인이 모아 제조주에게 즉시 전달한다.

제6조(흑기사) ①폭탄주 과음으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흑기사’제도를 둘 수 있다.

②폭탄주를 받은 자는 흑기사를 쓸 수 있다. 다만, 여성은 첫 번째 폭탄주부터 가능하고 남성은 2번째부터 인정된다.

③흑기사를 는 경우 흑기사에 대한 예우 또는 사례(謝禮)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그 자리에서 좌중에 밝혀야 한다.

제7조 (기타음주예법) ①술잔은 오른손으로 권한다. ②술병은 오른손으로 술병의 큰 상표를 잡고 왼손은 가볍게 함께한다. 왼손의 위치는 아랫사람일 경우 병아래, 동료일 경우 병 옆에, 상사이거나 연장자일 경우에는 병위에 위치하는 것을 권고한다.

③잔을 권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과 눈으로 인사하고 눈인사를 받으면 천천히 잔을 권한다. 이때 술병은 자신의 주변에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잔을 전하고 술병을 찾는 것은 아주 큰 결례이다.

④술을 권한 후 받은 이가 한 모금 마실 때까지 그윽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아야 한다.

⑤술잔은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두손으로 받고 잔을 술병목 부분에 접촉하지 않고 5mm정도 간격을 두고 따라 올리고 받아야 한다.

제8조 (음주습관과 해장방법의 권고)①첫잔은 원샷하지 않는다. 첫잔은 3번 나누어 마신다. 자신의 몸에게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줌으로써 알콜을 해독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②회식 중간 중간에 물을 자주 마신다. 반찬 중 국물이 있는 것을 먹으며 야채중심의 안주를 많이 먹는다.

③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가급적 식사를 하여야 한다. 북어국, 콩나물국을 먹고 인삼 등으로 몸을 다스려야 한다. 보이차를 약하게 마시는 것도 해독의 한 방법이 된다. 아내와 남편이 다음날 아침에 해장국을 준비하고 안하고는 남편과 부인이 할 탓이다.

 

부 칙

제1조(시행일)이 조례는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다만, 이 조례 시행 이전부터 진행되거나 향후에 진행될 모든 폭탄주 제조과정은 각각의 기관 단체에서 이미 형성된 의미와 권한을 존중한다.

제2조(경과규정) 다른 기관, 다른 사람들이 폭탄주를 만들어 무슨 방법으로 마시는 것에 대하여 관여하지 아니한다. 경기테크노파크 임직원들은 이 조례를 적극 활용해 줄 것을 권장하고자 한다. 그래야 술 덜먹고 건강에도, 사무실 분위기도 밝아진다.

 

이 조례는 공식 조례는 아니고 행정기관의 조례 형식으로 술을 권하고 받아 마시는 절차를 정리한 것입니다. 젊은 기자들이 이 자료를 나누어주면 처음에는 식사 자리에서도 보도자료를 뿌리는가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이 주법을 적용하여 술을 권하고 받게되었고 이를 본 공무원 간부들이 젊은 기자가 주법을 안다고 칭찬을 했답니다.

그래서 이강석 과장이 알려준 바라고 말하자 국장님 대부분이 “그렇다면 정답이다”라는 신뢰를 보내주셨다 합니다.

 

기자에게 전하기 이전부터 공직사회에서는 어느정도 주법조례를 통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 홀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수많은 선배 공무원들의 주법 절차에 대한 口傳(구전)을 문서로 集大成(집대성)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통하는 술 마시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련된 술자리에서 과장님은 조직의 단합을 위해 맥주잔에 25도 소주를 한가득 채워서 한명 두명 모두에게 권하십니다. 제가 서무담당으로 발령받기 전에도 여러 번 이 같은 이벤트 아닌 이벤트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7급 선임 두명이 빈 소주병에 칠성사이다를 채워서 서무담당 8급 이강석에게 서무담당에게 전하고 과장님 비서역할을 했던 서무는 주석에서 과장님을 따라다니며 소주병을 공급했습니다.

차석 한 두명이 맥주컵에 소주를 받아마시면서 석연찮은 표정을 짓는다는 느낌을 받은 과장님은 서무담당이 전해준 소주병을 검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안이라서 소주병 안의 칠성사이다 氣泡(기포)를 발견하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소주병을 병나발 불 듯이 맛을 본 과장님은 버럭 화를 내십니다.

 

“이 자식들이 가짜 소주병을 들이대!!!”

직접 새 소주병을 따서 맥주잔 가득 따라주고 즉시 마시라 합니다. 그리고 소주병을 서빙하던 서무담당을 불러서 그 자리에서 한 컵을 가득 따라주고 벌주로 마시라 합니다.

얼결에 원샷을 했습니다. 안 마시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事端(사단)이 나거나 事件(사건)이 날 판입니다. 과장님은 두 사람에게 진 소주를 가득 벌주로 내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자 발로 상을 들어 45도까지 기울였습니다.

 

말 그대로 밥상을 엎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상 주변은 5분 계장님, 지방행정사무관의 자리였습니다. 황급히 상을 잡아서 제자리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전체 주무관들은 과장님의 깡소주 컵소주를 한 잔씩 받고 나서야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어떤 계장님이 서무에게 당부하십니다. 조금후 회식이 파하면 서울가는 택시를 잡아오라 하십니다. 택시비를 내라는 것까지는 아닌줄 생각했지만 과장님 한번 서울까지 모신다는 맘으로 택시비를 선불하고 승차하시는 과장님께 돈을 드렸다 말했습니다.

 

가끔 자주 수원에서 택시로 서울 집에 가시고 서울역에서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서 택시타고 도청에 출근하시는 바이니 취하셔도 출퇴근은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이십니다.

더구나 ‘칠성사이다 소주병’사건으로 인해서 과장님은 술을 거의 드시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당시의 새마을지도과 직원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되었지만 본의 아니게 사건의 주모자가 된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하지만 이후 과장님은 서무담당의 결재서류를 시원하게 싸인하시고, 지방과에서 매번 빌려오는 시군명패를 우리과 용으로 제작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수시로 과장님 출장계획을 마련하여 시군을 다녀오시도록 했습니다.

과장님이 사무실에서 출장가시거나 개인일로 연가를 내신 날을 당시 공직사회에서는 ‘무두일’이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개발계장님이 ‘오늘은 무두일이니 한잔 합시다’하시므로 요일중에 붉은 가족과 함께 쉬는 가정의 날이라도 생겼나 했습니다.

그런데 한자를 다시 풀어보니 無頭(무두), 머리가 없다는 의미이고 과장님이 사무실에 부재중이니 ‘호랑이 없는 굴에서는 토끼가 대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과장님 부재중, 무두일에는 계장님 5분이 한잔하러 가시고 차석 5명도 일찍 파해서 맥주하러 가십니다. 이에 7급이 다수인 젊은 층의 공무원들은 8급을 추가하여 역전 진로집으로 갔습니다.

수원역 진로집에서는 양념돼지고기와 진로소주를 팔았습니다. 연탄화덕이 달궈지면 바가지에 고기를 들고와서 물처럼 부어줍니다. 지글지글하면서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를 안주삼아 당시 25도의 소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킵니다.

 

지금 기억해 보아도 당시의 소주잔은 지금의 것보다 큽니다. 요즘 소주잔은 당시 소주잔의 75% 정도로 보입니다. 독한 술, 지금보다 많은 양의 소주 한잔을 원샷하면 혀에 닿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서 위벽으로 흘러듭니다.

이때 우리는 몸속에 위벽이 그려집니다. 짜리한 알콜의 퍼짐을 몸속의 위벽에서 짠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목이 타고 위가 찌르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주한잔을 공복 원샷하고 ‘캬~~~’하고 마무리했습니다.

 

급한대로 김치 한 조각으로 안주를 삼습니다. 아직 양념 돼지고기가 익으려면 이같이 소주를 3잔 이상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돼지고기가 바닥은 차고 위는 익지 않았습니다. 대충 대략 젓가락으로 휘저으면 膾炙(회자)입니다. 반은 익고 반은 날음식이라는 말입니다. 회자란 ‘인구에 회자’된다는 말인데 사람의 입으로 익은 음식도 들어오고 날음식도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소주잔을 돌리는 것이 의리였습니다. 입술에 묻은 안주성 고추장을 소주잔 테두리에 묻은 채로 동료, 선배, 후배에게 권하고 술을 가득 부었습니다.

 

더러는 맥주잔에 폭탄을 말았습니다. 최근에 어느 모임에서 1984년형으로 폭탄주를 제조했다가 크게 원망을 들었습니다. 나름 “폭탄주 제조 및 음용에 관한 조례”를 만든 당사자로서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요즘의 폭탄주는 소주 반 잔을 맥주컵에 넣고 중간에서 한참 아래까지만 백주를 넣은 후에 살짝 흔들어서 권하고 한번 스넵으로 마신다고 합니다. 과거의 폭탄주는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세 번은 입안에서 꿀렁거려 잔을 비웠습니다.

바뀌고 변한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나이들면서 늘어나는 것은 주름이고 줄어드는 것은 수량입니다. 얼굴은 거칠어 지고 술실력은 감소하니 이를 두고 人生無常(인생무상)이라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늙어도 나이가 늘어서 주름살이 깊어져도 인간의 지혜, 나이먹어가는 슬기로움은 남아있고 커져간다고 생각합니다. 40년전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은 정제된 언어와 표현을 하는 것은 지혜가 그만큼 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당시에는 작은 일인 듯 보이던 해프닝조차도 수필의 소재로 삼는 것은 그만큼 창의력이 늘었다는 반증이라 봅니다.

 

기억력이 줄어서 추억이 사라지는 대신에 기억이 덮고 있던 당시의 감성과 서정이 모래속 사금처럼 살아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마음속에 녹여내고 이를 정제해서 글로 표출하는 일이야말로 창조적인 활동이고 그런 삶은 아름다운 생애라 할 것입니다.

 

힘들어도 추억, 즐거워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행복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서스럼없이 글로 표현하고 실명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이강석 기자 stone91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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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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