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속의 작은 생각들

  • 등록 2025.04.03 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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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이렇게 우물쭈물 하다가 2022년을 영영 보내는 기분입니다. 1958년 이래 매년 같은 365일이지만 2022년은 다른 해에 비해서 조금은 길고 큰 의미를 담은 한해였습니다.

우선은 좋아하는 숫자 2가 2개가 나오는 해입니다. 2222년에는 일기를 쓰기 어려울 것이니 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 2022년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책을 사면 22쪽이나 222쪽에 서명을 하고 이것이 나의 책이라고 자랑을 하곤 했는데 아이들이 성장하여서는 책에 낙서를 하면 1:1 판매에서 불리하다며 금지하라 합니다.

그동안에는 책을 사면 평생 간직하는 줄 생각했는데 신세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김해영 박사의 강의를 들어보니 아이들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왕족이나 고관대작은 미리미리 아이가 태어날 때에 어머니로부터 받은 胎(태)를 잘 보존하고 명산 좋은 자리에 胎室(태실)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조선시태 태실을 발굴하여 한곳으로 모은 바가 있다고 합니다.

태실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가 효율적인 관리를 하겠다는 등의 그럴싸한 이유를 제시하였겠지만 본질은 태실의 백자 항아리를 가져가기 위한 計略(계략)이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문화적으로 조선을 말살하려는 政略(정략)도 숨어있었을 것입니다.

왕릉만큼이나 태실도 풍수지리를 보아서 자손이 번창하고 나라가 융성하는 자리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곳에나 태실을 설치하지않고 전문가가 참여해서 태실을 모실 자리를 정했던 것입니다.

시골에서 부모님을 모셔도 지관을 불러서 자리를 정했습니다. 이른바 左靑龍(좌청룡) 右白虎(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입니다.

 

왼쪽에는 용이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고 오른쪽은 흰 호랑이가 자리하였으며 북쪽, 즉 뒤편은 거북의 형상이고 남쪽은 붉은 공작이 꼬리를 펴주는 지형지세를 찾아냈던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종합하면 배수가 좋아서 물이 차지 않는 자리입니다. 실제로 좋은 묘자리라고 하는 곳에 가보면 주변보다 조금 올라온 형상이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무너지거나 물이 흐를 것 같지 않은 자리입니다.

말 그대로 背山臨水(배산임수)입니다. 뒷편에 산 언덕이 있고 저 아래에 물이 있다면 지금의 이 자리는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니 수해로부터 안전하고 묘실의 땅속이 늘 건조하며 절대로 물이 차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묫자리에 대한 전설이 여러 건 있습니다. 머슴으로 대를 이어 일하던 중 아버지가 별세하자 머슴의 아들이 주인에게 묫자리를 청합니다.

주인은 조상을 모신 산의 뒷 편 움푹 패인 곳에 장례를 지내도록 배려합니다. 주인집 조상의 묫자리보다 불편해 보이는 자리이지만 머슴의 아들은 아버지를 정성을 다해 보십니다.

세월이 흘러 머슴의 아들은 아들을 낳고 3대를 이어 머슴을 살았습니다. 머슴은 별도의 생활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집에 기거하면서 함께 식사하고 일하고 그 집에서 잠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주인과 함께 일했습니다. 머슴의 아들 역시 주인집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생활하고 학교를 다닙니다.

 

재산이 있는 주인집 아들은 도시로 留學(유학)을 가기도 유학 중에 酒色雜技(주색잡기)에 빠지기도 하면서 우골탑을 쌓아갑니다.

시골의 논밭과 특히 소를 팔아서 대학을 다닌다 해서 '상아탑'에 '牛骨塔(우골탑)'이라는 이름을 추가했습니다.

象牙塔(상아탑)이란 속세를 떠나 조용히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나 현실도피적인 학구 태도를 이르는 말이라고 인터넷 사전에서 풀이합니다.

 

세속적인 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정적(靜寂)·고고(孤高)한 예술지상주의 입장을 취한 19세기의 프랑스 시인 A.드 비니를 평론가 생트뵈브가 평할 때 사용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대학 또는 대학의 연구실을 지칭하는 말로 전용되기도 한다고 첨언하고 있습니다. (두산백과)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세월 속에서 1.5대가 되기전에 주인집의 전답은 대부분 머슴 부자의 것이 되었고 주인집 아들은 도시로 나가서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훗날 주인집은 경매로 나오고 머슴 아들이 낙찰을 받습니다.

 

50년의 세월속에 주인과 머슴의 위치가 뒤바뀌는 모습을 본 지관이 그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주인집 조상들은 산봉우리에서부터 대를 이어 모셨고 머슴이 나이들어 죽자 산봉우리 뒤편의 구렁텅이에 묫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을 멀리서 보니 칼을 눕혀놓은 형상인데 주인집 조상들은 칼날위에 묘를 쓴 것이고 머슴의 아비 산소는 바로 칼자루의 자리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칼자루를 쥔 머슴의 아비가 칼을 흔드는데 주인집 조상은 어찌 대응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地官(지관=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의 주장입니다. 묫자리가 보기에 좋은 자리가 명당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땜장이 父子(부자)가 열심히 일을 해서 큰 재산을 형성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을 저 동네를 떠도는 땜장이의 직업상, 아버지가 客死(객사)하자 아들은 이름 모를 동네의 야산에 아버지 산소를 마련했습니다.

떠돌이 땜장이 생활을 하다보니 제대로 갖춘 장례를 모시지 못하고 급하게 매장을 하다보니 맨 얼굴의 아버지 눈에 흙이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눈에 흙이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급한대로 유일한 재산이랄 수 있는 땜장이 火具(화구)속의 가죽을 떼어내어 아버지 얼굴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대를 이어서 땜장이로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아들은 점점 돈을 벌었고 새로운 사업을 통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된 아들 땜장이의 사장실에서 아버지의 장례 상황을 들은 지관이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눈을 덮어드린 가죽은 아마도 개의 가죽이었을 것입니다.”

땜장이는 고열을 내는 석탄을 태워서 웬만한 쇠를 녹이는 기술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화구의 풍구가 강한 바람을 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기가 쉽게 들어오도록 부드러운 짐승의 가죽을 압축기 안쪽에 붙이고 피스톤을 밀어냅니다.

 

이때 가죽이 입구를 막고 반대편으로 공기를 보내는데 이 공기가 곧바로 석탄으로 불어나가면서 산소공급을 늘려서 고열을 내게 됩니다. 어려서 땜장이의 작업장면을 보았습니다.

힘차게 풍구질을 하면 검은 석탄이 붉은 돌덩이가 되어서 흑연으로 만든 도가니에서 흰색을 띤 쇠붙이들이 회색빛을 내면서 녹아서 액체 상태가 됩니다. 이를 숟가락처럼 생긴 도구로 떠서 두 손으로 솥단지 뚫어진 부분을 메워줍니다.

900도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는 쇳물을 다루는 솜씨는 보통의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기술이었습니다. 녹슬어서 뚫어진 무쇠솥을 때우고 물을 끓이는 냄비 등을 수리하는 땜장이의 기술은 어린 아이에게는 엄청 신기한 모습이었습니다.

 

최근에 방송을 보니 殉葬(순장)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묘지를 발굴했다고 합니다. 주인의 자리 옆에 함께 매장된 사람의 뼈를 검사한 결과 머리 뒤편에 둔기로 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 함몰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함께 매장된 유골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서 학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죽여서 순장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합니다. 생매장을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인이나 몸종을 묶어서 산채로 매장을 하여 내생에서도 주인님을 모시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산 사람을 강제로 순장하는 것은 피하게 되었고 대신에 동물을 함께 매장하는 매장문화가 있었다고 학자는 말합니다. 여러 가지 가축이 있지만 사람과 가장 친하게 지내고, 집안에 따라서는 가족처럼 대하던 개를 순장 대타로 삼았을 것이랍니다.

 

어려서 장례를 모시는 현장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묫자리를 파고 있는데 동네의 누렁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자 어르신 한 분이 ‘황구’인데 같이 넣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묘역의 어디엔가는 동물의 유골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땜장이에게 필수장비인 풍구의 부품중 끌어들인 공기를 압축하는 역할을 하는 부품이 다름 아닌 개의 가죽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얼굴을 덮어서 눈에 흙이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했던 아들 땜장이의 효심이 그를 부자로 이끌었다는 것이 지관의 풀이입니다.

통개 한 마리는 아니지만 쪼가리 개가죽을 아버지 묘에 함께 넣었으니 천하의 명당에 조상을 모신 바이고 아버지 땜장이는 저승에 가서도 쉬지 않고 아들 사업의 발전을 위해 큰 노력을 지속했을 것입니다.

 

땜장이 아들로 태어나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는 죽어서도 개가죽이 덮힌 눈을 감지 못하고 아들 잘 되기를 바라며 지극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습니다. 부엉이도 눈을 뜨고 잠을 잡니다.

눈을 부릅뜨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잠에 취해서 한밤을 자고 나서도 추가로 낮잠을 자는 이에게 발전은 없습니다. 눈을 부라리면서 주변을 살피고 경쟁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땜장이의 아들은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인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조상님의 보살핌속에 큰 사업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김해영 박사의 다음 강의는 누에와 나방 이야기입니다. 누에는 4잠을 자고 고치를 만들어서 엄청난 변태를 한 후에 고치를 잘라내고 밖으로 나와서 훨훨 날아갑니다.

이 때에 나방이 된 누에는 온 몸을 바쳐서 열정적으로 만든 고치를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다고 합니다. 자신의 변화와 혁신에 써버린 고치에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라고 합니다. 뗏목은 강위에 떠있을 때 사람과 동물이 渡江(도강)하는데 필요한 장비입니다. 강을 건네준 뗏목이 고맙다고 땅위를 前進(전진)하면서 함께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전쟁영화의 명장면일수록 자신을 도와준 누군가에게 감사인사를 하느라 위기를 맞게 됩니다. 2022 월드컵에서 손흥민 선수가 5명의 수비수를 뚫고 수비선수의 양발 사이로 공을 밀어내주었고 이를 황희찬 선수가 꼴로 연결했습니다.

 

이때 황희찬 선수가 슈팅 기회를 준 손흥민 선수에게 감사인사를 하려 했다면 꼴로 연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패스를 받는 즉시 슈팅을 하였고 꼴로 연결한 후에 두 선수가 함께 기뻐하는 것이 맞습니다.

김해영 박사의 강의는 삶속에서 버릴 것이 있고 함께할 것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지난날의 소품들이 소중하기는 합니다만 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이지요.

책은 종이로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이위에 찍힌 활자를 읽고 그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선현의 정신을 본받고 올바른 정신을 座右銘(좌우명)으로 삼아서 바른 삶, 멋진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재에 책을 모아놓고 사진 찍으며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책은 문자를 통해 정보, 이야기, 의미를 전해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책이 중요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골뼈를 먹는 것이 아니라 뼈속의 진액을 마시는 것입니다.

사골뼈를 우린다고 합니다. 가마솥에 넣고 끓이면 뼛속의 성분이 녹아나오고 그 국물을 조리고 調理(조리)해서 먹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 사골국물 우려먹는다고 합니다. 사실 수필집을 쓰면서 그동안 적어둔 글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표절에 해당하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이 책을 읽으실 분이 9인 이하이고 우연히 읽으신 분이 다른 책을 모두 다 보신 것이 아니니 자기 剽竊(표절=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씀)의 문제를 제기하실 일은 없을 것으로 단정합니다.

아마도 작품을 창작하면서 표절하지 말라고 剽竊(표절)이라는 한자가 이리도 어려운가 봅니다. 이 한자를 만든 사람은 남의 것을 베끼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그림을 그려서 상형문자로 표현했을까요.

스스로 가급적 중복해서 쓰지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에는 자화자찬, 자기만족의 길로 들어서고, 그래서 어느덧 표절의 길로 들어서곤 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이렇게 자신과의 대화를 길게 늘려가는 수필집을 2023년에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소설가, 수필가가 출판사의 원고청탁을 받아서 글을 쓰기보다는 일상에서 또는 쓰고자 하는 마음속에서 글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고 봅니다.

이후에 완성된 글을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보내고 이를 기획해서 책 한권이 출간되는 것으로 봅니다. 요즘 bookk.co.kr 임직원의 성원과 도움으로 꾸준히 책을 내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덕분에 퇴직 후의 無聊(무료=흥미 있는 일이 없어 심심하고 지루함)함을 달라고 아침형 인간으로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열정을 불태우는 무대를 마련해 받았습니다.

 

그래서 2023년에는 좀 더 고민하는 글, 공감받는 수필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게도 수원화성신문 이상준 대표님이 2023년부터 고정으로 월 1회 자유기고를 청탁했습니다. 예시로 보내주신 저명인사들의 글을 보니 걱정이 앞섭니다.

교수, 변호사, 공공단체장 등 전문가들의 글을 보면서 나름의 전략을 구상해 봅니다. 인문학적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양한 독자가 있는 수원화성신문을 보는 시민들에게 작은 공감, 마음속 호수위에 낙엽 한 잎 던지는 마음으로 수필을 써서 기고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2022년을 보내고 2023년에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잘살고 못하는것이 조상 탓만은 아닐 것이지만 그래도 조상을 잘 모시면 자다가도 떡이 생길 것입니다.

부모를 모시는데 큰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눈에 흙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소중한 자산 1호, 생계를 위한 堡壘(보루)라 할 땜통의 개가죽을 떼내어 얼굴을 덮은 효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불편해 보이는 묫자리가 그 산을 뒤흔드는 칼자루였음을 뒤늦게 알았던 것처럼 오늘의 어려움이 훗날의 광영을 준비하는 시발점이 되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비봉면에서 팔탄면 발령을 받으면서 억울함이 있었지만 경기도청이라는 큰 무대로 도약하는 契機(계기)가 되었고 1996년 공무원 5급에 승진한 후 1997년에 집과 경기도청에서 98km 9개시군을 지나야 도착하는 동두천시청에 발령을 받아서도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발령을 받은 날 오전까지는 섭섭한 마음이 가득하였지만 오후부터는 도지사의 발령이고 동두천시는 경기도 管轄(관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흔쾌히 받아들인 바입니다.

그런 마음을 먹어도 선배들은 오전 인사에서 왜 자네가 수원에서 연천 다음으로 먼 곳에 소재한 동두천시청으로 가게 되었는가를 자문·자답했습니다.

 

징계도 없고 감사 지적을 받은 바도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냥 열심히 일하고 사무관 교육받고 성남시로 가는 줄 알고 있었고 오산시청에 가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간부를 만난 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유관진 오산시장님을 만났고 강신성 실장님도 찾아갔습니다. 강신성 실장님은 비봉면 고향선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오산시청 사무관자리는 1개뿐이고 경쟁률은 5:1이 넘은 듯 보이며 여건이 가장 유리했던 L선배가 차지했습니다.

 

발령을 받은 날에 동두천시 발령을 안타까워하며 위로해주신 선배와 주변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두천시도 경기도이고 그곳에서 큰 쓰임새가 있어서 발령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가야 할 자리인데 제가 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1997년에 나이 39세에 이런 말을 했다니 스스로 보아도 참 대견한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감히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이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무원, 시민들과 어울려서 동장으로서 공무원으로서 신명나게 일하고 1998년 수해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결과로 오세창 시장님의 기억에 남았고 13년 후인 2011년에 부시장에 임명되는 영광을 얻었던 것입니다.

 

1997년에 동두천시 생연4동 사무소에서 7급으로 만난 후배들이 5급 사무관이 되었습니다. 2023년 1월1일에 김성곤 사무관은 생연1동장, 김우정 사무관은 불현동장에 보임되었습니다. 정우상 국장은 연말에 명예퇴임을 한다고 합니다.

정 국장은 동장으로 근무할 때 사무장이고 시설사업소장으로 가서는 운영계장으로 함께 일했으며 부시장 취임때는 시정계장, 부시장으로서 인사위원장일 때에 사무관에 승진한 인연이 깊은 인물입니다.

 

임태수 불현동장은 2년 전에 퇴직했는데 생연4동에서 총무담당으로 함께 일했습니다. 1999년 동두천시 생연4동을 떠난 이후에도 몇 번을 만나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추억담을 나누는 사이입니다.

여기에 김방남 통장님(삼성양복점), 윤명구 통장님(미온사, GQ양복점), 목영달 대영인쇄소 사장님, 이상국 동두천상인회장님과도 어울리면서 주변의 다른 몇 분과 식사하고 함께 서해안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어르신들 60대에 40살 동장으로 만난 분들인데 25년이 지난 요즘에도 당시의 모습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얕은 소견으로는 집에서 멀어서 교통이 불편한 동두천시청에 발령된 것에 작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두천시청은 당연히 경기도의 일원입니다.

개인의 기준으로 교통이 불편하고 그동안 살아보지 않은 곳일뿐, 가서 근무하고 살아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소요산의 정기와 역사가 있습니다. 원효대사, 의상대사의 역사가 있고 어유소장군의 전쟁사가 있습니다. 오세창 시장님이 어유소장군 복장을 하시니 정말로 멋지십니다.

 

“동두천시도 경기도”라면서 열정으로 근무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만 대전도 대한민국이라면서 백선엽 장군님(1920~2020)의 아들이 서울이 아닌 대전 현충원에 아버지를 모시도록 한 정부의 결정을 흔쾌히 받아들인 기사가 있습니다.

감히 여기에 그 기사를 올리는 것이 송구합니다만 역시 대단한 군인의 대단한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사를 보여드립니다.

 

백선엽 유족 "대전도 대한민국…대전현충원 만족"

"아버지도 생전 알고 계시던 사실" 등록 2020-07-12

[이데일리] 고(故)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의 안장지를 서울국립현충원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유족은 “대전현충원 안장에 만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 장군의 장남 백남혁 씨는 1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장현충원에 안장된다는 사실을 아버지와 가족 모두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도 생전 만족해하셨다”며 이같이 밝혔다.

 

백 장관은 국립묘지법에 따라 현충원 안장이 결정됐다. 서울현충원의 장군 묘역이 만장됐기 때문에 15일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정된다.

다만 일부 예비역 장성과 야당은 백 장군을 대전현충원이 아닌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장군의 6·25 전쟁 공적에 비춰볼 때 서울현충원 안장이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 씨는 “서울이나 대전이나 다 대한민국 땅이고 둘 다 현충원”이라며 “아버지가 지난해 건강했을 때 이미 대전에 안장되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고 전했다.

 

유족이 백 장권의 서울현충원 안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명백히 아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아버지는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분이다. 만약 지금 서울 가라고 하면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야’라고 할 분”이라며 “물론 가족들은 안장 논란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고 말했다.

 

백씨는 “아버지는 평생 대한민국을 위해 살았다.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기를 언제나 기원했다”며 “많은 분이 조문을 와서 대단히 감사하다. 감사의 뜻으로 큰절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백 장군의 대전현충원 안장에 대해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전날 페이스북에 “백 장군을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지 못한다면, 이게 나라인가”고 밝혔다.

 

반면 정의당과 독립운동가 선양단체 등은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에 복무했기 때문에 현충원에 안장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태어나서 2020년까지 100년을 사신 분의 인생중에서 어느 시점을 놓고 논란을 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자신의 눈에는 대들보가 들어있는데 남의 눈 티끌을 탓하는 격입니다. 일생을 통해 이룩한 업적을 균형되게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느 순간을 찍어서 자신이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평가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생을 살면서 잘한 일을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1977년 19살 면서기 초임에 보직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냈다가 면장님께 불려가서 ‘네가 가고 싶은 부서로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즉석에서 답했습니다.

 

“면장님, 죄송합니다. 면장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네가 이명의 어르신의 손자, 이기승 선생의 아들이 맞구나. 정말로 네가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

총무담당관실에서 준비한 도의원 독도방문 일본교과서 궐기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일정에 미스매칭이 있어서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하고 토요일까지 머물렀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제가 준비한 여행이 아니고 총무담당관실에서 시작한 행사이고 저는 의원님 안내만 책임지면 되는 일”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의원님 여러분,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 더 이곳에 머무르셔야 하겠습니다.”

벌은 사무실에 가서 내리시고 오늘을 하루일정을 울릉도에서 보내셔야 하겠습니다. 제가 잘못이라 말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요.

 

구차한 변명을 했다면 정말로 사무실에 돌아와서 큰 징계를 받았을 것이고 이후의 공직생활이 참으로 지루하고 힘들었을 것이며 지금의 영광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그날에 변명을 했다면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화자찬을 하면 안되는 줄 알지만 9급 공무원에 들어와서 2급으로 일하고 1급 지방관리관이라는 명예를 얻은 몇 가지 요소중 하나가 이날의 독도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동두천시 생연4동장 발령이 훗날에 부시장으로 승진하는 기초가 되었고 공보실로 전근된 것도 공직 발전의 대사건이었습니다.

공보실에서 사무관,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인연을 맺은 김희겸 부지사가 7명 후보 중 6번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강석을 낙점한 일로 공직 9, 8, 7, 6, 5, 4, 3, 2급, 그리고 명예직 1급에 이른 것입니다.

그 여세를 몰아서 경기테크노파크 상임이사, 원장이라는 경기도 단위 공기관장으로 2년 1개월을 근무하고 멋지게 사표를 내서 후배에게 자리를 양보한 후에 민간인이 되어서 ‘공무원의 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밀고#당기는#홍보이야기’를 출간했습니다.

 

현직 시절 연수원에서 들은 강의를 몽땅, 싸그리 적어서 자료집을 출간하고 이를 동료와 후배들 교육생에게 배포하였고, 어찌보면 참으로 희한한 교육생이라면서 장관실 업무보고에서 들어갔다고 하고 지방언론에 보도되는 등의 성과를 얻어낸 바입니다.

오늘 대놓고 자기자랑을 펼치고 나니 가슴이 뻥 둟리는 기분이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기획이 완성되어 실행계획을 수립할 단계에 이른 듯 느껴집니다.

 

오늘 중에(2022. 12. 29)에 다섯 번째 도전을 합니다. 강원도 감사담당관, 경기도체육회사무처장, 수원시 제2부시장, 경기도공보관 도전에 이어서 오늘(2022. 12. 20)은 경기도의회사무처장에 응모합니다. 열심히 서류를 작성해서 완성했습니다.

경기대학교 석사, 한국방송통신대학 학사 자료를 인터넷으로 출력하였고 주민등록초분, 남양주시청 경력증명서, 경기테크노파트 경력증명서를 E-Mail로 받아서 첨부했습니다. 말미에 경기도의회사무처장 응모서류의 내용을 올려드립니다.

 

앞에서는 인생을 살면서 버려야 할 것, 내려놓아야 할 일들을 말했지만 후반부에서는 도저히 떨칠 수 없는 운명적 만남과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살면서 모든 것이 소중하고 시간이 갈수록 오늘의 일들이 추억으로 자리하는 것을 알기에 오늘을 멋지게 살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보이고자 합니다. 주변의 모든 이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인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이강석 기자 stone91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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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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