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융건릉, 경복궁에 이어서 오늘은 화성을 공부하는 날입니다. 공부이고 힐링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10명 정도 회원이 오실 것으로 기대했는데 25명이 신청하시고 2분은 신청없이 오늘 행궁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해설사님 = 회원 여러분들이 총회를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承旨(승지)도 오시고 史官(사관)도 나오시고 그래서 解說(해설)사도 긴장하고 있습니다.
해설사제도가 23년이 되었고 23년째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즐기는 시간이 되시도록 하고자 합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지방에 가시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KTX도 있고 승용차도 있고 현장에는 호텔이 있어서 편리하게 다닙니다만 과거에는 이런 교통시설, 숙박시설이 없으니 지방에 작은 궁궐을 지었습니다. 임시궁궐입니다.
대표적인 행궁은 남한산성의 광주행궁, 강화행궁, 온양행궁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과 강화행궁은 피난용일 것이고 다른 행궁중에는 왕릉 참배용이 있었습니다. 온양행궁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한 기능도 있었습니다.
이곳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보통 행궁은 100~130칸입니다. 광주행궁은 370칸 정도데 화성행궁은 576칸 규모이고 현재 482칸이 보존, 보수되어 있습니다.
이곳 봉수당에서 장조(사도세자)의 중전이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가 열렸습니다.
정조 이산은 어린 나이에 뒤주에 갇혀서 8일만에 승하한 아버지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왕릉에 13번 참배를 했습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는 동갑입니다. 28세에 남편을 잃고 혼자되신 혜경궁홍씨가 회갑을 맞이하자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렸습니다.
당시에는 한양~수원은 먼길이었습니다. 가마를 타고 시흥행궁에서 1박하시고 이틀만에 이곳 화성행궁에 도착해서 회갑연을 열었습니다.
230년전의 잔치를 상세하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원시는 60회째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10월초에 회갑연을 축제로 열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을 축제로 운영하는 아주 멋지고 훌륭한 축제입니다.
여러분이 올해 10월의 축제기간에 해외에 가지 않고 수원에 오시면 여러분은 800만원을 버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아마도 10월 초 주말을 좌우로 해서 행사기간이 잡힐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비싼 비행기를 타고 와서 관람하는 축제를 여러분은 차타고 오셔서 볼 수 있으니 800만원을 버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봉수당] 정조가 차린 잔치상입니다. 그 옆으로 어좌, 일월오봉도, 집무실이 있습니다. 여기가 중심전각입니다. 한양 궁궐의 근정전, 인정전은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의전의 기능을 합니다만 이곳 봉수당은 임금의 집무를 보는 공간입니다.
일제가 침략하여 문화재를 파괴하고 민족 정신을 말살하였습니다. 이곳 행궁을 철거하고 신풍초등학교를 세우고 법원을 배치하고 경찰서와 도립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시대에 지은 화성 행궁중에서 洛南軒(낙남헌)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곳에서 일본관리들이 일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정조는 경노잔치를 벌였습니다. 정조의 愛民(애민)사상을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죽과 쌀을 나누어주고 회갑을 맞이한 가난한 노인과 은퇴한 관리 등 380명을 잔치에 초청하였고 임금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니 天地開闢(천지개벽)할 일입니다.
더구나 임금과 백성과 퇴직 관리가 같은 식단, 메뉴로 식사를 하였으니 백성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있습니다만 세종과 정조가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일이 있는 언어는 인류 역사에서 한글뿐입니다. 외국의 어느 학자는 한글에 감동을 받아서 10월9일 하루 동안 한복을 입고 한국의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때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배제하였고 그 당시 뉴스에 나온 젊은이들이 인터뷰에서 한글날을 아는 이가 거의 없어서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8일간 연 것은 궁궐 마당 뒤주 안에서 8일간 굶어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정조가, 8일간 잔치를 벌이는 것이며 ‘8일간의 행사’를 연 것입니다. 그 내용이 병풍에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입니다.
[인터넷]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장헌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莊祖陵)에 행차한 뒤 정리의궤청(廳)을 설치하여 편찬 간행하도록 하였다.
당시 정조는 화성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어 주민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행차를 위해 한강에 설치한 배다리[舟橋] 건설, 화성에서 거행한 문무과 별시 등 모든 내용이 그림과 함께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Memory of the World Wonhaeng eulmyojeongri eugye]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여러분, 조선은 기록의 나라입니다. 6km에 달하는 화성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동북공심돈은 외도, 내도, 투시도가 있고 목수, 석수, 공사기간, 賃金(임금)에 대한 기록이 방대하게 남아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당시 초기에 지정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수를 많이 해서 원형이 적다는 점을 지적했을 때 이 설계도를 제시하자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이 이에 동의한 것입니다.
1,800명 수행원이 한양에서 수원 화성으로 말을 타고 가마를 타고 걸어서 올 때 풍악을 울렸습니다. 8일간 한양에서 화성까지 움직인 인원은 6,500명입니다.
올 가을에는 말 400필이 동원되고 사람은 더 많이 참여하는 축제가 준비중입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정부가 개최하는 가장 큰 행사일 것입니다. 124m의 의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궁에는 평소 수원 유수가 머물면서 행정업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이 행궁에 오시면 이곳에서 나라일을 보았습니다.
[화성장대] 지휘본부입니다. 저 건너편에는 연무대가 보입니다. 중국은 창, 일본은 칼, 조선은 활의 나라입니다. 활은 5발을 1순이라 합니다. 연무대는 군사를 훈련하는 곳이었습니다.
사실 정조가 왕에 오를 때는 열악한 분위기였습니다. 세종과 정조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쓴 왕입니다. 조선시대에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것이고 동궁 시절에 어렵게 자리를 지킨 바가 있습니다.
정조는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홍국영이 정조를 지켜내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4살이던 때에 할아버지 영조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낼 정도로 영특함이 있었고 사도세자 역시 문과 무에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53년간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정조는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하여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정조 20년에는 이곳 서장대에 와서 3,700명 병사와 주변 백성들이 참여하여 주간, 야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왕권이 공고함을 보여주었습니다.
2023년 10월에 저 연무대에서 군사훈련을 할 것입니다. 연무에서 살펴보면 창용문(동문), 팔달문(남문), 장안분(북문), 화서문(서문)이 보입니다.
이 성을 건립할 때에 반대가 많았습니다. 대신들이 遷都(천도)를 하면 자신들의 세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습니다.
정조는 10년의 계획을 하면서 목성, 토성, 석성 등을 구상하였고 결국 벽돌+돌로 축성하기로 하고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주변에 돌이 많아서 공사를 빠르게 진행하였습니다.
10년 계획을 한 공사를 2년10개월 만에 완성하였으니 부실공사를 걱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조는 성을 지을 것이니 목수, 석수, 인부가 오면 賃金(임금)을 주겠다 했습니다. 그래서 공사에 참여한 자들이 정성을 다해 일했으므로 부실공사는 없습니다.
특히 정조는 서양에 78년 앞서서 奴婢(노비)를 해방했습니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일하는 백성들에게 품삵을 주었는데 반나절만 일한 이에게도 임금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니 인부들이 열심히 일했고 정조가 일하는 백성들에게 약재를 상으로 주었다니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230년이 지난 지금도 화성은 견고합니다.
역사탐방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얻어가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정조는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했습니다. 이곳에 글씨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석수 박상길]이라고 보입니다. 성을 쌓고 꾸미는 작업에 참여한 책임자일 것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도 성을 축성하는데 참여한 분의 이름이 기록되고 후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설은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 앞에 돌과 벽돌로 성을 쌓으니 적군이 공격해도 버텨낼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수원을 상징하는 문양을 받은 곳입니다. 이 모습을 그림으로 만들어서 수원시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았고 행궁이나 화성을 돌아보면 또 다른 감동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화성을 축성하는데 다산 정약용의 거중기가 사용되어 백성들의 중노동을 줄이고 공사를 효과적으로 빠르게 진행하였다 합니다. 해설사님이 화성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용 선생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걷고 오르고 관찰하고 들으면서 행복한 우리문화유산 탐방을 마치니 운동을 하여 상쾌하였고 맛집에서 풍성하게 점심을 잘 먹었습니다.
[추가기록] 화성에서 가까운 곳에 융건릉이 있습니다. 아버지 장조를 모신 융릉과 훗날 정조를 모신 건릉입니다. 합해서 융건릉이라 부릅니다.
아버지를 위해 용이 되시라고 곤신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