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경 중앙 언론이나 지방언론의 기자들은 기사보다 가십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기사는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각종 행사와 시책을 알리는 것으로서 보통의 업무라 할 것이고 가십은 도정 전반이나 도지사와 간부들의 동향보고라 할 것이기에 관선 도지사 시절인 당시로서는 큰 관심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1988년 상반기까지는 이른바 1도1사로서 경인일보가 경기도·인천광역시 지방기사를 독점하였고, 그해 8월부터 10월까지 3개 지방지가 창간되었습니다. 경인일보(1961. 9. 1), 경기일보(1988. 8. 8), 기호일보(1988. 7. 20), 인천일보(1988. 7. 15)가 4파전으로 경쟁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창간초부터 가십을 활용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기호일보와 인천일보는 인천에 본사를 두고 경기권에는 작은 지국수준의 사무실에 3-4명이 근무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경인일보 가십이 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매주 간부회의가 09:00에 열리면 발빠르게 30분 안에 원고지 1매 200자 이내의 핵심을 정리하여 전화로 부르면 오후 2시경 도지사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게재되는 것에 큰 보람을 삼았던 것입니다.
독자들이나 공무원들은 그 기사가 기자의 취재에 의한 것으로 알겠지만 사실은 보도자료 담당자가 상황실 옆 기계실에 들어가 오디오만으로 청취한 후 그 자리에서 전화를 통해 제보하였습니다.
언론은, 특히 일간지는 팩트에 중점을 두게 되고 전후좌우 배경과 과정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 기사를 내는 터라 한가지 사업에 수개월을 쓰며 일하는 공무원들을 곤혹스럽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2~3월에 기사를 쓰면서 실적이 30%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11월 기사에서 실적이 80%이니 준수하다 평하기도 하니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다는 게그맨의 멘트가 생각납니다.
기사이든 가십이든 신문에 글로 기록되는 보도인데 그 종이위 글씨로 인해 누구는 기뻐하고 어떤 분은 괴로워하는 희노애락이 담겨있습니다. 때로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이야기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십이 정말로 무서운 시절의 아찔한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寸鐵殺人(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될 것 입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경기도민회장학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