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1970년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동창생 전원이 비봉중학교로 단체 입학을 하게 됩니다. 무시험 입학이어서 초등학교 졸업장 들고 곧바로 비봉중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학군제라 해서 무시험 뺑뺑이라는 입학 제도로 진행되었습니다. 비봉중학교에 가서 유도를 배웠습니다. 비봉중고 설립자 홍건표 교장선생님은 어려서 상경하여 사업에 성공하고 힘든시절을 버티게 해 준 유도를 통해 고향의 후배들을 잘 키우겠다는 학교 운영의 방침을 곧게 세우신 분입니다. 보통 실력으로는 5단에 이르는 유도의 승단인데 명예 8단에 이른 분입니다. 유도에서 명예8단이란 실력 5단 이후에 유도에 기여한 바에 따라 명예의 단을 올린다고 중학교 2학년쯤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석표 유도 선생님은 검은 띠 5단이었고 명예 8단의 홍건표 교장선생님의 유도복 띠에는 붉은 색과 청색, 흰색이 무지개떡처럼 연결된 멋진 디자인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장석표 선생님과 홍건표 교장선생님이 품새 대련을 시범으로 보이시는데 실제로 조르기를 하면 선생님이 캑캑 하면서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견디는 모습이 안스러웠습니다. 2학년 어느 날에 장인권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몬트리올 올림픽 메달리스트라 했습니다. 서구
선친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지금 함께 사시는 부모님중 아비부입니다. 선친은 돌아가신 아버지 입니다. 다른 분의 아버지를 춘부장이라 합니다. 椿府丈(춘부장)은 상대방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쓰던 말입니다. 춘은 대춘이라는 상상속의 나무이고 이 나무가 8천년을 봄으로 삼고 다시 8천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춘의 1년은 3만2천년입다. 춘자에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부장이란 집안의 큰 어른이란 뜻입니다. 1971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서 선친이 되신 것인가요. 오전에 수원사는 큰형이 비봉면 자안리 집에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에 누군가를 통해 전갈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시골에 닿은 것입니다. 전화가 없고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누군가가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였고 할아버지, 집안 어른과 함께 비봉까지 5km를 걸어가서 수원가는 버스를 타고 성빈센트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병원 어디엔가에 아버지가 계신데 만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엉엉 우시고 큰형은 인상을 쓰고 저쪽 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어른들이 냉동고
중학교 3학년입니다. 1973년은 비봉중학교 3년차 다닌 시골 학생으로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이입니다. 당시 한준배 국어선생님, 한문선 국어 선생님이 문학강의를 하시면 중2, 중3 시골소년은 그 문학의 길에 들어서려다 풀길로 가고 문학의 개울가로 가다가 실개천으로 방향을 틀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학소년의 가슴속에는 중학교 교사의 꿈이 자리를 잡습니다. 중학생 때 들은 문학적 이야기로는 큰 강은 폭이 넓고 높은 산은 골이 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강과 높은 산자락의 소년소녀들이 문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했습니다. 그 넓은 들판과 산과 하늘을 보면서 상상의 무대를 더 넓고 크게 마련한다는 말입니다. 작은 공간에서 큰 이야기를 꾸며내기는 어렵다 생각합니다. 넓은 공간에서 시작한 어떤 이야기 꾸미기가 비록 이런저련 여건이 부족하다 해도 최소의 결과가 결국에 크게 나타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1학기는 다리 골절로 집에서 지내고 여름방학 이후에 고교 진학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비봉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하시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학교 발전 방침으로 인해 10명 정도 학생들이 마지막날까지 학교 교실에서 잠자면서 농성 비슷한 상황을 펼치게 되고 결국 마지막날 원서가
비봉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렵게 힘들게 수성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시골 중학교를 나와서 도시 수원의 공립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은 약간의 모험이었습니다. 비봉중학교에서 6명이 진학했습니다. 지금 수원에 송죽동은 과거 솔대라 불렀습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솔대라 했으므로 한자 그대로 松竹洞(송죽동)이라 작명했습니다. 율전동은 밤밭입이다. 밤나무가 많은 곳이라 해서 밤의 밭, 밤밭이 된 것입니다. 일본식, 왜식 작명의 흔적이 보이기도 합니다. 밤밭, 송죽동에 이모님이 사시고 사촌형님, 형수님은 교사를 하셨습니다. 이모님 덕분에 3년동안 불편없이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모부 돌아가셨을때 상가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사촌들이 고등학교 3년동안 이모부와 함께 했으니 펑펑 울만도 하다 했습니다. 2012년에 이모님이 돌아가셨을때는 아주대 병원에 이들동안 상근하고 장지에 갔습니다. 이모부와 나란히 잘 모시는데 동참하고 걸어내려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노인 요양원에 갔었습니다. 나이를 들면 그런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교회 열심히 다시시던 '한권사'님은 하느님 앞으로 평온하게 가셨습니다. 요즘 어머니 모습에서 한권사님의 그
1976년 10월 8일에 수성고등학교 3학년 문예반 학생으로 경희대학교 전국 고교생 백일장대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코'라는 과제를 받고 원고지 10장을 적어내고 4등상을 받았습니다. 당시 2등까지는 무시험 1학기 장학생으로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는 특전이 있었지만 참방 4등으로 상장과 한자사전을 상품으로 받았습니다. 경기도 안성출신 조병화 선생님을 직접 만나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제출한 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 심사위원들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제목을 듣는 순간 생각한 문장을 적어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창의력보다는 순간의 순수한 생각을 주제로 삼았던 기억이 납니다. 코는 후각으로서 처음에는 확실하게 냄새를 맏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마취되어 냄새를 모른다는 점을 압니다. 그래서 시골 재래식 화장실에 가서 처음에는 냄새가 나서 조금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후각이 마취되어 냄새가 사라진 것처럼 편안해 집니다. 그런데 코의 기능은 이처럼 냄새를 맏으면 되는데 다른 쪽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콧구멍이 뻥 뚫린 것이 유난히 표가 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서 코를 아래로 자꾸 잡아
5급으로 들어와서 23년만에 5급이 되었다는 조크가 있었습니다. 1977년 당시에는 5급 공무원이라도 들어가라 했습니다. 5급을(9급), 5급갑(8급), 4급을(7급), 4급갑(6급=주사), 3급을(5급=사무관), 3급갑(4급=서기관), 2급을(부이사관=3급)로 비교됩니다. 그래서 9급 공무원에 들어왔습니다. 초기에는 대학교 국문과 재수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에 집중하게 되고 피동적으로 끌려가면서 스스로의 주관 없이 시간과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한 그해 2월에 응시를 했고 1977년 2월17일에 경기도인사위원장 직인이 박힌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당시 응시지역은 화성군이고 도내 시군 전체의 공무원 채용을 경기도가 총괄 대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해 1977년 5월에 5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6년11월23일에 다시 5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비봉면사무소에서 공직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일을 가르치지 않고 너도 지금 나만큼 공무원에 대해 안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냥 일의 앞뒤 설명없이 진행하라 합니다. 물어볼 선배가 사무실에 없습니다. 모두가 현장에 나갔고 부면장님이 전화기를 잡고 사무실을 지키면서 군청의 지시를 대기하고 있습니
1978년은 공무원 2년차로서 몇가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국문과를 나와서 중학교 교사를 하겠다는 꿈이 살아있었지만 현실은 아니었고 그래서 방송대 1학년에 입학하였구 9년동안 다녀서 5년제 학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공무원 2년차에는 산업계의 다양한 업무를 했습니다. 달달달 외웠습니다. 축산, 양정, 상공, 수산, 잠업, 농정, 관정, 그리고 잡다한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월 20일이 되면 월말 기준 보고서 독촉이 옵니다. 특히 축산업무에 월보가 많았습니다. 답리작 사료작물, 서강사료 생산실적을 보고하고 젖소 마릿수, 육우와 한우 통계자료를 제출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숫자를 대한민국 정부의 농림수산부 통계로 쓰면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 전작 업무도 흔들림이 보였습니다. 수도는 수돗물 나오는 배관이 아니라 벼농사이고 육도는 밭농사입니다. 이는 차석 업무입니다. 군청 농산과는 논농사를 위해 존재하고 읍면은 농사짓는 현장 사무실입니다. 가뭄이 오면 안보적 차원에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벼를 심어야 했고 노풍은 크게 실패했습니다. 산업계장님이 20세 젊은 직원 둘을 데리고 시골마을에 갔습니다. 그리고
1978년에 비봉면사무소에서 양정담당을 하였습니다. 양정이란 추곡 쌀과 하곡 보리를 담당하는 업무입니다. 추곡수매는 정부가 농민들이 생산한 벼를 매입하여 정부양곡으로 비축하는 일입니다. 하곡수매는 보리를 사들이는 것입니다. 보리농사는 적으니 나오는 대로 사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벼농사는 정부가 쌀을 사들였다가 쌀값이 오르면 비축 양곡을 시장에 내놓아서 적정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부 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하던 시절입니다. 이 양곡정책은 수년후 정부가 벼를 사들이지 않는 반대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만 1978년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공무원을 동원하여 벼를 사들이느라 힘들게 일했습니다. 제가 담당한 비봉면 상기리는 지금 봉담읍 상기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습니다만 산촌마을이어서 추곡수매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면장님이 양정담당 부락도 목표량에 미달하는가 지적을 하십니다. 그래서 수분 오버로 수매에 들어지 못한 벼 20가마를 제 월급으로 구매를 해서 비봉면 소재지 건조소에 위탁하여 13.5%이던가 수분 함량기준에 통과하도록 건조 포장하여 출하했습니다. 그런데 20가마니를 말리니 19가마로 줄었고 나중에 알았는데 20가마중 2가마 정도가 쭉정이를 담았던
1980년은 성숙의 해입니다. 공직 2년 근무하고 국방의 의무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4월에 근무를 마치고 공무원에 복직하여 팔탄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회계담당을 하였습니다. 두달 후에 총무계장님이 새로 오셨기에 지출원용 도장 하나를 새겨 드렸습니다. 첫 결재를 받고자 할때 이 도장으로 결재를 하시라 드렸습니다. 표정이 참으로 밝으십니다.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산업계 분야에 오래 근무하시다가 총무계장이 되셨으므로 행정다운 행정도 하시고 도장을 찍어 예산을 집행하는 맛도 있었던 바입니다. 1년을 근무하고 1981년8월10일에 화성군 태안읍 소재 농민교육원으로 부서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20일 봉급날인데 후임자는 오지 않았으므로 15일부터 며칠간 팔탄면으로 퇴근하여 봉급계산 업무를 지원했습니다. 19일 저녁에 회계서류를 다 만들고 수표까지 작성하여 결재만 하시면 지출이 가능하도록 마련해 드렸습니다. 이 일로 계장님은 아주 여러곳에서 자랑하십니다. 우리 이서기가 태안읍으로 발령나서 가고 후임자가 없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며칠밤에 퇴근해서 봉급서류를 만들어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하십니다. 후임자가 있어도 와서 도울 일인데 계장님 혼자서
▩ 팔탄에서 병점으로 ▩ 1980년말에 (1980년10월13일)에 경기도청 전입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팔탄면사무소에 5월10일 복직 발령을 받아 회계담당으로 일하던 중에 총무담당 오영진 서기가 시험을 보라면서 군청 공문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입시험 응시원서입니다. 경기도청에서 도내 시군 읍면동 공무원을 대상으로 9급 전입시험을 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생각으로 경기도청이 300명쯤 근무하는 군청 정도의 기관으로 생각했었고, 다만 우리 집 비봉면 자안리에서 수원으로 가는 시내버스 노선중 수원세무서 앞에 하차하여 조금만 걸어가면 팔달산 도청 건물에 도착하니 출퇴근이 편하겠다는 생각에 전입시험에 응시했습니다. 과목을 미리 알려주는 바도 없었고 알아볼 길도 없으니 그냥 볼펜하나 들고 시험날 도청에 갔습니다. 요즘에야 시험내용을 미리 인터넷을 통해 검색 가능하겠지만 달랑 전입시험 응시표에 화성군 팔탄면 지방행정서기보 이강석이 응시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여 우편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경기도청 고시계 앞으로 보냈는데 나중에 보니 인사계에서 전입시험을 주관합니다. 그리고 훗날 만나게될 심재인 선배가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1980년 10월에 9급으로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