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벌초와 시제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조상님 묘소를 깔끔하게 하고자 형제들이 벌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이미 둘째형이 고조부 벌초를 마쳤고 증조, 조부, 아버지 등 넓지 않은 묘소의 벌초를 남겨두었다 하므로 이번주 일요일에 날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에게 다른 일정이 들어왔으므로 다시 형과 날을 조율해야 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닌 듯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예초기 빌려주는 곳이 많다고 하므로 수원의 농기계 가계가 밀집한 매교동 공구상가에서 기계를 빌렸습니다.

 

매교동으로 이동하여 적정한 기계를 찜하고 다시 수원천변을 잉어와 붕어, 그리고 오리와 물새를 친구삼아 찬찬히 걸어 세교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시청역을 지나 매탄권선역에 도착한 후 집에 가서 차를 운전하여 다시 가서 예초기를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5시에 출발하였습니다.

신나게 내달리다가 주유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양노2리 발이골이라고 중학생 시절 걸어 다니던 길에 주유소가 있는 것이 기억나므로 가보니 아직 5시반이라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시 비봉면과 매송면 경계인 쌍학3리로 돌아가서 주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달려서 고향마을 태어난 집 앞에 당도하였는데 아직도 어둡습니다. 산에 오르기에는 이를 시각입니다.

 

그래서 종중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 문중은 효령대군파입니다. 효령대군은 조선시대 3대왕 태종(이방원)의 차남입니다. 양령, 효령, 충령, 성령 사형제가 있었고 태종이 삼남 충령에게 王位(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남은 왕위를 양보하여 양녕대군이 되었고, 차남은 왕위에 욕심을 내지 않고 백련사에서 어머니와 함께 불공에 열중하여 효성이 지극하다 해서 孝寧大君(효령대군)입니다.

그리고 삼남이 왕위에 오르니 世宗大王(세종대왕)입니다. 몇 번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 모셔진 세종대왕께 인사를 드리면서 형님 효령대군의 안부를 여쭈어보곤 합니다. 그때마다 형님은 잘 계신다고 답하십니다.

효령대군은 청권사에 모셨습니다. 청권사 홈페이지를 참고하였습니다. 淸權祠(청권사)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모시는 사당(祠堂)의 이름이고, 50만 후손들의 종친회(宗親會) 명칭입니다.

또한, 효령대군의 위덕과 사상을 계승·선양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사단법인(社團法人)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우선, 궁금하실 ‘청권(淸權)’의 뜻에 대해 말씀드리면, 옛날 중국 주(周)나라의 우중(虞仲)왕자가 아버지 태왕(太王)의 뜻을 헤아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칭찬하면서 공자(孔子)가 청권이라고 하였습니다.

효령대군께서 아버지이신 태종(太宗)대왕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미덕을 세종대왕께서는 나의 형이 곧 청권이라고 칭송하셨고, 정조(正祖)대왕께서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로 사액(賜額)하신데서 연유합니다.

효령대군의 사당과 묘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효령로에 있으며,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효령대군의 생애와 업적과 사상을 연구하면, 5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대립과 갈등의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효령대군에 이어 서원군(瑞原君), 청거수(淸渠守), 음평부정(陰平副正), 수사장(水使璋), 응록(應綠), 정구(鼎九), 동백(東栢), 한후(漢垕), 세강(世綱)으로 이어집니다.

윗대 조상을 모신 종산에 올라가 큰 절을 올렸습니다. 지금까지 이끌어 주시고 키워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렸습니다.

지난번 종산 벌초 날에는 윤달로 인해 9월 마지막 일요일이라는 메모에만 집착한 바 이미 8월 마지막주 일요일, 8월27일에 마쳤다고 합니다.

종산에 가니 어르신들은 늘 그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영겁의 세월을 지키실 것입니다. 조상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인데 자손들은 조상을 따라가기 위해 매년 매해 늙어갑니다.

나이를 먹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등에 주름이 깊어만 갑니다. 그리고 벌초에 오는 자손들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십니다.

 

내려오는 길에 고조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기는 종산이니 평온하게 잘 마무리된 벌초의 깔끔함을 맛보았습니다. 둘째 형이 수일전에 작업을 하였습니다.

옆에는 어린 시절 키가 큰 할머니로 기억되는 ‘세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증조할머니 입니다. 그 할머니의 아들은 6.25전쟁에 전사하시고 아저씨들은 나라의 보훈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주택은행에 취직하여 지점장이 되었습니다. 은행에서 주신 주택은행 온도계가 한동안 시골 208-1번지 집 기둥에 있었습니다.

다시 차를 달려 동네 길을 지나 묘역 인근에 다가가 주차를 하기 위해 차를 돌리는데 동네 아저씨가 관심을 가지십니다. 3년 선배 형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전문가 만난 결에 예초기 조립과 시동을 도와달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어도 전문가가 나타나면 諮問(자문)을 구하는 재치가 필요합니다.

 

일단 휘발유를 통에 넣고 엔진오일을 20:1로 첨가합니다. 너무 많은 듯 부어주시므로 '스톱'을 외치자 '눈으로 다 알고 하는 일'이라면서 웃으십니다. 그리고 줄을 당기니 스스로하고 시동이 걸립니다.

3년 전에 기계를 가지고 현장에 와서 큰 실수를 한 바 있습니다. 기계 연료통에 엔진오일을 먼저 넣고 휘발유를 나중에 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거운 오일은 연료통 아래로 내려가서 엔진으로 스며들었고 그 상태에서 시동을 걸려하니 도저히 터지지를 않았고 벌초 기계를 처음 다루는 초보자의 속만 터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네 아저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니 즉석에서 엔진오일이 엔진 안으로 과도하게 들어간 것으로 진단하시고, 줄을 빼서 청소한 후 휘발유와 엔진오일을 20:1 ‘칵테일’한 휘발유를 넣으니 한 방에 시동이 터졌던 것입니다.

오늘은 동네 형의 도움을 받아 한방에 시동이 걸리므로 이를 짊어지고 벌초를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도착순으로 아버지 산소의 벌초를 먼저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71년7월11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1951년 12월29일 어머니 한옥희 여사와 혼인신고를 하셨습니다.

전쟁 중에 결혼하신 것입니다. 1971년, 결혼 20년만에 돌아가셨습니다, 큰형 17세, 둘째 15세, 막내인 제가 13살 때 先親(선친)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이명의 조부님은 아버지 별세 후 10년만인 1981년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79세 1903년생이십니다. 조재복 할머니는 1950년대 초에 별세하셨으므로 할아버지 묘역에 合葬(합장)하였습니다.

어려서 뒷산에 올라 할머니 산소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할머니 산소는 참으로 아담하였고 잔디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1960년대 그 산자락에서 아버지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습니다.

과수원을 하시면서 할머니 산소를 함께 돌보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조상님 산소 모시는 일은 어머니 몫이 되었고 그 업을 지금 이강천, 이강석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이어짐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합니다. 물론 잘 정돈되면 깔끔하게 모셔서 잘 관리하고 싶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 이리저리 자랑을 하였습니다. 공무원 서기관 발령장 받으면 그냥 집안에 알리고 싶어집니다.

사무관 때는 주변 사람에게 자랑하게 되지만 서기관이 되면 문중을 향합니다. 서기관이면 이미 나이가 들어 문중의 어르신들에게 관심받을 나이가 됩니다.

회식에서 ’서기관 승진 문중 축하 행사‘에 가야 한다며 먼저 나간 공직 동료가 있었고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경기도 양주시에서 태어난 동료인데 집안에서 큰 축하연을 연답니다.

그나마 저는 문중 벌초에 가면 동두천부시장, 오산부시장,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부시장이라고 벌초하는 날에 문중의 이기용 아저씨가 어르신 앞에서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종중 벌초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손으로서의 의무도 있었겠지만 공직자로 문중 어르신 앞에 소개되는 순간을 위해 하루 일정을 비워서 참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미스매칭으로 벌초에 가지 못하니 인사할 기회가 한번 줄었고 공무원이기에 매년 종중 벌초 현장에서 급식당번을 하곤 하였는데 최근 아들이 수원시청 공무원에 합격한 그 아버지가 급식을 도왔다고 합니다.

역사와 세월은 그렇게 의미있게 이어지고 아름답게 계승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을 후대가 하고 다시 주변의 다른 집 자손이 이어갑니다.

며칠 전 전화를 통화하니 '공무원의 길 차마고도'책을 받고 싶다 하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아들이 수원시청에 합격했다 합니다. 그래서 그냥 보낼까 하다가 공직에 입문하게 되었다 하니 정식으로 25,000원 내고 책을 구매하라 했습니다.

 

공무원의 길을 들어서면서 가져야 할 나름의 규칙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툭툭 스마트폰을 두드리면 다음 날 도깨비 방망이 요술처럼 그 책을 내 집 현관에서 받게 됩니다.

벌초를 하기 위해 단단히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갈퀴가 빠졌습니다. 이는 예초기 다음으로 중요한 장비입니다. 하지만 총무가 음료수, 간식, 수건, 장갑 등 소품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刈草(예초)후 뒷정리의 필수인 갈퀴를 비봉면사무소 소재지 전 면장님댁 가게에서 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비봉을 지나는 시각이 5시 30분쯤이었으므로 가게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단 동네로 직행하였던 것입니다.

가면서 일단 기계로 풀을 깎아 둔 후 2~3일 후 잘 마르면 다시 갈퀴를 가지고 가서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갈퀴질을 핑계로 한 번 더 조상님 묘역을 다녀오면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기대와 생각도 겸했습니다.

그러나 작업을 마친 후 돌아보니 영 개운하지 않으므로 나뭇가지를 꺾어서 갈퀴 대용으로 사리비 쓸듯이 천천히 작업을 하니 어느 정도 깔끔하게 정돈이 됩니다.

 

맥가이버는 아니어도 다양한 손기술을 발휘하면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이 가능하고 그 장비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가 되니 이른바 이가 없으면 잇몸이 그 역할을 한다는 萬古(만고)의 진리를 터득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비봉면사무소 간 길에 작은 도서관에서 책 3권을 빌렸으므로 독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집 근처에 아무리 큰 도서관이 있어도 가지 않으면 남의 일이고 조금 먼 곳이고 작은 도서관이지만 몇 번 가다보면 친숙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도서관이라 해도 그 책을 평생동안 노력해도 다 읽어내지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도서관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주민들이 접근하기 좋은 가까운 곳에 작은 도서관을 여러 개 세우는 것이 남양주시 이석우 시장님의 도서관 정책의 키워드인 것처럼 다른 정책들도 소비자 중심, 니드 중심, 현장으로 찾아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더 많이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초기 기계를 반납하여야 하므로 어제 빌려주신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제 눈치를 보니 오늘 집안에 혼사가 있는 듯 월요일 아침에 반납해도 된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반납하려면 전화를 해보라 하시면서 명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아침 8시반에 전화를 드리니 13:00이후에 문을 여신답니다.

이번에는 사무실로 향합니다. 집보다 가까운 사무실에 가서 정리정돈을 하고 이런저런 글도 쓰고 할 요량입니다. 사장님의 일정이 나의 스케줄에 긍정의 효과를 주십니다.

사무실에 와서 머리를 감았습니다. 사우나탕이 쉬는 날이군요. 사무실에 오면 뜨거운 물에 한 번 지질 수 있겠구나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자료를 정리하면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보내면서 사람의 일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긍정의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일감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1982년에 글씨를 못 쓰는 것을 한탄만 하지 않고 스스로 경기 타자학원에 등록하여 타자를 배웠으므로 오늘 이렇게 장문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서 가족과 주변의 지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대략 측정해 보니 오늘 쓴 글이 원고지 23매 분량입니다. 학창시절에 원고지 3매를 쓰기 위해 고민·고생을 하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고 보람입니다.

당시에 타자기에 도전하지 않았으면 이후 공직내내 불편했을 것이고 결국 나이들이 독수리 타자를 치고 있을 것입니다만 지금은 모니터를 보면서 신명나게 두드리니 이 또한 기분 좋은 일입니다.

결국 운명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변화를 줄 수는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늘 벌초를 스스로 다녀온 바에 대한 自畵自讚(자화자찬), 자기자랑, 自己滿足(자기만족)에 대해서는 이만 접고자 합니다.

그리고 묘소 앞에서 아버지께 108배 절을 드렸으니 極樂往生(극락왕생)하시고 다음 세계에서도 아들을 격려하시고 시대에 앞서 나가셨던 그 모습을 이어주신다면 그 자손이 또한 미래 지향적으로 전진해 갈 것이라 확신합니다.

 

 

■ 문중 어르신!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종중의 여러분들이 오셨습니다. 풍성하게 차란 床石(상석)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조상님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잘 먹고 건강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이강석·현재 부자가 종중 산으로 갔습니다. 봉담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1착으로 오셨고 우리는 두 번째 도착입니다.

일단 올라가서 通政大夫(통정대부) 할아버지 묘역의 솔까래를 거뒀습니다. 늘 차에 갈퀴를 가지고 다니는 바, 오늘도 갈퀴가 한 몫을 했습니다.

작업을 진행하는 중에 종중 총무 이강식이 차가 올라옵니다. 우리 부자도 음식 나르는 일을 돕고 다시 솔잎을 긁어서 옆으로 보내고 묘역의 잔디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이제 많은 자손이 오셨습니다. 10시까지 오시라 했는데 10시 반경에 모두 모이셨고 4분이 모여서 상차림의 순서를 말씀 하십니다. 紅東白西(홍동백서) 조율이시 魚東肉西(어동육서) 서포우회.

다양한 성씨의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산신제를 지내는 경우에는 한 집안의 제례보다 형식과 절차에서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당 茶禮(차례) 지내다가 신주는 개 물려 보낸다'고 했습니다.

불필요한 절차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중요한 신주 단자는 개가 물고 뛰어다니도록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행스럽게 전주이씨 문중의 효령대군파 18대손 17대손 16대손 그리고 19대손이 모였으니 제례 절차는 회장님의 지휘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19대손 대표가 된 아들 이현재가 열심히 음식을 날랐습니다. 제상 床石(상석)을 나뭇가지로 털어서 정갈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제사가 시작될 즈음 우리는 다음번 상차림을 합니다.

바쁘게 제사 진행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였고 제사 후 음식을 모두에게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과일, 고기, 제물을 봉투에 담아 가져가시게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동네 노인정에 드렸으나 모두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었고 내일 沈(심) 씨 문중에 행사가 있으므로 노인들이 거기에서 음식을 드시니 오늘 제사음식은 우리 종중에서 자체로 나누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제 행사를 마치고 일행은 방아다리 뷔페로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단을 고루 살피면서 맛있게 먹고 돌아왔습니다. 이강수 형이 나의 갈퀴를 달라 하면서 9,000원에 구매했다고 하니 10,000원을 주십니다.

돌아오는 길에 8,000원에 같은 것을 구매하니 2,000원 이득이 남았습니다. 벌초가서 뿐 아니라 시제에서도 갈퀴의 용처가 있음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시제를 마치시고 환담을 하십니다. 19대손 대표 이현재가 왔다고 어르신들이 반가워하십니다. 정말로 이 시제, 종중, 벌초 등 중차대한 일들을 자자손손 이어가게 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해 보입니다.

벌초 참가자 5만원, 시제 참석자 3만원 시상금을 주는 것도 필요하고 젊은이가 오면 기념품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부인들이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에게 시제에 다녀온 이야기를 알리고 자자손손 이어가는 힘의 원천은 신사임당의 이율곡 교육처럼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식 교육을 해야 합니다.

전주 이가끼리만 절하고 제사를 지낸다 한들 이 가문의 자자손손 이어짐이 어렵습니다. 부인, 어머니, 할머니의 교육의 힘으로 문중을 이끌고 宗孫(종손), 宗婦(종부) 집안의 며느리가 家門(가문)을 이끄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이처럼 중요한 종중 일을 누가 담당을 하든지 많은 종중 자손들이 열심히 참석하고 상호 교류하고 인사를 하는 시간을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강석, 이현재, 즉 아들과 아버지, 父子(부자)에게도 참으로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조상님 모시는 일>

어머님만 걱정하시는 일이 있어요

4대봉사 조상님 고비(考妣)마다 제수 준비

고조 증조 조상님 머리 깍아 드리는 일

매년 자라나는 풀 힘 먹고 후손이 크듯

해마다 요맘때면 후손을 부르는 것

조상님과 손자들이 나누어야 하는 일

제사와 벌초와 생명

시제와 벌초와 제사 불참하는 자

벌금을 물리자 했어요

"국가가 내게 해준게 뭣이냐"면 뭐라 할까

답하지 못할걸, 그래서 차비 주자 했어요

1976년까지는 손자의 의무

벌초는 자손의 행복한 임무인데

2010년에는 종중의 중대사

손과 낫도 아닌 원동기 기계를 쓰면서도

땀난다 어렵다 하대요

벌초 온 놈 잘난 놈

안온 자 못온 자 '냅둬요'

종중 벌초 다녀와서

올해 어머니 걱정 덜었어요

너 잘되라 하는 일인데

올해도 종산에 오르는 길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넘어야 했어요

 

■ 벌초를 하면서

최근 수년간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노력하는 종산 벌초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종중산 아닌 우리 산에 모신 이회완 고조 할아버지 이완우 증조할아버지, 이명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산소에 가서 절을 올렸습니다.

잔디가 많이 부족합니다만 어제 안양 형이 미리 와서 벌초를 하였으므로 깔끔합니다.

일종의 역할분담으로 안양 형은 고조, 증조, 할아버지와 아버지(할머니 포함) 묘소 벌초를 하고 셋째는 종중 종산 벌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안양 형이 시간이 맞으면 종중 벌초에도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데 오늘은 회사에 업무가 있어 오지 못하였습니다. 이기창 아저씨의 할머니 산소도 깔끔히 벌초를 하였다며 이기창 아저씨가 고맙다 합니다.

 

일찍 도착하여 보니 윗대조 묘에는 아카시아 잔가지가 여러 곳에 서 있습니다. 아랫쪽 5대 봉사 4대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는 깔끔합니다.

자신의 직계 조상은 가끔 와서 관리를 하는 듯 보입니다만 윗대 통정대부 응록 할아버지와 다음 대 할아버지 묘소에 아카시아 잔가지가 무성하더라는 말입니다.

쑥과 아카시아를 맨손으로 뽑고 묘 봉분 주변을 갈퀴로 긁어내는 작업을 하다보니 후손들이 한 두명 늘어나 15명정도 되었으므로 내려가 몇 분에게 인사들 드리고 다시 이기선 아저씨의 주문으로 이강수 형이 가져온 톱을 빌려 묘역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뭇가지 제거작업을 하였습니다.

 

11시경 작업이 끝날 것으로 보이므로 이기설 아저씨에게 전화를 해서 점심 뷔페를 가지러 가자 하니, 잘 준비되고 있다 하십니다.

그리고 다수의 후손이 힘을 모으니 작업은 금방 마무리되었고 10:30분부터 후손들이 모여서 회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기설 아저씨가 10년 정도 총무를 하셨으니 다음번 총무에게 인계하자 했습니다. 그래서 이강식 후손이 총무를 명 받았습니다. 이기호 아저씨의 아들입니다.

총무는 2016년 현재 6백만원 운영자금을 인계받을 것이고 복리식 정기예탁금으로 2016. 8. 19. ~2017. 8. 19까지 연리 1.550%의 통장금액 249,058천원을 인수받을 것입니다. 만기 금액은 252,946천원입니다. 참고로 2018년 잔액은 256,050천원입니다.

이 정기예탁금의 이자를 가지고 시제를 올리고 오늘처럼 벌초를 오면 아주 맛있는 오찬 뷔페를 주문하여 후손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있습니다.

 

어르신들 대화 중에 이강석도 공직을 마감한 2~3년 후에는 총무를 3년 정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만약에 총무가 된다면 작은 까페를 인터넷에 만들어서 젊은이들이 수시로 들어와 후손들의 동정을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문자, 카카오톡 등 SNS를 이용하여 모든 일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8월28일, 8월의 마지막주 일요일에 벌초를 한다고 알리는 것은 물론이고 문자, 카톡, 인터넷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다수의 후손들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벌초에 참여하시는 후손들에게는 기념품을 만들어 전달하고자 합니다. 족보에 본인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을 확대 강조한 작은 수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게 도장을 새겨서 줄 수도 있습니다. 벌초 참가기념품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한번 오면 그 도장을 전달하는 행사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재미있게 이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모든 이에게 도장을 새겨주고 참석하는 날 전하고 훗날 늦게 오시는 후손, 그 자손에게 이처럼 벌초행사에 참석한 기념을 하는 것입니다.

수억을 잠겨놓고 이자만 따먹을 것이 아니라 자손들을 위하는 일에 5백만원 정도 떼어내어 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며느리들 도장도 새겨주어야 할 것입니다. 출가 전 딸들에게도 도장을 파줄 것입니다.

단체로 100개정도 도장을 판다면 단가는 2만원에 가능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기계 프린터로 도장을 만드니 말입니다.

그 도장 주머니를 멋들어지게 만들면 며느리들이 좋아할 것이고 벌초나 시제에 생각깊은 며느리들이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며느리들에게 존재감을 심어주는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는 아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벌초하고 시제 지내는 일을 의무로만 생각하기에 이처럼 힘들게 끌고 오시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졌는데 점심전에 일찍 벌초 작업을 마쳤으므로 여러 명은 먼저 퇴근하였습니다. 반찬이 남았으므로 비닐봉지를 준비하라 해서 담아 주었습니다.

나도 마늘조림과 메추리알 장조림을 15,000원어치 정도 담아왔습니다. 그릇에 옮겨서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오늘내일 먹을 양은 냉장에, 그리고 남은 더 많은 양은 냉동으로 보관 중입니다.

이제 과제겸 숙제는 조상님 묘역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작은 납골묘로 축소할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 70을 넘으신 해방 이전 조선시대 스러운 할아버지급에서는 반대를 하십니다.

70세 이전의 그래도 젊은 층에서는 조만간 납골묘로 하자는 의견을 모을 듯이 보입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고 그 속에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종산에서 톱질을 하였는데 쓰지 않던 근육이 움직여서 어깨와 갈비뼈가 아픈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업중 왼다리에 작은 생치기가 났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분 좋은 추억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 2013년 벌초이야기

2013. 9. 1 일요일은 종중에서 벌초를 하는 날입니다. 후손들은 일단 직계 존속의 벌초를 하고 종산에 모여듭니다.

저도 일단 증조할아버지 동산모탱이 산소에 가서 이미 도착하여 이기용 아저씨 벌초를 돕고 있던 형을 만나 함께 벌초를 하였습니다.

이기창 아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 벌초를 도왔습니다. 두분 아저씨의 어머니는 목소리가 커서 別名(별명)이 ‘문화방송’ 할머니인데 이분의 유골이 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6.25때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진 이기창의 아버지는 잘 모르고 그 어머니이신 문화방송 할머니는 지난해 돌아가셨을 때 서울 빈소에 조문했습니다.

 

고조고(여산송씨) 벌초를 마치고 종산에 가니 20여명이 이미 작업 중이고 잠시 후에는 그 인원이 45명으로 늘고 기계는 13대가 넘나드는 숫자를 기록하더니 예정보다 이른 11시에 작업을 마친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점심을 가져오라 하였지만 그게 쉬운 것은 아니었고요.

문중에 배정된 보상금 2억정도 통장에 넣어두니 매년 이자가 나오고 이 돈으로 시제사를 차리고 벌초 때 한식뷔페 밥도 준비하고 참 좋습니다. 결국 돈이 있어야 후손도 있고 자손도 즐거워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크게 大悟覺醒(대오각성)하였습니다.

 

■ 왕릉의 명칭

立春(입춘)이 지났으니 따스하면 좋을 것인데 아침 찬바람이 목덜미를 감아 도는 느낌이 살짝 장미 가시는 아니어도 장미 잎새 뒷편의 거스러미 수준입니다.

살짝 치고 가는 느낌이 가볍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장군의 일부가 아직도 중부권에 남아서 자신의 역할이 남았는가 관망하는 느낌입니다.

물론 초봄의 기세와 밀당하다보면 꽃샘추위까지 아직 절차가 남아있다 할 것입니다만 그래도 후손이 10대 위쪽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는 날 아침인데 날씨가 개운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대략 25km정도를 가면 만나는 윗대 조상님이십니다. 회, 우, 의로 이어지고 기자항렬에서 아버지, 그리고 康에서 宰로 가는 문중입니다. 문중마다 갑을병이거나 나름 돌림자의 기준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문중 활동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대략 이름을 듣고 어느 파인지 아신다 합니다.

 

우선 종중 산으로 갔습니다. 지난번에 화장을 권장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크게 반대의 말씀을 하신 할아버지께서 종중 산자락 가운데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잔디를 심어야 하겠습니다. 지난해 음력 12월15일에 卒(졸)하셨다고 자손들이 비문에 적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시골에서는 삼뱅이라 불렀던 동네가 지금은 봉담읍입니다. 상석을 잘 준비하셔서 깔끔하게 옆의 형제분들과 줄을 맞추셨습니다.

그 첫 번째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옆집에 사신 분으로서 어린 시절 여러가지 추억과 기억이 있는 분이십니다.

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벌초에 동참하고 절을 올렸습니다만 오늘은 좀 길게 절하고 깊이 인사를 드렸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신 조상님들에 대한 인사를 올렸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렇게 면면 이어가는 것인데 현재의 젊은이들은 전통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우리 후손들이 조상에 대한 관심이 아주 낮다는 점입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자신의 청춘과 젊은 시절이 아주 오래갈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청춘은 짧고 인생은 쉽게 지나갑니다.

走馬看山(주마간산)처럼 지나가는 인생에서 자신을 깨닫는 순간에는 이미 많은 것이 지나간 뒤라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가나 생각하는 시기에 벌써 노안이 오고 흰머리 새치가 들고 어금니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보니 눈가에 주름이 보이고 면도하다가 목덜미의 더 깊은 골을 발견하고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올해 나이 40이 넘어버린 것입니다.

 

마음이야 늘 28세 청년인듯 하지만 세월이 세상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추월해서 고속도로 다음 휴게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허망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一場春夢(일장춘몽)과 南柯一夢(남가일몽)이 있으니까요.

짧은 봄날의 꿈속에서 80세 인생을 살고 다시 꿈을 깨는 순간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南柯一夢(남가일몽)은 역설적으로 인생을 살면서 아주 소중한 시기를 충분하게 누릴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합니다.

또는 오늘내일 하루하루를 무게감 있게 살아가라는 경구로 보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있게 시간을 쓰고 활용한다면 70년 인생이 결코 짧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민족 지도자의 인생은 늘 변화와 격동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인생이, 삶이 길게 보이고 가치를 더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亂世英雄(난세영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 큰 인물로 부각되는 점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내내 무과 합격자가 많았을 것인데 임진왜란을 만난 이순신 장군은 성웅이 되었고 평화의 시기를 지켜낸 장군들은 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성묘를 다녀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역시 다녀오기를 참 잘했습니다. 아침에 108배를 올릴 때 일찍 서둘러서 다녀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2015년 1월1일 아침 세마대 독산성 해맞이 행사에서 매일아침 108배를 하겠다는 화두가 머리속에 자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약속은 2021년 봄에도 매일아침 108배를 올리는 것으로 지켜가고 있습니다. 108배 2,000번이 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을 다잡고 몸속의 피가 흐른다는 느낌이 들면 방석위에 서서 108배를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절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6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아침 절을 하고 저녁에도 간간이 절을 했습니다. 그 기록이 10년을 채우면 기네스북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 외삼촌 처삼촌

옛말에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교시절 처가를 멀리하던 사상과 세도정치에 신물이 났던 상황에서 생성된 말인가 생각합니다.

처삼촌의 묘를 벌초하는 사위가 흔하지 않을 것이지만 여건이 그래서 처삼촌 벌초를 한다면 지극정성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처삼촌이면 아내의 작은 아버지나 큰아버지이니 나이 20대 후반에 알게 된 분이거나 이미 아내를 만나기 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외할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애교섞인 속담이 있습니다만 동시에 외삼촌 소에서 남겨먹지 않으면 남길 곳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선 외할머니 떡도 가격이 맞아야 구매한다는 말이니 친인척으로부터 납품을 받아도 정품이 완벽하게 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아는 사람이라 해도 납품이 제 때에 안되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거래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은 '안성유기맞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과거 경기도 안성지역에서는 유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많았습니다. 방자유기란 놋쇠와 합금을 두드려 얇게 펴고 이를 접시, 밥그릇, 국그릇 등 그릇을 말합니다.

한양의 사대부들이 딸을 시집보낼 때 안성 유기 匠人(장인)에게 필요한 만큼을 주문했고 제날짜에 좋은 제품을 정확히 납품했더라 해서 '안성유기맞춤'에 대한 신뢰가 높았습니다.

지금도 집안에 가구를 들이거나 소품을 구매하여 설치하는데 딸 들어맞으면 '안성맞춤'이라며 좋아합니다. 직장인으로 치면 適材適所(적재적소)라는 말과 통할 것입니다.

공직에서는 적재적소도 중요합니다만 요즘에는 '拔擢(발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직원을 요직에 重用(중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발탁도 그 사람 전부를 평가하지는 못하는 현실적인 상황도 반영해 주어야 합니다.

민원실에서 혁신적인 일을 해내기는 어렵습니다. 고작해야 친절한 공무원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설부서, 세무, 건축, 환경, 기획 부서에서는 조금만 발전시켜도 획기적인 혁신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공직자나 회사원들은 이른바 평온한 부서를 고집하지 말고 어렵고 거친 3D부서를 자원해서 큰 성과를 내는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외삼촌 소에서 남기지 않으면 남길 곳이 없다는 말은 소장수의 직업정신입니다. 소 장수는 팔려는 소는 싸게 부르고, 사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소이니 비싸게 사라고 중개를 합니다.

 

그래서 소를 팔기 전에 여물(소먹이)을 많이 먹여서 배가 탱탱하게 부풀렸습니다. 따라서 소를 사는 사람은 시간을 끌어서 소의 팽팽하고 불룩한 배가 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양측의 경쟁은 수 시간 후에 적정선에서 결정이 됩니다.

이때 소장수는 외삼촌이 소를 파는 경우 저렴하게 평가하고 소를 사려는 외삼촌에게는 비싸게 받아내어 차액을 챙겨갑니다.

어느 경우에나 남겨 먹으면서 손해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살펴보면 가장 친한 듯 보이는 외참촌이 소를 사거나 파는 경우에서도 남겨 먹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장수가 외삼촌 소에서 남기기 않으면 이윤을 챙길 곳이 없다고 했으니 다른 이에게서는 더 많이 남겼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장사하면서 손해 보았다, 노인께서 죽고 싶다, 노처녀 시집가지 않는다는 말은 대한민국 3대 거짓말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거짓말은 88세 노인이 '내가 평생에 거짓말이라고는 안 해본 사람'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거짓말 대장은 따로 있다고 합니다만 글로 쓰지는 못하겠습니다.

세월이 흘러 모계사회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남녀평등은 물론 시부모 외부모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외삼촌 소장수의 상거래, 외할머니 떡장수 이야기, 처삼촌 벌초는 자신의 삼촌 묘역보다 더 정성스럽게 관리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 또한 바람직한 시대적 변화라 하겠습니다.

 

■ 자자손손 이어지는 DNA와 조상님의 힘

자자손손 이어지면서 15대를 살았다고 자랑하시는 자손들이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0년 넘게 지켜온 고택은 7대 이상 조상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니 돌아가신 선대의 DNA가 지붕과 기둥 마룻바닥, 부엌, 텃밭 등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더구나 긴 세월 이어온 창고, 부엌, 텃밭에서 조상님의 우성 DNA가 자손들의 체질을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300년전 조상님 중 수준높은 인자를 보유한 DNA가 흙 속에서 잠을 자다가 어느 날 배추나 무우를 통해 자손들의 체내에 들어와 새로운 DNA대장이 되어서 새로운 유전인자를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전은 생물학적으로도 진행되겠지만 집, 텃밭, 앞산, 집안의 각종 자료 등 인문학적인 유전도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오히려 생물학적인 유전보다 사상적인 전통계승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1,2,3에 보면 미래에서 과거로 온 아들과 미래에 결혼하게 될 현재의 남녀가 동시에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봅니다.

영화에서 현재의 인물과 미래의 사람이 같은 시제에서 만나듯이 대대로 이어 살아오는 참 좋은 문중의 과거 조상 중 엄청난 천재의 DNA가 흙 속에서 물속에서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저와 아내와 아이들 이름이 나오는 족보 券2之(권이지) 7권 824페이지에서 잠들어 있다가 후손의 몸속으로 들어와 세포분열을 일으키면서 그 DNA속에 저장되어 전해온 대단한 지식이 후손에게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혹시 다산 유적지 인근의 후손에게 도착한 다산의 DNA가 시공을 초월하여 후손의 몸속에서 분열을 시작하면 다산의 저서 중 해석하지 못한 부분을 단숨에 설명하는 神童(신동)이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가정을 해보는 것입니다.

 

韓錫琫(한석봉)의 후손이 어느 날 名筆(명필)이 되고 추사 金正喜(김정희)의 자손 중에 더 대단한 文人(문인)이 나타난다는 추론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DNA는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후손이라야 가동된다는 전제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려면 미토콘드리아를 의인화해야 하고 세포를 하나의 자동차로 개조해야 할 것입니다. 땅속에서 돌아다니는 지하수와 지렁이, 달팽이, 두더지 등 눈감고 살아가는 생명체를 사람처럼 표현해야 합니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관객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데는 전문가들의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겠습니다. 의인화나 공상과학적인 내용은 약하면 陳腐(진부)하고 과하게 나가면 공감이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우리의 조상님은 반드시 후손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힘을 쓰시는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열심히 제사를 지내는 집안, 조상님 묘를 잘 모시는 사람들은 사업, 정치, 건강, 화목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효험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재산이 많고 돈이 잘 돌아가서 조상님 묘역을 잘 가꾸기도 하겠지만 잘 모시니 조상님의 蔭德(음덕)으로 사업이 잘되고 자손들도 발전하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반대로 먹고살기에도 힘이 드니 조상님 묘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힘들어도 묘는 잘 가꾸는 후손이 있고 재산이 많아도 관리에 소홀한 자손도 있을 것이겠지요.

그래서 생각하기는 가급적 고향을 떠나지 말고 조상 대대로 살아가는 것이 언젠가 맞이할 영화 터미네이터 같은 조상님과의 만남을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굽은 소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부족한 자식이 종신을 한다 했습니다. 종신이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임종을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종신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정작 평생동안 부모님을 모신 자식이 종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막내딸의 손을 잡고 돌아가시는 순간에 평생 부모님을 모신 장남은 조카들 챙기다가 그만 종신의 기회를 놓친다는 말입니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에 ‘종신자식은 따로 있다’는 말도 하십니다. 그렇게 운명적으로 태어나고 만나고 이별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저도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는 시기가 되었나 봅니다.

 

 

■ 1980년대 관혼상제

경기도청 새마을지도과에서 서무담당으로 근무한 1984년 당시 사무실의 중요 집기는 책상, 의자, 전화기, 그리고 타자기입니다. 복사기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복사지가 부족하고 토너도 비싸서 일단은 아껴야 하는 품목으로 분류합니다. 잘 모셔놓고 필요할 때 최소한 쓰는 것이 공무원의 절약, 근검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협조전은 반드시 먹지를 끼워넣고 타자를 쳐서 결재를 받은 후 발송합니다. 협조전이란 부서간 1:1로 의견을 조회하거나 의견을 회신하는 공직 내부의 문서입니다. 직인이 아니라 부서장인 과장님 서명으로 문서가 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무담당으로 근무하면서 이 문서에 대한 응신을 협조전으로 해야 하나, 일반 문서형식으로 보낼지를 판단하는데 자신감이 붙으면 庶務(서무)를 면하고 다른 부서로 이동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2년 정도 근무한 것이지요.

대부분의 업무를 문서로 운영하던 시절이라 젊은 이가 결혼을 하게 되면 이른바 請牒狀(청첩장)을 돌리게 됩니다.

청첩장은 외부기관이나 친척, 인척에게 집 주소를 적어 보내는 것이고 청내 각 부서에 결혼을 알리는 방법은 16절지 절반 32절지에 타자하여 복사한 후 부서의 문서함에 넣었습니다.

 

과 서무는 문서함에 들어온 결혼 쪽지를 3부 복사하고 과내 게시판에 첨부합니다. 복사한 '결혼쪽지' 3부는 과장님과 주무계장님께 드리고 1장은 서무담당이 보관합니다.

1984년경 쪽지를 받으신 과장님은 싸인펜으로 2, 3이라 쓰시는데 이는 2,000원, 3,000원을 보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에 근무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은 대부분 토요일 12~14시 이므로 오전내내 청내는 결혼식 축의금 봉투가 오가게 됩니다.

전화를 걸어 누구 결혼식에 가는가 묻고 갈 사람이 있으면 그 과로 봉투를 보냅니다. 어떤 경우 겹치면 서무담당들이 청내 중간 복도에서 만나 봉투를 교환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모바일 청첩장도 있고 청내 전자게시판에 결혼식 알림을 게시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2직급 위의 분 명의로 글을 올립니다.

 

새마을지도과에 근무하는 이강석군이 최경화 양과 결혼합니다. 새마을지도과장 이상윤, 새마을계장 이범관, 개발계장 문성제, 교육홍보계장 정언양, 자연보호계장 김진흥. 1985년 11월 9일에 결혼한다는 내용을 타자 쳐서 수 십장 복사를 한 후 각 부서함에 발송하였습니다.

2021년 요즘에는 결혼식 등 관혼상제 통지문에 은행 통장 계좌번호를 倂記(병기)하기도 합니다. 사정상 못 오시는 분들은 부조금, 축하금을 보내시라는 '효율성'이 강조된 신문화입니다.

다만, 이 신문화가 아직도 정착되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효율적이기는 한데 일방적인 청구서로 보이니 말입니다.

절충안으로 동료 직원의 통장번호를 알리고 입금된 내역을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방식도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활성화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계좌번호를 올리기는 아직 쑥스럽고 송구한 마음이라면 결혼식이 있는 그 일주일 동안 해당과 전 직원에게 서무이든 차석이든, 아니면 결혼당사자의 통장번호를 공시하여 고객들의 편익을 증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바입니다.

요즘 결혼식에 5만원내고 4만원 이상의 식사를 하면 결국 본인에게는 1만원 축하한 것이라고 합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5만원 받으면 1만원을 즉석에서 돌려드리던데 이 경우는 0원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한 교통, 거리, 시간 등을 감안하여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부조금만 보낼 수 있는 현대적 편익을 증진해야 할 것입니다.

 

[관혼상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관혼상제는 빠질 수 없는 일들이며,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중요하게 여긴 가정 행사이다.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질서가 완강했던 조선 시대의 관혼상제는 단순한 의례 이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중요시되고 있다.

△ 관례 : 청소년이 머리에 관을 쓰고 성년이 되는 의식으로 주로 양반 계층에서 행해졌다. 오늘날에는 성년의 날이라 하여 갓을 쓰여 주는 대신 장미꽃을 선물하며 어른이 된 것을 축하한다.

△ 혼례 : 결혼식을 말하며 의혼·납채·납폐·친영으로 구분된다. 의혼은 결혼을 의논하는 절차, 납채는 사주 또는 사성(四姓)을 보내는 일, 납폐는 신랑집에서 혼인을 허락한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부집에게 예물을 보내는 절차, 친영은 신랑이 처가로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의례이다. 오늘날에는 전통 혼례 대신 서양식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상례 : 사람이 죽었을 때 장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장례라고도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5일이나 7일 동안 삼베로 지은 상복을 입고 문상을 온 문상객들을 맞는 것 등 장사를 지내는 의례이다. 오늘날에는 병원이나 종교 단체, 장례업체에서 장례를 맡아 주는 등 절차도 간단해졌다.

△ 제례 : 조상을 기리는 제례는 크게 시제(時祭)·차례(茶禮)·묘제(墓祭) 등으로 나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제사도 간소화되고 아예 지내지 않거나 다른 방법으로 지내는 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관혼상제, 冠婚喪祭]

 

■ 늦은 성묘 좋은 만남

설에 가지 못한 성묘를 뒤늦게 다녀왔다. 흩어져 사는 집안 어른들과 일찍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늦은 성묘에 지각했다.

아이들과 함께 출발하느라 행장 꾸리는데 시간을 많이 썼다. 쌍둥이 남매 중 아들은 어제저녁에는 가겠노라 호언을 하였으나 늦잠에 취해 포기 직전까지 갔다가 아빠의 성화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제부터 엄마의 응원 아닌 응원으로 동참 의사가 약했던 딸아이는 아들이 가기로 했다고 하자 잠을 털어내고는 스피디하게 준비를 한다.

딸아이의 아킬레스건은 아들과 똑같이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아직도 바지를 입고 옷도 남자 옷을 입는다. 어쩌다 여자아이들이 많이 입는 옷을 사면 엄마와 실갱이를 하곤 한다.

바로 이점이 강점으로 활용된다. 쌍둥이지만 1분 먼저 태어난 누나인 관계로 아들이 간다고 하자 딸도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세 식구는 베란다에서 아이들을 배웅하는 아내의 인사를 받고 출발하여 시골길을 달렸다. 30년을 오가면서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을 연발하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도시를 처음 구경 올 때 비포장 길을 달리는 붉은색 버스를 타고 관절 마디마디를 뒤흔들며 지나던 길인데 이제는 포장이 잘 되어서 30분 거리로 가까워졌다. 전에는 1시간 반은 걸리던 길이다. 신작로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시간은 족히 걸렸기 때문이다.

동네를 들어서니 어렸을 때 살면서 본 것보다 아주 작아진 앞산과 동네 언덕이 반겨주는 듯 마는 듯 늘 그곳에 있었고 마구잡이 개발로 허리가 잘려나간 산은 붉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그 옆 산도 고속도로가 달려 지나가고 있었다.

선산에 도착하니 조상님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곳에 계셨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 1년을 조상들은 이틀로 사실 것이다.

설에 한번, 추석에 한번 후손들과 짧은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좀 시간이 있는 후손에게는 3일로 사실 것이다. 벌초하러 오는 날이 하루 더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께 성묘를 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말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만큼도 살지 못하셨지만 나에게 있어 그분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

 

특히 어린 시절 膝下(슬하)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은 지금 사회생활에서도 자주 활용하고 있다. 운명이겠지만 아버님이 내 나이 13살이 아니라 20세까지만 함께 하셨다면 지금쯤 나는 무슨 직종에 종사하고 있을까.

이번 성묘에서 달라진 것은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지난해에는 산소 속에서 할아버지가 주무신다고 하더니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산소를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자 이해하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조상님 묘소에 쌓인 낙엽을 긁어내고 나니 참으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분들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얼굴 모르는 조상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다 함께 성묘를 하는데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하면서 신식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성묘를 하면서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생각 조차 못 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좁은 하천에 샘물이 흐르는데 그 둑에 비스듬하게 선 버들강아지가 봄을 머금고 있었다. 몇 줄기 꺾어서 물병에 담아 아이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버지 흉내를 내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이틀만 지나면 봄이 올 거야.”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