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고위 관리가 임명될 무렵이 되면 각 언론에 하마평이 무성하게 오르내린다.
하마평이란 새롭게 관직에 오를 후보들에 대한 세간의 평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하마평의 기원이 재미있다.
예전에는 궁 앞에 모든 관리들이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 군주가 머무는 곳이니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관리들이 내려 궁으로 들어가고 나면 남은 마부들끼리 쑥덕공론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리가 판서가 된다네그려” “예끼 이 사람아! 이번에는 우리 나리 차례야” 등등.
이렇게 하마비 앞에서 이루어진 세평이라고 해서 하마평이란 말이 생겨났다.
이 코너에서는 공무원 인사철을 앞두고 경기도에서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동두천시, 오산시, 남양주시에서 부단체장을 역임한 이강석 전 부시장이 직접 겪은 인사철 에피소드 몇가지 조언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복도통신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요 요즘에 나오는 통신은 참 힘든 내용입니다. 교육을 갈 인원이 몇 명이고 누구누구가 이번 승진에 오르고 내린다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복도통신이기 때문에 정보의 출처에 대한 신뢰수준이 낮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더구나 같은 급의 인사에 대한 복도 통신이야 말로 귀를 종긋하게 만드는 소식이고 들어보면 나름 타당성과 객관성이 보태지는 이야기입니다. 복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는 때로 아주 구체적이고 확실한 정보통의 빨대에 의한 것으로 포장되어 2층과 3층 복도를 넘나들기도 합니다. 오전·오후로 변하는 복도통신은 마치 몇 년전 없어진 중앙신문의 가판과도 같습니다.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판매된 가판에 일단 기사가 올라가면 다른 경쟁사 데스크는 일단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때나 요즘이나 특종은 아니어도 낙종을 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중동, 성동격서의 심정으로 응근히 신경을 쓰는 것은 사실입니다. 복도통신에 당사자가 되면 더더욱 신경을 쓰게 되겠지요. 혹시 그냥 있다가 정말로 그렇게 되면 나만 뒤쳐지는 것 같아 내심 걱정, 좌불안석입니다. 그리고 나서자니 출처 불명의 소문에 민
언론사에 ‘퇴직인사’… 경기테크노파크 이강석 원장 2019년 1월 31일 퇴직하는 이강석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의 '퇴임 인사차‘ 언론사를 방문했다. 퇴직하는 공직자가 언론사에 인사를 오는 것은 의외다. 19세 고졸사원으로 화성 비봉면, 팔탄면에서 공직을 시작한 그는 1981년 경기도청에 전입하여 88년부터 7급 공무원으로 공보관실에서 언론인과 마주했다. 이 원장은 1988년 지방언론이 재점화되는 시기에 공보실에서 경인일보, 경기일보, 기호일보, 인천일보 출입기자들과 당시 7급 공무원으로서는 독학(!)수준으로 공보 현장을 함께 뛰었다. 보도자료 발굴을 위해 도지사실 결재대장을 열람하여 홍보자료를 발굴하고, 결재가 난 도정정책 자료를 시군에 배포하기 위해 인쇄를 하는 '발간실'의 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동장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일선 행정경험을 체득한 이 원장은 다시 1999년부터 도청 공보실에서 7년간 언론관련 사무관으로 일했다. 2008년에는 도의회 공보과장으로, 2011년에는 경기도 언론담당관으로 일했다. 이 원장의 공보부서 근무 총 경력은 11년6개월로 다른 공무원에 비해 길다. 이 원장은 7급, 5급, 4급으로 공보실에 근무했다. 그
2011년은 공직에 있어 격동의 시기입니다. 연초에 전격적으로 언론담당관이 됩니다. 공직에서 공보부서 11년6개월을 채워가는 6개월을 근무하였습니다. 당시에 신문사 유가부수를 측정하는 ABC제도를 바탕으로 상위랭크 언론사만 같이 가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고 그 바탕으로 지금의 경기도청 기자실이 운영되는 줄 압니다. 어찌하는 것이 정답인가는 알 수 없고 알아도 무의미한 역사속의 한 페이지가 되겠습니다만 저의 다짐은 모든 언론이 우리의, 행정의 벗이고 친구이고 후원자이며 응원단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언론은 多多益善(다다익선)입니다. 언론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합니다. 공무원이나 공기관 근무자들이 언론을 어려워하거나 불편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업무를 비판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하지만 공무원, 공기관 임직원, 대기업 홍보실은 늘 독점적 위치에 있다는 점을 대오각성(大悟覺醒)해야 합니다. 我執(아집,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자신만을 내세워 버팀)과 獨善(독선,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의 자세가 아닐런지 근신하고 염려해야 합니다. 좋은 표현으로 경기도가 행하면 표준이 된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런 사례가 많습니다만
경기도 2~3급 인사를 보니 일하는 공무원이 승진한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면 본인도 모르는 사유로 3급 국장에 보임되고, 부단체장으로 발령을 받는다는 경기도청 인사의 진면목을 이번 인사에서도 보여주었습니다. 여성간부의 전진배치도 크게 보이고 비고시의 안배도 있기는 합니다만 과거 도지사의 고시출신 중용의 여파로 그동안 키워온 비고시 과장들은 대부분 공로연수를 생각하는 나이에 이른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공직사회가 무겁게 움직이는 것인가 느낌이 듭니다. 여성간부 중용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바이겠으나 깊이있게 들여다보면 고시출신 공무원 간부는 대부분 남성이어서 비고시 여성간부의 약진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이러한 추세는 공무원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심도있는 분석을 통해 앞으로 5년내 여성공무원의 흐름도를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도정은 주무관과 사무관이 기초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고시출신 간부의 약진은 조직력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고민이 있고, 고시출신 도지사, 부지사, 실장, 국장의 지휘부가 큰 조직을 원활하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비고시의 중용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옛날 어르신 조크중에 "큰 소가 나가면 작은 소가 큰소 자리를 대신한다"고 했고, "생선장수 광주리에서는 큰 생선만 나온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매년 해가 바뀌면 소가 나이를 먹고 일잘하는 소가 물러나면 옆에서 경력을 쌓은 소가 그 일을 대신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다수의 비슷한 생선이 담긴 광주리이지만 가는 집마다 생선장수는 광주리에서 제일 크게 보이는 생선을 집으들면서 흥정을 하게 된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1990년대 경기도청 각 부서의 6급 차석은 "차관"이라 불렀고 그 의미를 풀어보면 "차기에 사무관이 될 공무원"을 의미한다 했습니다. 당시 내무부에서는 시도에 공문을 보내서 함부로 "차관"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문서지시를 한 바가 있습니다. 실제로 전oo선배님은 6급 당시부터 품격이 중후한 분이었습니다. 7급 후배와 함께 내무부가 있었던 광화문 청사13층에서 업무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중 인원이 늘어나 공간이 비좁아졌습니다. 이제 7급 후배가 말했습니다. "차관님! 이쪽으로 서시지요". 불편한 차석을 걱정하여 한 말인데 그 안에 함께 있었던 정부의 국가공무원 다수가 오히려 다른 한편으로 자리를 피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일부 시청발 기사에서 실장, 국장, 과장 인사발령이 보입니다만 다수의 공무원들이 긴장하는 경기도 실국장과 시군의 부단체장 인사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선 상반기 정기인사에 대해 깜깜이 소식이고 경기도공무원노조의 인사발령게시판을 들어보니 4월경에 올라온 명단이 덩그라니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주간단위로 국장발령, 과장발령, 사무관 발령, 주무관 발령으로 이어져서 1개월동안 인사발령을 마무리한 사례가 있습니다만, 요즘 경기도인사는 행정안전부 승인을 받는 과정도 없으니 어느날 전격적으로 발표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더구나 요즘에는 에너지를 아낀다고 발령장을 주지 않고 공문시행으로 대체합니다만 이는 반대해도 좋을 일입니다. 공무원이 부서를 이동하고 조직개편으로 새롭게 일하는 분위기를 일신한다는 의미에서 승진이 아닌 일반 전보의 경우에도 도지사의 직인을 찍은 멋진 발령장을 대상 공무원에게 교부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타시도의 경우에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자에게 주듯이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서 발령을 합니다. 제작단가가 1두루마리당 2만원정도 들었을 것입니다만, 현재 경기도와 시군의 발령장 하드폰 원가는 3천원정도로 추정합니다. 발령대상자는
흔히 철부지란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자를 지칭합니다.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고있다면 계절을 모르는 ‘철부지’인 것입니다. 9급 신규공무원을 지나서 이제 막 공무원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면사무소 직원이 도청 직원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조차도 잘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팔탄면사무소에서 경기도청 소속의 사업소인 농민교육원으로 발령을 받는 상황을 회고해 봅니다. 동동주에 살짝취했다. 면사무소 회의실 장의자에서 널부러져 단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이가 있다. 발로 뻥 차는 느낌이 들었다. 발령이 났단다. 아 1년여 만에 나도 고향인 비봉면으로 가는구나 했다. 도청발령은 생각하지 않는 터였다. 그런데 도청소속의 농민교육원으로 발령이 났다. 도청으로 가기전에 군청에 들러 전출 발령장을 받았다. 요즘에도 가끔 연락하는 이00선배가 내무과에서 대기중인 나에게 다가와서는 큰 소리로 ‘이서기 축하해여!’한다. 이분이 팔탄면 출신인데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축하하는가 묻자 “몰랐나?, 팔탄 출신 이서기가 도청으로 간다네!”했다. 일어서서 수줍게 인사를 하였다. 비봉출신이고 팔탄면에서 1년6개월 근무했다. 경기도청은 팔달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
요즘 공직사회에서 갑질이라는 문제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갑질로 인한 피해는 당장 필드에서 갑질로 어려움을 겪은 이들의 고통이었고, 이를 지적하는 감사부서의 조사와 징계위원회의 논의 과정의 안타까움, 그리고 당사자가 조직으로부터 징계조치를 받은 이후의 긴 시간을 징계의 굴레를 쓰고 감내해야 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갑질에 대한 언론보도는 천인공노할 내용이어서 갑질의 피해가 크다는 생각에 공감을 하곤 했습니다만 조직내에서 논쟁이 되고 위원회에서 검토, 논의되는 갑질의 경우에는 갑질인가 아닌가의 경계선이 참으로 모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일이 갑질이 되는구나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1980년대 공직사회라면 이같은 경우의 일들은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과거 군대에서 밤 12시까지 몽둥이 구타를 당하지 않은 날은 더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했다지요. 사실 과거 공직사회의 모든 사무실에는 한두명 잔소리, 악담을 해대는 사무관 계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공무원들은 마음속으로 "저양반 또 시작이군!!!" 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면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데 게딱지 후펴파듯이 소속의 해당 공무원의 업무행태를 비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1960년대에 농촌에서는 ‘하다 못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붓글씨는 아니어도 펜글씨를 잘 쓰면 면서기로 일하는 시절이었다. 지역의 유지가 면장을 하던 시절에 면장에게 부탁을 하면 글씨를 잘 쓰는가에 큰 비중을 두어 임시로 뽑아 쓰다가 잘 적응하면 이른바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 글씨가 중요한 이유는 타자기 보급전이었고 복사기는 물론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정을 펜글씨로 쓰고 호적등본,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에는 '기재생략'이라는 고무도장이 가득했다. 또한 당시의 호적부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가 바글바글했다. 아들이 분가를 신청해야 호적에 분리되었던 시절이다. 호적등본상 가족이 15명이나 되니 손자손녀 취업서류를 구비하려면 3일전에 예약을 해야했다. 신청을 받은 호적주임이 토요일, 일요일 여유시간에 따로 호적등본을 필사했다. 먹지를 대고 2부를 더 복제했다. 모든 일을 글씨로하니 글씨를 잘쓰면 보다 나은 보직으로 진급했다. 군청 시청과 도청의 공직에서 필체는 중요한 업무능력이었다. 인사계, 기획계, 예산계에는 명필 직원들이 발탁되고 수직승진을 거듭하여 간부가 되고 1992년 지방자치 이전까지 시장군수에 발탁 되었다. 그리고 정
화성군 비봉면사무소에 처음 발령을 받고 만난 분은 안 선배입니다. 선배는 당시 회계담당자로서 이강석과 김OO 서기보가 발령을 받고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군청에서 읍면에 발령대상자를 2~3일 전에 미리 공문으로 알린다는 사실을 당시에 신규공무원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군수님 발령장을 들고가서 인사하면 그제서야 발령사실을 아시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군청 공문이 면사무소에 왔을 것이고 남자 한명과 여성공무원 한 사람이 비봉면사무소에 발령된 것을 알았고 이름도 확인되었으며, 특히 이강석은 비봉면 자안1리 출신이라는 것도 파악되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본면 직원이 대부분이던 시절이니 이번에는 어느 동네에서 공무원이 오는가 하는 것도 궁금한 일이었습니다. 대략 비봉면사무소에는 25명이 근무했는데 23명은 본면 출신이고 인근의 면에서 잠시 발령받고 와서 근무하는 직원은 2명이내였습니다. 얼마후에는 다른 면에서 근무하던 본면 출신 공무원이 복귀하기도 하고 근무 중에 군대를 가거나 타 기관으로 전근을 가기도 했습니다. 안 선배에게 인사를 하고 발령 후 사무실에 출근을 하였고, 훗날 교사로 전공을 찾아간 강 선배의 후임으로 서무담당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무담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