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장 쓰다듬기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출신 이강석

1996년까지 공무원들은 인사발령장을 받는 즉시 청내 모든 사무실로 인사를 다녔습니다.

 

1960년대 시골마을 어르신들이 동네 청년과 아이들의 세배를 받기 위해 집에서 한복 곱게 차려입고 기다렸던 것처럼 청내 과장, 계장님들은 사무실에서 인사발령자의 방문인사를 기다렸습니다.

승진, 전보자들이 인사를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최우선적으로 맞이했으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고 축하의 말을 전했습니다.

 

승진, 전보자들은 과단위로 방문을 하면 우선 그 사무실의 책임자, 부서장인 과장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과장님은 환하게 인사를 받고 축하인사를 건넵니다. 승진, 전보자가 보이는 발령장을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아본 다음에 이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 바닥으로 발령장 위를 쓰다듬은 후에 돌려줍니다.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선배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가 인사 갔을때 과장님이 발령장을 건네 받아 오른손으로 쓰다듬은 후 돌려주시던데요. 왜 그리 하시는 것인가요?”

 

선배가 답했습니다.

 

“그 과장님 마음속에 조만간 군수 승진을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도지사의 직인이 찍힌 발령장을 쓰다듬어서 그 기를 받으려는 것이랍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답입니다. 그러니까 승진발령을 축하하면서 덩달아 자신의 영진영전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오전, 오후 하루종일 발령장을 들고 인사를 다녔습니다. 오후가 되면 흰 종이에 발령사항이 인쇄된 발령장은 본인의 땀에 더하여 인사를 받으신 분들이 주고 받으면서 지문으로 문지르는 바람에 양쪽 귀퉁이가 돌돌 말릴 정도로 습기차고 피부에 찰과상을 입게 됩니다.

 

요즘 발령장은 논문 하드본처럼, 결재판 형식의 값나가는 바인더북에 넣어서 줍니다만 당시에는 그냥 흰 종이에 타자를 치거나 워드 인쇄한 후에 붉은 인주로 도지사, 시장, 군수 직인을 찍어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발령장에는 수백명의 손때와 지문이 담겨있다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99년에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 2년간 근무하고 돌아오니 각과를 다니며 발령사실을 자랑하던 인사전례가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공무원들은 자신의 소속 국단위로만 인사를 했습니다. 업무연결이 많은 같은 국의 과에는 그래도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에는 인사발령후 전부서를 다니는 ‘인사전통’은 사라졌으니 신세대 취향인 것인지 조직내의 아름다운 문화 일부가 사라진 것인지에 대한 각자의 판단이 있을 줄 압니다.

 

그래도, 같은 기관에 근무하는 동료로서 인사발령을 받은 당일만큼은 크게 자랑하는 의미에서도 전 부서를 돌면서 인사를 다니는 새로운 전통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사무실 철문이 두터워지고 개인간에도 파티션이니 OA사무실(office automation, 사무 자동화, 컴퓨터의 정보 처리 시스템에 의한 사무 처리)로 인해서 소통을 막는 장벽이 높아지는 가운데 개인적 성향이 높아지고 있다는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밀레니엄(M)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면서, 아날로그를 경험한 경계 사이에 있는 세대라는 특징을 보인다.)에게 조심스럽게 소통의 한 방식이었던 "인사발령 후 청내 모든 부서 인사 다니기"를 권해보는 바입니다. 

 

발령장을 들고 각과 사무실을 모두 방문해 보면 사무실 배치, 근무 분위기, 다른 부서의 과장, 팀장, 주무관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근무행태나 근무부서의 상황,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파악하게 되는 타산지석, 온고이지신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귀뜸해 드립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경기도민회장학회 감사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