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옴부즈만(Ombudsman)』으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민원을 접하고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무원 조직의 여러부서를 방문하거나 합동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옴부즈만은 스웨덴어로 남의 일을 대신해서 해주는 대리인(Agent)이라는 뜻입니다. 옴부즈만은 시민의 대리인으로 행정에 대한 시민의 고충을 접수하여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를 조사하여 필요한 경우 시정조치 및 의견 표명함으로써 시민과 행정기관 양자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간이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임명된 사람 또는 비사법적 시민권익 보호제도를 말합니다. 중요역할은 시민권리 구제 기능을 수행하는데 △행정의 민주적 통제 기능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 기능 △행정개혁 기능 △갈등해결을 위한 조정 기능입니다. 고충민원이란 △위법·부당한 처분으로 인한 민원 △소극적인 처분으로 인한 민원 △불합리한 행정제도로 주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민원불합리한 행정제도로 불편 또는 부담을 주는 사항에 관한 민원 등입니다. 106만 시민을 모시는 화성특례시는 시청 4층에 옴부즈만 사무실을 설치하고 공직에서 일한 경력자 5명을 위원으로 위촉받아 근무하고 있습니다. 민원을 상담하고자 하는 시민을 직접 방문하거나 화성시홈페이지 시민참여→시민옴부즈
 
								경기도 청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도청의 전신인 경기감영은 한성부 내에 있었다. 청사가 서울시에 있는 것은 도민의 자존심의 문제였을 것이다. 1953년 4월 15일 인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병희 수원유치위원장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요청하였던 바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수원으로 결정되고 1967년에 현재의 청사로 이전했다. 참고로 공사비 15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전 당시 도민은 289만명으로 현재는 1천353만명이니 4.7배가 늘었다. 공무원수도 늘었고 경기북부지역 발전을 위해 의정부에 북부청사를 두고 있다. 경기청사 이전에서 고배를 마신
 
								<외 밭에서 신을 고쳐 매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서 관을 고쳐 쓰지 말라>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이라는 글이 있다. 풀이를 보니 의심받기 쉬운 혐의를 말하며 “외 밭에서 신을 고쳐 매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서 관을 바로잡지 않는다”로 풀이된다. 지난주에 지인과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고향 조상님 묘역에 들러 보살피고 비탈길을 내려오니 밭 뚝에 사과가 탐스럽게 달려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 사과나무가 없었는데 50년이 지나니 풍성하게 붉은 사과를 매단 나무가 멋지게 자리하고 있다. 탐스러운 사과를 직접 볼 기회가 없었으므로 밀착해서 사진을 3컷 찍고 몇 발짝 걸어가서 선채로 인터넷 카페에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오비이락(烏飛梨落)이랄까. 사과밭 주인인 초등 1년 후배가 트럭을 운전해 눈앞에 정차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했다. 정말로 일부러 시간을 맞춰도 이렇게 정확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차 안에서 빼꼼 내다보므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안부를 묻고 차는 떠났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과나무를 잘 키웠다’는 인사말을 했다. 차를 운전해 후배가 떠난 후에 머쓱한 상황이 찾아왔다. 사과나무 아래에 경고문을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차를 좋아해서 호를 다산(茶山)이라 했다. 그런데 다산은 한강을 의미하는 열수(洌水)라는 호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22세에 과거에 장원 합격했다. 혁신군주 정조(1752~1800)는 10살 동생뻘인 정약용을 중용했다. 다산은 정조를 보좌하면서 한강에 배 다리를 건설하고 1793년 31세 나이에 화성을 설계했다. 현재의 경기도청이 자리한 팔달산에 화성을 축성하는 공사를 총괄했다. 다산은 일생 저술에도 힘써 500권을 집필했다. 이중 ‘일표이서’라 불리는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1800년 승하하신 정조대왕, 1801년에 강진으로 귀양가 정치권에서 밀려난 다산=열수 정약용 암행어사. 두 분에게 10년 정도 왕과 신하로서의 역사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다면 조선 후기와 현대에까지 크나큰 발전적 변화와 긍정적 혁신이 있었을 것이다. 다산의 글 중 일부를 소개한다. 병든 아내가 치마를 보내 천 리 밖에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는데 오랜 세월 홍색이 이미 바랜 것을 보니 서글피 노쇠했다는 생각이 드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공조직 과장이 간부회의에서 일을 맡아 오면 부서 직원들의 원성을 받고, 기업의 부장이 이사님 회의에서 프로젝트를 받아오면 능력을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공조직은 주어진 업무를 감당하는 수비적 기능을 수행하고, 기업은 늘 새로운 업무를 통해 생산성, 수익성을 높여야 하는 입장이다. 물론 공무원도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개혁과 개척정신이 있다. 기업은 수익을 추구한다. 제품을 팔아 이익을 남겨야 한다. 기업에서 성과를 내면 성과금을 받는다. 그래서 부장이 일감을 받아오면 부서원들이 환호한다. 공무원은 일을 받아오면 ‘우리 일이 아니’라는 논리전에서 패한 것이니 부서장의 능력을 의심받는다. 그래서 공직사회의 혁신이 어렵다. 공무원의 성과급이나 포상이나 국내외 연수의 기회를 결정하는 일도 성과나 실적, 혁신보다는 ‘균형’에 무게가 실린다. 조선시대 명 재상 황희 선생의 ‘네 말도 맞다, 자네 말도 옳고, 당신 말도 맞네!’라는 이야기를 학창시절에 들었다. 어떤 두 사람의 언쟁을 들으며 양쪽에 모두 옳다고 하자 옆에 있던 아내가 ‘도대체 누가 옳다는 것인가?’ 물으니 아내에게 ‘당신 말도 옳다’했다고 전한다.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받아들인다는 황희 정승의 철학이
 
								천자춘추 필진으로서 마지막 기회인 듯한데 준비된 원고가 두 편이어서 심재홍, 윤세달 도지사님 두 분 소개의 글을 묶어 송고하면서 경기일보 애독자들께 인사드린다. 이는 마치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12부에 나오는 해관(解官)처럼 느껴진다. 관직은 교체되는 것이니 놀라지 말고 연연하지도 말라. 그런 마음으로 졸필(拙筆)을 마감하고자 한다. 제24대 심재홍 도지사는 부지사를 거쳐 인천시장을 하신 후 도지사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본인 소개 글을 찾았다. ‘29세부터 31년간 격동기에 대한민국에서 공직자로 일했다. 육군 헌병장교를 거쳐 38세에 대전시장, 50세에 전북도지사, 56세에 인천직할시장, 그리고 59세에 제24대 경기도지사로 일했다. 1978년 2월부터 1980년 5월까지 경기도 부지사로 일했다. 경기도청 자료실에서 27년 전에 발행한 심재홍 도지사 연설문집을 찾았다. 1992년 4월21일 도지사 취임식에서 지역자치의 확립을 강조했다. 지방자치는 도와 의회가 함께 하는 양 수레바퀴와 같다고 말했다. 1992년 7월6일에는 새질서 새생활 5대 밝은 정신 회복운동을 제창했다. 근면, 도덕, 준법, 신뢰, 절약. 5대 밝은 정신
 
								늘 깔끔한 외모에 샤프한 인상으로 경기도 부지사와 도지사로 일하신 이재창 도지사(1990년 6월~1992년 4월)는 경기도 출신(파주)이어서 임사빈(양주) 도지사 이후 또 한 분의 도 출신 도백으로 환영받았다. 젠틀한 외모만큼 업무처리도 철저하신 분으로서 도지사의 모든 결재서류에는 늘 체크와 수정이 있으므로 담당 사무관들은 항상 신경을 쓰면서 결재를 받았고 결재가 나오면 문서 전체를 살피기도 했다. 여러 부서의 결재서류가 밀리면 비서실에서 한곳에 모아 보자기에 싸서 공관 서재에 올리면 외부출장에서 돌아오신 도지사께서 심야에 결재하였는데 이 경우에는 더욱 수정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고 한다. 공관에서 차분히 서류를 보게 되니 그러할 것이라 당시 공무원들은 추측했다. 이제는 퇴직하셔서 60대 후반이 되신 좋아하는 공직 간부의 1999년 회고. 이재창 지사님의 결재문서가 수정 없이 나왔기에 참 신기한 일이다 싶어서 끝까지 문서를 살펴본바 마지막 장 시군에서 올라온 서류의 오자를 발견하시곤 결재하신 사인펜으로 수정한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김인규 선배의 증언) 이재창 지사는 결재문서에 신경을 쓰심은 물론 결재문서 앞에 붙이는 ‘요지’조차도 관심을 가졌다. 도지
 
								‘임꺽정’, ‘임두목’으로 불린 임사빈 경기도지사(1987. 12 ~ 1990.6)는 중앙(내무부)과 경기도, 그리고 국회에서 큰 활약을 했다. 공무원 말단에서 시작해 도백에 오르고 국회의원을 한 분이니 그 인생은 늘 새로움과 기록의 연속이었다. 경기도 출신 도지사라는 긍정의 평가도 높았다. 2년6개월간 재임한 임사빈 경기도지사는 공직자와 언론의 반대에도 기채를 내서 의왕~과천 유료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맨땅의 헤딩’으로 보였지만 오늘날 ‘수도권 순환도로’로 개칭논의가 활발한 수도권외곽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수원, 의왕과 과천 교통의 중심이 되었고 경기남부~서울~경기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임사빈 도지사는 내무부 근무 시에도 보스형 공직자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공보부서 근무를 하다가 승진해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수많은 내무부 출입기자들이 이분의 방을 들락거리며 기사를 취재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선 굵은 인물로서 늘 큰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일화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토요일 오후에 이른 숙직을 하고 있는데 시ㆍ군에서 정보사항이 들어왔다. 성남시 어느 공원에 도지사가 오셨단다. 혼자서 경기1가1000번 승용차를 운전해서 오셨단
 
								요즘에는 경찰청장이라 부르는 1980년대 치안본부장 출신으로 제20대 경기도지사에 발령된 이해구 도지사. 1984년10월부터 1986년1월까지 경기도지사로 일했다. 1980년 9월에 도지사에 취임한 염보현 도지사도 치안본부장 출신이다. 당시에는 경찰이 내무부장관 소속의 기관이었으므로 치안본부장을 도지사로 발령했다. 이해구 도지사는 안성 출신이다. 제13대 김태경 도지사(1971년6월~1972년6월)가 평택출신으로 최초의 경기도 출신 도지사였고 두 번째로 이해구 도 출신 도지사가 취임한 것이다. 이어서 22대 임사빈 도지사와 25대 윤세달 도지사는 양주 출생이고 23대 이재창 도지사는 파주 출생이다. 이해구 도지사는 화합으로 영광경기, 책임으로 지역안정, 창의로 헌신봉사, 특성 있는 균형개발, 향토애로 문화창달이라는 도정 방침을 정했다. 치안책임자로 일하다가 도지사로 발령되었지만, 하위직 8급 공무원의 느낌에는 지방행정과 중앙행정에 능통한 인물로 보였다. 특히 월례조회에서의 훈시는 연설형태가 아니라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와의 대화 같았다. 취임 초 월례조회에서 어떤 상황을 설명하다가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설명하였다. 행정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면
 
								1978년 봄, 공무원 365일 근무한 어느 날의 기억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엘리트 행정가인 손재식 도지사(1976년 10월~1980년 1월). 요즘도 재난 방송과 뉴스에 나오는 그 유명한 노랑 민방위복을 곱게 다려입는 손재식 도지사가 한해대책 현장 점검에 나섰다. 화성군청과 비봉면사무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리는 장면을 보여 드려야 한단다. 화성시 매송면~비봉면~남양면~마도면~송산면~서신면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비봉면에서는 오전 양수작업을 중단했다. 하천의 모래를 파내고 건수가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도지사님이 오시면 힘차게 퍼 올리겠단다. 중고생을 동원해 양동이로 물을 날라 가뭄에 타 들어가는 못자리에 뿌렸다. 당시 정부는 논농사가 곧 ‘안보적 차원’에서 추진하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 했다. 도지사가 우리 지역을 통과할 예정시간이 임박해지자 공무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도청에서 도지사 차가 출발하면 오산에 있었던 화성군청으로 알려주고 군청 농산과에서는 면사무소로 연락하기로 했다. 면사무소 공무원이 부락당 1대뿐인 이장님집 교환전화를 통해 소식을 듣고 오토바이로 현장에 달려왔다. 당시에는 ‘삐삐’조차 없었다. 경기1가1000번(도지사) 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