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이 1967년 6월23일 서울 정부청사 건너편에서 현재의 이곳 수원 팔달산 중턱에 이사하여 자리한지 51년이 되었다. 1965년 당시에는 수원시도 작은 편이어서 도청사가 인천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시로 갔다면 1981년 광역시 승격으로 행정구역이 분할되면서 또다시 경기도청은 타 지역 신세를 질 뻔 했다. 경기도청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다. 경기도의회 건물은 경기도청 서울청사 시절도 서울 종로구 세종로 76번지에 있었다. 지방의회가 다시 구성되면서 1991년 7월8일 수원시 권선구 인계동 1117번지 문화의전당 내에서 문을 열었다. 의회청사는 1993년 2월11일에 입주했다. 경기도의회 현판은 김영삼 대통령의 친필이다. ‘경기도의회’ 원본은 도의회 사료관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김문수 도지사님이 취임하면서 도청 울타리 철조망을 걷어내고 정문의 철문도 철거하자 했다. 2009년 2월 어느 날 도청과 의회 정문과 후문의 철거현장에 나가서 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 현판을 회수했다. 자칫 철골 고물로 사라질 위기에서 구해내어 경기도의회와 경기도청 관련부서에 전달했다. 철거 이전에 문화재부서에 의견을 전했다. 정문의 2개 문패가 달린
열쇠는 영어로 Key라 불리는데 묵직한 쇳덩어리 자물통을 열어주는 기능을 하며 과거 어르신들은 창고나 곳간을 잠근 후 키를 허리춤에 매달아 권위의 상징으로 여겼다. 어르신들은 이를 ‘쇳대’라고 불렀다. 조직의 중요한 인물을 Key Man이라 부르고 글의 중요 단어를 Key Word라 한다. 요즘 새 차의 열쇠는 과거 디지털형 쇠키가 아니라 그냥 동그란 IT덩어리이다. 이 스마트키는 4차 산업의 시대에 걸맞게 디자인되었으며 주머니나 가방 등에 지니기만 하고도 시동을 걸 수 있는 무선 기능을 갖추고 있다. 동시에 차문을 열고 8초간 서서 기다리면 자동으로 차 트렁크를 열어주기도 한다. 20년 전까지도 사람들은 자동차 키를 손에 들고 다녔다. 자동차 차주임을 자랑하기 위함이다. 여사님들도 핸드폰과 함께 반드시 차키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대화를 하고 차를 마셨다.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자동차 스마트키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냥 주머니 속에 있는 것으로 그 기능을 다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차가 없는 것을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편하게 술 한잔 하고 택시 타고 집에 가는 것이 새로운 로망이 되는 시대다. 1990년대 공직사회에 ‘무두일’이라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사찰에 가서 대웅전을 들여다보고 주변의 사찰 시설을 살펴보면서 관광을 한 후에 1만 원을 내고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친절한 사찰의 보살님은 발원의 샘플을 제시하기도 한다. 가족건강, 취업, 합격, 결혼, 사업성공 등 다양한 소원문구를 적어낸다. 기왓장에 흰 페인트 글씨를 적어냈을 뿐인데 사찰에서는 1만 원을 받으니 참으로 수익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아내와 함께 사찰에 가서 소원을 빌고 기왓장에 몇 가지 바람을 적었다. 세상사 순리대로 살자고 조금은 추상적인 ‘류수부쟁선(流水不爭先)’을 적으면 아내는 그 틈새에 가족건강, 합격기원 등 나름의 구체적인 소원을 추가한다. 4글자를 써도 20자를 적어도 1만 원을 내면 된다. 그런데 이 기왓장과 관련해서 작은 이야기를 한 가지 전하고자 한다. 우선 하고 싶은 말은 사람들은 소원이 적힌 기왓장이 대웅전 지붕은 아니어도 사찰의 어느 건물 지붕에 올려질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최근에 방문한 사찰에서 작은 벽채 공사를 하고 있는데 소원이 적힌 기왓장을 쓰고 있었다. 기왓장을 반으로 잘라서 쓰고 있다. 소원을 적어 올린 기왓장이 지붕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데 반으로
팩스는 1980년대에 모사전송이라 해서 공문서를 우리 사무실 기계를 전화선으로 상대편 기기에 연결해서 문서를 복사해서 전달하는 획기적인 문서발송 수단이었다. 당시로써는 과학적인 일이었고 요즘으로 말하면 자율주행 자동차의 초기단계를 보는 것 같았다. 동시에 같은 청사 내에서 바로 옆 과에 팩스로 문서를 보내는 것을 보고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참 귀찮은 스타일의 직원이라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이 팩스에도 물론 기록지가 있기는 한데 실제로는 문서의 내용까지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 편 몇 번 전화번호를 타고 상대방에게 몇 시에 도착하였다는 정도의 증거만 남는 초기적인 인증시스템이다. 그래서 통상은 팩스를 보내고 받았는가를 전화해서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장황하게 팩스에 대한 사전 설명을 하는 이유가 있다. 개인 일로 신청한 일이 다른 업무와 중첩되면서 잠시 유보를 해야 할 상황이므로 그 내용을 적은 신청서를 팩스로 보냈다. 그리고 3일이 지났다. 혼자 상상했다. 아마도 그 기관의 팩스기에 이곳저곳에서 보내는 홍보전단지 등에 나의 서류가 섞이면서 이면지 함으로 직행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원본을 다시 뽑아서 빠른 등기우편으로
호텔이나 컨벤션에서 열리는 조찬모임, 강연회에 가면 홀 한편에 옷걸이가 있어서 웃옷이나 코트를 걸어두고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남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옷걸이는 주최 측이 마련한 최상의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고 이처럼 배려 깊은 준비한 콘퍼런스에 온 것이 자랑스러워 가슴 뿌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행사장 한켠에 가로세로 50cm 정도의 개인 금고를 행사장 규모에 따라 20~50개 정도 설치했으면 한다. 행사에 참가하는 여성 모두는 귀중품이 들어 있고 그 자체가 명품이고 귀중품인 핸드백을 둘 곳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행사장이나 공공장소에서 옆 사람에게 맡기기도 부담스러운 소중한 가방을 개인 금고에 넣고 비밀번호로 잠그거나 나만의 열쇠를 준다면 참으로 깔끔하고 기분이 좋을 것이다. 호텔 방안 개인 금고처럼 행사장에도 귀중품을 넣고 나만의 비밀번호를 설정할 수 있는 캐비닛이 있다면 이용자의 마음이 행복할 것이고 그 시설이나 호텔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영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에 여러 날치과를 다니고 있다. 지난해 여름에 개업한 이 치과의 대기실 한편에는 개인 옷장이 있다. 외투와 가방, 핸드폰을 넣고 잠근 후에 키를내 손
치과진료를 받고 있다. 어금니 골절로 1/3쯤 갈아내고 그 위에 덧씌우기를 한다. 신경치료를 4번 받았다. 어금니의 뿌리와 몸속에 연결된 신경을 끊어내고 녹여 없앴으므로 실금으로 인한 치아 통증은 사라졌다. 그 위에 임시치아를 붙이고 일주일을 지내고 치과에 갔다. 이리저리 작업을 한 후에 의치를 올렸는데 치아는 잘 맞았지만 입 안쪽 잇몸과 어금니에서 작은 틈새가 느껴진다. 수많은 치과 진료를 해오신 원장님은 즉석에서 혀끝의 불편한 느낌이 있을 것이라면서 일주일 후에 다시 맞춰보잔다. 일주일간 더 불편함을 드려서 죄송하다 하신다. 눈 가리고 누워있는 사람에게 사과를 하셨지만 입을 크게 벌린 상태라서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냈다. 새로 주문한 주물 의치는 아마도 어금니 아래쪽의 잇몸과 만나는 부분을 좀 더 길게 하고자 치아 부분을 더 절삭했다. 혀에는 눈이 없지만 눈 이상으로 정확한 구조물 판단 능력이 있다. 오죽하면 부하나 동료를 평가할 때 ‘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의 치아도 예민하다. 입안을 둥글게 차지하는 성곽처럼 우직한 치아인 듯 보이지만 치아도 혀만큼 예민하다. 갈아내서 작아진 어금니를 일주일 이상 그대로 두면 자신의 역할이 없어졌다 생
언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언론사의 광고는 곧 생명과 같다. 신문사나 방송사가 광고 없이는 운영이 어렵다. 광고가 없으면 언론도 없다. 공영방송 KBS도 협찬이라는 형식의 사실상 광고가 있다. 신문사는 매일 수십 건의 광고를 실어야 하는데 광고주는 신문사 광고국에 전화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광고가 잘되는 신문사 광고부장은 광고주를 피해 다니고 잘 안되는 신문사 광고부장은 광고주를 따라다닌다는 말이 있다. 기업으로서는 제품이 잘 팔리라고 광고를 싣지만 어떤 경우에는 영업실적을 올리기 위해 광고를 내는 경우도 있다. 광고효과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번 광고가 얼마만큼 매출에 효과를 올렸는지를 평가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언론사는 늘 자기 독자와 시청자를 자랑하지만, 광고주는 그만큼 인정하는 눈치가 아닌 듯 보인다. 그래서 광고를 내는 광고주가 나서기보다는 광고매체인 신문사가 광고에 앞장서는 경우가 있다. 우리 신문사에 광고를 내면 효과가 높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방법은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앞서 말한 대로 광고효과가 그 신문사의 파워에 의한 것인가를 상호 간에 증명할 방법이 적다. 1999년 이전에는 공고를 내는 것이 행정기관 광고의 전부였다.
1966년경에 아랫마을 전기 방앗간 3선 동력 전선에서 110v 전기를 뽑아내서 50촉짜리 전구를 켜면 2㎞ 떨어진 윗마을에서도 주변의 건물이 환하게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문명의 상징이라 할 전기가 밝기도 하지만 어려서는 지금보다 시력이 더 좋았을 것이고 공기 중 미세먼지가 적어 청명하였기에 멀리서도 잘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설극장 영화가 상영된다는 방송을 들은 동네 젊은이들은 저마다 쌀 반 말을 가슴에 안고 나방이 불빛에 몰려들 듯 천막 영화관을 행해 달려간다. 가는 길 사거리 가게에서 쌀을 돈으로 사서 지전과 동전을 꼭 쥐고 뛰어간다. 쌀을 주고 돈을 받으면서 ‘쌀을 산다’고 하고 돈을 주고 쌀을 받으면서 ‘쌀을 팔아온다’는 역설적 표현은 농경문화의 자존심이라고 한다. 그러니 쌀을 사면 내 손에는 돈이 들어온다. 그 돈으로 영화표를 산다. 고모는 어린 조카를 오버코트 속에 숨겨 극장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기도 아저씨는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영화가 끝나면 추첨으로 이어지는데 내 손의 표와 같은 번호가 적인 짝표가 저 추첨함 안에 들어 있다. 늦은 시간 길가의 긴 풀잎새에 이슬이 맺힐 때까지 우리는 추첨을 기다리고 결국 바가지 1개를 탄 동네
경기테크노파크는 도내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공기관이다. 경기도와 안산시, 그리고 정부에서 투자했다. 안산시 상록구 해안로 한양대학교 캠퍼스 후문 쪽에 있으며 중소기업 제조업 본사가 입주한 10층 높이 기술고도화동을 비롯하여 6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도내 중소기업의 현장기술을 통한 기술 고도화, 즉 기술닥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도내 중소, 중견 제조 기업을 대상으로 1단계 현장 애로 기술 지원, 2단계 중기 애로기술 지원, 3단계 상용화를 지원한다. 그리고 전주기적 문제해결 지원책으로 시험분석, 설계, 시뮬레이션 등을 지원한다.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해 333원칙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기업에서 기술 지원을 요청하면 3일 이내에 3명의 전문가가 3번 현장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간소한 신청절차, 신속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비 35억 원을 지원받았고 시군에서 24억 원을 매칭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테크노파크는 경기도 지식재산 전담기관으로서 유망 중소기업을 3년간 집중 지원하는 IP스타기업육성, 창업기업에 대한 지식재산 역량강화를 위한 IP 창업존과 IP 디딤돌사업,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글로벌히트 상품을 목표로 하는 특허·브랜
정말로 꿈을 기록할 수 있다면 참으로 재미있을 것이고 작가에게는 소재가 될 것이며 청소년들에게는 미래의 希望峯(희망봉)이 될 것이다. 초등학교 1~2학년 쯤에 동내 뒷동산 풀밭에서 깔끔하고 큼직한 하모니카를 습득하였다. 그 하모니카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지금쯤 전국은 아니어도 지방의 작은 음악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공무원 39년 재직 후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음악과 인연이 조금 부족했나보다. 그날 홀로 산책을 하다가 동네 언덕 잔디밭에서 하모니카를 拾得(습득)했으므로 어린 마음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소독을 한다고 라면 끓이듯이 물에 삶아 버린 것이다. 문제의 하모니카 외부는 철제로 만들어졌지만 그 속의 공기를 통과시켜 소리를 조율하는 다양한 크기의 셀들은 플라스틱이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펄펄 끓는 100도가 넘었을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플라스틱 부분이 여름날 초콜릿처럼 쭉 늘어져 밖으로 나와 버렸다. 결국 하모니카는 폐기됐고 어린 한국판 모차르트의 꿈은 녹아내린 하모니카 플라스틱 셀처럼, 여울목의 泡沫(포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음악가로서의 길을 가지 못했고 사연을 反芻(반추) 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