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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관#대변인

공보관#대변인 전 경기도청 언론담당 이강석 언론에 장문의 글을 쓰고자 한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보관’, 즉 대변인이라는 직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첫 번 소재로 삼고 싶었다. 1999~2007년까지 경기도청에서 근무하신 여섯명 공보관 또는 대변인에 대한 이야기다. 1999년에 처음 아웃소싱 공보관을 만났다. 당시에는 별정직 4급 공무원이다. 중앙에서 언론이나 언론홍보에 근무한 경력이 짱짱한 분들이 채용되었다. 그동안 공조직 안에서 상하좌우 짜임새있는 근무 틀에 익숙한 분들과 근무해 왔는데 이분들은 파격적이었다. 민간에서 경험한 바를 행정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화재현장에 택시타고 달려가는 열정을 배웠다. 도정에서 언론관련 사건이 뜸해지면 금연에서 발생하는 '금단현상'을 겪는다고 했다. 공보관실#대변인실은 늘 언론관련 사건들이 줄지어 들어서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다. 민간에서, 정치에서, 행정 밖에서 행정을 콘트롤하는 황소의 고삐조차 없는 무중력의 정치적 공간에서 날아 다니시던 분이 행정, 도정이라는 고삐에 묶이고 공보관, 대변인이란 공인명함을 들고 일하시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분들을 제대로 잘 보좌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은 행정시스템을 민간기업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당시 민간출신 공보관은 자신의 소속 직원에게 公私(공사)간 무슨 지시를 내려도 수행하는 줄 알았다. 공보관실 소관 예산도 마음대로 쉽게 편하게 마구잡이로 집행하는 줄 알았다. 공보관실은 경기도청 조직안에 계약으로 들어온 홍보대행사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그리고 공보관을 마치면서 이럴거면 왜 나에게 공보관을 하라고 했는가 우리에게 반문했다. 결국 공보관을 보좌하는 업무담당자로서 통제와 규제자 역할만 했다. 조선시대 신하가 되어 ‘殿下(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만 무한 반복했다.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공보관의 활동에 제동만 걸었다. 하지만 콩나물은 자랐다. 물을 주면 줄줄 새는 것 같지만 검은 천속의 노랑콩이 뿌리를 내리고 콩나물 줄기를 매몰차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언제 어느순간부터 반대자가 스스로가 역동적인 공보관을 닮아가고 있었다. 혁신작업은 쉽게 성과를 보이지 못하지만 어렵게 출발해도 출발만 하면 변화의 가속도는 점점 더 가속된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홍보에 대한 철학이 쌓였다. 과거의 홍보전략에서 조금은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자부했다. 고정관념을 탈피한 것이 광고였다. 그냥 보면 광고효과도 홍보성과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쌓인다. 그래서 모든 행정기관이 公報(공보)만 하다 廣告(광고)를 하고 광고협력사업을 한다. 사실 행정기관의 공보관은 광고관이다. 대변인도 기업으로 치면 광고담당 상무이사다. 공보관실에서 홍보팀장으로 4년간 일하다가 언론담당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아슬아슬하다. 내부에서는 언론담당으로 추천했지만 도청출입 원로언론인들이 단칼에 거부했다. 언론인들의 거부이유는 '(이강석 팀장은) 말이 많아서 언론담당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7급 때도 말이 많다고 도지사 수행비서 후보에서 1차 탈락했었다. 당시 손학규 도지사는 대변인과 언론담당은 기자실의 추천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언론담당은 본인이 간다고 가는 자리가 아니고 안 간다고 못가는 자리 또한 아니었다.’ 기자들이 원하는 사무관은 본인이 固辭(고사)했단다. 결국 원로 언론인들의 추천으로 2003년 3월 3일 오후 3시에 언론담당 발령을 받았다. 언론담당으로 일하면서 여러 공보관의 홍보전략을 배웠다. 언론인들에게 정보와 첩보가 있음을 알았다. 기사 쓰기보다 정보보고에 열을 올린다는 사실도 들었다. 공무원들이 모르는 홍보전략이 많다는 점을 깨달았다. 적극적인 홍보전략, 새로운 홍보패턴을 배웠다. 답답한 기자실을 개방형으로 바꿨다. 공보관의 강력한 추진방침에 따라 기자실 입구의 숨어있는 공간을 찾아내어 브리핑룸을 설치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전략을 발휘하는 공보관, 대변인을 만나서 홍보업무에 대한 수련의 기회가 이어졌다. 언론인 틈새에서 단련된 변화와 혁신은 이후 공직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기자 3명의 이야기를 듣고 분석하면 답이 나온다. 三人成虎(삼인성호)도 가능하다. 언론인을 어려워하는 공무원 조직안에서 몇 안되는 親言論(친언론) 공무원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 공보실 직원을 고생시키고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주어서 ‘행정적 고정맨’을 홍보맨으로 단련시켜준 경기도청 역대 공보관님들이 많이 그립다.

수원#화성#광교#박물관

수원#화성#광교#박물관 (전)남양주시 부시장 이강석 수원시의 문화사업으로 카톡방에 시를 소개하는 이색 프로그램에 접속되었습니다. 시에서 보내준 파일에 연결하니 숲의 파티 수원, 수원시립미술관, 아쿠아플라넷 광교, 오산버드파크, 의왕레일바이크를 소개하는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을 보고 부부가 날을 잡아 1일 3박물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사실 세계적인 박물관은 6개월을 다녀도 관람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수원시 3개 박물관을 하루에 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료관람이니 서둘러서 하루동안에 일단 돌아보고 나중에 시간을 내서 차분하게 정중하게 방문하고 관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은 경기남부경찰청과 경기대학교 기숙사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탈면 입구를 올라가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드넓은 초록의 공간이 나옵니다. 수원시의 역사와 문화, 한국의 서예사를 한준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수원의 행정책임자의 공적을 기념하는 선정비 27기가 한 줄로 서서 방문객에게 인사를 합니다. 어린이 체험실과 자료실, 북카페 '여민동락'이 어린이 시민을 반기고 있습니다. 역사관에는 1960년대 수원의 거리가 재현되어 있습니다. 서예관에서는 영조, 정조의 어필을 비롯하여 김수증, 박태유, 유순, 김정희 등 조선 명필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야외전시에는 고인돌, 석관묘와 함께 문중에서 기증한 마애불, 묘지석, 기념비, 망주석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중입니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은 조선의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건설한 수원화성의 아름다움과 우수성,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의 꿈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정신을 알리기 위해 만든 전문박물관입니다.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된 수원의 읍성인 화성이 바로 박물관일 수 있으며 그 안에 자료를 집대성한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화성축성실에서는 수원화성의 축성과정을 보여주고 화성행차시에 정조가 입었던 갑옷을 재현했고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그리고 '화성성역의궤' 등 수원화성 축성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성문화실에는 혜경궁홍씨를 위한 정조의 장대한 을묘년(1795년)수원행차, 정조의 충신 번암 채제공, 군사개혁의 핵심인 장용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조의 효심과 수원백성들에 대한 애민정신, 그리고 정조의 개혁정치를 가장 충실히 수행한 채제공 관련 유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조의 초상화 제작을 담당한 이명기가 그린 채제공 사복본 초상화는 보물로 지정받은 중요한 유물이며 왕권과 군사력 강화를 위해 창설된 장용영 군사들의 무기와 무예자료를 통해 수원 화성의 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원광교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은 광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광교역사문화실과 수원시에 유물을 기증해 주신 분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소강 민관식실, 사운 이종학실, 어린이 체험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회의원, 문교부장관,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한 소강 민관식(1918~2006)회장님이 기증한 정치, 사회, 문화, 체육의 다방면에 걸친 각종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신분증, 여권, 기차표를 보았고 대통령 취임후 만찬 메뉴표에 유명 정치인의 서명을 받은 자료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운 이종학 실에는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한 사료수집과 연구에 평생을 바친 역사학자 이종학(1927~2002)선생이 기증한 조선시대 고서, 고문서, 고지도와 금강산, 독도관련 자료, 일제 강점기 자료, 고향인 수원관련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고 익힌 민족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신 빌딩이 가득한 수원시의 화성의 옛 모습을 보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 참으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팔달문 주변의 비포장 도로에 트럭 한 대가 찍힌 사진을 보았습니다.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초가집과 판자집에 둘러싸인 사진이 있습니다. 화서문 밖에는 온통 논바닥이 바다처럼 밀려드는 사진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수원화성의 성은 지금의 모습입니다. 초가집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화성의 지붕과 웅장함은 변한 바가 없으며 오히려 초가집 가운데 우뚝한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조선시대의 역사의 중심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走馬看山(주마간산)으로 스쳐가듯 바라본 수원의 역사이지만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을 돌아본 오늘에서야 수원시민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2년을 화성시에 살았고 이후부터 오늘까지 수원에 살면서 여러번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시장 선거에 투표를 했지만 오늘 3곳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수원시민으로서의 자긍심, 자부심을 한가득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화의 힘인가 생각합니다. 시민에게 시민정신을 품게하는 시책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중에서 단연 文化(문화)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사업 중에서도 역사를 이어가는 박물관의 내실있는 운영을 통해 시민을 하나 되게 하는 힘을 키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가 3개 박물관을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뉴스폼 이야기

뉴스폼에 창간 축사를 올린 이강석입니다. 이처럼 소중하고 멋진 인터넷 신문에 창간축사를 하게 된 것은 큰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고 새롭게 출범하는 뉴스폼의 기사와 각종 자료들이 더더욱 폼나게 편집되고 네티즌,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가득입니다. 특히 자칭 부장이라 칭하는 김영준 사장님은 언론계의 중진이고 특히 기사작성은 물론 편집의 귀재입니다. 종이신문의 편집을 통해 다져진 저력으로 인터넷 신문의 새로운 편집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단 뉴스폼에 들어오면 기사가 짜임새있게 벽돌처럼 깔끔하게 배치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핵심을 짚어내는 카드뉴스를 통해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를 한큐에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저의 공직경험을 담은 동영상이 유트부에 올랐고 이곳 뉴스폼에도 한가운데 커다란 화면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얼굴의 주름만큼이나 긴 세월공안 공무원을 하면서 듣고 느끼고 경험한 이야기를 나눠서 차분히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뉴스폼 김영준 부장급 사장님, 사장급 부장님의 언론전문가로서의 실력을 무한의 공간 인터넷을 통해서 돛대 빵빵하게 대양을 향하는 요트처럼 풍성하게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주변의 지인은 물론 경기도민 시민 모두의 더 큰 격려를 부탁드리고 전국을 향해 나가는 뉴스폼 인터넷 신문으로 거듭나기를 축원드립니다. 이강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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