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9급 이야기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출신 이강석

 

 

흔히 철부지란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자를 지칭합니다.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고있다면 계절을 모르는 ‘철부지’인 것입니다. 9급 신규공무원을 지나서 이제 막 공무원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면사무소 직원이 도청 직원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조차도 잘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팔탄면사무소에서 경기도청 소속의 사업소인 농민교육원으로 발령을 받는 상황을 회고해 봅니다.

 

동동주에 살짝취했다. 면사무소 회의실 장의자에서 널부러져 단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이가 있다. 발로 뻥 차는 느낌이 들었다. 발령이 났단다. 아 1년여 만에 나도 고향인 비봉면으로 가는구나 했다. 도청발령은 생각하지 않는 터였다. 그런데 도청소속의 농민교육원으로 발령이 났다.

 

도청으로 가기전에 군청에 들러 전출 발령장을 받았다. 요즘에도 가끔 연락하는 이00선배가 내무과에서 대기중인 나에게 다가와서는 큰 소리로 ‘이서기 축하해여!’한다. 이분이 팔탄면 출신인데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축하하는가 묻자 “몰랐나?, 팔탄 출신 이서기가 도청으로 간다네!”했다. 일어서서 수줍게 인사를 하였다. 비봉출신이고 팔탄면에서 1년6개월 근무했다.

 

경기도청은 팔달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령받은 곳은 농민교육원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가 별로 없는데 선배에게 물으니 병점에서 2km 들어가면 농촌진흥원이 있고 그 안에 같이 있는 것이 농민교육원이란다.

 

이틀 전에 도청 발령소식을 듣고 기뻐하신 분은 두 번째 총무계장이시다. 라00계장님은 산업계장으로 계시다가 잠시 총무계장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면사무소는 장기근속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농업직이지만 잠시 총무계장으로 보임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 회계업무를 배운 터라 전임 계장님때처럼 지휘를 받기보다는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라계장님께 회계결재용 도장을 새겨 드렸는데 어린 회계담당이 계장용 도장을 새겨온 것에 대해 대견해 하시는 것 같았다.

 

한자로 새겼는데 획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며 즐거워 하셨고 처음으로 회계문서에 결재를 하시면서 “이거 도장이 약간 부면장 쪽으로 간 것 아닌가?”하시는데 그 의미는 본인이 총무계장이 된 것이 기쁘고 회계문서에 결재를 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기분을 전해 주었다.

 

왜 사람들이 뭔가에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가 남의 일이라도 약간은 느껴지는 것 아니겠는가? 잘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도 그 사람의 화장품 냄새를 느끼고 때로는 무슨 이름모를 향수를 뿌렸음을 알게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계장님은 면 소재지 식당에서 송별식을 열고 잔을 권하면서 도청에 대해 아시는 바를 모두 털어내 말씀하셨다. 그중 지금도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모두 퇴직하셨지만 공직내내 기억하고 만나고 느끼고 그랬다.

 

한분은 이재과에 근무하였던 남00선배이고 다른 이는 당시 정화상황실에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홍00선배이시다. 홍선배는 훗날 만나서 인사드렸고 남선배는 발령받는 날 미리가서 인사를 했다. 3층으로 기억되는 도청 구관건물(1967년 준공당시 본건물)에서 만났는데 긴장한 나는 ‘팔탄면사무소에서 온 이강석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남선배는 나를 위아래로 훝어보더니 ‘당신이 이강석이구먼’하면서 수첩을 여는데 몇 명의 명단이 보이고 그 속에 [이강석 →농민교육원]이라고 적혀있는 것 아닌가. 당시에는 발령 1-3일전에 청내방송으로 소위 ‘나발’(인사발령내용을 청내방송으로 알리는 일)을 불었는데 시골 면사무소에서 올라온 나는 남선배가 인사부서에서 화성출신 인사들 명단을 빼온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분을 잘 모셔야 공무원으로 출세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어르신 후임으로 1996년에 사무관자리에 가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수원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그리고 농민교육원을 가자했더니 모른다고 해서 다시 다른 택시를 잡아 농촌진흥원을 말하니 안다고 했다. 도청직원으로서의 근무가 시작된 것이다. 1981년 8월10일이 그날이다.

 

농민교육원은 4개의 계가 있었다. 지금은 도립직업전문학교의 일부가 된 농민교육원에는 서무계, 교학계, 새마을교육계, 영농교육계가 있고 계장은 모두 6급이고 원장은 4급이며 내가 배속받은 새마을교육계에는 6급 계장과 9급 3명, 그리고 무보직 6급 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농민교육원의 규모는 꼭 면사무소 크기인데 업무는 새마을 교육과 영농기계교육이 대부분이고 가끔 도청이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주문형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내 업무는 교육을 받은 이들의 수료소감을 정리하여 원장님께 결재를 받는 일이었다.

 

사실 1981년 8월1일, 그러니까 도청발령 10일전에 화성군수님이 나를 8급으로 승진시켰다. 발령이라는 것이 문서사송을 통해 군청에서 보내온 발령장을 면장님이 주시는 것이다. 평생에 처음 승진을 하니 참 기분이 좋았다.

 

당시에 아는 것은 발령초 1년간 시보발령이 있는데 이 기간 중에 일을 못하거나 잘못을 하면 이유없이 해직된다고 했다. 선배들, 특히 인사부서 공무원들은 동료 후배 공무원의 공무원으로서의 자격과 권리를 전수하기 보다는 규제중심의 통제에 힘을 쓴 것 같다. 그것은 당시의 행정업무가 중앙집권적인 상황에서 집행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시보라는 것이 약간 미완성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방행정서기로 ‘보’자가 떨어지니 좀 높아졌다는 느낌도 오는 것이 아주 좋았다. 그 기분을 살려 매번 받는 한 20장이 넘는 발령장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정리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런데 도청 전입발령시 다시 9급이 되었다. 흔히 말하는 ‘降任’이 아니고 동일자 취소된 것이다. 도청과 군청의 인사실무자간에 조정협의보다는 도청 담당자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농민교육원 그 자리는 8급이 보임되는 자리다. 8급자리가 있었지만 다시 9급으로 보임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30년전 인사담당자를 탓할 일은 아니다. 원칙대로 일한 것을 책망할 일 아니다. 그리고 고마운 일은 1982년 2월1일 번개처럼 다시 8급으로 승진하였다. 도청에서 9급으로 시작하여 8급에 승진한 것이니 명분도 있고 훗날에도 나는 도청에서 잔뼈를 키웠노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부지 9급 공무원의 도청이야기는 이처럼 잡초처럼 시작되었다. 하지만 작은 씨앗에서 큰 작물이 자라고 나뭇가지 잘라서 삼목(揷木, 식물의 가지, 줄기, 잎 따위를 자르거나 꺾어 흙 속에 꽂아 뿌리 내리게 하는 일)이라며 심은 것이 50년 후에 거목이 되는 것과 같이 공직의 시작은 작아 보이나 공무원의 마무리는 거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바이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경기도민회장학회 감사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