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국토방위를 위하여 연일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번 수해복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국방부장관님 이하 장병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경기도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 이강석입니다. 지난 8월6일(1998년) 침수도 동 전체의 90%이상이 수해를 당하여 동민 모두가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고 자칫 실의에 빠져들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너무나 중요해 평소 잊고 있었던 우리의 군이 있었습니다. 침수이후에도 폭우가 계속되면서 며칠 새벽을 동두천시 신천둑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아침의 태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른아침 도착한 우리 군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불빛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방부장관님! 우리의 군인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병사, 하사관, 위반, 영관 등 모두가 수해복구에 쏟은 정열은 폭우와 강풍, 번개와 진동을 잠재웠던, 10여일 만에 길을 뚫고 골목의 아스팔트를 찾아내고 할머니의 안경과 아이들의 인형을 돌려주었으며 수재민의 아픈 가슴속에 재활의 푸른 새싹을 피워냈습니다. 주민이 건네는 음료수
1984년경 경기도청 발간실은 기계음과 종이 돌아가는 소리가 겹쳐나오는 한편의 오케스트라 또는 오페라였다. 하지만 요즘 발간실은 대부분이 기계화되었고 장비도 발전해서인지 클래식처럼 조용하다. 그래서 25년전 경기도청 발간실의 모습을 청사진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발간실의 주 기능은 갱지에 공문서를 인쇄하는 일과 각종 회의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선 36개 시군에 보낼 문서를 인쇄하여야 하는데 공문서 표지는 각 부서의 문서시행 담당자가 청색의 원단에 타자를 해서 가져온다. 사실 초기에는 가리방과 타자가 공존했는데 일본어인 듯 한 가리방은 말미에 언급했다. 우선 청색 타자 원단에는 미세한 그물망 같은 것이 있고 양초성분의 막이 있는데 여기에 타자를 하면 글씨가 새겨지고 인쇄 잉크를 문지르면 갱지 위에 글씨가 새겨지는 것이다. 요즘 말하면 실크인쇄 원리와 비슷하다. 그리고 첨부되는 지침서, 회의서류 등은 발간실에서 청타를 찍어 교정을 본 후 인쇄를 거친다. 청타는 앞의 공문서 작성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데 글씨체가 타자체와 다르다. 인쇄활자를 찾아서 신문처럼 찍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서류는 오늘날의 인쇄체와 비슷한 것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1960년대 초등학교 운동회는 지역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다했다. 가장 높은 국기대에 태극기가 걸리고 만국기가 휘날리는 가을운동회. 국민학생 200명, 동네주민 300명이 모여들어 청군백군을 연호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동네청년, 처녀총각들이 모두 모였다. 사실 어린이 운동회이면서 부락 체육대회가 열리는 것이다. 물기가 흐르는 대형 축전지에 연결된 마이크 소리가 신기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축전지가 떨어지기 전에 다른 축전지를 등에 지고 읍내까지 가서 충전해 오시는 소사 아저씨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발틀을 밟아가며 연주하는 풍금소리, 축전지로 돌리는 검정 레코드판에서 나오는 행진곡이 운동회 음향이고 나머지는 사람들의 함성, 발자국 소리, 농악소리. 아침 9시. 구불구불한 논길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든다. 태극문양을 연상하게 하는 모자는 청색과 백색천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흰색으로 쓰면 청군, 백식으로 쓰면 백군이다. 청군백군은 아주 오랫동안 전통을 이어온 대진표다. 먼저 청군과 백군이 양쪽에서 입장하면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을 맞이하여...로 시작된 말씀은 승패를 떠나 스포츠 정신을 살리자는 말씀으로
1977년 9급(당시 5급을류)공무원의 월급은 쌀 2가마니 값이었다. 당시 상머슴은 쌀 12가마니를 받았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12가마를 받는 머슴이나 제집에서 다니고 24가마니를 받는 공무원이나 대우는 비슷했다. 그래서 공무원을 말할 때 공복이라고도 하고 머슴이라고 칭했을까? 하지만 공무원의 강점은 호봉과 승진에 있다. 머슴은 소를 부리는 일을 하면 12가마이고 그보다 못하면 10가마, 8가마, 5가마 등 차등이 있었지만 공무원은 24가마로 시작해서 매년 호봉이 늘고 승진하면 봉급이 올랐으니 말이다. 이제 연봉 5천만원이면 쌀 한가마 20만원을 쳐서 월평균 20가마 이상을 받으니 참으로 대단한 처우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공무원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엥겔계수가 점점 작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비, 문화비, 경조비 등 부수적인 지출이 많아서일 것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공무원들에 대한 국민의 인식속에는 ‘부수입’이라는 공식적인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공무원들은 무엇인가 추가되는 수입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공무원 봉급이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다. 보너스라는 것이 매 분기 1회씩 주어지고 정근수당이 1년에 2번 주어졌으며 복리
1970년초 시골 초등학교의 가을소풍은 낭만이 있었다. 어른들은 소풍을 ‘원족’이라고 했다. 소풍 필수품은 나무도시락, 나무젖가락, 찐계란, 코카콜라였다. 특히 코카콜라는 돈푼이나 있는 집 아이들에게만 주어지는 소품이었다. 소풍날 아침.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점심과 음료(대부분 물이지만)를 준비하여 학교로 향한다. 그리 소풍가는 곳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일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어떤 학생은 자신의 집뒤에 있는 절로 소풍을 가면서 일부러 학교까지 갔다가 다시 집 근처 소풍장소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당시의 선생님들은 소풍장소 근처에 사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적었다. 무조건 학교에 와서 인원파악하고 다시 소풍장소로 출발했다. 있는집 아이들이 가지고 온 콜라 한병은 그반 아이들 모두에게 고른 혜택이 주어진다. 일단 어렵사리 뚜껑을 따고 콜라주인이 한모금 마시고 나면 친한 친구부터 한모금씩 마시게 되고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눈초리는 병을 거꾸로 들고 마시는 아이의 입보다는 병안에 남아있는 콜라의 양에 관심이 높다. 저렇게 줄다가 ‘뒷 순서’에 있는 나에게 한 모금, 한 방울이 돌아올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학생에게는 콜라방울이
아마도 공무원의 여관작업은 1990년 초까지 이어진 것 같다. 남녀 공무원들이 여관의 한방에서 낮에는 물론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일하고 인근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작업하는 강행군이었다. 한번 여관작업이 시작되면 1주일에서 10일정도 걸리고 때로는 2-3일에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었고 처음에는 30여명이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304명이 남아서 최종 정리를 한다. 그리고 이중 대표선수는 중앙작업에 차출되기도 한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할 줄 안다. 이들은 이미 시군지역에서 수일간의 여관작업을 거쳐서 도 작업을 온 것이고 이어서 중앙작업까지 가게 된다. 이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여관작업은 복잡한 행정통계를 집계하기 위해 공무원들이 여관에 모여 숙식을 함께하며 일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한방에 3-4명이 일하게 되는데 이들은 복잡한 서식이 담긴 서류와 계산기, 주판 등을 가지고 일한다. 시군에 따라서는 남녀 젊은 직원이 거들기도 하므로 36개시군이 있었던 당시 도 작업을 하게 되면 그 인원은 40명이 넘었다. 그래서 불경기에 여관작업 한팀을 유치한 여관은 돈벌이가 되었다. 40명이면 최소한 방 10개 이상이 나가기
행정기관의 정보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1공무원 1PC’라는 용어로서 업무보고서에 등장하여 공무원 마음을 설레게 하던 때가 있었다. 초기에는 1개 국에 1대의 컴퓨터가 있을 뿐이어서 국 주무과 주무계에서 이 장비를 독점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중앙정부의 미래지향적인 블루오션을 실천하신 선배공무원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는지 경기도청에 컴퓨터 1대가 보내졌다. 영화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영화 부시맨을 보면 경비행기 조종사가 먹고 버린 코카 콜라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고 이를 주워 야자수 열매를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신주단지로 모셔지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 콜라병이 등장한 것은 고도의 광고였고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고에 취해서 밖에 나가서 그 코카콜라를 집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는 PPL(간접광고)이 포함되었다고 아예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컴퓨터라는 말을 해석해 보았다. 전자 회로를 이용한 고속의 자동 계산기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통계부서가 써야 할 것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통계업무 부서가 복잡한 계산을 하고 숫자를 많이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무서운 기계를 피하기 위해 통계팀에 보낸
그때에는 윗선에 이야기하면 민원이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민원인들은 중앙에 아는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거나 도청에 간부들을 잘 안다고 말하며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민원과 관련한 압력이 늘 불편한 혹뿌리였다. 그런데 아주 멋진 국장님이 한분 계서서 명쾌하게 민원을 해결하고 추가민원도 예방하는 一石二鳥(일석이조)의 효과를 올려주셨다. 그 분은 당시 경제분야 국장이셨는데 일단 민원인이 국장실을 방문하면 실무자를 부른다. 7급이나 6급 실무자는 국장실에서 민원인, 국장과 함께 3자가 앉아서 민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국장이 먼저 나서서 실무자를 야단치기 시작한다. “당신이 일을 잘했으면 이 바쁜 시간에 사장님이 여기 도청까지 오실 일이 아닌데 당신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였으므로 오신 것이 아닌가. 이를 어찌할 것인가.” 담당자는 아무 말 못하고 국장의 야단을 맞는다. 이때 화가나서 찾아온 민원인(사장님)은 만감이 교차한다. 이거 오늘 한 건으로 내 민원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1년에 여러차례 실무자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큰일 났구나.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는 격은 아닐까? 결국 사장님은 야단치는 국장에게 미안하다면서 실무자
1984년경 서무담당자로 근무던 때의 사무실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왼쪽 칸막이안에 과장실, 오른쪽으로 교육계, 개발계, 보호계, 마을계가 있다. 요즘 같은 파티션은 없다. 계별로 4-6대의 전화기가 있는데 번호는 2개다. 2222, 4444번인데 이번호 하나에 2-3대의 전화기가 연결되어 있다. 이를 ‘뿌라찌’전화라고 했다. 뿌라찌는 브리지(bridge)가 일본어 발음으로 변형된 이 단어라고 하는데 남의 집 안테나선에서 한 줄 더 따오거나 전기선 중간을 연결해 도전(盜電)하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리고 책꽂이와 몇 개의 화분이 있는데 요즘 사무실과 다른 비품은 바로 대형 재떨이가 계장님 책상과 차석 자리에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비운 재떨이에는 티슈를 깔고 살짝 물을 부어 주었다. 아마도 먼지, 즉 담뱃재가 날리는 것을 막으려 했던 지혜인 듯하다. 하지만 오전 11시가 되기 전에 재떨이는 꽁초와 담뱃재로 채워지는데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공무원들도 그냥 피우는 사람은 피워야 한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민원인이 와서 함께 피우기도 하고 계장
요즘 공무원 수첩은 참 많이 세련되었다. 큰 수첩은 내부회의에서 쓰면 되고 작은 수첩은 출장 갈 때 요긴하다. 더구나 뒷장에는 메모지도 있어서 작은 크기로 떼내어 쓸 수도 있어서 참 편하다. 과거 공무원수첩은 좌철로서 거즈를 대고 본드칠을 한 것이어서 가을쯤 가면 너덜거렸다. 그리고 그 큰 덩치를 항상 들고 다녀야 했다. 어떤 공무원은 승용차위에 수첩을 올려놓고 주민과 대화를 나누다가 깜빡 잊고 차를 출발하는 바람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요즘에 큰 수첩을 들고 출장가는 공무원은 적어 보인다. 과거에는 공무원증을 대신하거나 공무원임을 응근히 과시하기 위해 큰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요즘에는 작은 수첩을 속 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고 요즘 ‘나 공무원이요’하는 경우도 적은가 보다. “구내식당서 수첩으로 밥 퍼서 먹나?” 하지만 요즘에도 구내식당에서 무슨 행사가 열리거나, 쉬운 이야기로 기관장이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시게 되면 총무, 서무과 직원들이 그 ‘수첩’을 들고 온다. 물론 식당에서도 받아 적을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메모지를 속주머니에 준비하면 될 일인데, 식당에 수첩을 들고 와서는 수첩 때문에 손이 어찌할 바 몰라 하는 경우를 目睹(목도)하게 된다. 사실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