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지방행정 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에 내려와 집에서 노는 사람이 있으면 면장이 ‘와서 일좀 봐주게’하여 공무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55세 전후의 공무원들 중에는 공채가 많은 터인데 이분들의 초임시절에 대학생 출신 공무원은 좀 희한한 인물이었다. 그 이후 1970년대 경제가 살아나면서 대졸자들은 일반 회사에 취업을 하였고 9급공무원 (당시 5급 을류)은 고졸자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9급 공무원 공채의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고졸 신규 공무원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고졸자가 공무원에 들어오면 대단한 실력이 있음을 인정 할만 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70년대 서정쇄신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지금까지 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시는 1953년생 전후의 선배들은 매년 매월 급변하는 행정환경을 용케도 헤쳐 분들로 크게 존경받아 마땅하다. 우선 이들 선배들은 전쟁 중에 태어나 어린시절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보리고개를 넘고 전염병과 싸워 살아남은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다. 그리고 경제발전 초창기 월급많이 주는 공장으로 가지 않고 꿋꿋하게 펜대를 지켜온 공무원이다. 초임시절에는 전자계산기가 없었고 행정전화도 부족했고 일반전화도 맘대로 통화할 수 없었다
유신시절 공무원의 복장은 콤비양복과 카라 넓은 Y-셔츠로 상징되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앞단추를 풀어 콤비양복 위로 카라를 꺼내 독수리 날개처럼 양쪽어깨로 펴서 입었다. 관선 군수도 그랬고 간부들이면 어김없이 이 복장을 했다. 그리고 간부들은 근무중이나 출장시에 민방위복을 입었다. 좀더 여름으로 들어서면 양복이나 민방위복을 벗고 카라가 아주 큰 양복을 입었다. 굵은 팔뚝보다 더 넓은 셔츠. 속옷이 훤히 비치는 삼베로 만든 옷도 유행했다. 관선 군수와 민선시장을 하신 원로 김기형 선배님은 군수시절 면사무소를 순시하면서 가장 먼저 들어가 보는 곳이 읍면사무소 숙직실이었다. 이부자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펼쳐놓고 총무계장을 불러 야단을 쳤다. “이게 직원들 잠자리인가? 돼지우리만도 못하다.” 이분이 무척 예의를 중시하는 분으로 생각한 부면장은 군수님 초도순시날 남직원 모두에게 넥타이를 매도록 했다. 원님이 오시니 복장을 단정하게 하고 맞아들이자는 취지였다. 아직까지 넥타이를 매본 일이 없는 한 공무원은 부면장에게 ‘저는 넥타이가 없어서 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 부면장님은 자신의 넥타이중 젊은 색을 골라와서 그 젊은 직원에게 빌려주었다.
면 단위에는 이른바 5대 기관장이 있다. 면장, 파출소장, 농협장, 예비군 중대장, 우체국장이다. 여기에 학교장이 가끔 참여하기도 한다. 어느 날 5대 기관장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반주를 곁들이게 되었는데 권한이 높은 지서장 앞에는 술잔이 모어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체국장에게 술잔을 권하는 이가 없었다. 사실 우체국장은 당시 호봉제로 월급을 받았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선 오지지역 면단위 우체국은 별정우체국이라 하여 전세 들 듯이 기본자금을 입금하고 우체국 운영권을 받았는데 월급의 기준은 아마도 6급 몇 호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인이 이 별정우체국을 인수하면 높아야 4호봉의 월급을 받게 되어 수익성이 떨어지는 관계로 학교 선생님을 정년 퇴직하신 분이 유사경력을 보태 6급 30호봉 정도의 월급을 받는 것이 유리하므로 교사출신이 대부분 우체국장을 하게 된다고 들었다. 하지만 郵遞局長(우체국장)은 특별한 권한이 없었다. 오가는 편지 우표만 있으면 보내고 배달해야 하고 시외전화 신청하면 연결해 주고 요금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딱히 결정하는 권한이 없고 그냥 앉아서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평소 업무 중에 이권이나 인허가권이 없으므로 기
화성 남양의 봉림사와 수원 중심지의 봉녕사. 글자하나 차이인데 부처님 오신날에 만나는 두 사찰의 상황은 크게 달랐습니다.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부부가 남양소재 봉림사에 갔습니다. 비봉산 봉림사는 청룡국민학생시절 12번의 소풍중 6번을 간 것으로 기억되는 참으로 연고있는 사찰입니다. 어린나이에 처음 사찰에 갔고 가서 대웅전이 우람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동시에 사찰뒷편의 미군부대 레이더를 참으로 신기하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대웅전은 부연이 달린 멋진 기와집인데 평소 고향마을에서 본 집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레이더는 잠자리 날개를 둥굴게 펼치고 사마귀 머리를 한 물체가 중심부에서 축을 삼아 잠자리 날개를 향해 머리를 고추세우고 돌아가는 형상입니다. 아마도 날개의 칩에서 전파를 받아 사마귀머리로 보내면 그 내용을 분석하여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2학년 소풍에서 친구 2명이 점심을 먹고 부모님 등 가족의 대열에 합류하여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남은 학생들은 모자라는 2명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세고 다시 주임선생님에 앉아일어서를 하고 나중에는 교감선생님이 2명씩 짝을 맞추며 헤아려보았지만 우리반 70여명중 2명이 모자랐습니다. 선생님들간
어느 기관이나 회사나 인사발령은 큰 관심사다. 드라마에서 보면 회사의 인사발령은 로비에 종이 몇 장 붙이는 것으로 발표된다. 社員(사원)들이 삼삼오오 기웃거리며 인사발령 A4 용지를 보면서 의외의 인물이 발탁되거나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의 영을 어긴 일로 해서 좌천되는 발령에 직원들이 호들갑을 떠는 장면도 볼 수 있다. 1980년대 公職社會(공직사회)의 인사발령은 하나의 커다란 잔치였다. 인사발령이 나면 잘된 사람 신나서 한잔, 오리알 된 직원 격려하느라 두잔. 그래서 관가 주변은 인사발령으로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하며 강원도청에서 모 직원이 분석한 바에 의하면 200명 인사발령은 7억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바도 있었다. 인사작업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많은 나날을 지낸 후 어느 날 오후 사무실의 차임벨이 울리면서 인사발령은 시작된다. 그 당시 인사 담당자가 수없이 바뀌어도 인사발령 멘트는 변하지 않았다. “1987년 5월 30일자 인사발령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는 순간 사무실은 물론 복도에 있던 직원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인사발령 나발을 불기 때문이다. 방송이 끝나는 순간부터 사무실은 분주해진다. 인사발령지(지
그 옛날 붓으로 기안하고 펜으로 결재하던 시절의 문서를 보면 “수제지건에 대하여”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首題之件(수제지건)이 맞는가 모르겠지만 늘상 공문서를 시작할 때 수제저건이라 쓰고 이를 결재하여 달라는 뜻으로 통용된 말이었단다. 법원이나 검찰의 용어가 어려워 여러 차례 개선을 도모한 일이 있다. 경찰관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일반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많이 고쳤다. 그래서 행정이나 검경을 통털어 어려운 말들은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지만 많이 개선되어 편안해진 편이다. 70년대 용어 중 제일 먼저 접한 것이 ‘庶政刷新(서정쇄신)’이다. 서민을 위한 행정의 쇄신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서민들은 이 용어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서정쇄신은 나쁜 공무원 잡아가고 목 자르는 일쯤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서정쇄신으로 퇴직한 공무원도 많지만 이로해서 벼락 승진한 공무원도 많고 지금쯤 3급에 이른 간부들은 아마도 이때의 공직 숙청 속에서 살아남고 오늘의 영광을 이룩하였다 할 것이다. 다음에는 계절별 사자성어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늦겨울에 진행되는 토입답압(土入踏壓)은 무엇일까? 논보리, 밭보리는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은 나야 씨앗을 맺는데
면서기는 툇마루에서 찬밥을 주고 농협서기는 안방에서 씨암탉 대접한다. 70년대 시골동네의 풍경중 하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면서기는 늘 規制(규제)와 지시를 하는 공무원이고 농협서기는 貸出(대출)과 비료, 농약을 공급하는 좋은 기관이다. 사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하나의 面 동네에는 아주 많은 기관이 있다. 면사무소를 비롯해 순경들이 근무하는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예비군 중대장도 높은 기관의 하나다. 이들 기관 중 가장 주민들과 밀접한 기관은 면사무소와 농협이었고 결국 농협 직원들은 좋은 공무원으로 (농협은 공무원이 아니지만 서기라는 직함이 있음) 평가되고 공무원인 면서기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한번은 22세 공무원이 추곡수매 담당을 하면서 수매현장에 혼자 출장을 나갔고 농협에서는 영농부장, 수매담당, 출납담당등 5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주민이 50대 나이의 농협 영농부장에게 물었다. 다음번 수매에는 현금을 주나? 영농부장은 저 사람, 면직원에게 물어보라 했다. 주민은 “저 어린 직원이 뭘 알겠어!” 하면서 영농부장의 답변을 요구하였다. 결국 면직원은 영농부장에게 다음번 수매일정과 방법 등을 설명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행정기관의 접대는 하부기관의 간부가 결정하고 지역의 유명 식당이나 관광지를 안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1년에 2번 정도 내려오는 내무부 평가나 점검관은 미리 점검표를 보내오고 빈칸을 연필로 써주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본은 좀 다르다고 한다. 상급기관의 담당자가 하급기관에 점검을 위해 출장을 가는 경우 반드시 술 한 병을 준비한다고 한다. 일본 공무원은 자신이 업무를 수행할 기관에 가서 부기관장이나 간부를 만나 인사를 하고 미리 준비한 술 한병을 내어놓고 실무자를 소개받고 실무자와 일을 마치면 되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 식사 대접하여야 할 경우에는 그 기관의 실무자가 대접 여부를 결정하고 내부 보고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상급기관의 출장자가 가져온 술병에는 모월모일에 중앙의 모 공무원이 가져온 술이라고 적고 이를 술저장 캐비넷에 보관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여든 술은 연말 회식이나 부서 식사가 있을때 필요한 만큼 꺼내어 마시는데, 이때 술병을 가져온 이들의 이름과 날짜, 출장수행 업무내용, 성품 등을 회상하면서 마신다고 한다. 이때 출장온 이의 이미지가 좋은 이의 술은 기분 좋아 빨리 마시고 악질적인 인물이었다면 또한 그래
요즘에는 과거 서무담당자가 발품을 팔아야 할 일들을 인터넷이 대신해 준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팩스가 서무담당 업무를 도와주었다. 우선 팩스를 청사 내 다른 부서에 보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통신요금이 늘 부족했던 터라 외부에 전화를 하려면 주무계장의 사전 결재를 받아야 했던 터라 청내 팩스를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나 보다. 실제로 행정 전화기 중에 일반전화가 되는 것은 실과에 1대씩 지정되어 있었고 이 전화기 다이얼은 작은 자물통으로 채워서 통제를 받았다. 1980년대. 계원 9명이 근무하는 부서에 행정전화는 2대뿐이다. 실제 전화기는 6대가 있지만 전화선은 2개다. 3대의 전화기를 연결하여 사용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아 다른 직원에게 넘겨주려면 “계장님! 2번입니다”라고 말하고 계장님이 송수화기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 조용히 끊어야 한다. 요즘 행정전화는 넘겨주기 버튼을 누루고 전화를 끊어야 상대편이 통화를 할 수 있다. 행정전화 1인 1대 시대는 1공무원 1PC와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것 같다. 하지만 통화량이 늘은 것인지 행정전화도 바쁘다. 더구나 공무원 모두가 개인 전화기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무실
행정전화선이 부족하여 4개 면사무소를 행정전화선 1개에 연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행정전화 벨이 2번 울리면 甲면, 3번 울리면 乙면, 4번 울리면 丙면, 5번 울리면 戊면이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마구 울어대면 4개면 모두가 전화를 받아야 했다. 군청 담당자가 전언통신문을 보내려면 양손에 2개씩 4개의 전화기를 들고 내용을 불렀다. 16개 읍면을 동시에 연결해 알리는 것이다. 참! 傳言通信文(전언통신문)이란 긴급한 문서를 전화로 알려주고 송신자와 수신자를 적어 확인해 두는 일이었다. 해서 전언통신문을 부르다 보면 빠르게 적는 이가 있고 筆記(필기)가 느린 이도 있게 마련인데 하도 답답하여 먼저 적은 이가 잘못 듣고 헤매는 이를 위해 거들다가 군청직원에게 ‘어떤 oo이야. 조용히 해!’하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면사무소 일반전화는 자석식으로 우체국 교환을 통해 연결되었다. 서울에 전화하려면 전화기의 손잡이를 돌린 후 수화기를 들면 교환수가이 나오고 서울 번호를 대고 잠시 기다리면 연결해 주었다. 전화주문이 밀리면 20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요즘의 전화는 많이 달라졌다. 우선 행정전화가 1대씩 공무원 개인에게 주어지고 이 전화기로 행정전화는 물론 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