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동네 걸어서 한 바퀴 2010년 11월 14일아침입니다. 집을 나설 때는 광교산행으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집과 버스 정류장 중간쯤을 걸어가던 중에 고향이라는 화두가 머리를 스쳤습니다. 전두엽을 거쳐 대뇌로 들어온 그 고향 화두는 오늘의 여행 방향을 180도 바꾸어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즉 83번을 타고 13번을 타면 가는 광교산이 아니라 51번을 타고 다시 99번을 타면 가는 비봉면 양노리 방면입니다. G20 의장국 대한민국의 교통체계는 무한한 변신을 거듭하여 경기도내 모든 지역을 환승할인 권역으로 구성해 놓았습니다. 경기도의 광역교통망 정책이 성공한 일면이 환승할인과 심야 광역권 버스노선 설치일 것입니다. 역시나 광교산 코스처럼 양노리 코스도 환승할인이 되는데 약 200원 더 내면 되는 조금 먼 거리입니다. #51번 버스안에서 임 선배를 향수함 토요일 오전이어서 일까? 오가는 행인이 많습니다. 다문화 아저씨와 아가씨도 많이 지나갑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다문화 시대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숙성단계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문화는 세계화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다문화로 성공한 사례입니다. 다문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이를 바
일제 강점기부터 경찰 제일주의가 있었나 봅니다. 주재소 순경이 모든 민사, 형사사건을 처리하였답니다. 그러니 평소에 주재소 주임과 친밀한 인사는 주변의 사건사고 발생시에 유리한 입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모든 일에 연결되면서 ‘물고 순경이냐?’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물고란 논에 물을 대는 수로의 문을 말하는데 물이 부족하면 닫고 물이 넘치면 열어서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뭄이 심해지자 서로 문을 잠그게 되었고 다른 이의 논을 통해 물을 공급하는 입장에서 남의 집 논 물고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물고싸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물고관리를 하려하기 때문입니다. 我田引水(아전인수)라는 말과도 통할 것입니다. 내 밭에 물을 대고자 하는 것이지요. 물고 역시 자신의 논과 밭에 유리하게 운영하다 보니 다툼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싸움에서 불리해진 어르신이 평소 알고 지내는 순경에게 이 싸움을 중재해달라 부탁을 하였습니다. 순경이 오면 상황이 유리해 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기도 합니다. 순경이 와서 물고 관리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상대편 어르신은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당신이 ‘물고’ 순
서신 백미항 넓은 갯벌에 서니 온몸에 짠 기를 풀어놓은 듯 오롯한 그 맛이 짭조름하니 알싸하다 미지근한 순항은 밍밍하지만 호된 사지를 넘어온 짜릿한 안착은 단번에 빨려든다 수산물 작업장 창고 마당 꽃 달린 해님이 달그락거리는 오후 널브러진 그물은 한낮 햇살에 달큰하게 늘어지고 비닐하우스 한 채 굴뚝 연기로 몸 비틀어 유혹하는데 얼마만의 호기인가 소복하게 쌓인 굴 더미 성곽처럼 둘러앉은 동네 아낙들 찌그러진 양동이로 토닥토닥 모이는데 새댁 얼굴에 복사꽃 핀 걸 보니 졸겠구먼 그게 아니랑게유 칼칼한 양념 웃음 난로 위 주전자 구수하게 수증기 오르면 항구의 겨울이 입담으로 밀려간다 윤민희 시인 충남 보령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문학석사) 졸업, 시집 『그리움을 위하여 가슴 한 켠을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엇박자』,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 수상/경력 - 동서문학상, 오산문학상, 풀잎문학상,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입상, 전국여성문학대전 동시부문 최우수상 수상, 경기도 문화예술진흥유공 표창, 오산문인협회 제11대 회장 역임, 초등학교 교사. - 시작메모 - 윤민희 시인의 시집 『책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느끼는 감
釀造場(양조장) 사장님이 最愛(최애)하는 ‘술조사’가 있다면 나무를 관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山林(산림)간수’가 있습니다.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경우 조사를 거쳐서 의법 조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로, 양조장 사장님이 술조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密酒(밀주, 허가없이 몰래 담그는 술)를 단속하여 양조장의 술이 많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옷을 깔끔하게 빼어 입은 사람이 집 앞에 나타나서 집안을 기웃거리며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급하게 점심을 지어 대접을 했습니다. 이 분이 산림간수입니다. 소나무 가지를 베어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벤 것은 아니고 잔가지를 잘라온 것도 안 된답니다. 1960년대 대한민국 공무원은 입법·사법·행정 3권 全權(전권)을 가졌습니다. 1977년 공직에 들어가 담당 부락에 가니 70세 할머니가 ‘담당 서기님’이라 호칭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19살 면직원을 이렇게 어려워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선배에게 물으니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면서기의 권력의 후유증이라 했습니다. 당시에 徵用(징용)·徵兵(징병)·供出(공출)이 있었습니다. 강제노역에 끌려가고 군에 입대하고 쌀과 물품을
논밭의 풀을 죽이는 제초제가 나오기 전에는 좁은 하천에도 물고기가 가득했습니다. 폭우가 내리면 추녀 끝에 미꾸라지가 올라왔습니다. 누구는 구름 위를 떠돌던 물고기가 빗물을 타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힘 좋은 미꾸라지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오다가 폭우가 내려 물살이 강하므로 이를 치고 올라와 우리집 추녀 끝까지 당도한 것으로 봅니다. 물고기를 잡는데 큰 그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그물이나 양동이, 투망으로 고기를 잡아서 집안에 양어장을 만들어 넣어줍니다. 수초까지 장착해주면 평화로운 양어장이 됩니다. 어릴적 양어장에 키운 물고기는 붕어, 금붕어, 버들무지, 송사리, 가재 등 다양합니다. 작은 물고기를 소주병에 담아서 키우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볼이 빵빵하게 크게 보였습니다. 유리병이 볼록렌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물고기를 키우다가 한 여름에 큰 비가 내린 다음 날에는 모두 가출해 버리곤 합니다. 비가 내려 물이 차오르면 물고기가 뛰어올라 우물가 하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더 넓은 하천으로 나가서 강을 타고 내려갔을 것입니다. 더 큰 물고기가 되고 큰 가족을 이루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동네 웅덩이에서 수구
똥차는 언제 출발하나요??? 요즘에는 아파트를 가로지르는 마을버스가 다닐 정도로 교통기반이 확충되었습니다만 1970년대 모든 마을에 버스가 운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향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2년쯤입니다. 마지막 버스는 시골마을 방앗간 앞에 주차하고 밤을 지낸 후 다음 날 아침 첫차가 되어 콩나물 시루처럼 한가득 학생들을 싣고 읍내로 나갔습니다. 한번은 버스가 고장이 나서 1시간 늦는 바람에 상급반 고등학생들이 해명을 부탁하여 버스 기사님이 차를 세워두고 학교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사과를 한 일도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청년이 종점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서 땀을 흘리며 기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똥차는 언제나 떠나나요?” “아, 예, 똥이 차야 떠나지요.” 자신이 타고 갈 버스를 “똥차”라 하니 기사님은 넌지시 한 방 먹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확인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와 주기를 바랄 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시골마을 버스는 하루 4번 운행했습니다. 아침 출근, 낮 11시경, 오후 2시경, 그리고 저녁 퇴근시간에 한번 운행했
시대를 앞서가고자 노력했던 신식 아버지 先親(선친)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대형 목욕탕을 만들었습니다. 집안에 1칸 면적의 공간을 확보하여 대형 무쇠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물이 따스한 것 이상으로 솥의 바닥은 뜨거웠으므로 나무판을 만들어 뗏목처럼 띄우고 올라갑니다. 나무판이 솥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게 되고 이를 발판 삼아서 들어앉으면 뜨끈한 탕물이 온몸을 달구고 1년 묶은 때가 퉁퉁 불어나서 슥슥 문지르면 국수발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을 뜨겁게 데운 것이니 아들 삼형제, 아버지, 삼촌 등 남자들은 순서없이 이 탕에 몸을 담그고 물이 부족하면 찬물을 채우고 차가워지면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이후 동네 청년들이 장작을 들고와서 목욕을 했습니다. 물이야 지하수이니 별도의 비용문제가 없는 것이고 불을 피우는 장작을 집에서 챙겨와 아궁이 불을 피웠으니 연료비만 부담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벌초와 시제에서 만나는 아저씨가 장작을 들고 수건을 목에 걸고 목욕을 하러 오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자, 한겨울에 장작불을 때서 물을 끓인 후에 일단은 솥 밖에 서서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고 비누칠을 한 후 헹궈낸 후에 아이들을 탕 안에 들
桑田碧海(상전벽해)란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1960년대에 시골 마을 산기슭에는 뽕나무를 심었습니다. 누에고치가 완성되면 뜨거운 물에 삶아서 외국에 수출하던 시절입니다. 누에고치는 누에가 4잠을 자고나서 몸속의 진액을 비단실로 뽑아내어 자신의 羽化(우화)를 준비하는 방을 만듭니다. 이를 우리는 누에고치라 하는데 통으로 삶아서 수출하였다 합니다. 더러 가정에서 고치를 끓는 물에 넣어 첫 번 가닥을 잡아내어 비단실을 뽑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비단천을 만드는 실이 나옵니다. 한 번에 몇 개의 고치실을 잡아당겨서 돌돌 말아내면 비단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조 기술이 부족하였으므로 고치를 통으로 출하를 하고 정부가 수매하여 외국에 수출하여 달러를 벌어와 석유를 사다가 산업발전에 투입했다고 들었습니다. 누에는 일시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농사입니다. 그래서 시골 마을 아낙네들의 손길이 많은 집에서 누에를 쳤습니다. 기른다 말하지 않고 누에를 친다 했습니다. 누에씨 1장에는 수 천마리의 씨누에가 있습니다. 이를 받아다가 뽕잎을 잘게 썰어 먹였습니다. 한잠을 자고 뽕잎을 먹고 두 잠을 자고 뽕잎을 먹었습니다. 네 잠을 자고 나서는 엄청
요즘 젊은이들은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돌리며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는 빨래방을 갑니다만 시골 아낙들의 대화방은 빨래터였습니다. 이런저런 빨래를 가득 머리에 이고 와서 빨래를 합니다. 아기가 똥을 싼 기저기는 맨 아래로 내려가서 우선 휘휘 지어 걸러내고 애벌 빨래를 한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비누칠을 한 후 다시 문질러 줍니다. 그 아랫마을 아낙들은 내려오는 시냇물이 청정수인양 빨래를 했습니다. 당시 시골 하천 주변에는 풀과 나뭇가지, 자갈, 모래등이 있어서 자연적인 정화작용이 가능했습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상하수도관으로는 불가능한 정화과정을 자연은 아주 당연스럽게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을 아래로 내려가면 하천은 다시 새로운 개천으로 탄생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의 아낙들은 빨래를 할 때 양잿물 비누를 썻습니다. 양잿물이란 화공약품인데 이를 물에 끓인 후에 쌀겨를 넣어서 응고시킨 것입니다. 이를 맨손으로 잡아서 빨래에 문지르니 그 손이 거칠어지고 심한 경우 손바닥에 구멍이 날 정도입니다. 그래도 밭일로 논일로 단련이 된 손이라서 웬만한 양잿물 비누는 견뎌내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더러는 손바닥을 보이시는데 양잿물로 손바닥은 닳았고 손등은
땅을 놀리는 것은 농부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논뚝에도 콩을 심었습니다. 논 뚝에 콩을 심으면 꿩이 와서 파먹으므로 싹이 날 때까지 꿩을 쫓기 위해 허수아비를 세웠습니다. ‘허수아비의 아들’은 ‘허수’라는 조크가 크게 통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꿩이나 새들도 시골 할아버지가 대충 만든 허수아비에 놀라서 논두렁 밭두렁에 심은 콩을 꺼내어 먹는데 어느 정도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독수리 모양의 연을 날려도 새들은 가짜임을 다 알아차리고 농작물을 쪼아먹습니다. 요즘 농부들이 더 이상 독수리를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차린 모양새입니다. 그 시절에는 논두렁에 콩을 심었습니다. 푸른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 콩이 파랑 주머니를 달고 익어갈 무렵에 동네 아이들은 논두렁 근처에 불을 지피고 콩튀기 놀이를 합니다. 불 위에 파랑 콩을 익혀서 알콩을 꺼내먹는 것입니다. 알콩달콩하다는 말이 여기에도 어울릴 것입니다. 그 맛이 참 좋았습니다. 살짝 익은 콩은 흰 밥 위에 올려진 그 콩맛을 내기에 아이들은 신이 났습니다. 입가는 물론 콧구멍까지 검정으로 물들었습니다. 검은 재 속에서 익어가는 콩을 주워서 껍질을 까고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