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와 보리와 쌀과 보리쌀로 변신하는 곳이 방앗간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는 말은 술을 좋아하는 이가 술집 앞으로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반드시 들러서 한잔한다는 말입니다. 신라 金庾信(김유신) 장군이 젊은 시절에 馬上(마상)에서 졸았는데 평소대로 말은 그를 태우고 기생집으로 갔다고 합니다. 술집 앞에 멈춰선 말 위에서 잠을 깬 이순신은 말의 목을 베고 말았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무공훈련과 공부에 전념하여 삼국을 통일한 장수가 되었고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김유신 장군 묘지 비석에 왕릉이라고 쓰여있습니다. 1960년대 시골 마을 방앗간의 동력은 원동기입니다. 초콜릿으로 만든 사찰의 탑이 조금 녹아내린 형상을 한 기계로서 양쪽에 회전을 고르게 하는 커다란 바퀴 모양의 휠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기계 안에는 실린더와 피스톤이 있고 학교때 배운 대로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행정 기관입니다. 승용차나 기차 등 비교적 큰 장비의 엔진은 4사이클을 거쳐서 동력을 만들어 냅니다. 이 동력을 방앗간의 각종 기계에 연결하면 벼를 퍼 올리고 기계에서 껍질을 벗기고 현미를 갈아 백미로 만드는 것입니다. 7분도 쌀이란 껍질을 벗기고 70%정도 껍질을 갈아낸
작은 상점을 구멍가게라 하고 조금 넓어진 현대식 건물에 가게를 차리고는 ‘슈퍼마켓’이라 합니다. 한때는 공무원중 동사무소, 면사무소 직원을 일러 ‘슈퍼맨’이라 했습니다. 일선 공무원들이 중앙, 도, 시청, 군청에서 매일 쏫아지는 공문을 다 처리하고 지역의 주민이 요구하는 복지, 수도, 위생 등 수많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동네가게 슈퍼마켓의 슈퍼라는 의미는 ‘박물장수’에서 연유된 것 같습니다. 박물이란 博物館(박물관)과 한자를 같이 씁니다. 그래서 博物(박물)이란 많은 것을 안다는 의미이고 博士(박사)란 깊이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博學多識(박학다식)이란 넓게 배우고 많이 안다는 의미입니다. 박학다식하고 인품에 깊이가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君子不器(군자불기)를 실천하는 분이라면 더더욱 존경받을 것입니다. 1960년대 구멍가게를 열기 위해서는 박학다식까지는 아니어도 숫자와 문자를 알아야 했습니다. 숫자는 문자속에 포함될 것 입이다만 숫자속에 문자가 들어간다고 보기는 어렵겠습니다. 문맹은 벗어나야 구멍가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좀 한 초졸의 며느리들이 구멍가게를 열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적어준 대
어느 해부터 국기법이 개정되어서 비가와도 눈이 내려도 太極旗(태극기)와 기관의 기를 게양합니다. 이전에는 태극기를 비 맞출 수 없다며 비 내리는 즉시 기를 내려서 실내에 보관했습니다. 다시 비가 그치면 태극기를 달았는데 이번에는 미숙한 학생이 거꾸로 달아서 교장 선생님의 지적을 받은 기억도 있습니다. 변방의 기관에서 숙직을 하면 새벽에 일어나 太極旗(태극기) 다는 임무가 큰 일이고 특히 소한, 대한 추위 속에서는 손등이 오돌거릴 정도로 태극기 게양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국기줄에 열쇠고리를 잡아매고 태극기에는 물음표 갈구리를 매달았습니다. 아침에 게양대에 가서 척척척 3번 걸면 끝이고 저녁 국가 降下(강하)시에도 물음표 세 번 누르면 끝이니 선배들이 편안하여 고맙다 했습니다. 1982년경의 일이니 이때부터 저에게는 혁신의 정신이 조금 있었나 봅니다. 이후에는 기관이 커졌으므로 국기를 달고 내리는 어려운 일을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불지 않으면 깃봉에 늘어져 있는 태극기는 물론 기관 旗(기), 새마을기도 보이지 않으므로 미국식으로 태극기 윗부분에 봉을 끼워서 팽팽하게 매달자는 의견을 내게 되었습니다. 사실 태극기를 매일 볼 수 있으니 태극기의 소중함을 깊이
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풀밭이 교육장이고 여름에는 소나기를 만났을 때 요령있게 피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가을에는 단풍을 보면서 세상을 사는 이치를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한겨울 꽁꽁 언 얼음판 위에 피운 장작불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얼음이 불에 녹는데 그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불타는 장작을 보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는 과학적 논리는 부족했지만 현실적인 감각은 존재했습니다. 장작불에 얼음이 녹아 불을 꺼지게 하는 묘한 현상을 보면서 스스로 터득하였습니다. 풀밭을 헤집고 다니는 닭이 먹는 것은 곡식뿐 아니라 유리조각이나 작은 돌맹이였습니다. 닭을 잡아 내장을 꺼내보면 그 속에 닭이 먹은 곡식 알갱이와 함께 모래와 유리조각이 나오니까요. 이를 노랑색 내피로 문질러서 소화를 시키고 살을 찌운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닭을 잡으면 포도송이 같은 장기가 있는데 그 닭이 평생 낳을 계란의 숫자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른 봄에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고 피살이를 하고 비료를 뿌리는 과정을 보면서 쌀나무가 아니라 벼가 자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무성하게 자라올라 ‘보릿고개’를 넘게 해 준다는
1960년대 초로 어렵게 기억하는 일 중에 하나가 소를 잡아서 동네 가가호호 나누었던 일입니다. 소문 듣기로 청년들이 돈을 모아서 소 한 마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요즘에 시장에 나가보면 ‘소 잡는 날만 영업함’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도축장에서 소를 잡아 통으로 들여와 팔기 때문에 신선하고 저렴하다고 광고로 자랑을 합니다. 1970년 당시 돼지를 잡는 것은 비공식적으로 용인되었지만 소를 잡으면 밀도살이라 해서 처벌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청년들은 저녁 어스름한 시간을 택해서 소 한 마리를 몰고 동네 으슥한 개울가로 가서 擧事(거사)를 진행했습니다. 듣기로는 다리위에서 소의 눈을 천으로 가리고 다리 아래로 추락시킨 후에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고 갈비살을 발라내어 5근 단위로 나눈 후에 가가호호에 한밤중에 전달했습니다. 고기를 새끼줄에 묶어서 집집마다 전달하고 며칠 후 잠잠해질 즈음에 고기값을 거출했습니다. 머리와 다리는 작업에 참여한 청년들이 나눴고 소 내장은 손질해서 가마솥에 끓여서 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소를 잡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하면서 그 소 內臟(내장) 국물로 입막음을 했습니다. 소머리 고기는 끓여낸 후 천에
1968년 초등학교 3학년 때입니다. 시골에서 면사무소 소재지까지 5km를 걸어 나와서 중형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안 전기불이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달리는 것 같은데 길가의 가로수가 뒤로 밀려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병풍처럼 양쪽에 설치된 가로수 그림이 뒤편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 같은 느낌은 3번 정도 버스를 탈 때 반복되더니 어느덧 버스의 움직임이 몸에 배고 시선에 잡힐 즈음에 가로수는 서 있고 버스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버스터미널에서 옆 차가 움직이는데 우리버스가 이동하는 착시현상을 느끼는 경우는 최근에도 여러 번 느낀 바가 있습니다. 초보운전 승용차 안에서도 옆 차가 움직이는데 내 차가 움직이는 것으로 느끼고 브레이크 발에 힘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사실대로 느끼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더러는 주변의 환경에 따라서 뜨겁게, 차갑게, 더러는 미지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찬물에서 나와 미지근한 물에 들어가면 뜨겁게 느껴지고 뜨거운 물에서 나와 찬물에 들어가면 더 차가운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2021년 오늘 우리는 이른바 사우나탕이나 목욕탕에 가지 못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이 한 분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노인과 어른의 지혜가 소중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80년, 90년을 살아온 경험이 젊은이에게 큰 힘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빼면 남는 것은 어릴적 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이웃집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입니다. 요즘 말로 “나 때는 말이야”가 통하던 시대입니다. 전기가 끊어지는 상황을 ’블랙아웃‘이라고 합니다. 대규모 정전사태를 이르는 것으로 ‘대정전’이라고도 합니다. 블랙아웃은 공급되는 전기보다 사용되는 전기의 양이 많아 특정지역에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정전사태를 말합니다. 사실 태어나서 고등학교 2학년까지 불랙아웃 구역에서 살았습니다. 전기를 처음 본 것은 1964년 유치원생일 때입니다. 우리 동네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아랫마을 방앗간에 3줄짜리 전선으로 방앗간용 동력선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에 장비를 연결해서 110v 전기를 뽑아내서 영사기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100촉 전구를 장대에 매달아서 주변을 밝혔습니다. 100촉이란 촛불 100개를 켰다는 말입니다. 어려서 제사 지낼 때 촛불 2개를 켜
현대문명이 발전하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어린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해도 젊은이들이 귀 기울이지 않는 시대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10년 간격으로 보이지 않는 벽돌벽을 두고 사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방송국의 패널조차 앵커와 거리를 두고 그 사이에 아크릴 투명 격실을 만들어 나만의 공간에서 토론을 하고 세상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틈새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한데 세상은 온통 장벽이 가득합니다. 그러다보니 1960년대에 전기·전화가 없던 시절의 농촌 모습을 서서히 잊어버리고 만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를 이곳저곳에 정리하다가 한 권의 책으로 모았습니다. 그냥 세월 지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데 기초가 되었던 그 시절 그 당시의 이야기를 몇 가지 기록해둔 자료입니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안타까운 시기가 되어서야 정신 차리고 이 글을 적어보고 있습니다. 장문을 정리하다 보면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몇 가지 편리한 기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250쪽에 달하는 파일을 정리하면서 오늘까지 작업한 곳에 표기를 해 둡니다. 刻舟求劍(각주구검)이 아니라 정확하게 이전의 작업을 종료한 지점에 편하게 3333을 입력해 둡니다. 3자
오산시에 개장한 '맑음터공원 캠핑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캠핑장은 까산이(까마귀)존에 잔디사이트 4인용 33개, 매화존 에 데크사이트 4인용 20개 등 텐트 53개와 캐러밴 4동이 설치됐다. 오산시가 시조를 비둘기에서 까마귀로, 시화를 개나 리에서 매화로 바꾸어 까산이존과 매화존이 설치됐다. 오산의 '맑음터공원 캠핑장'은 오산천변 환경사업소 부지에 마련되었다. 환경기초시설인 하수처리장 주변에 야영장을 조 성하는 프로젝트가 추진되자 초기에는 '말도 안 된다'며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시 공무원들은 선진사례를 조사하고 자료를 연찬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고 이제 성공적으로 공 사를 마치고 만석, 만실을 앞두고 있다. 과거에 캠핑은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1970년대 시골에 는 검정 미제(美製)천으로 텐트를 만들고 석유 버너에 밥을 해 먹으며 10일 이상 야영을 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당시 캠 핑은 무전여행과 한 조를 이뤄서 청춘들의 번뇌를 삭이는 과 정이었다. 요즘에는 1박2일이나 2박3일 동안 현대적 장비를 갖추고 안 전한 곳에서 캠핑을 하는 젊은 부부가 많다. 자라나는 어린 이, 생각이 깊어지는 중고생들에게도 부모와 함께하는 '캠핑 장 1박2일'은
지난해 말 39년 8개월 공직을 마감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 흔들림과 당혹함이 적지 않았는데 어느 날 새벽 1시에 잠에서 깨어나 손에 잡은 책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牧民心書(목민심서)’로 흔들림을 잡은 바 있습니다. 제도의 개혁 원리를 말하는 經世遺表(경세유표), 형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그리고 목민관, 즉 현대의 공직자가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인 목민심서를 ‘1표2서’라 하며 1762~1836년 74세 일생 동안 심혈을 다하신 508권 茶山(다산) 선생님의 저서 중 壓卷(압권)입니다. 목민심서를 잡고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만난 활자는 바로 ‘解官(해관)’이었습니다. ‘관직이 교체되어도 놀라지 마라. 수령직은 교체됨이 있는 것이니 교체되어도 놀라지 않고 관직을 잃어도 연연하지 않으면 백성이 그를 존경할 것이다. 평소에 문서와 장부를 정리해 두어서 청렴하고 명백하게 하여 후환이 없도록 해야 한다.’ 지방행정 기관의 공무원에 대한 인사는 여건상 단기간에 진행됨이 현실이니 현재 공직에 몸담은 1962년생쯤 나이에서 다산 선생님의 ‘해관’을 생각하고 그 글을 읽으면서 공감해 봄직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목민심서에서 다산은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