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행정역사관에 참 좋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하기 위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작은 관심이 큰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대해 자랑을 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기도청 현판, 김영삼 대통령의 경기도의회 현판이 나란히 정리 보존 중입니다. 두 기관의 명칭이 새겨진 동판을 보존하는데 一翼을 담당하 였던 바 이에 대한 자랑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65년경에 서울 광화문에 소재한 경기도청 청사를 수원으로 이전 결정을 합니다. 처음에는 인천시로 간다 했습니다. 도청이 이전하려면 문방구, 설계사무소, 건설사, 식당 등 어느 정도 인프라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수원으로 경기도청이 이사를 온 1967년에 수원시내 택시가 10대 내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정부의 관리들은 경기도 땅 서쪽방면으로 치우쳐 있는 인천시로 경기도청을 이전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원으로 경기도청이 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당시 이병희 국회의원이 삭발투쟁을 벌이는 등 많은 인사들의 노력으로 수원 이전이 결정되었고 1967년에 지금의 팔달산 중턱에 경기도청 본관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에 인천시로 경기도청을 이전했다면 또다시
홍보의 맥은 타이밍입니다. 이른바 계기 홍보가 중요합니다. 언론에서 기관장 취임 100일 기념 인터뷰를 하는 것도 홍보의 계기를 만들어 기사를 쓰면 '누이좋고 매부도 좋은 일'이기에 필요한 전략입니다. 경기도청에서 홍보의 진맥을 잘하는 '공보명인'으로 꼽는 선배가 있습니다. 공직에서 두 번을 전입자와 후임자로 만났습니다. 이 분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과 타이밍을 소개하겠습니다. [아침단상] 경기도청 이전 후를 생각한다/ 경인일보 2019-11-06 제22면 경기도청은 수원화성이 있는 팔달산자락에 자리 잡고 지대도 높아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잔디광장도 있고 산자락은 사시사철 다양한 색상과 다른 정취가 느껴지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지요. 벚꽃이 필 무렵에는 청사를 개방해 수십만의 도민이 찾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30년 넘는 세월을 그곳에 몸담아 일을 했지요. 그런 경기도청이 광교신도시로 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도청은 67년 수원으로 이전해 근대유산으로 지정된 구관만 있다가 신관이 들어서고 지방자치시대가 다시 시작되면서 경기도 의회 건물이 들어서고 잇달아 식당이 있는 제2, 제3별관이 들어섰지요. <중략> 도청이 광교 신
1985년 기억으로 경기도청에는 국가직 공무원과 지방직 공무원이 있었다. 대부분 지방공무원이고 과장, 국장은 국가직, 계장, 차석, 주무관은 지방직이었다. 양정과, 기획실 등 일부부서의 경우 주무관중 국가직이 몇명 있었다. 6급이하 주무관이 국가직이면 국비로 월급을 받았다. 지방직은 경기도청과 시군청 재원으로 봉급을 주었다. 과장, 국장, 실장, 부지사는 국가직이므로 정부에서 인건비 예산을 받았다. 그러니까 국가예산으로 월급을 받는 것은 국가사무를 담당한다는 의미였고 따라서 과장이상은 국가직으로 정부에서 보낸 공무원으로 보는 것이었다. 경기도청의 각과에는 과장 1명과 계장 4명이 있었다. 지금은 서기관 과장에 사무관 계장, 5급 팀장이 근무한다. 과거에는 사무관 과장, 사무관 계장이 있었다. 과장은 국가직이니 '행정사무관'이고 계장은 지방직이니 '지방사무관'이었다. 더러는 정부에서 온 6급 주사가 과장 직무대리를 하니 과장이고 당시 총무처에서 채용한 고시 사무관은 지방직으로 계장에 보임되었다. 6급 과장에 5급 계장이 근무했다. 6급 국비 과장은 사무관 승진시험을 통과하면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적정한 시기에 다시 내무부(행정안전부)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든 과
1988년 당시 공보실에 근무하는 홍승표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합니다. 사금파리 흰 잔에 검붉은 커피 한 사발을 주는데 200원이었습니다. 5잔을 마셔도 1,000원에 해결되는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연봉이 1천만원을 넘지 못하였으니 당시 500원이면 최근 코미디에서 한때 인기를 누린 '궁금하면 500원'보다는 더 비싼 돈이었습니다. 3명이 앉아서 3잔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는 공보실에 와서 일해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제안에서 가장 의미깊은 말은 고등학교 3년동안 문예반 활동을 한 것이 1순위요. 두 번째는 전임 세정과 보다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일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사실 지방행정주사보 7급에 승진하여 세정과에 가니 매일매일 하는 일이 전자계산기 두드리기였습니다. 36개 시·군(현 31개 시·군)의 세외수입 보고서, 하천점용료 부담금, 그리고 본청 각 부서의 세입보고서를 집계하여 안전행정부에 전화로 불러주고 다음날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공무원 7급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인데 아주 샤프한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더구나 세정과 근무기간도 2년이 흘렀으니 이즈음에 부서를 이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인사발령장을 전달하는 행사를 일컫어 "사령교부"라고 하는 용어부터 군대스러워서 민주적인 행정에서는 부드럽게 인사발령 행사로 개칭을 건의 합니다. 공직내내 그렇게 발령장을 받았으면서 이제서야 개선을 건의하는 점 송구스럽습니다만 앞으로는 조금 더 멋지고 의미있는 발령장 전달행사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1977년이면 공직에서도 권위주의가 하늘에 닿아있을 시기입니다. 화성군청 군수님을 만나서 5급을류 공무원 사령교부, 오늘날 9급 공무원 발령장을 받으러 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재수생으로 학원을 다니는 중에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흰색 T-셔츠에 끈 없는 운동화를 신고 오산읍에 소재한 화성군청 내무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내무과장, 행정계장은 모든 ‘공무원의 헌병’이어서 이른바 ‘山川草木(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던 시절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발령장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겁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상밖의 불량하고 미흡한 발령 대상자를 본 당시의 목이 짧은 행정계장님은 ‘복장불량’을 호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뭐요?” “발령장 주신다고 해서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 복장이 뭐요? 발
1970년대 당시 시골 어르신들 말씀에 '하다못해 면서기,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 있었고 정말로 하다못해 5급 공무원도 못하느냐는 말도 돌았습니다. 이 일도 저 일도 못하겠으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 공무원에 대한 평가, 특히 지방공무원에 대해서는 저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은 정말로 서류를 만져보지 못한 분들이 면장을 하였기에 나온 말입니다. 면장으로 발령받은 분이 취임식을 하고 면장실에서 총무계장의 보고를 받습니다. 기안 갑지에 기안을 해서 면장님 결재를 받으러 간 것입니다. 내용을 설명하고 결재판을 내밀자 면장님이 내용이 참 좋다하므로 결재를 청하자 면장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어떤 조치를 해야 하나요?” 나름 교양있게 질문을 하므로 총무계장이 설명을 했습니다. “이곳에 결재를 하시면 됩니다.” 신임 명장은 도장을 찍어야 하는지 서명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매기에 서명을 하도록 했던 바 이름 석자를 간신히 쓰셨다고 합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결재하기도 버거운 어르신이 면장을 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 나오고 '하다못해 면서기'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1
1960년대에는 글씨를 잘 쓰면 승진하고 출세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경기도농민교육원에서 농조조합장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저수지를 관리하면서 농사짓는데 물을 보내주고 수세를 받는 조합입니다. 이곳의 조합장님들이 일주일간 교육을 받으시고 마지막 날에 군대식 표현으로 '訴願受理(소원수리)'를 받아 이를 정리하여 원장님께 보고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자료를 종합하여 식사, 교육환경, 강사, 교직원 서비스 등을 평가하고 기타 의견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필체가 범상하지 않습니다. 싸인펜으로 슥슥 써 내려가시는 필력이 초서도 있고 행서도 있고 추사 김정희, 떡장수 아드님 한석봉입니다. 작업을 마치고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농조조합장님들이 어찌 이리도 하나같이 글씨를 잘 쓰시나요. 농조라 하면 농사짓는 분들이신데 한문 공부를 엄청 하셨는지 다들 명필이십니다." 선배가 말했습니다. "이분들이 누구신지 그대가 잘 모르는가 보네. 어르신들은 직전에 군수 영감, 시장을 하신 분들인데 정년 2년 전에 물러나서 농조 조합장으로 일하면서 정년을 맞이하시는 거라네." 요즘 공로연수에 해당하는 기간에 농조 조합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35년 40년 전에 공직
지금 9급 공무원이라면, 9급 공무원을 준비중이라면 一瞥(일별)해 보기를 권하는 이야기다. 1981년 8월 8일 아침에는 팔탄면 구장리에서 퇴비증산 작업을 하고 마신 동동주에 살짝 취했다. 면사무소 회의실 장의자에서 널부러져 단잠을 자고 있는 나를 깨우는 이가 있다. 발로 뻥 차는 느낌이 들었다. 발령이 났단다. 순간 1년여 만에 나도 고향인 비봉면으로 가는구나 했다. 도청 발령은 생각하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도청으로 발령이 났단다. 1981년 8월10일자로 도청으로 가기전에 군청에 들러 내무과장이 주시는 전출 발령장을 받았다. 요즘에도 가끔 연락하는 선배가 내무과에서 대기중인 나에게 다가와서는 큰 소리로 ‘이 서기 축하해요’ 한다. 이분이 팔탄면 출신인데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축하하는가 묻자 “몰랐나? 팔탄 출신 이 서기가 도청으로 간다네” 했다. 일어서서 수줍게 인사를 하였다. 비봉면 출신이지만 비봉면에 근무하고 방위 받고 팔탄면으로 복직 되었다. 누구나 我田引水(아전인수)에 익숙하다. 도청은 팔달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발령 받은 곳은 농민교육원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가 별로 없었는데 선배에게 물으니 병점에서 2km 들어가면 농촌진흥
도청 7급은 실무자이고 시청과 군청의 7급은 차석입니다. 도청 계장은 사무관이고 시청 계장, 구청 계장, 동사무소 사무장은 주사 6급입니다. 영화 7급공무원에서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배우 김하늘과 남자 요원이 현장에서 충돌하는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아마도 정보기관 직원은 7급 공채를 하는가 봅니다. 7급 공채도 있지만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9급에서 시작한 공무원이 7급이 되기까지 8급을 거치게 되면 10년 이상 공무원 밥을 먹게 됩니다. 따라서 7급 공무원은 중견입니다. 공직의 기능과 역할, 파워, 단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바람 강하게 부는 바다 근처 넓은 강가를 따라 자라는 갈대의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 중 충돌하는 순간에도 사고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헬기나 전투기를 주택가를 피해 산으로 몰아 추돌하는 살신성인의 조종사 이야기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7급 공무원은 언론과 충돌할때 어느 지점이 부드러운 재질인가를 잘 파악하고 있으므로 '적땅껏' 대응하다 안 되면 작전상 후퇴를 하여야 합니다. 戰史(전사)에 정말로 작전상 후퇴가 있다고 합니다. 행정에서도 정말 안 되는 일은 작전상 기권하거나
2008년 8월에 경기도의회 부의장, 당대표, 상임위원장, 재선 이상 의원 40여명을 모시고 공무원 8명이 묵호항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여 일본의 중등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한 것을 규탄하는 '독도수호 결의대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독도일정 방문에 있어서 이른바 '미스매칭'이 발생하였습니다. 도의회 의원단은 묵호항 1박, 울릉도 1박의 2박3일 일정을 잡았는데 여행사간 미스매칭으로 울릉도 2박으로 판단하여 금요일이 아닌 토요일 배표를 확보하였고 일행은 금요일에 다시 돌아오는 일정으로 알고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도의회를 출발한 버스 2대에 도의원과 공무원이 탑승하였는데 1호차와 2호차에 공무원 4명씩 분승하기로 하였으나 1호차에 의원님이 다수 승차한 관계로 공무원은 저 혼자만 남게 되었고 공무원 7명은 2호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참을 달리자 생수를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고 물병과 휴지 등 이런저런 소품을 나르는 저에게 부의장님께서 "직원들도 함께 나르지"하시는데 "공무원 7명이 의원님께 자리 내드리고 2호차에 탑승하였습니다"라고 답했다. 계획상으로는 4명씩 분승예정이었으나 의원님들께서 1호차를 선호하시므로 혼자 남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