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한 마리 햇볕 한 줌 물고 능소화 꽃을 바라봅니다 능소화 꽃도 물끄러미 새를 바라봅니다 파란 하늘은 뭉게구름을 안고 뭉게구름은 온 세상을 안고 있습니다 점보다 작은 세상 속에서 새 한 마리 바람 길을 따라 날아가고 있습니다. 휘청거리며 날고 있는 새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과 햇살 바람과 꽃을 품고 있는 새 한 마리 새가 세상을 만들고 새가 만든 세상 속에서 꽃들은 피고 있습니다 새 한 마리 그리움이 몰려 올 때는 날개깃에 부리를 감추고 잠이 듭니다. 김재자 시인 경기 화성 출생 / 일간지에 ‘노랑부리 백로’ 등을 발표 작품 활동 / 시집 '말 못하는 새'가 있으며 글샘동인, 현재 용인병원유지재단 행정부원장 역임 -시작메모- 새는 우리 인간과 가장 가까운 생명체다. 새는 사람을 닮아가고 사람 또한 새를 닮아 간다. 우리 주위에서 눈을 뜨면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것이 새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새처럼 날고 싶은 마음에 결국은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만들었다. 시인은 새를 모티브로 하여 평소 가슴에 품었던 마음을 한 편의 시로써 풀어냈다. 새를 근간으로 요즘 한창 피고 있는 능소화, 그리고 햇살과 파란하늘, 바람과 구름을 적당히 버무려서 거대한 세상을
1993년초까지 도시과에서 남한산성 도립공원 지원, 온천관리, 도시계획도로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16년 공직생활 중에 자신의 담당업무를 하면서 현장에서의 큰 보람을 느낀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부서에서 보람차게 일했습니다만 도시개발계의 업무는 현장이 확연한 일이었습니다. 남한산성 도립공원과 함께 김포약암온천, 화성 월문온천, 포천 신북온천 등은 현장을 볼 수 있는 업무입니다. 도시계획도로 업무역시 공사현장이 있고 2년정도 진행되면 어느날 깔끔한 도로가 개통되어 지역 주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는 성과 측정이 가능한 사업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장을 다니면서 보람을 느끼고 이렇게 행정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서 보람차게 일했습니다. 지금도 포천 신북온천에 가면 당시의 관보에 올라간 지구지정 고시문을 볼 수 있습니다. 남한산성에 가면 올해 예산으로 개선된 시설물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날 고향 선배가 만나자고 합니다. 예산담당관실 주무계 삼석 주사자리에 오라합니다. 경기도청 예산계 실무자라면 1981년 도청 전입 당시에는 생각도 못한 일인데 시간과 세월도 흘렀지만 주변에서 중요부서에 배치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피
1994년은 예산부서에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기입니다. 한여름에 예산편성을 시작하여 겨울 크리스마스를 지내야 마감되는 대정정의 기간입니다. 6월경에 편성 기초를 시작하여 8월, 9월에 열정적으로 업무를 진행합니다. 추석을 맞아 이틀을 쉰후에 겨울이 될때까지 금토일 모두 출근했습니다. 한여름에는 작업실 에어콘이 없으므로 옆사무실 에어콘을 켜고 찬바람 출구에 못자리에 쓰이는 통비닐을 연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찬바람이 배달되는 비닐통로가 지나는 구간에 물방울이 맺혀서 바닥에 우두득 떨어지므로 장시간 에어콘 바람을 수송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어 본격적인 일을 하게되면 판장모 내듯이 예산과목별로 하루하루 작업을 진행합니다. 일반운영비, 여비, 재료비 등 각 항목을 실국, 실과, 부서, 사업소까지 정리하여 일괄처리한 후 기본경비에 대한 예산은 기획관리실장님 전결로 결정을 합니다. 이어서 지역개발비 등 예산액이 큰 사업비에 대한 편제에 들어가서 개별 사업별로 도지사님의 결재를 받았습니다. 중간에 부지사님께도 5시간 이상 장시간 보고를 드립니다. 예산내용은 전산프로그램에 입력하고 이를 심사한 후 최종액이 결정되면 자동으로 계산되어 예산규모를 정하게 됩니다.
예산업무에 종사하다 보니 새로운 용어, 중요한 규정에 접하게 되었고 이를 모아보니 작은 책자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예산용어집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바쁘게 일하다 보니 1권 보존을 했어야 하는데 지금 집어디에도 그 자료집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이 자료집을 보고 참고하여 공부하고 도움을 받았다는 동료, 후배 공무원들의 격려를 조금 들은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을 회고해 보면 예산의 구분, 계속비, 명시이월, 사고이월, 예비비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산안의 편성, 심의, 의결, 집행의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예비비란 예측하지 못한 지출 수요에 충당하기 위하여 일반회계 예산의 1% 범위내에서 정하도록 한 예산입니다. 예비비 지출은 집행부에서 하고 차기 의회에 보고하여 승인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지방재정법 제43조(예비비) ①지방자치단체는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의 지출 또는 예산 초과 지출에 충당하기 위하여 일반회계 예산 총액의 100분의 1 범위 내의 금액을 예비비로 예산에 계상하여야 한다. 명시이월과 사고이월은 논의, 논쟁사항이었습니다. 예산을 편성하였는데 당해연도에 원인행위를 하지 못한 사업을 예산서에 표기하여 이월하는 것을 명시이월로
2002년 월드컵 안정환의 미국전 헤딩 동점골 순간에 사무실에 혼자 있었습니다. 혼자서 방방 뜨면서 기뻐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해 보아도 생생합니다. 모든 선수와 스탭이 엉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하루종일 슛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인터넷으로 다시보기를 해도 그날의 감동이 떠오릅니다. 당시 업무는 도지사님 인터뷰입니다. 방송국, 신문, 월간지, 주간지, 일간지 등 모든 언론에서 오는 인터뷰를 섭외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임무입니다. 참으로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입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가지 중요한 포인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중앙지가 도지사 인터뷰를 싣는 경우는 연초에 시도별로 돌아가면서 박스 기사 기획을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급한 것은 아닙니다. 중앙사로서는 반드시 16개 시도를 돌아가면서 한번은 인터뷰 기사를 올리는 것이니 바쁘면 늦추고 가능하면 서둘러도 됩니다. 두번째로는 현안이 있을때 인터뷰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는 중요한 기회이고 공보관실에서 미온적이면 인터뷰가 킬 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중간에 있는 간부들이 중앙사와의 인맥을 통해서 만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도정 전반보다는 최근 어필하고 싶은 분야
1996년에 예산부서에서 예산 배정 등 업무를 담당하던 중에 1996년4월3일에 경기도지방공무원교육원에 발령되었습니다. 지금은 인재개발원으로 개칭되어 과거 내무부 소속 지방혁신인력개발원(연수원)의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여 확대개편하였습니다. 경기도인재개발원이 쓰던 사무실에는 경기연구원, 경기관광공사, 경기복지재단, 여성가족개발원이 입주했습니다. 이곳 공무원교육원 교재연구담당관실에 사무관 요원으로 배속되었습니다. 발령후 1개월여만에 사무관 승진교육 대상자를 선정하는데 전국적으로 인원이 많아서 3월31자로 끊는 바람에 교육은 가을로 밀렸습니다. 그리하여 교재제작 업무를 하면서 6개월을 기다려 1996년11월23일에 지방행정사무관에 승진, 임관하였습니다. 1977년 5월16일에 공직에 들어왔으니 19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에는 20년 이상 걸린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교재제작 담당과 교관으로 지정되어서 '창의력 신장'이라는 과목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의력에 대한 다양한 교재와 교안을 보면서 다양한 창의에 대한 생각을 키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림으로 보는 창의력이 있고 글로 이해하는 창의성도 있습니다. 그동안 행정조직 안에서 부분 부품처럼
1996년 사무관 승진 교육을 연말에 받은 이유는 전국적으로 별정직 읍면동장이 일반직으로 전환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초까지 읍면동장은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취임해서 지역사회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고향동네의 경우에도 지역 어르신 홍 면장님이 10년이상 면장을 하셨고 1977년 가을에 당시 우리 면의 예비군 중대장을 하시던 윤 면장님이 취임하셨습니다. 대부분 읍면동장은 당의 간부나 지역의 유력인사를 추천받아 군수가 임명하였는데 제도가 바뀌어 6급 공무원이 조기 퇴직하여 별정5급 읍면장 발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일반직(행정, 농림, 토목, 건축, 환경 등) 공무원을 임명하였다가 다시 본청의 과장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7년초부터 전국적으로 읍면동장이 사무관에 승진하기 위한 교육수요가 크게 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96년 4월3일자로 직무대리 발령을 받았던바 3월말로 교육대상자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3일 차이로 다음 교육을 기다려서 1996년11월22일에 제4기 초임관리자 과정 교육을 마치고 11월23일에 사무관에 승진하였습니다. 6개월 정도 늦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사무관이라는 직함을 받으니 힘이 났습니다. 조상님 묘역
도청 출신 조금 선배들은 6급에서 사무관 직무대리를 받고 동두천시청에 와서 과장 보직을 받고 공부를 해서 사무관 시험을 보았습니다. 주관식 사무관은 논술을 본 분들이고 객관식 사무관은 5지선다형 시험을 통과해서 사무관에 임용된 분들입니다. 하지만 1996년, 1997년에는 6급에서 5급 보직을 받고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6주간 교육을 받으면 사무관에 승진했습니다. 그러니 1997년부터 동두천시청에 발령받고 온 사무관들은 오는날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으므로 시 공무원들과 시민들은 전임자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셨습니다. 더구나 3명이 한 숙소에 기거하면서 매일 만나 시정에 대해 토론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근무했습니다. 그 숙소는 폐지된 배수지 탱크 옆의 청경 근무초소였습니다. 방3개를 어렵게 원룸처럼 꾸미고 살았습니다. 가끔은 시청 간부를 초청하여 삼겹살을 구워먹었습니다. 재료를 구매하여 직접 구워 먹으면 더 맛있고 적은 금액으로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윤영우 부시장님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시고 택시를 잡아타고 관사로 가시는 모습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세명의 사무관은 생연1동장, 생연4동장, 상수도사업소장입니다
지난해 수해복구를 마치고 본격적인 동장으로서의 임무를 계속했습니다. 1998년 말이 되면서 수해피해, 상공업 기반의 부족, 구시가지의 한계점 등으로 인해 우리 동 인구 5,000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계담당이며 지금 시청 간부인 오천명씨 혼자서 동사무소를 감당하여야 한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동생은 오정명, 형은 오천명인데 우리동 주민수는 4천대로 내려갔습니다. 결국 1998년11월30일에 생연3동과 생연4동을 합하여 중앙동이라 하고 3동 이상용 동장님이 통합 중앙동 동장이 되시고 저는 시설사업소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동 사무장도 시설사업소 운영계장으로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정들었던 동사무소 동료들도 중앙동, 다른 동, 시청 등으로 떠나갔습니다. 과거 동두천읍 시절의 중심지가 공동화 현상으로 인하여 통합되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1999년에 들어서서 시민회관, 종합운동장, 도서관을 관리하는 시설사업소장의 임무에 흥미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수원 집으로 왔다가 일요일 오후나 월요일 새벽에 시청에 올라가서 간부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상수도사업소장 신 소장님과 교대로 차를 운행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서수원 집으로 가서 신소장을 태운 후
2000년은 공보실 근무의 최고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공직에서 이만한 성취와 보람의 시대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 가는 길이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례를 빌려다가 우리의 업무에 접목하고 창의적으로 일감을 찾아내어 우리 방식으로 추진했습니다. 도정홍보를 위해 젊은이들의 도정홍보 광고문안 콘테스트를 열었습니다. 도정에 홍보가 되는 것이라면 선거법에 위방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다양한 일을 추진했습니다. 홍보컨설팅을 받아보니 전문가가 따로 있습니다. 글 한줄, 이미지 하나가 독자와 도민의 마음에 큐피트의 화살처럼 꽃힌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고정관념으로 일방적 홍보를 해왔던 우리의 방식에 큰 수술이 필요했습니다. 변화는 계속되었고 공보기능에서 홍보기능이 강화되었고 공보형의 신문게시에서 광고성 홍보문구를 신문에 실었습니다. 도지사님 인터뷰를 물량으로 밀고 나갔습니다. 지역지에서 지방지, 중앙지, 월간지, 주간지, 특수지 등 모든 매체에 도전하였고 방송도 뉴스는 물론 교양프로그램에 경기도정을 끼워넣은 전략을 고민했습니다. 영화촬영지가 시민들에게 큰 관심을 갖게 하는 점을 착안하여 이벤트성 공간을 마련하는 방안도 추진했습니다. 공무원이나 공기관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