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조상 모시기와 왕릉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維歲次 庚子 十月 朔初三日17 代孫

유세차 경자 시월 삭초삼일17 대손/敢昭告于 감소고우

 

顯 十二代 祖考 通政大夫 敦寧府都正 府君

현 십이대 조고 통정대부 돈영부도정 부군

 

顯 十二代 祖妣 淑夫人 平山申氏 之墓 氣序流易

현 십이대 조비 숙부인 평산신씨 지묘 기서유역

 

霜露旣降 瞻掃 封塋 不勝感慕

상로기강 첨소 봉영 불승감모

 

謹以 淸酌庶羞 祗薦歲事 尙 饗

근이 청작서수 지천세사 상 향

 

이 제문을 한글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마치 한편의 漢詩(한시)와도 같습니다. 한문으로 쓰는 문장의 멋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의 외교에서는 늘 한시나 한자 숙어를 인용하여 演說(연설)을 하고 對話(대화)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2023년 10월10일에 후손들이 고하나이다.

12대에서 5대조 할아버님 할머님 !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돌아오니 영원토록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이에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해석문에서는 瞻掃封塋(첨소봉영)이 생략된 듯 보입니다. 이는 묘역주변을 정리, 벌초했다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읽고 이처럼 한글로 번역한 자료를 젊은 후손들에게 배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젊은이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벌초와 시제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하는 시대적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발전적인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선 벌초일과 시제일을 알리는 수건을 가가호호 4개씩 배부하고자 합니다. 전년도에 만든 수건에 내년도 벌초 일시와 장소, 그리고 시제 일시와 장소를 인쇄하여 배포하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집에서 수건을 쓸 때마다 벌초일을 기억하고 시제일에 맞춰서 일정을 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제일을 음력으로 정한 것을 풀어서 양력으로 하되 매년 10월 첫주 토요일이나 일요일로 하면 좋겠습니다.

 

현재 벌초일은 매년 10월 첫 번 일요일로 정해졌으니 직장을 다니는 젊은이들도 일정을 잘 조절하면 다수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첨가하는 것은 며느리가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벌초 날에는 아이들과 함께 와서 여름날의 야유회로 삼고 시제에는 종부를 비롯한 집안의 활동성 있는 며느리들이 동참해 주기 바랍니다.

 

종중에서는 벌초에 온 자손, 며느리, 손자손녀에게 참가수당을 주시기 바랍니다. 재정여건에 따라 실비 이상으로 보상적인 금원을 지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기계를 가져온 자손에게는 30% 할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향에 사는 자손들은 농사용으로 보유한 제초기계를 가져옵니다. 이들에게도 연료비, 인건비를 지급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집안으로 시집온 것이니 두 배로 지급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소식이 널리 퍼지도록 홍보에도 노력하여야 합니다.

 

손자손녀 어린 아이들에게도 같은 금액을 종원과 같은 금액을 지급하여 존재감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참가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소중한 投資(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살아보니 60까지는 살기 위해 살고 60세부터 80세까지 20년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기간으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문중을 보면 80후반의 회장님과 70을 넘긴 총무격의 형님과 실제 50대 총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10대에 배우고 30대에 참여하고 50대에 몇 명이 문중을 이끄는 중심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더 늦으면 체계적인 관리와 운영이 어렵습니다. 종중의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 투자해야 합니다.

 

어려서 쌍둥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면서 장난감이나 먹을 것을 사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딸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돈은 수협은행에 가면 언니들이 주잖아!”

 

아이들은 은행에서 무한정 돈을 내주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엄마가 설명했습니다.

 

“아빠가 직장에 가서 돈을 벌어 은행에 입금해야 엄마가 찾을 수 있는 거란다”

 

이후부터 아빠는 가끔 아이들에게 5천원을 용돈으로 주었습니다. 아빠의 존재감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초등학생때 식목일 행사에 데려갔습니다. 마침 성남시 권두현 부시장님(경기도부지사, 새마을중앙회 사무총장, 지방행정동우회회장)이 아이들에게 1만원씩 용돈을 주셨습니다. 아이들은 식목일 행사에 가면 누군가가 돈을 주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다음 해에는 식목일 행사장에 가서 동료에게 2만원을 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식목행사에 온 것을 격려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1만원씩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후에 몇 번 더 식목일 행사에 갔으므로 아이들은 경기도 땅에 여러 그루의 나무를 심었고 그 나무의 광합성으로 나오는 산소를 호흡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례를 볼 때 자손들이 벌초와 성묘에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인책이 있어야 하는데, 공자 왈 맹자 왈로 아무리 효를 강의해도 듣지 않을 것이므로 현금, 현찰로 유인책을 쓰자는 건의를 합니다.

 

그리고 會(회)자 行列(항렬)의 작은 족보를 만들어서 종원들에게 배포하고자 합니다. 자손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도록 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족보 여백에는 주소록을 만들고 연락처도 싣고자 합니다. 인터넷 시대에 밴드를 만들고 단톡방, 홈페이지도 여건에 따라 만들어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벌초일에는 종산 입구에 입간판을 세우고 비봉농협의 급식서비스를 이용하여 깔끔하게 점심을 제공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현장에서 식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에는 벌초 후 비봉면 소재지 식당으로 모이라 하니 고향에 사시는 어른들은 귀찮아서 참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젊은이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작업을 마치면 곧바로 귀가하곤 하였지요.

 

이른바 物心兩面(물심양면) 작전입니다. 처음에는 수당을 받는 유인책으로 끌려온 듯 보이지만 와서 보고 조상의 의미를 알고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참여하는 기준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종중에 나타나기는 쑥스럽고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든 초기에는 여럽고 크게 투자를 해야 시책이든 사업이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의미를 더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벌초와 시제에 참여하고 그 참여를 바탕으로 올바른 자아의식과 인생관, 가치관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종중을 이끄시는 리더들이 과감한 투자에 同意(동의)를 하셔야 합니다.

 

돈이란 움켜쥐고 아껴야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재투자를 해서 더 큰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인처럼 우리는 어렵게 받은 종중 돈이지만 이쯤에서 과감한 투자를 통해 자자손손 이어지는 종중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은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의 차남 효령대군파입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장남 정종에게 왕위를 물렸고 태종이 이어받았습니다. 조선왕 27명의 518년의 계보를 연이어 정리해 보았습니다.

 

재임기간이 긴 순서로는 영조 52년, 숙종 46년, 고종 44년, 선조 41년, 중종 38년, 순조 34년, 세종 32년입니다.

긴 세월동안 왕위를 유지하면서 큰 업적을 이룩하신 왕이 많습니다. 강의에서 들은 바로는 조선초기에는 왕권이 강하지 못하고 고려말, 조선초 신하들 사이에서 왕이 조율을 했다고 합니다. 이를 인정해 주다보니 사색당쟁이 심각해 진 것일까요.

 

일본이 조선을 침략을 할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현장 조사결과도 사색당쟁처럼 갈렸다는 이야기를 초등학교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기억도 있습니다. 역사는 쉽게 평가할 과목은 아니겠지만요.

 

1392태조(6년)1398정종(2)1400태종(18)1418세종(32)1450문종(2)1452단종(3)1455세조(13)1468예종(1)1469성종(25)1494연산군(12)1506중종(38)1544인종(1)1545명종(22)1567선조(41)1608광해군(15)1623인조(26)1649효종(10)1659현종(15)1674숙종(46)1720경종(4)1724영조(52)1776정조(24)1800순조(34)1834헌종(15)1849철종(14)1863고종(44)1907순종(3)1910

 

조선시대 역사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기간이 있습니다. 그런 역사가 되 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임진왜란 후에 유성룡은 懲毖錄(징비록)을 적었습니다.

 

[징비록]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반면교사, 류성룡의 『징비록』은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책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징비하고 있는가? 이 책을 쓴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한 선조 시대 최고의 재상으로, 그를 빼놓고는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순신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하여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 당쟁을 벌이는 대신들과, 권력을 지키고자 일생 동안 신하들을 이용하고 백성에게 고난을 준

선조가 나라를 이끌던 이때에 류성룡과 이순신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천운이라 할 수밖에 없다.

 

구리시에 소재한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 시조의 묘역입니다. 태조는 자신의 묘를 함흥에 써달라고 유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함흥에 모시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들 태종과 신하들이 논의한 결과 함흥의 흙과 풀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태종은 묘역을 조성한 후 봉분은 벌초를 하지 말도록 御命(어명)을 내렸습니다.

 

아버지께서 유언하신 바는 함흥에 묘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함흥에서 흙과 풀을 가져와서 봉분을 만들었기에 봉분의 풀은 베지 말고 그대로 두도록 한 것입니다.

 

결국 다음 해 한식날에 겨우 내내 찬바람에 흐트러진 건원릉의 억새풀을 걷어내는 행사를 합니다.

 

구리시에서는 부시장이 행사에 참석한다 하므로 구리시청 선배 부시장께 후임 지목을 요청한바 있지만 결국에는 인근의 남양주시청에 1년간 근무했습니다.

 

남양주시에는 건원릉이 있습니다. 고종황제, 명성황후, 순종황제,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가 모셔졌습니다. 단종왕비 정순왕후의 사릉이 있습니다.

 

光陵(광릉)樹木園(수목원)으로 더 알려진 세조(수양대군)의 능이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습니다.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사약을 내렸습니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운명적인 악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슬픔에 잠겨 시를 남겼습니다. 그 비문이 단종의 마지막 거처인 淸泠浦(청령포) 건너편 언덕에 슬프게 자리잡고 서 있습니다.

 

천리길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시를 음미해보니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한 단종의 애절함이 있고 금부도사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아픔을 주도한 세조의 광릉은 졸지에 남편을 잃고 노비의 신분이 되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잠든 사릉과 멀지 않은 거리여서 역사적인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광릉을 조성하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건드리지 말라는 御命(어명)이 있었고 이후 500년 동안 천연림으로 광릉이 이어져 왔다고 합니다.

 

1년에 2일 열리는 광릉수목원 축제에서 아침 9시 반경에 비공개 구역에서 만난 나비들의 춤은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결국 조선왕릉은 구리에서 시작하여 남양주시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남양주 홍유릉 인근은 1910년 이후 왕족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의 묘역이 조성되었습니다.

 

앞으로 홍유릉 인근에 ‘조선왕릉 미니어처’를 만들기를 건의합니다. 홍유릉, 영친왕, 덕혜옹주, 의친왕릉 구간의 토지에 설치하면 좋겠습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장을 건립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니어처에 IT를 접목해서 역사이야기, 동영상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우리의 후세대가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