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원경선 원장님 기사문입니다. 2023년 추모 10주기를 그리며 2023년 올해는 풀무원의 창립자인 故 원경선 원장님의 추모 10주기가 되는 해다. 일찍부터 사람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이웃사랑, 생명존중을 말하고 실천했던 아름다운 농부, 유기농의 아버지, 그리고 풀무원의 원장님.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원장님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는 풀무원이 걸어온 길, 또 가야 할 길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가슴속에 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1953년 풀무원을 세우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을 상대로 토목청부업을 운영했던 젊은 시절.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옳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책을 느꼈다. 전쟁은 굶주리고 헐벗은 수많은 고아와 넝마주의들을 낳았고, 원경선 원장님은 1만평의 땅을 농토로 개간해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 ‘풀무원 농장’을 만들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사람답게 만드는 풀무질, 풀무원의 시작이었다. 1976년 유기농을 시작하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남의 건강을 해치는 농약을 칠 수 있느냐.” 1970년대는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던 시절
오늘 서울 신사역 1번출구에서 600m 거리의 한식당에서 행복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환경재단(대표 : 최열)에서 주관한 “4차산업 리더십과정”강의를 함께 듣고 중국여행을 함께 다녀온 원우회원의 정기 모임입니다. 광역버스를 타고 수원을 출발하여 양재역 인근에 하차하여 초여름의 서울 구경을 시작하였고 다시 양재역 지하의 시원한 구간으로 들어가서 신사역 방면으로 달리는 더 시원한 기차에 올랐습니다. 이제 지하철에서도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가 많아졌습니다. 3년간 지하철은 물론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마스크를 벗으면 식당 종업원에게 ‘야단’을 맞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을 잘도 버티고 살아 왔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사역에서 카드를 찍고 1번 출구로 향하면서 오늘부터 법으로 정한 만 나이로 살게되어 1살 어려졌으니 행복한 일입니다. 1958년생 생일이 지나는 연말 12월에는 나이 들었다고 국가에서 허락하는 발그레한 색상의 ‘무상교통카드’를 발급 받기위해 농협으로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虎視眈眈(호시탐탐)하듯이 그날을 鶴首苦待(학수고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느껴 보았습니다. 더러 혹자는 나이 든 것
어제는 일단 태행산(청요리 출신 김재엽 사장은 태항산이라 합니다.)으로 향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고 정신적 지주인 화성시 비봉면 자안1리 태행산은 주변의 쌍학리, 상기리, 청요리를 연결하는 292m높이의 산입니다. 294m라는 분도 있는데 이는 새롭게 무대를 설치하면서 2m 높아졌다 생각합니다. 경기도 수원 남부에서는 높은 산으로 생각합니다. 과천의 남태령은 한양을 기준으로 남쪽에서 높은 고개라는 의미로 노인이 급하게 작명하였다는 정조대왕 전설이 있습니다. 태행산은 태양을 향하는 산이라는 의미가 있다고도 합니다. 치바위는 산 90%능선에 자리하고 있는데 과거 이 바위에 배의 줄을 매었더라는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일단 봉담을 지나 청요리에서 올라가는 길에 도전하였으나 산기슭에 도착하니 길이 없습니다. 오른쪽 벌채한 산으로 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만 우회로로 보이므로 다시 자안이 종산길로 갔습니다. 나중에 산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아까 청요리 우회로가 지름길이었습니다. 높이 오르면 멀리 보이는 것이고 낮은 산길에서는 나무와 숲은 보이지만 산길은 가늠 할 수 없습니다. 종산에 올라 통정대부 응록(應祿)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등산을 시작하였습니다. 비봉면장님과
누구나 가장 높은 자리, 가장 기분 좋아하시는 위치의 호칭을 붙이는 것이 좋습니다. 시골에서 택시를 타면서 말하는 목적지에 '면장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도 45년 전이거나, 1945년 경에 면장을 하신 분이 사셨던 집으로 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시골로 말하면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900번지, 청요리 858번지가 면장댁입니다. 제가 근무할 당시 홍무표 면장님은 남전리 출생이시고 윤완의 면장댁은 청요4리입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속에는 두 집 면장댁이 있습니다만, 이후 공무원 출신으로 35년 근무하고 후반부에 면장을 하신 분의 집은 아직 '면장댁'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하신 분이기에 그 역할의 중요성이 비추어 주민들이 일정 지명을 '면장댁'으로 부른 것이고, 이후에는 도로명주소가 생겨나서 딱히 면장댁이라는 지명을 쓸 이유가 사라졌고 전처럼 한분이 10년이상 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 2년이내에 퇴직을 하셨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실제로 도로명주소 제도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중입니다만, 처음부터 이 제도를 환영한 분야는 '택배'라고 합니다. 여러 집을 다니면서 소포를 전달하는 택배기사님들은 도로명주소에 익숙하
조선시대 착한 농부가 풍년을 맞아서 임금께 감사인사를 드리기 위해 수수엿을 준비하여 한양길에 올랐습니다. 며칠을 걸어서 도착한 궁궐에는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남루한 옷차림과 시골스러운 행색으로 인해 쉽게 궁궐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을 방황하던 농부는 성벽 한구석에 앉아서 슬피 울었습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임금이 농민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은 아마도 정조대왕으로 생각됩니다. 선비차림의 正祖(정조)는 농부에게 다가가 울고있는 사연을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이곳에서 울고있나요?" "네, 저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농부인데요, 임금님 덕분에 농사가 잘 되어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기위해 수수엿을 준비해서 임금께 드리러 왔지만 만나 뵐 방도가 없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선비가 가까이 다다가서 말했습니다. "만약 임금께 이 엿을 드리면 상을 내리실 수도 있을 것인데, 고을의 원님 벼슬을 내리면 받으시겠습니까?" "예, 고을벼슬을 주시면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관찰사 벼슬도 하겠습니까?" "제가 부족하지만, 觀察使(관찰사)도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평복 선비차림의 정조와 농부의 대화를 무르 익었고 참판을 지나 이조판서를 거쳐서
아마도 이솝우화이지요. 국민학생때 도덕시간에 공부한 내용으로 부자가 당나귀를 팔러가고 있습니다. 당나귀를 끌고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가고 있는데 주변사람들이 누군가 타고가면 편할 것인데 당나귀를 그냥 데리고 가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당나귀를 타고 마을을 지나가니 동네 아낙들이 걸어가는 아들이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리고 아들을 태워가는데 이번에는 노인정 앞의 노인들이 불효자라 비판을 합니다. 아버지를 태우고 가야지 아들이 당나귀를 타고 가는 것은 어른을 모시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부자 두면이 당나귀에 등에 올랐습니다. 당나귀는 부자의 체중을 견디지 못해 흔들리는 모습을 본 청년들이 동물을 학대한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부자는 당나귀 네다리를 묶어서 장대에 메고 가다가 외나무다리를 만나게 됩니다. 당나귀를 메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큰 소리를 치면서 흥미로워합니다. 아이들의 소란에 놀란 당나귀가 크게 몸부림을 치자 부자와 당나귀는 개울로 빠졌습니다. 옷이 흠뻑 젖었고 더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이솝의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초등학생, 국민학생으로서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협회에 5시경 도착하여 한잔의 커피를 마신바 밤 12시까지 똘망똘망하여 잠이 오지 않아서 이런저런 일 정리하고 공부하고 살피다가 새벽 4시가 되어 어깨가 무거워서 잠시 한시간 잠을 청한 후 다시 기상하여 절하고 자리에 앉아서 지난날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중학교 2학년경에 한자공부 숙제를 하룻밤새 완성한 기억이 납니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서 한자를 쓰는데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펜을 잡은 부분이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려서는 하룻밤 새우는 일이 어렵지 않았고 젊어서도 청춘의 힘으로 밤을 새웠으며 35세 1993년경에는 예산담당관실에서 6개월을 자정넘겨 일하고도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잠을 평소만큼 채우지 못하면 아침이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5시에 절을 마치고 자리에 오니 평소의 상태인듯 눈이 편안하고 몸도 개운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커피 덕분은 아닐 것입니다. 커피는 잠을 오지않게 하는 카페인 기능을 다한 것이지 몸을 개운하게 하는 효능은 아닌줄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몸을 바로한 명상에 이은 절하기의 효과로 지금 심신상태가 양호하여 집중이 되고 새로운 활기가 돌아오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봅니다. 그런 자세로 일취월장, 권토
하루 두시간 자고 피곤하니 다음날은 잠이 쏫아집니다. 잠잠잠입니다. 서울의 잠실은 누에를 많이 키워서 잠실이라 합니다만 누에는 평생 4번 잠을 자고는 고치를 만들어 비단을 선물합니다. 누에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계속해서 뽕잎을 갉아서 먹습니다. 다른 것은 먹지 않고 오로지 뽕잎만을 먹고는 비단을 만들어 냅니다. 편식하는 누에는 비단을 만들어 인간을 이롭게 하는데 다양한 음식을 회자하는 인간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그 먹은 음식의 힘과 에너지로 더 많은 재물을 모으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4잠을 자고 성장한 누에는 뼈도 없는 몸을 비틀어서 타원형의 고치를 만들어 냅니다. 그 길이가 800m라고 하던데 확인이 필요합니다. 확인되었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1,500m라고 합니다. 다시 생각을 돌아보니 800m는 모나미볼펜의 글씨쓰기 길이인가 봅니다. 살면서 기억해야 할 숫자가 참으로 많습니다. 어려서 초등생시절에는 삼세번, 3요소를 많이 외운 기억이 납니다. 연극의 삼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라 했습니다.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인데 이를 다 섞으면 검정이 된다는 오묘한 진리를 배웠습니다. 가정의 삼요소는 아내, 남편, 아이들일까 생각해 봅니
▩ 역사 스토리텔링 단종은 조선 제6대 왕(재위 1452∼1455)이다. 문종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이 되었고, 단종 복위운동을 하던 성삼문 등이 처형된 후 서인으로 강등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단종의 유배와 사형을 집행하러 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청령포를 마주 보는 강 언덕에서 비통한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 1453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 인, 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당하였고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던 한명회, 권람 등의 강요에 의하여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나이 어린 상왕이 된 것이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에 유배된 것이다. 중학생 때 박왕희 역사 선생님은 “성박이하유유”로 기억하라 했다. 단종은 세종 23년 1441년에 출생하여 바로 원손에 봉하였고 1448년 세손, 1450년
2023년 7월3일부터 화성시 시민옴부즈만이 되었습니다. 정명근 시장님으로부터 위촉장을 받았습니다. 위촉을 받고 마음에 큰 고민을 하기로 했습니다. 현직 공무원으로 일할 때 더 열심히 일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남의 바둑판을 보고 훈수하는 것이 쉽다는 말처럼 퇴직해서 보니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실천하지 못한 일들이 많습니다. 정부, 지자체의 행사에서 사회자는 국민의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후에 ‘이하 의식은 생략한다’고 말합니다. 국민의례는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에 대한 묵념 등이 있습니다만 길게 잡아도 10분 이내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중요한 내용이지만 사회자는 시간 관계상의 이유를 들어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식을 건너뛰고 급한 듯 행사를 진행합니다만 이후 참석자 소개에서는 10~20분을 소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 가지 제안을 해 봅니다. 먼저 ‘이하 의식은 생략한다’는 사회자의 멘트를 “생략”하자는 제안입니다. 송구한 마음으로 이하 중요한 국민으로서의 의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으로서의 의전을 갖추지 못함을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