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양주 오봉산 석굴암으로 달렸습니다. 구리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시 달려가니 1시간30분 정도에 당도합니다. 우선 가져간 갈퀴를 조립해서 마애불 주변의 낙엽을 정리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와 갈퀴를 가져갔고 도착하자마자 작업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초 3일로서 사찰에서는 큰 행사가 열리는 날입니다. 신도들이 많이 오셔서 예불을 준비하십니다. 스님 3분이 교대로 불경을 암송하시고 신도들의 발전을 기원하십니다. 건강기원, 사법고시 행정고시 임용고시 합격, 사업 잘 되고, 부동산 거래 잘되고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이 대부분 입니다. 스님의 낭송으로 이강석, 최경화, 이현아, 이현재 이름이 불리어지니 새로움이 있습니다. 수백명, 1,000명이 넘을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다 거명하시고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고나니 12:40분입니다. 법문을 마치고 공양간 앞으로 내려오니 주먹밥, 시루떡, 과일 등 점심 도시락을 주십니다. 아주 내실있는 구성입니다. 시간도 조금 지났거니와 산 중턱 7부능선 비탈에 자리한 오봉산 석굴암에서 점심으로 받아온 음식을 그 아래 유격장 입구의 한적한 자리에서 주차하고 받아온 음식을 하나둘 음미하면
집에서 TV를 통해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있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먼 공간을 여행하는 이야기인데 과거와 현재를 혼용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가족이 보낸 멧시지를 수십년 후에 읽는 장면이 나오는데 딸의 메시지에서 아버지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날 때의 아빠 나이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는 딸의 이야기가 "이제는 더이상 연락이 닿지 아니하므로 아버지를 보내준다"고 합니다. 우주 공간에서 뒤늦게 딸이 보낸 메시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일부 우주인은 동면을 통해서 생체리듬을 느리게 하여 인간세상에서보다 더 길게 살면서 우주선을 운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지구를 출발한 우주선이 화성에 착륙했다는 보도를 보았는데 과거 영화에서 이처럼 미래지향적인 내용의 스토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냥 지구에서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 우주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상상하는 인간의 두뇌구조에 대해 다시한번 깊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시간이 100년쯤 지나면 지금의 고뇌, 갈등, 어려움은 의미가 사라질 것입니다. 살아있는 존재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최근 LH부동산 투기사건으로 2명이 자살을 하였는데 뉴스에 의하면 두 사람 다 깊이 있게 투기
많은 분들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만 저녁에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나 일찍 잠을 청하는 날에도 다음날 새벽 몇 시경에 일어나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으면 그 시각에 잠에서 깨어나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새벽에도 4시반에 할 일이 있으므로 긴장을 하고 잠을 청하니 4시경에 기상하였습니다. 혹시 몰라서 4시20분으로 알람을 설정했습니다. 하지만 4시에 기상하였고 알람은 즉시 해제하였습니다. 알람 설정을 더러 합니다만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난 경우는 10번에 한번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신이 주시는 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다음날 아침의 예정 시각에 일어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을 청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침에 잠을 자기 시작해서 저녁에 깨어나서 일터로 갑니다. 각자가 일어나야 할 시각을 정하면 신의 임무가 되고 신들이 각각의 사람의 기상 시각을 관장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큰 무리없이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아침에 늦게 일어난 버스 기사님은 수많은 출근 시민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일찍 정시에 기상하여 차를 점검하고
한글파일로 일기를 쓰는 경우에는 속마음을 편안하게 적어갈 수 있지만 인터넷상에서는 깊이있는 이야기를 적기가 어렵습니다. 이 글은 세상에 오픈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학생시절의 학폭문제로 스포츠선수들이 곤혹을 겪고 있고 일부는 방송에서 하차하고 선수생활에 큰 여러움을 겪고 있습니다. 연예인은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광고가 빠져나가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글은 그냥 존재할 뿐 밖으로 나가지 않지만 인터넷이라는 사이버공간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과거에 올린 글로 곤혹을 겪는 정치인이 있고 누군가를 비방하는 댓글로 수사를 받기도 합니다. 과거 공직사회에서도 홧김에 올린 글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여러 번 있습니다. 이후에는 글 올리는데 조심하게 되는 공직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과정을 겪어본 우리 이후의 세대 젊은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한계를 겪고 있고 앞으로는 정의를 주장하는 독립운동, 만세운동, 사회운동은 더이상 발휘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를 이끄는 선각자보다는 다른 이의 정책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들만 즐비하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를
일단 절을 하기 위해 엎드리는 순간에 두 손을 바닥에 대고 0.5초 정도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 순간에 머리속에는 시골에서 자랄 때 농경지를 정리하는 불도저의 무한궤도가 일단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 2~3초간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요즘에도 공사장을 지나면서 중장비를 보면 바닥에 눕는 순간은 무한궤도의 사슬이 휴식을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원리를 따지면 누워있지만 그 궤도를 당기는 힘이 가장 강하게 가해지는 순간입니다. 무한궤도가 바퀴 위로 올라갈 때는 느슨하게 관절의 연골에 들어간 힘을 풀어서 쉬는 시간이고 바닥에 누워있는 '침대축구'같은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힘이 들어가서 불도저나 포크레인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절을 올리는 순간 오체투지, 바닥에 업드리고 이마와 팔꿈치를 대는 순간이 가장 강열한 절하기 한번의 마무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으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휴식이 아니라 움직임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모든 일들을 알아내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나머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각이 없고 느낌도 없으며 움직임조차 없는 절하기입니다. 절을 해도 아무런 생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절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은 듯 합니다. 그냥 절을 하고 있으니 몸을 움직이는 것이고 몇번 절을 하였는가를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손에 잡은 염주는 그냥 손에 잡힌 물건이고 절하는 자신은 누구인가 모르겠고 지금 이 공간이 사찰인지 집인지도 모릅니다. 화면에 보이는 해인사의 새벽예불을 보면서 지금 스님이 되어 사찰에서 새벽예불에 참여하고 있는 어느 스님 한 분을 설정하고 그 속으로 감정이입이 되어서 내가 스님인지 스님이 나인가도 분간하기 어려운 오리무중의 심경으로 절을 합니다. 이런 절을 해본 기억이 없지는 않은데 오늘처럼 확연하게 物我一體(물아일체)가 된 경우는 적습니다. 3,000배를 올리던 중에 몇 번은 자신의 존재와 주변의 삼라만상이 하나 되는 느낌이 올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근육이 있고 다리와 허벅지 속에 뼈가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일이 여러 번입니다. 절을 계속 하여 2,000번에 이르면 이제부턴 정신력이고 부처님의 뜻이구나 할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체력으로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힘으로 몸을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건너다보니 절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찰은 사람이 살기에는 많이 불편한 곳을 터전으로 삼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정신수양과 육체적 단련을 위해서 어려운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산기슭에 자리를 정한 사찰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절은 산 중턱의 큰 바위를 대웅전 앞에 배치하거나 큰 돌을 비스듬하게 걸쳐서 건물을 배치합니다. 아마도 스님들은 산속의 맑은 곳을 찾아서 사찰 수도를 하게 되고 주변에 불필요한 사람과의 접촉을 줄이는 효과도 보게 될 것입니다. 스님들이 중생을 구도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합니다만 대승불교, 소승불교에서 말하듯이 우선은 자신이 도를 닦고나서 훗날에 중생을 이끌어간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하여 스님들은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불경을 읽으면서 수도의 길, 구도의 길을 달려갑니다. 그래서인가 산사에 들러도 암자에 가 보아도 스님을 뵙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수도 중이시고 특히 스님들이 수도 중이니 조용히 하라는 안내문을 봅니다. 그 건물에서는 젊은 학승들이 깊은 밤을 낮삼아 수도와 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것입니다. 더러는 20년 이상 고승들이 동안거, 하안거라 해서 100일간 1일1식으
모든 인간에게 신은 평등하여 매일 24시간을 주면서 잠자고 식사하고 쉬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사색하라 합니다. 노숙자의 저녁은 골판지를 모으는 고민의 시각이고 평범한 가정의 밤 11시는 각자의 방에서 나만의 하루를 정리하고 희망찬 내일 아침을 상상하는 행복의 시간입니다. 이제 아침을 맞으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오늘은 어제 죽은 자가 갈구한 하루라고도 하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는 신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24시간 하루를 받으면서 어찌 쓸 것인가 고민을 크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하루하루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숫자만큼 다른 방식으로 보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하루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병상에서 요양원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시는 어르신들의 하루는 길거나 짧을 것입니다. 외롭게 시간을 보내는 하루는 길겠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짧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처럼 각각의 시간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홍승표 부시장님 페이스북에서 빌려왔습니다.] 술 마시는 것도 酒道가 있다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에 관한 전설이나 떠도는 이야기는 많
성철스님을 만날 수 있는 겁외사를 화면을 통해서 봅니다. 스님의 생가는 평야지대에 있고 뒷편에 큰 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뒷편에 고가도로가 지나갑니다. 생가 앞에는 사찰을 지었습니다. 성철스님을 기념하고 이어가는 의미의 사찰로 생각합니다. 스님은 무소유였습니다. 동판으로 만들어진 봇짐과 신발, 지팡이가 비석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처럼 성철스님도 무소유입니다. 불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무소유를 이야기하다 보면 이번에는 성인들의 삶의 모습과 과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소유한 분들이 후세에 남는 경우는 적습니다. 나를 낮추고 양보한 분들이 후세의 존경을 받습니다. 그런 자세로 절하기를 이어갑니다. 절을 하면 나를 낮추게 됩니다. 자신을 알리려 하면 할수록 감춰지고 숨기려 하면 알려지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그러합니다. 알리려고 하지 않는데 널리 퍼지고 소문을 내려 해도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향기입니다. 인향만리 주향천리. 술의 맛은 천리를 갈지 몰라도 인향은 이미 만리를 퍼져나가더라는 말입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절을 하고 일을 하고 새벽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두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 주장하지만 가장 행복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이 불행한 줄 알거나 그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임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자신을 불편해하지 말고 강점과 장점을 살려나가면서 스스로 행복의 길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나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줄 모르고 저렇게 불행의 길로 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오늘 아침 절을 하였다는 사실이 행복입니다.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 코고는 소리가 행복입니다. 부부가 언쟁을 하고 삐치고 토라지는 것은 부부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니 행복입니다. 도대체 부부싸움을 할 수 있는 부부가 행복한 부부입니다. 남남간에는 버스안에서 발을 밟아야 싸울 수 있습니다. 옷깃을 스쳐야 인연이라 말할 수 있지만 옷이 닿았는 줄도 모르고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논산 훈련소 들어가는 날에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는 행복합니다. 아기를 낳았으니 행복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딸을 낳아도 기뻐합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았으므로 논산훈련소에 동행한 것입니다. 딸들은 본인이 원해야 입대할 수 있지요. 그러니 눈물을 흘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