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고향마을 이야기 '비봉면 횡단 걷기의 추억'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고향 동네 걸어서 한 바퀴

2010년 11월 14일아침입니다. 집을 나설 때는 광교산행으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집과 버스 정류장 중간쯤을 걸어가던 중에 고향이라는 화두가 머리를 스쳤습니다.

 

전두엽을 거쳐 대뇌로 들어온 그 고향 화두는 오늘의 여행 방향을 180도 바꾸어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즉 83번을 타고 13번을 타면 가는 광교산이 아니라 51번을 타고 다시 99번을 타면 가는 비봉면 양노리 방면입니다. G20 의장국 대한민국의 교통체계는 무한한 변신을 거듭하여 경기도내 모든 지역을 환승할인 권역으로 구성해 놓았습니다.

 

경기도의 광역교통망 정책이 성공한 일면이 환승할인과 심야 광역권 버스노선 설치일 것입니다. 역시나 광교산 코스처럼 양노리 코스도 환승할인이 되는데 약 200원 더 내면 되는 조금 먼 거리입니다.

 

#51번 버스안에서 임 선배를 향수함

토요일 오전이어서 일까? 오가는 행인이 많습니다. 다문화 아저씨와 아가씨도 많이 지나갑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다문화 시대를 준비하는 단계에서 숙성단계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문화는 세계화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다문화로 성공한 사례입니다. 다문화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이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내버스 안에서 갑자기 메모지를 꺼냈습니다. 51번 버스 안에서 수첩에 적은 메모는 지금 살펴보니 ’글을 버려야 산다는데 버릴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너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라고 적혀있습니다.

 

2010년 팔달 문학에 깜도 안 되는 詩 몇 줄 올린 것에 대한 반성입니다. 한번 쭉 써놓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다가 원고 제출 기한이 임박하면 파일로 긁어서 이창현 총무에게 보내고 그러면 책에 나오는 것에 대한 죄송스런 말입니다. 정말로 반성할 일입니다.

 

작고하신 동아일보 소속 ‘영원한 기자’ 任 선배를 생각해 보라. 원고지 2매도 안 되는 기사를 쓰기 위해 오전 4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을 헐어가며 팩스로 원고를 보낸다.

 

오전 내내 기사 쓰는 모습을 보라. 100자 원고지에 검정색으로 쓰고 청색으로 고치고 적색으로 교정을 본후 다시 정서를 한다. 또다시 붉은 색으로 수정하고 팩스 보낸 후에는 전화로 고친다.

 

뭐 세상 바꿀 일이라고 기사 하나에 하루를 소비한다. 석간 동아일보는 오후 5시에 신문이 오는데 팩스로 보낸 수정 많이 한 기사를 식자 뽑아서 판 뜨고 돌려서 인쇄를 하여 이곳까지 보내는데 4시간이면 된단 말인가. 동아일보사가 임 선배 400자 기사 때문에 있는 것인지.

 

그런데 정말로 석간 동아일보가 오면 지방판 하단에 횡으로 난 1단 기사, 기사와 기사 사이를 골목골목 누비는 임 선배의 기사 내용은 정말로 ‘금과옥조’ 그 자체이었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확실한 내용 전달과 양측의 주장과 평가가 그 짧은 기사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마치 수필을 시처럼, 소설을 시조처럼 표현하는 임선배의 그 모습이 성성한데 이제는 그분의 기사문을 만나기 어렵다. 인터넷을 뒤져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바라본 선배의 모습에 대한 회고다.

 

 

#시골길이 아니더라

1968년에 비봉면 자안리를 떠나 수원역을 거쳐 지금 장안문 밖 영화동에 온 것이 시골에서 신작로를 타고 大處(대처)에 온 첫 기억입니다. 대처의 사전적 설명은 ‘사람이 많이 살고 상공업이 발달한 번잡한 지역’을 말합니다.

 

시골 어르신들은 우리 동네보다 큰 도시화된 지역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대처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냥 큰 곳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이해했습니다.

 

시골에서 가까운 대처중 하나인 수원시에 처음 가는 날입니다. 신작로에는 재래종 미루나무가 가로수가 되어서 양쪽에 서 있습니다.

 

다수의 친구가 공감하는 바인데 이 길을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버스는 서서 흔들리기만 하고 가로수가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버스를 타면 그 느낌이 바뀌어 버스가 앞으로 가게 됩니다. 오목천동쯤에서야 비포장이 끝나고 지금의 아스팔트 길을 들어서는데 그 승차감이 정말 다릅니다.

 

아!!! 도시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속도를 낸 버스는 남문과 북문 사이의 차고지에 도착하였고 버스를 내려 얼마를 걸어서 도착한 집 대문은 쪽문입니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야 했고 나올 때도 앞집 대문에 인사를 합니다.

 

전기불은 시골 살면서 방아다리 가설영화관이 왔을 때 보았던 바 있지만 온통 시가지의 상가와 집에 불이 켜있는 야경은 시골 소년에게 또 다른 감흥을 주었습니다.

 

이 많은 불을 누가 켜고 끌 것인지가 걱정이고 어디서 이 에너지가 오는지도 궁금한 일이었습니다.

 

시내가 온통 정전인데 버스와 택시들은 불을 켜고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건물의 전기와 자동차의 자체 불빛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골 아이였던 것입니다.

 

학교 가서 친구들과 수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집 停電(정전)때 버스 불 켜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주변 친구들은 걱정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집은 정전이고 버스와 택시는 불켜고 다니는 것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과도한 杞憂(*기우)에 빠졌나 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걱정은 창의력을 키우는데 작은 도움이 될 것이라 위로해 봅니다.

 

*杞憂[기우] 앞일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함. 또는 그 걱정. 옛날 중국 기(杞)나라에 살던 한 사람이 ‘만일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좋을 것인가?’ 하고 침식을 잊고 걱정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네이버사전>

 

#고향길을 향해서

수원에 처음 버스를 타고 왔던 이야기는 한 50년 더 이전의 경험입니다. 미루나무 가로수를 뒤로 밀면서 밤길에 올라왔던 그 길의 주변에는 이제 아주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1975년 고등학교 유학시절 토요일에 집으로 가던 이 길에 건물은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비봉길은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건축이 제한되는 곳인데도 주택은 아니고 공장건물, 창고 같은 건축물이 많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비봉면 소재지는 그 좁은 공간에 비좁고 답답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경찰관이 근무하는 파출소도 그렇고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분류하는 우체국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밥집 이름이 청룡집에서 비봉정육점으로 바뀌었고 34번이던 전화번호는 031-3*6-0034로 추억의 번호 34를 흔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반가웠습니다.

 

안에서 일하는 분은 바뀌었습니다. 청룡집 아저씨 빈소에 분향한 것이 한 1년 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사위가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고향 마을로 향하는 길은 중학교 때 다니던 길과 거의 비슷한데 일부 구간이 추가 직선화 공사로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량이 속도를 내면서 먼지를 내고 불안감을 줍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사색의 오솔길이어서 많은 생각을 얻고 버리고 다시 줍고 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사색이 가능한 코스였는데 이제는 트럭과 승용차가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가므로 아무런 생각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연과 소음을 피해 바리골 장고개를 거쳐 멍우리 방면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혼자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 길가에는 존경하는 조한석 선배의 집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 뵈었을 당시에도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인가 가서 밥을 먹고 술도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 겨울 잠바를 빌려드린 분이고 나중에는 책을 빌려드리기도 했습니다.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데 장고개 올라가는 길이 심상치 않습니다. 시멘트 포장이고 이쯤이면 산속이어야 하는데 건물이 나옵니다. 가축 없는 축사가 나타났습니다. 벽을 임시로 가린 비닐막이 바람에 펄럭일 뿐 인적도 가축도 보이지 않습니다. 축산농가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산자락에는 전원주택이 보입니다. 깔끔하고 아름답습니다. 저쯤에 집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바로 그런 자리가 삼각형 숲속에 보입니다. 하지만 이곳도 그린벨트이니 신축은 안 됩니다.

 

안타까운 일이 더 있으니 2개의 고속화도로가 지나갑니다. 차량의 속도감 있는 소리와 화물차의 무게 실린 엔진소리가 쉼 없이 지붕위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집을 먼저 지었는지 도로가 지나가는 그 사이에 집을 지었는지는 궁금한 일일 뿐 알아볼 수 없는 의문입니다.

 

이제 장고개가 나와야 할 시간인데 갑자기 높은 망루에 매어둔 로프가 바람에 흔들거립니다. 크게 찍은 벽돌이 보입니다. 일정하게 줄지어진 작은 조형물이 보입니다. 군부대 유격 훈련장입니다.

 

예비군도 훈련을 받을 만한 곳입니다. 그래도 대략 35년전 기억을 살려 오른쪽으로 난 길로 향했습니다. 이쯤으로 가면 장고개가 나올 것입니다.

 

땀이 날 정도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저만치 군부대 위병소가 보입니다. 혹시 총이라도 겨눌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손을 크게 돌리면서 인기척을 보내고 그냥 지나가는 행인1 정도라는 표시를 하였습니다.

 

더 이상 들어가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서니 검은색 썬그라스를 쓴 초병이 나옵니다. 계급장을 보니 일병(=)입니다.

 

“여기서 멍우리로 가는 길이 있는가요?”

 

“여기는 군부대입니다. 가실 수 없습니다.”

 

“아 예. 이 부대 안으로 가려면 군 입대를 하든가 방위협의회 위원이 되어야 하겠군요.”

 

[훗날 오산시청에 근무하면서 위문금을 들고 이 부대에서 대대장님을 만나서 다음번에 승진하시라 덕담을 했습니다. 고향집이 비봉면 자안리 208번지인데 군부대는 자안리 oo번지라서 많이 신기했습니다. 그 대대장님은 지금쯤 별이 2개 ★★일 것입니다.]

 

미련없이 돌아섰습니다. 어차피 장고개를 걸어 넘어가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추억의 길을 걸어본다는 애초의 컨셉은 있었지만 반드시 강행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 10km 걸어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광교산 가파른 봉우리들이 약간 무서웠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발이골까지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고 삼각형, 델타형으로 우회하는 것입니다.

 

다만 장고개 정상까지 온 길은 평온하였으나 되돌아간 부리고개 길은 불편합니다. 차량의 먼지와 소음이 심하므로 평범한 등산로는 아니었습니다. 고행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번 고개를 넘어 휴게소를 지나 호젓한 산기슭에 접어드니 봄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정말로 양지바른 곳입니다. 인간의 삶은 비교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트럭과 버스가 굉음을 내며 달리는 길을 지나 평온한 오솔길에 접어드니 이곳이 천국입니다. 마른 풀이 등산화에 걸리고 거친 자갈길과 비탈로 미끄러지는데도 거친길을 달려온 나그네에게는 이곳이 참으로 평온하게 느껴집니다.

 

#시골 동네 조용한 길가에서

힘이 듭니다. 잠시 쉬면서 사과 반 개를 먹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 점심밥과 함께 사과 2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집에서 사과 1개를 먹고 나왔는데 2개째 사과를 먹습니다. 가방에는 1개 더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서 만나는 보살핌을 받은 묘소는 평온합니다. 인근 상석에 비문까지 큼직하게 세운 묘소는 억새풀과 가시나무가 무성합니다. 한 15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손들이 移民(이민)을 가셨는지 보살피는 이가 없는가 봅니다.

 

고향의 선산 先塋(선영)에 도착했습니다. 40대후반, 정조대왕 만큼 사신 李完宇(이완우) 할아버지 곁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짧은 삶을 사시면서 전답을 크게 넓히셨습니다.

 

바로 아래 묘지에 영면하신 李命儀(이명의) 할아버지께서 농지개혁, 貨幣(화폐)개혁의 혁명적 변화를 잘 관리하지 못하신 바가 안타깝습니다.

 

무장아지, 김치, 멸치에 콩밥인데 한 5km 걸어온 터라 밥맛이 좋습니다. 쑥쑥 목 안으로 넘어갑니다.

 

물도 시원합니다. 탁 트인 앞자락을 막는 고압철탑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산업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참아야 할 일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영에 자리잡고 앉으면 긴 세월이 보입니다. 어르신들이 사신 시대가 보이고 그 후세로서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후대에 문중이 어떻게 변하고 발전할까 기대감을 가져봅니다.

 

#우리 동네 모습

다시 길을 나서 동네 뒤쪽 길을 택했습니다. 저만치 우리 집 용마루(용두새)가 보입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 다음으로 부녀회장을 이어받으신 집안 아주머니가 알타리무를 손질하시다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한참 동안 여러 사람 이름을 대고서야 신상파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옛날만큼 재미있었으면 하는데 실상은 그러하지 않으시답니다. 그 이유가 서로 내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랍니다.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니 50년전 기억으로 판박이가 됩니다.

 

어려서 본 동네 모습이 전혀 변하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 그 집이 있고 산기슭과 전답의 모습조차 그대로인 듯 보입니다. 참으로 긴 세월 이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주변의 다른 마을은 개발시대를 맞아서 급격히 변하여 상전벽해 하는데 고향마을은 변함이 없으니 고마운 일인가, 다행스러운 일인가, 안타까운 것인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주머니의 토론이 이어집니다. 각박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각종 농산물을 소매로 팔기 때문이라 진단하십니다.

 

먹고 남으면 버리거나 저장하였던 농산물을 수확해서 도시에 나가 팔면 돈이 되기에 이웃간에 주고받는 미풍양속, 상부상조가 사라진 것이라는 판단을 하십니다.

 

그 옛날 함께 살았던 분들이 그립다 하시는데, 정말로 이곳은 사람의 흔적이 그리운 곳인가 생각합니다.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이 고향마을을 힘겹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도심에서는 사람과 차량이 충돌하며 살지만 이곳은 주변에 인적이 끊기고 매일 함께있는 4-5인 가족이 전부인 셈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반복되는 일상에 재미가 없다는 말씀이 나올 법도 하겠습니다.

 

다시 李會琓(이회완) 고조 할아버지를 뵈었습니다. 지난번 종중 벌초행사를 마치고 와서 벌초를 하였지요. 초콜릿색으로 탈색된 상수리나무 낚엽이 봉분을 덮고 있습니다.

 

갈퀴를 가져왔으면 쓰임새가 참으로 많았을 것입니다. 참고로 점심을 먹으며 인사드린 李完宇(이완우) 할아버지는 저에게 증조 할아버지 입니다.

 

마치 태조 이성계 할아버지 봉분과 같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가 함흥의 억새를 보시도록 하기 위해서 봉분에 함흥의 흙과 뗏장을 옮겨 심었고 후대에게 ‘봉분의 억새는 벌초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해서 지금도 가을이 되면 머슴아 머리처럼 갈대머리가 휘날린다 합니다.

 

 

#1965년 초등학교길을 추억함

선영을 출발해서 초등학교 다니던 안산 고개를 향했습니다. 구불구불 논길을 지나 개울을 만나면 참죽나무 2그루 베어 만든 쌍나무 다리를 지났었습니다. 동네 후배 녀석이 네발로 울면서 기어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굽이굽이 흐르던 개울은 직선으로 흐르고 좁은 나무다리 자리쯤에는 시멘트 교량이 설치되었습니다. 승용차는 편안하게 다닐 길로 확장되었습니다. 잘된 일이지만 추억을 찾아온 나그네는 조금 아쉽기도 하였습니다.

 

빈 도시락 달그락거리며 내달리던 고갯길은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마른풀과 낙엽이 차지한 원시림 지대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왕벌이 살았던 왕소나무는 보이지 않습니다.

 

가을 등하교 길에서 정말 큰 알밤을 줍곤 했는데 니키다소나무 40년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왕소나무 할아버지의 행적을 물으니 자신들은 일본에서 移民(이민)와서 이전의 역사는 잘 모른답니다.

 

고개를 거의 다 올라가면 멍우리로 직행하는 길이 나오는데 이 또한 흔적 뿐입니다. 도저히 걸어갈 길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5학년 초등학생 4명이 防空壕(방공호)를 팠었습니다. 그 당시면 1968년쯤인가에 김신조등 31명이 청와대 습격조로 북악산을 넘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곳곳에 목진지가 설치되었던바 우리 초등생 4인조는 학교에서 작업을 마친 하교 길에 이 자리에 방공호를 팠던 것입니다. 제법 넓게 파고 그 위에 나무를 베어 덮은 후 뗏장으로 僞裝(위장)도 했습니다.

 

다음날 멍우리 친구집에 하숙을 하시던 황인각 선생님께서 우리 4인조를 지목하여 일어서라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방공호를 부수었는지 말하랍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판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시고 훼손한 것은 우리 짓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파고 설치하였으며 다른 학생들이 부순 것이라는 답에 선생님의 머쓱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 눈에 선합니다.

 

청룡초등학교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문이 잠겨 교정에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 틈으로 내부를 들여 다 보았으나 옛 추억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졸업 후 운동장을 파내고 교정을 넓혀서 옛날 기억이 남은 부분이 적고 주변에는 공장과 창고가 들어서 있어서 옛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6년을 다녔던 길과 주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간직했습니다. 추억은 남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예술적인 역량이 있습니다.

 

#봉담읍 상기리에서

이제는 돌아갈 시간입니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버스시간표를 보니 한 3시간 후에나 버스가 온답니다. 청요2리를 지나 요골까지 갔습니다. 그래도 2시간 반 후에나 버스가 온답니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지나가는 차량을 얻어탈 요량으로 손을 들어 보았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 보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이 보이고 손만 들면 태워줄 마음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고향마을을 걸어가는 반대의 입장에 된 오늘은 히치하이킹(hitchhiking, thumbing 또는 hitching)이 쉽지 않습니다.

 

수 년전에 동탄 만의사에서 오는 길에 할머니 한 분을 태워드렸는데 동탄에서 오겹살 집을 하시는 분입니다. 딸 자랑을 어찌나 하시던지, 아마도 아들은 없으신가 봅니다. 이런 할머니에게 아들이 있다면 또한 자랑하시는 말씀이 하늘위 구름까지 올라갈 것인데요.

 

하지만 내가 힘들고 다리 아프고, 버스 시간표가 맞지 않아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싶은데 차는 그리도 바쁜지 쌩쌩 달려갈 뿐 정차하지 않습니다.

 

사실 지나가다가 차량이 멈출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는 곳에 서서 손을 들고, 나중에는 모자를 벗어 흔들어도 모두 쌩쌩 지나갑니다. 조금 더 버티면서 손을 흔들어야 하는가 하다가 이왕 추억여행으로 나온 것이니 더 걷기로 했습니다.

 

이제 상기리 저수지에 당도했습니다. 1977년경엔가 자주 왔던 곳으로 이 저수지는 그 당시에 없었습니다. 다만 저만치 산 계곡을 막으면 물이 많이 모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바는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주장해도 인정해줄 사람은 없겠지만 당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기행문을 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저수지 수몰 전에는 저 물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물속에 한 6~7가구가 살았습니다. 차 길이 좁으므로 저수지 물가로 걸었습니다. 모두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짧은 구간에서는 바닷가 모래밭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저수지 뚝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무엇인가 추억꺼리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배낭에서 사과 2-2를 꺼내 한숨이 먹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먹는 것입니다. 더구나 시골 여행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사과가 실하기도 하지만 여행 중 먹는 맛은 집에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저수지 상류를 지나서는 아예 동네 안길로 들어섰습니다. 이쯤에 초등, 중학교 친구 송재일의 집이 있었는데 하고 가까이 가니 개 짓는 소리에 주인이 쳐다봅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 집에 친구가 사시는가 물었습니다.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새로 지었습니다. 30년전 그 집이 아니고 집터도 조금 더 위쪽인 듯 보입니다.

 

 

#1977년을 추억함

상기2리 그때 이장님 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입구는 생각이 나는데 이장님 집터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른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서정적입니다.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도 만나볼 일입니다. 바람을 맞아 억새가 고개 숙이는 쪽에서 보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모질게 바람맞는 쪽을 보니 애처럽습니다. 같은 억새가 보는 방향에 따라 서정과 다큐가 겹친다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이제 상기1리로 향합니다. 당시 이영구 이장님댁을 가보니 문패가 그분이 아닙니다. 이씨 성의 이장이신데 그집 문패가 백씨입니다. 상기리는 이씨와 백씨 집성촌입니다.

 

강씨도 몇 가구 있습니다. 윗동네는 백씨가 많고 중간에 이씨가 많이 사십니다. 상기리 5통에는 백씨와 권씨가 삽니다.

 

농로에서 대내무 지팡이를 얻었습니다. 가늘어서 하늘거리는데도 쉽게 부러지지 않을 듯 팽팽하게 탄력감을 줍니다. 동시에 손에 느껴지는 대나무의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재미있습니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길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걷는데 비둘기 수백마리가 날아 오릅니다. 오랜만에 이 길로 나그네가 지나가는 것인가요. 더구나 대나무 지팡이가 시멘트 바닥을 긁고 때리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나 봅니다.

 

비둘기에게 미안했습니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가을 秋收(추수) 후 남은 나락 몇 개 먹고자 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사실 비둘기들이 1m 옆에 있다고 잡을 일도 아니고 잡았다 해서 어찌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비둘기를 만나다

인간들도 비둘기 마음인가 생각합니다. 미리 피하지 않아도 될 일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입니다.

 

걱정이 필요한 것인지를 조사한 미국 기업인은 한 일주일간 수첩에 적은 걱정꺼리 중 한 2~3%만이 진정 걱정의

필요성이 있었다고 했다지요. 또한 걱정해도 대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노파심’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집비둘기는 사람이 다가오면 모이, 먹이를 줄 것을 아는데 들비둘기는 대나무 지팡이 소리만 듣고도 퍼러럭(펄럭펄럭) 날아오르는 것인가요?

 

하긴 비둘기 중에도 노파심이 많은 애가 있고 겁 없는 집 비둘기과도 더러 있는 듯 보입니다.

 

#상기1리 백씨 집성촌

이제 저 고개를 넘으면 신작로가 나옵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수시로 올 것입니다. 그런데 청룡초등학교에서 이곳 상기1리 왕림 근처를 오는 동안 상기리에서 자안리로 향하는 버스는 3대를 보았으나 자안리~상기리 행 버스는 한 번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한쪽으로만 도는 버스는 아닌 줄 아는데 말입니다. 머피의 법칙처럼 정말로 내가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시내버스인가 봅니다. 82번 타고 광교산 가려 할 때는 51번 도청행 버스가 먼저 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그리하여 정말로 왕림가는 길에 들어섰습니다. 옷과 신발을 사러 온 차들이 가득합니다. 어떤 엄마와 딸은 큰 봉투에 옷을 사 들고 신이 나서 걸어옵니다. 표정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내가 고른 옷을 아빠가 카드로 박박 긁어 주었나 봅니다.

 

#걸어서 12km 정도

버스를 탔습니다. 봉담 휴게소 근처까지 지하도를 거쳐 도착한 정류장에서 잠시 기다려 수원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현재시각 오후 5시반이니 밀릴 시간입니다.

 

잠깐 졸기도 하고 차장밖을 보면서 사념에 잠겨보기도 하다가 수원 세무서 앞에서 내려 다시 환승하여 집으로 향했습니다.

 

지난번 광교산 종주 12km 이후에 평지로 다녀온 장거리 입니다. 대략 12km가 넘을 것 같습니다. 양노리 버스를 하차하여 걷다가 장고개에서 초병만나 되돌아온 길이 3km, 부대에서 산 아래 휴게소까지 2km, 다시 청룡초등학교 3km, 상기리까지 3km 등 합하면 11km입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이장님댁 다녀오고 산길로 오고 가고 상기리에서 봉담휴게소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간 것 다 합하면 12km라고 하겠습니다.

 

#추억을 신선하게

추억이 아름답기는 한데 쓸쓸합니다. 그래도 추억이 있으니 갈 길이 있고 올래길도 있습니다. 둘레길도 있고 고향길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세내어 고등시절, 중등시절, 초등시절의 그 길을 걸어보았고 사회 초년병 시절의 동네도 잘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머릿속 추억은 그대로인 채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린시절 추억의 현장을 보면 전보다 작아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추억을 넣어둔 머릿속을 잠시 비우고 현장을 살핀 후 다시 정돈하여 신선하게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습니다.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