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9급(당시 5급을류)공무원의 월급은 쌀 2가마니 값이었다. 당시 상머슴은 쌀 12가마니를 받았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12가마를 받는 머슴이나 제집에서 다니고 24가마니를 받는 공무원이나 대우는 비슷했다.
그래서 공무원을 말할 때 공복이라고도 하고 머슴이라고 칭했을까? 하지만 공무원의 강점은 호봉과 승진에 있다. 머슴은 소를 부리는 일을 하면 12가마이고 그보다 못하면 10가마, 8가마, 5가마 등 차등이 있었지만 공무원은 24가마로 시작해서 매년 호봉이 늘고 승진하면 봉급이 올랐으니 말이다.
이제 연봉 5천만원이면 쌀 한가마 20만원을 쳐서 월평균 20가마 이상을 받으니 참으로 대단한 처우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많은 공무원들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엥겔계수가 점점 작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비, 문화비, 경조비 등 부수적인 지출이 많아서일 것이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공무원들에 대한 국민의 인식속에는 ‘부수입’이라는 공식적인 단어가 떠오르곤 했다. 공무원들은 무엇인가 추가되는 수입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공무원 봉급이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다. 보너스라는 것이 매 분기 1회씩 주어지고 정근수당이 1년에 2번 주어졌으며 복리후생비가 생기고 시간외근무수당이 추가되었다.
특히 정근수당 초기에는 125%까지 지급되었는데 작은 봉급봉투가 부족하여 10만원권 뭉치를 봉투위에 올리고 철끈으로 묶어서 본인에게 전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계좌이체“제도가 없어서 1,000원권을 누렁봉투에 담아 주었다. 그래서 봉투의 명세서를 매달 고치는 어느 순수한(?) 공무원도 있었다. 일정금액을 빼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요즘 공무원의 보수는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많은 공무원들은 아직도 보수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50대 공무원들은 요즘 받는 보수를 청년시절과 비교해 보면 입이 딱 벌어질 것이다.
순수한 50대 공무원들은 아직도 그 돈의 구매력보다 ‘액면’에만 신경을 써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익은 벼 고개 숙이듯 자신이 이만큼 일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노력하였는지를 반성하는 것일까?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