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1919년 3월에 우리 남양주시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를 부른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1919년에 승하(昇遐)하신 고종황제는 사후에 대한민국 백성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고종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1851~1895)를 홍유릉(洪裕陵·사적207호)에 모셨습니다. 홍릉(洪陵)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셨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왕릉에 등을 기댄 듯 위치한 유릉(裕陵)에는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영면하십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고종과 국정을 논의하는 파트너였으며 당시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가문의 배경이 없는 분이라서 황후(왕비)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홍유릉을 지나 뒷산으로 가면 영친왕을 모신 영원(英園), 이구 황세손을 모신 회인원(懷仁園)이 자리합니다. 의친왕묘가 같은 자락에서 마주하며 특히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묘가 참으로 단아하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의 교육을 위해 고종황제께서는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幼稚園)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정략결혼과 따님을
1980년 22세에 화성군 비봉면에서 팔탄면으로 근무지가 이동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담당 업무는 이른바 ‘주사’가 담당한다는 회계업무였습니다. 면사무소 근무자는 별정5급 면장님, 6급 부면장, 6급 총무계장, 그리고 7, 8, 9급 공무원과 보조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산업계장이 총무, 총무계장이 호병, 호병계장이 산업계장으로 자리이동, 승차하면서 동시에 공무원 3년차 신입에게는 회계담당을 맡겼습니다. 월급 50,000원대를 받던 시절인데 매달 수 백만원을 집행하는 업무는 그 무게감이 엄청났습니다. 우선 월급계산을 하여 대략 20명분 200만원 정도를 농협에서 인출하여 사무실까지 들고 오는데 강도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주변을 살핀 후 급하게 뛰어온 기억이 납니다. 1,000원권 돈다발을 서랍 속에 감추고 한 뭉치씩 꺼내어 봉급봉투에 담아 다시 다른 서랍에 넣었습니다. 봉급 지출액에서 공제액을 제하고 개별 봉투에 넣은 돈이 다 맞아 떨어져야 봉급봉투를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10원짜리까지 맞춰서 담고 나면 200원이나 300원이 남게 되는데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다시 세어보고 지출 내역서를 재삼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은
시내를 다니다보면 가끔 희한하게도 밝은 노란색으로 염색을 한 여성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염색을 마친지 5일정도 지나간 듯 속 머리에는 검은색이 올라오고 있어서 안스럽습니다. 일주일이면 속머리가 자라서 색상이 어색해지는 머리염색을 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4~5일정도 외국인처럼 멋지게 보이기 위해 컬러염색을 하는 그 마음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검은 머리가 자라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염색에 도전하는 것은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 재정과 행정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봅니다. 10억원을 들여서 골목길을 포장하고 시장, 의장, 시의원, 주민이 모여서 준공식을 하고나면 다음날부터 고가의 인근 주민 주차장이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골목길을 포장했다고 해서 교통소통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하는 말입니다. 버스, 택시, 승용차가 자주 왕래하는 도로 중 병목구간을 개선하는데 우선적으로 예산을 투자하고 골목길은 포장보다는 깔끔하게 정리하여 환경, 위생적인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 행정의 우순순위 목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체장과 의원들은 시민의 눈에 보이는 시설을 건설하는데 집중하는
이제는 他山之石(타산지석)이라는 말은 ‘강 건너 불’과는 다르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타산지석은 그대로 풀어보면 ‘다른 산의 돌’이라는 뜻으로 다른 산에서 나는 거칠고 나쁜 돌이라도 숫돌로 쓰면 자기의 옥을 갈 수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강 건너 불은 ‘자신에게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관여하려 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큰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강 건너 마을의 집에 불이 나거나 큰 싸움이 벌어지는 등 위험에 처해도 이쪽 강 건너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할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강 다리가 서울구간에만 32개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최근 서울 강동구 고덕동~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을 잇는 33번째 한강 다리의 이름을 놓고 이웃한 자치단체 사이의 신경전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도로공사는 2016년부터 구리∼안성 고속도로를 건설 중인데, 이 다리는 올해 말 완공할 예정이어서 구리시의회는 건설 중인 교량 이름을 ‘구리대교’로 해 달라는 내용의 건의문을 국회, 총리실, 국가지명위원회, 경기도, 한국도로공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무관한 일인데 동시에 발생하여 인과관계가 있는 듯 보여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오해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이 1989년 1월 1일에 오산시로 승격하였습니다. 시로 승격하면서 오산시는 개나리, 비둘기, 은행나무를 시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당시의 화성군과 오산시의 자료를 살펴보니 화성군의 상징물도 오산시와 같은 개나리, 비둘기, 은행나무였습니다. 오산천에 개나리가 만발하고 비둘기가 날았으며 공자님을 모시는 사당 闕里祠(궐리사)에는 520살(2023년 기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오산역사에서 오산역 이름 유래를 설명하는 동판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에 까마귀가 많이 날아다녀 역명을 오산이라 했다'고 합니다. 오산역은 1904년 경부선 완공 당시 설치되었으며 이후에 설치된 오산역을 안내하는 동판이 오산역 한쪽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오산지명 유래는 오산천에 자라(鰲=자라오, 전설상의 바다에 사는 큰 거북 또는 자라)가 많이 서식해 오산(鰲山)이라 불리다가 오산(烏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지만 애초부터 까마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선생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인 하로촌(賀老村)에서 금오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절개가 곧았으며 김종직, 조위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1441년 진사가 되었으며 36세가 되던 1451년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사헌부감찰을 거쳐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면서 청백리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약동 선생은 1470년에 제주목사가 되었습니다. 부임하여 행정을 살피던 중 백록담 산신제를 지내는 산천단이 한라산 정상 부근에 있으므로 추운 겨울에 제기와 제물을 짊어진 백성들이 어렵게 산을 오르다가 미끄러져서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약동 목사는 한라산 중턱 이라동으로 제사 장소를 이동하였고 그 자리에는 지금도 백성을 사랑하는 목사님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이약동 선생이 청백리로 불리는 여러 가지 스토리텔링 중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궤편암과 투갑연입니다. 먼저 궤편암(掛鞭岩)은 말채찍을 반납한 바위 위에 새겨진 이야기입니다. 1474년에 경상좌도군절도사가 되어 제주도를 떠날 때 평소 착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그대로
수원시의 문화사업으로 카톡방에 시를 소개하는 이색 프로그램에 접속되었습니다. 시에서 보내준 파일에 연결하니 숲의 파티 수원, 수원시립미술관, 아쿠아플라넷 광교, 오산버드파크, 의왕레일바이크를 소개하는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수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수원광교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을 보고 부부가 날을 잡아 1일 3박물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사실 세계적인 박물관은 6개월을 다녀도 관람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수원시 3개 박물관을 하루에 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료관람이니 서둘러서 하루동안에 일단 돌아보고 나중에 시간을 내서 차분하고 정중하게 관람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수원박물관 수원박물관은 경기남부경찰청과 경기대학교 기숙사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탈면 입구를 올라가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드넓은 초록의 공간이 나옵니다. 수원시의 역사와 문화, 한국의 서예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수원 행정책임자의 공적을 기념하는 선정비 27기가 한 줄로 서서 방문객에게 인사를 합니다. 어린이 체험실과 자료실, 북카페 '여민동락'이 어린이 시민을 반기고 있습니다. 역사관에는 1960년대 수원의 거리가 재현되어 있습니
공직사회의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살아 있던 시절에 "아첨도 능력"이라는 당시 부지사님의 공개 글에 도청 공무원 모두가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고시출신의 강직한 고위공무원이 후배, 동료 공무원이 보는 게시글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게시글에 대한 해명, 해석이 附椽(부연)된 기억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조대왕의 '무취불귀'와 비견되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했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無醉不歸)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그런데 ‘무취불귀'란 말은 실제로 취해서 돌아가라고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에서 김준혁 교수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화두는 ‘과공은 결례’입니다. 손님을 초대한 주부가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는 ‘차린 것이 한 개도 없다’라고 말하고, 손님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라 치하의 말을 합니다. 그동안 보아온 상다리는 튼튼해서 상위에 음식을 제아무리 많이 올려도 휘거나 부
골프는 4명이 함께 잔디밭을 이동하면서 골프채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을 홀컵에 넣는 경기입니다. 골프는 타수가 적어야 기분이 좋고 골프채 운동을 적게 하고 타수 잘 나왔다고 기분 좋아하는 스포츠입니다. 흔히 말하는 주말골퍼들은 100돌이라 해서 95~100타를 오가면서 이 타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땀을 흘리며 산 정상에 올라가서 '야호'하면서 기분 좋아합니다. 반면 정신과 신체 건강을 위해 나선 골프는 운동내용보다는 타수를 가지고 그날의 운동 결과를 평가합니다. 타수가 적으면 운동량이 적은 것이고 타수가 많으면 운동을 많이 한 것인데 운동을 많이하면 화가 나고 운동을 적게 하고도 기분 좋아하니 골프를 하지 않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오묘한 골프를 골프라 말하지 않고 '운동'이라고 말하게 된 이유는 과거 일부 층에만 허락된 골프를 대놓고 말하기 어려워서 그리 한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만의 귀족 스러운 운동으로 신비감을 주기 위한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누구나 편안하게 ‘골프 간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1980년대에는 절대 비밀이었고 그래서 골프장에 가면서 '골프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