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돌아가신 본인의 아버지를 先親(선친)이라 한다고 들었습니다. 손학규 도지사님께서 월례조회시에 사회자가 살아계신 아버지를 선친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바로잡아 주신 기억이 납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당신께서'라고 존칭하기도 합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제가 중학교 1학년 1학기 다닐때 42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중학생으로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학기 기말고사를 준비한다고 저녁에 책을 보고 있는데 고모님들이 울면서 옷을 챙겨 입으라 하셔서 집을 나서 비봉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수원에 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성빈세트병원 영안실에 모셔졌습니다. 낮에 야외에 나가셔서 업무를 하시다가 땀을 많이 흘리셨는데 병원으로 모셨지만 돌아가신 것입니다.

 

수원에서 이틀을 보내고 시골로 모셨습니다. 1971년 당시에는 상가에는 온 동네 분들이 오십니다. 아이들은 상가에서 도시락을 챙겨서 학교로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상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동네의 어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상가에서 일을 돕기 때문입니다. 3일되는 날 아버지는 동네 뒷산 좋은 자리에 모셔졌습니다.

 

장례를 모시고 다음날부터 매일아침 상복을 입고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서는 상식을 올리고 묘에 가서 절하고 곡을 했습니다. 아버지 묘는 학교가는 길가에 모셔져있지만 아침일찍 이슬이 풍성한 새벽시간에 세명의 아들들이 베옷에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줄 맞춰 걸어가서 세 번 절하고 哭(곡)하고 돌아와 아침을 먹고 다시 그 길을 걸어서 중학교에 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복입고 조금 일찍 나서서 절하고 학교에 가면 효율적일 것입니다만 어머니께서는 동네사람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결례라면서 새벽잠을 깨워주셨습니다.

 

어느 해 식목기간에 노간주나무를 아버지 묘역에 심었습니다. 형은 개나리를 옮겨심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 묘역에 가면 그 노간주나무 그루터기가 남아있고 내년 봄 이른 시기에 개나리가 노랑색 꽃망울을 펼칠 것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50년을 바라보는 긴 세월동안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과묵했지만 자상한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공부 잘해서 멋진 인물이 되라는 말씀을 들어면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공직에 들어와 사무관 되어서 그날로 인사드렸습니다. 발령장을 복사한 종이를 묘역에 살짝 넣어드렸습니다. 서기관 승진하고도 발령장 사본을 보여드리고 잔디 아래에 숨겨드렸습니다. 이후 5대조까지의 선대 산소를 장비로 破墓(파묘)하고 내 손으로 화장을 해서 納骨堂(납골당)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공직 발령장을 들고가서 보여드리고 절을 올렸습니다.

 

주변에 1930년생 어르신들을 뵈면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함께하셔도 되는데 그렇게 일찍 가족을 떠나시면서 많이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임종에 종신하지 못한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등 굽은 소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부족한 자식이 부모님 곁에서 終身(종신,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 곁에 지키고 있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하지 못하여 늘 송구합니다. 선친이 장수하셨다면 그 아들들의 인생 또한 지금과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 봅니다. 인생이란 늘 그렇게 수많은 선택과 결정,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에 따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보다도 더 많은 또다른 가능성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더 많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는 바입니다. 그래서인가 오늘은 그 어느 날 보다도 아버지, 선친이 많이 그립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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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