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묘역#벌초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조상님 묘소를 깔끔하게 하고자 형제들이 벌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만 이미 둘째형이 고조부 벌초를 마쳤고 증조, 조부, 아버지 등 넓지 않은 묘소의 벌초를 남겨두었다 하므로 이번주 일요일에 날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에게 다른 일정이 들어왔으므로 다시 형과 날을 조절해야 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닌듯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예초기 빌려주는 곳이 많다고 하므로 수원의 농기계 가계가 밀집한 매교동 공구상가에서 기계를 빌렸습니다.

이 기계는 전날 토요일에 직장 동료 결혼식이 있었고 집에서 5km정도를 걸어서 교회 혼례식장에 참석하여 지인 선배와 점심을 먹고 예식장에 올라가 축하했습니다.

 

이어서 매교동으로 이동하여 적정한 기계를 찜하고 다시 수원천변을 잉어와 붕어, 그리고 오리와 물새를 친구삼아 찬찬히 걸어 세교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시청역을 지나 매탄권선역에 도착한 후 집에가서 차를 운전하여 다시 가서 예초기를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5시에 출발하였습니다.

신나게 내달리다가 주유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양노2리 발이골이라고 중학생시절 걸어다니던 길에 주유소가 있는 것이 기억나므로 가보니 아직 5시반이라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시 비봉면과 매송면 경계인 쌍학3리로 돌아가서 주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달려서 고향마을 태어난 집앞에 당도하였는데 아직도 어둡습니다. 산에 오르기에는 이를 시각입니다.

종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청거수 은평구정 어르신들을 모신 종산에 올라가 큰 절을 올렸습니다. 지금 까지 이끌어 주시고 키워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렸습니다.

지난번 종산 벌초날에는 윤달로 인해 9월 마지막 일요일이라는 메모에만 집착한 바 이미 8월 마지막주 일요일, 8월27일에 마쳤다고 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지난해 임시로 뽑힌 총무도 '이강식' 전총무가 담당하도록 조정되었다고 합니다.

종산에 가니 어르신들은 늘 그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십니다. 영겁의 세월을 지키실 것입니다. 조상님은 그 자리인데 자손들은 늙어갑니다.

나이를 먹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등에 주름이 깊어만 갑니다. 그리고 벌초에 오는 자손들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십니다.

 

내려오는 길에 고조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여기는 종산이니 평온하게 잘 마무리된 벌초의 깔끔함을 맛보았습니다. 둘째형이 수일전에 작업을 하였습니다.

옆에는 어린시절 키 큰 할머니로 기억되는 이른자 "세째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증조할머니 격입니다.

그 할머니의 아들은 6.25전쟁에 전사하시고 아저씨들은 나라의 보훈을 받아 그 옛날에 주택은행에 취직한 바 있습니다. 은행에서 주신 주택은행 온도계가 한동안 시골 208-1번지 집 기둥에 있었습니다.

 

다시 차를 달려 동네 길을 지나 묘역 인근에 다가가 주차를 하기위해 차를 돌리는데 동네 아저씨가 관심을 가지십니다. 3년선배 형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 전문가 만난 결에 예초기 조립과 시동을 도와달라 했습니다. 할수 있는 일이어도 전문가가 나타나면 자문을 구하는 재치가 필요합니다.

일단 휘발유를 통에 넣고 엔진오일을 20:1로 첨가합니다. 너무 많은 듯 부어주시므로 '스톱'을 외치자 '눈으로 다 알고 하는 일'이라면서 웃으십니다. 그리고 줄을 당기니 스스로하고 시동이 걸립니다.

 

3년전에 기계를 가지고 현장에 와서 큰 실수를 한 바 있습니다. 기계 연료통에 엔진오일을 먼저 넣고 휘발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무거운 오일은 연료통 아래로 내려가서 엔진으로 스며들었고 그 상태에서 시동을 걸려하니 도저히 터지지를 않으니 속만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아저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니 즉석에서 엔진오일이 엔진안으로 과도하게 들어간 것으로 진단하시고 줄을 빼서 청소를 한 후 엔진오일을 잘 칵테일한 20:1 휘발유를 넣어주셨고 한 방에 시동이 터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동네 형의 도움을 받아 한방에 시동이 걸리므로 이를 짊어지고 벌초를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도착순으로 아버지 산소의 벌초를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71년7월11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1951년 12월29일 어머니 한옥희 여사와 혼인신고를 하셨습니다. 결혼 20년, 큰형 17세, 둘째 15세, 막네 13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 이명의 조부님은 1981년에 별세하셨습니다. 79세, 1903년생 이십니다. 조재복 할머니는 1950년 대 초에 별세하셨으므로 할아버지 묘역에 이장하여 합장하였습니다.

 

어려서 뒷산에 올라 할머니 산소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할머니 산소는 참으로 아담하였고 잔디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1960년대 그 산자락에서 아버지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습니다.

과수원을 하시면서 할머니 산소를 함께 돌보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조상님 산소 모시는 일은 어머니 몫이 되었고 그 업을 지금 이강천, 이강석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이어짐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합니다. 물론 잘 정돈되면 깔끔하게 모셔서 잘 관리하고 싶습니다.

 

벌초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 이리저리 자랑을 하였습니다. 공무원 서기관 발령장 받으면 그냥 집안에 알리고 싶어집니다. 사무관때는 주변사람에게 자랑하게 되지만 서기관이 되면 문중을 향합니다.

서기관이면 이미 나이가 들어 문중의 어르신들에게 관심받을 나이가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전에 회식에서 서기관 승진 문중 축하행사 가야 한다며 먼저 나간 공직 동료가 있었고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그나마 문중 벌초에 가면 동두천 부시장, 오산부시장, 도청 실장, 남양주 부시장 하시면서 이기용 아저씨가 문중 어르신 앞에서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올해에는 일정 미스매칭으로 벌초에 가지 못하니 인사할 기회가 한번 줄었고 공무원이기에 매년 급식당번을 하곤 하였는데 최근 아들이 수원시청 공무원에 합격한 그 아버지가 급식을 도왔다고 합니다.

며칠전 전화를 통화하니 '공무원의 길 차마고도'책을 받고 싶다 하기에 물으니 아들이 수원시청에 합격했다 합니다. 그래서 그냥 보낼까 하다가 공직에 입문하게 되었다 하니 정식으로 25,000원 내고 책을 구매하시라 했습니다.

 

공무원의 길을 들어서면서 가져야 할 나름의 규칙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툭툭 스마트폰을 두드리면 다다음날 도깨비 방망이처럼 그 책을 집앞 현관에서 받게 됩니다.

단단히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갈퀴가 빠졌습니다. 이는 예초기 다음으로 중요한 장비인데 음료수, 간식, 수건, 장갑 등 소품을 많이도 준비했습니다.

예초후 뒷정리의 필수인 갈퀴를 비봉면사무소 소재지 전 면장님댁 가게에서 사야 하는데 비봉을 지나는 시각이 5시 30분쯤으었으므로 가게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단 동네로 직행하였던 것입니다.

가면서 일단 기계로 풀을 깍은 후 2~3일이 지나면 푸이 마를 것이고 다시 갈퀴를 가지고 가서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핑게로 한번 더 조상님 묘역을 다녀오면 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기대와 꼼수도 겸했습니다. 그러나 작업을 마친 후 돌아보니 영 개운하지 않으므로 나뭇가지를 꺽어서 갈퀴 대용으로 댑사리비 쓸듯이 천천히 작업을 하니 어느정도 깔끔하게 정돈이 됩니다.

맥가이버는 아니어도 다양한 손기술을 발휘하면 最善(최선)은 아니어도 次善(차선)이 가능하고 그 장비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대체가 되니 이른바 이 없으면 잇몸이 그 역할을 한다는 만고이 진리를 터특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비봉면사무소 간 김에 작은 도서관에서 책 3권을 빌렸으므로 독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집 근처에 아무리 큰 도서관이 있어도 가지 않으면 남의 일이고 조금 먼 곳이고 작은 도서관이지만 몇번 가다보면 친숙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도서관이라 해도 그 책을 평생동안 노력해도 다 읽어내지 못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도서관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주민들이 접근하기 좋은 가까운 곳에 작은 도서관을 여러 개 세우는 것이 남양주시 이석우 시장님의 도서관 정책의 키워드인 것처럼 다른 정책들도 소비자 중심, 니드 중심, 현장으로 찾아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더 많이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초기 기계를 반납하여야 하므로 어제 빌려주신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제 눈치를 보니 오늘 집안에 혼사가 있는듯 월요일 아침에 반납해도 된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반납하려면 전화를 해보라 하시면서 명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아침 8시반에 전화를 드리니 13:00이후에 문을 여신다 합니다.

이번에는 사무실로 향합니다. 집보다 가까운 사무실에 가서 정리정돈을 하고 이런저런 글도 쓰고 할 요량입니다. 사장님의 일정이 나의 스케줄에 긍정의 효과를 주십니다.

 

사무실에 와서 머리를 감았습니다. 사우나탕이 쉬는 날이군요. 사무실에 오면 뜨거운 물에 한번 지질 수 있겠구나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자료를 정리하면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을 보내면서 사람의 일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결정에 따라서 긍정의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기다리기 보다는 스스로 일감을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1982년에 글씨를 못쓰는 것을 한탄만 하지 않고 스스로 경기타자학원에 등록하여 타자를 배웠으므로 오늘 이렇게 장문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서 가족과 주변의 지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니 참 좋은 일입니다.

대략 측정해 보니 오늘 쓴 글이 원고지 23매 분량입니다. 학창시절에 원고지 3매를 쓰기 위해 고민고생을 하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고 보람입니다.

 

당시에 타자치기에 도전하지 않았으면 이후 공직내내 불편했을 것이고 결국 나이들이 독수리 타자를 치고 있을 것입니다만 지금은 모니터를 보면서 신명나게 두드리니 이 또한 기분좋은 일입니다.

결국 운명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지만 어느정도 변화를 줄 수는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오늘 벌초를 스스로 다녀온 바에 대한 자화자찬, 자기자랑, 자기만족에 대해서는 이만 접고자 합니다.

 

그리고 묘소 앞에서 아버지께 108배 절을 드렸으니 極樂往生(극락왕생)하시고 다음 세계에서도 아들을 격려하시고 시대에 앞서 나가셨던 그 모습을 이어주신다면 그 자손이 또한 미래지향적으로 전진해 갈 것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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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