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개월 월급을 쪼개고 모아서 오토바이를 장만했습니다. 자전거로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 동력장치로 그 장비를 업그레이드한 것이지만 추가비용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도 젊은이들이 새 차를 사면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도 크거니와 주유, 엔진오일, 보험, 세차 등 기본적이거나 부가적인 비용이 추가됩니다. 여기에 더 큰 소비양태의 변화로 인해서 소비 수준이 높아지게 됩니다.
전에는 그냥 갈비탕을 먹었는데 차가 움직이다보니 주차장이 넓고 편안한 식당을 찾게되고 그래서 점심 식사비가 12,000원이던 것이 2만원 이상으로 올라갑니다. 설렁탕, 해장국이 뚝불고기나 갈비정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래서 소비를 말하는 엥겔게수가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1978년도에 오토바이를 운영해도 큰 비용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오일쇼크를 몰랐습니다. 그냥 동네 원동기 수리하는 아저씨가 비공식으로 판매하는 휘발유를 넣었습니다.
큰 소주병에 휘발유를 담아두었다가 면직원이나 농협직원이 오토바이를 타고가면 한 병, 두 병 넣어주고 얼마를 받습니다.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신 오토바이의 기동성은 뛰어났습니다. 부면장님은 49cc 오토바이를 타고 오로롱 거리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상징적으로 출장을 가십니다. 하지만 다른 7급, 9급은 매일 오전 오후 출장입니다.
오토바이는 음주운전으로 보지 않았던 시절이니 술 한 잔하고 내달리면 피부를 때리는 바람의 감촉이 무디기 때문에 과속을 하게되고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한때 면 소재지의 어떤 사장님이 오토바이사고로 돌아가신 사건이 나면서 이를 일러 '과부틀'이라고도 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과부라 하고 심한 표현으로는 '미망인'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사망했다해서 그 부인을 미망인, 과부 등으로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未亡人 미망인
춘추시대(春秋時代) 노나라(魯) 성공(成公)이 재위 중 노의 백희(伯姬)가 송공(宋公)에게 출가(出家)하게 되자 계문자(季文子)라는 사람이 백희(伯姬)를 따라 송에 갔다. 계문자(季文子)는 후행(後行)으로서의 임무(任務)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므로 성공(成公)은 위로(慰勞)의 연회(宴會)를 베풀었다.
그 연회석(宴會席) 상에서 계문자(季文子)는 ≪시경(詩經)≫을 인용(引用)하여 성공(成公)과 송공을 칭송(稱頌)한 후, 송의 땅은 좋은 곳이니 출가(出家)한 희(姬)는 틀림없이 잘살 것이라고 노래했다. 이를 듣고 있던 희의 모친 목강(穆姜)은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번에 퍽이나 큰 신세(身世ㆍ身勢)를 끼쳤습니다.
당신은 선군(先君) 때부터 충성(忠誠)을 다했고, 이 미망인(未亡人)인 나에게까지 진력하여 주셔서 고맙기 그지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역시 ≪시경(詩經)≫의 녹의(綠衣)의 종장(終章)에 만족(滿足)의 정을 의탁(依託ㆍ依托)하여 노래를 부르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오토바이는 그냥 기계에 올라타는 것이어서 충돌, 추돌, 미끄럼 등의 사고시에 몸통이 날아갔다가 바닥이나 벽체 등에 충돌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오토바이가 턱에 걸렸고 몸이 날아가서 물이 가득한 논 가운데로 박혀다고도 합니다. 오토바이 사고가 늘자 당시 화성군청에서는 오토바이 면허시험을 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10문제중 6문제를 맞추지 못해서 20세에 원동기 면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23세에 자동차운전 1종보통 면허를 받았는데 이는 원동기를 운행할 자격이 없으므로 1980년 이후 오토바이를 타지 못했고 그래서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여러 번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원동기 면허시험에 우리 비봉면 면사무소 응시자 중 유일한 낙방생이었던 사실을 자랑하는 바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