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꿈과 현실의 거리감 ▨
팔을 어깨 아래로 깔린 채로 잠에서 깨어나보니 팔이 저리고 몸이 답답한 것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악몽까지는 아니지만 힘든 꿈을 만난 것입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꿈속의 무대는 1982년 경기도 농민교육원입니다.
‘81년 8월10일에 팔탄면사무소에서 경기도농민교육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77년 5월16일에 화성군 비봉면사무소에 9급, 당시에는 5급을류 공무원으로 발령받고 정신없이 일했습니다.
내용도 모르고 선배나 부면장님의 지휘를 받고 이리저리,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오늘 한 일의 결과조차 모른 채 부화뇌동은 아니지만 匹夫匹婦(필부필부) 수준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습니다. 요즘에는 범죄인의 집이나 사무실을 압수수색 할 때에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검사나 경찰이 대상자에게 제시하고 영장에 적힌 내용만 압수수색을 해서 가져간다고 합니다.
과거영화에서 보면 서재의 모든 책을 뒤지고 무엇이든 나오면 쓸어담더구만요, 갑작스레 현금 3억원이 나왔으므로 범죄관련성이 높지만 다시 사무실에 가서 영장청구를 하고 다음날 판사가 서류를 검토하여 발부한 영장을 들고 와서야 그 돈을 수사 자료로 가져온다고 합니다.
요즘 법죄 수사기법이 늘어서 돈을 보고, 돈봉투나 기타 소재를 분석하면 몇년전에 만들어진 종이인지, 소재인지를 감식해 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5년전에 부친상때 받은 돈을 그대로 보관한 것이라 하면 봉투 종이와 돈 종이를 분석해서 3년전에 만들어진 돈이면 거짓이 되고 수사의 목록에 실리는 것입니다.
또한 5만원권 일련번호를 분석하면 대략 몇년도에 발행한 돈인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정치인이 법에 의한 재산신고서에 현금이 없다고 했는데 집에서 현금 뭉치가 나왔으니 이를 해명하기에 어려움이 클 것입니다.
이처럼 범죄수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압수수색을 위한 서류를 영장이라 합니다만 과거에는 신체검사 영장, 군 입대 영장이라 했습니다.
그 서류에는 징병검사 통지서, 입영통지서라고 쓰여있는데도 사람들은 영장이라 합니다. 양곡을 관리하는 부서에서는 양곡이동명령서라고 적어놓고는 '오다'라고 읽었습니다. 오다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Order의 일본식 발음이 '오다'인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고 수원에 소재한 병무청에 갔습니다. 그날은 우리 비봉면 장정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날인데 중학교 동창이 3반 180명이고 그중 남자가 대략 90명인데 이날 신검대상자는 다시 180명쯤 되어 보였습니다. 여학생이 모두 남자가 된 것인가 생각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본적을 비봉면에 두고 외지에 나가사는 이들이 90명쯤 되었던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그중에 현직 공무원은 유일했습니다.
당시의 장정(신체검사 받으러온 청년들을 장정이라 불렀음)들은 대부분 기업체에서 일했고 공무원의 4배 월급을 받았습니다. 공무원 한달 보수가 5만원일때 이들은 20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무원보다는 기업체 취업을 원했고 그렇게 회사에 다니다가 50전후에 명퇴했고 공무원은 60을 채웠습니다. 개인사업을 하였더라면 지금도 사장, 앞으로도 15년정도 더 사장으로 일해서 결국 75세에 장장 55년 근속패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신체검사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다양했습니다. 色盲(색맹)도 보았고 인성을 체크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 체중, 허리둘레 등 기본체격을 점검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체력장을 하지 못하고 학교가서 본 필기고사 득점비율로 체력장 점수를 받았습니다. 20점 만점에 열심히 뛰면 18점을 받는다고 기억하는데 홍성두 선생님께서 체력장을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중학교 3학년 3월31일 토요일 유도시간에 같은 반 이동원(큰 이동원)과 대결을 하다가 왼쪽다리 발목의 2줄기 뼈가 골절되었습니다.
수원 기독병원 의사 선생님이 2달반 동안 기부스를 하라해서 정말로 75일을 허벅지까지 감싼 석고를 달고 있다가 병원에 다시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진료를 하실 줄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학교로 말하면 소사 아저씨 격의 어떤 아저씨가 모터가 달린 톱니바퀴로 석고 덩어리를 떼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굳은 발목과 무릎 연골을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적셔가면서 어렵게 굴신을 시작했습니다. 다리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시골 어른들이 의료상식이 없으니 중학교 3학년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맏긴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금 알았더라면 2주후에 다시 기부스를 하고 3주 후에는 발목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제거한 후 운동을 시켜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의료사각지대에서 골절을 관리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일은 아닙니다만 요즘과는 판이하게 다른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체력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점수로 비율을 내서 체력장 점수 20점에서 일정 점수를 받고 이를 합산해서 수성고등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아마도 체력장보다는 조금 더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당시에 수원소재 중학생도 반에서 10등 안쪽만 원서를 써 주었다는 수성고등학교에 시골 중학교 학생이 합격하였으니 큰 일을 해낸 것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