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하여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어느 나이부터 아니면 5살의 해 여름부터 바지가랭이가 터진 바지를 입고 돌아다닌 기억이 납니다.

기저귀를 떼고서도 얼마간은 기저귀를 매달았던 바지가랭이가 터진 내복을 입은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서서 쉬를 하면 그뿐이었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 깡촌, 산아래 동네에 살던 모습입니다.

 

 

그렇게 유년의 시절을 보내고 얼결에 초등학교에가서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6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서울구경을 하고 기차역에 내려서 삼륜차에 60명을 태우고 동네 입구마다 서너명씩 떨구어주고 이내 청룡초등학교까지 운행한 담임선생님의 용기를 되새겨 봅니다.

 

초등생, 비록 6학년이지만 삼륜차 트럭 짐칸에 아이들을 태워도 되던 시절이고 동네앞에 그냥 내려주고 맘편히 다음 코스로 이동하였던 당시 선생님들의 생각이 그분의 판단이 아니라 세상사가 다 그러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1971년경에는 초등학생, 당시의 국민학생을 트럭에 태워도 아무런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한바 관광버스를 임차했는데 회사 사정으로 버스가 제시각에 오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삼륜차를 구해서 아이들을 태워 집 근처까지 데려갔던 것이랍니다. 초등학생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니 김재엽군이 참으로 상세하기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에 광역버스 입석을 폐지하여 아침 출근길을 어렵게 합니다만 당시에 비하면 이 또한 과분하고 불필요한 안전 우려증이라 봅니다.

 

자갈길 신작로를 늦은 밤에 고무신 신거 걸어가기 보다는 세바퀴 흔들리는 트럭 적재함에 태워서라도 집근처에 아이들을 떨구어주는 편이 선생님으로서는 위로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한밤중에 60명 아이들을 데리고 걸서 6km를 행군하는 선봉에 선 당시 국민학교 선생님의 마음과 삼륜차 트럭에 아이들을 태우고 동네 어귀에 떨구어주는 선생님의 마음을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2박3일 서울 수학여행을 마치고 늦은 밤에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야 하는 선생님의 책임감이 얼마나 컷을까요.

 

그런 시절을 거치고 달려서 60년이 지난 2022년을 맞이한 것이 기적같은 일입니다. 긴 세월속에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와 위험요인이 오고 갔을까요. 찻길을 건널 때마다 위험순간은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계령 굽이길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한계령 비탈길 중앙선에 앉아있었습니다. 비록 굽이굽이 흘러가는 길의 가운데이지만 트럭, 승용차 수만대가 밤새 지나가면서 핸들을 제대로 틀지 못하거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으면 나의 텐트를 치고 절벽아래로 내려갈 수 밖에 없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를 살고 매시간을 보내고 그런 매번의 순간에 사고의 요인은 상존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경우를 다 비켜가면서 오늘에 이른 것은 가히 기적이랄 수 있으며 종교에 따라서 부처님의 가피이고 하느님의 보우하심이지요.

 

그러니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가 나이 더 들어서 죽을까 걱정하지 않기로 합니다. 누구나 영생하지 못합니다. 한때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분들을 만났습니다만 요즘 1910년생 어르신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100세를 사신분이라면 1922년생으로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분입니다.

 

112살 어르신은 1910년에 태어나신 분 입니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해를 1910년으로 본다면 그해에 태어나신 분은 올해 112살이십니다. 만나뵙기 어려운 분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따지는 이유는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 가야, 고려, 조선시대에 태어나신 모든 분들중에 지금 생존하신 분은 없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도 저승사자가 노인으로 변장을 하고 흰 숯으로 만들기 위해 검은 숯을 수세미로 문지르는 현장에서 '내가 삼천년을 살았다' 자랑하다가 잡혀갔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행복하게 누리고 느끼고 잘 소비해야 합니다. 삶의 시간을 알뜰하고 과감하게 소비하자는 주장을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도 하루는 가고 뛰어다녀도 오늘은 내일로 이어집니다. 버틴다고 오늘이 멈추지 않고 거슬린다고 내일이 오지 않을까요.

 

내일은 오늘을 밀어 어제로 보내고 새로운 내일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시간과 세월을 쓰고 소비하다보면 마음이 넓어지고 생각이 확장되는 가운데 눈가에 주름이 생겨나고 목의 주름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훗날의 죽음을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닫 함께 한 시대를 살다가 죽게 됩니다. 죽음은 절대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살면서 벼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수확하여 쌀을 먹습니다. 1년생 식물입니다. 산에 고목이 있고 잔가지를 흔드는 묘목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노인, 장년, 청년, 어린이, 유아가 공존하고 전철에는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되어서 태내의 아이를 보호하고 그 엄마들은 조금전에 구청에서 태교를 받고 오는 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녀손녀를 귀여워하는 것을 내리사랑이라 합니다.

 

본인의 자식인 아들딸에 대해서는 바쁜 나머지 양육을 하였던 것이고 아들딸이 성장해서 낳은 손자손녀는 사랑으로 키우게 됩니다.

 

자식을 키울 때 느끼지 못한 혈육에 대한 정을 손자손녀를 통해 느끼도록 신이 인간의 마음씀을 설계했다고도 합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이 낳은 자식이 낳은 자식을 더 사랑스럽게 느끼도록 설계했나 봅니다.

 

그러니 노구에 힘들어도 손자손녀를 키우는 보람과 행복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끙끙그리며 손자손녀를 돌보고 할아버지는 힘들어도 학교앞에서 손녀손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체는 종족을 이어가는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삽니다.

 

난을 키우는 선비가 게을러야 난이 잘 자란다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난에 좋은 환경조건을 구비해주면 열심히 입새를 키우다가 여건이 척박해지면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자주 물을 주는 것을 불편해하는 난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게으른 선비를 만난 난은 더이상 생존이 어려워지는 느낌이 들면 급하게 난의 꽃을 피워서 종족을 위한 씨앗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베란다에 방치된 난에서 꽃이 피는 것을 보고 반가워한 기억이 있다면 그만큼 난을 학대한 것이라 반성해야 합니다.

 

들판에서 자라나는 풀이나 산기슭을 장식하는 나무들은 우리를 위해 산소를 공급한다고 합니다. 광합성을 통해서는 영양분을 축적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공기를 정화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요즘 재판중인 변호사는 "누구에게 들었습니다"라는 말로 어느정도 진술을 하는 듯 하여 형량을 줄이는 전략을 쓴다고 합니다. 누구에게서 들었다는 진술이 언론에는 큰 관심을 갖게 하지만 법정증거로는 약하다고 합니다. 증언한 들었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떠들어 댄 사람에게 다시 물어서 인정을 해야 비로소 법정증거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로서의 지식으로 개발사업을 해서 큰 돈을 굴리고 사건화되어 구속되고 풀려나서 재판을 받게되자 교묘한 말로 자신에게는 유리하고 재판은 길게 늘어지게 하는 전략을 쓴다는 것이 종편방송 출연진의 주장입니다.

 

패널들도 전문가입니다. 변호사, 교수, 정치인, 여론조사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분들이 종편에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종편에 나오는 사람은 늘 그나물인데 주제는 그밥이 아닙니다. 태풍, 가뭄, 압사, 화재, 정쟁 등 오만가지 주제가 나오는 방송에서 늘 부족한 인력풀로 돌려막기를 하는 것 같은데도 출연진은 막힘없이 답합니다. 척척박사가 따로 없습니다. 대단한 분들이 방송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종편 방송은 공중파가 다루지 못하는 부분을 긴 시간을 할애하여 보도하므로 국민들의 언론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종편 뉴스와 토론을 통해서 정국을 파악하고 대통령과 정당의 지지율을 정하는 것인가 추정해 봅니다.

 

전공에 맞지 않는 분야를 이야기하는 듯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합니다만, 대한민국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직업은 변호사일 것입니다. 변호사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분이고 판사, 검사를 했거나 그냥 판검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변호사의 길을 가는 분도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 로스쿨의 과정을 거친 이가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됩니다. 아마도 이분들은 많은 경쟁자속에서 시험에 합격하였거나 선발된 분이닌 실력을 갖췄다고 보여집니다. 보여진다는 말은 변호사들의 상용어인것 같습니다.

 

이분들이야말로 세상사 모르는 것이 없다할 정도이겠습니다만, 다른 분야에 근무하였거나 지금 종사하는 이가 많은데 방송의 패널 40%정도가 변호사일까 가정해 봅니다. 그리고 전직 정치인이 방송인으로 활동합니다.

 

행정고시 출신의 관료가 많이 배출된 사회인데 관료출신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비중은 지극히 낮아 보입니다. 이분들도 행정의 현장에서 다양한 일을 직접 집행하고 현장의 어려움을 겪은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야에서 일한 분은 방송에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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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