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편안한 의전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공직사회의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살아 있던 시절에 "아첨도 능력"이라는 당시 부지사님의 공개 글에 도청 공무원 모두가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고시출신의 강직한 고위공무원이 후배, 동료 공무원이 보는 게시글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게시글에 대한 해명, 해석이 附椽(부연)된 기억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조대왕의 '무취불귀'와 비견되었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했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無醉不歸)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그런데 ‘무취불귀'란 말은 실제로 취해서 돌아가라고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에서 김준혁 교수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화두는 ‘과공은 결례’입니다. 손님을 초대한 주부가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는 ‘차린 것이 한 개도 없다’라고 말하고, 손님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라 치하의 말을 합니다. 그동안 보아온 상다리는 튼튼해서 상위에 음식을 제아무리 많이 올려도 휘거나 부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상위에 음식이 ‘단 일도’ 없을까요.

 

1980년대에는 기관장이나 간부의 승용차가 도착하면 벌컥하고 문을 열었습니다. 2023년 오늘날에는 누구도 기관장 차량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요즘 기관장 대부분은 차량안에서 결재를 하고 서류를 검토하고 전화 통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기관 중 의전을 중시하는 정보기관의 장이 현관에 도착하는 모습을 2층 창문을 통해 본 기억이 있습니다. 차 안에서 누군가가 하나둘 구호에 맞춘 듯이 운전석, 조수석, 운전석 뒤편 문이 잠자리 날개처럼 동시에 열리고 수행비서가 내려서 기관장의 차문을 박력 있게 열어 제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대통령, 도지사, 장관의 차량이 도착했을 때 수행팀이나 비서, 경호팀에서는 차분하게 여유롭게 차문을 열고 내린 후에도 여유롭게 문을 닫습니다.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직접 문을 열고 내려서 문을 닫는 기관장이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1982년경 8급 공무원 시절에 경기도청 간부를 승용차에 태워 행사장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다른 선배 2명이 함께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승용차 정원 4명을 채우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과장님 사무실에서부터 수행해서 차량 앞에 도착하여 뒷문을 열고 타시도록 안내했습니다.

 

하지만 과장님은 저에게 먼저 타라 하십니다. 8급이 5급 국비과장님, 요즘으로 서기관 4급 과장님이 승차하라 차문을 열어주신 격이 되니 대단히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 이놈아 빨리 타!!!”라시는 단호한 과장님 말씀에 탑승하고 보니 3명 가운데에 끼여 앉게 되었고 한참을 달려서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숨이 막히고 침이 마르는 30분을 달려 사무실에 도착하였고 차량의전을 마친 후 선배에게 차량탑승 예절을 배웠습니다. 선배의 설명을 듣고 과장님의 지휘를 받아 의전을 의전에 맞게 강제적으로 진행하였다는 寸評(촌평)을 하였습니다.

 

앞자리에 앉게 되는 공무원이 차문을 열어 과장님을 태웠어야 했습니다. 저는 뒷자리 중간에 미리 탑승하여 대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승용차 뒷자리 3인 중 중간에 타보니 다리 위치가 불편하고 양측의 어르신에게 기대지 않으려니 허리에 힘을 주어야 하고 승용차 코너링 때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습니다.

 

 

차량탑승 의전을 제대로 배워보니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의 상석 1번은 대각선 뒷자리이고 동료가 운전하는 차량의 상석은 옆자리입니다. 뒷좌석의 중간은 5번의 자리입니다.

 

차량의전을 이야기한 김에 다음으로 식당에서의 의전을 부연, 추가하겠습니다. 과장, 팀장, 주무관 10명이 식사를 하는 경우 서무담당 주무관은 펄펄 끓어오르는 해장국을 가져온 식당 여사님에게 첫 번은 과장님, 두 번째는 주무계장님에게 드리라고 참견을 합니다.

 

의전을 챙기다가 그릇이 넘어가면 주변 동료들이 큰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절대로 누구에게 먼저 주라 말하면 안 됩니다. 여사님들은 그동안 이 같은 불필요한 의전으로 스트레스를 겪고 있고 그래서 좌중의 연장자나 가운데 분에게 먼저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더구나 뜨거운 국물을 10초 먼저 받아서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크게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자리에 앉은 순서이든 여사님의 판단이든 그날 그 식당에서 밥 한 그릇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매운탕이 끓으면 상사의 접시를 가져다가 국자로 떠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또한 저는 반대입니다. 먼저 뜨시도록 하는 것은 바른 의전에 접근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순서 의전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뜨거운 국물을 떠서 주는데 자신이 받을 순서가 아니라고 손으로 떠밀다가 국물을 흘리고 심한 경우 손가락에 화상을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친절하게 뜨거운 국물을 떠서 주면 ‘고맙다’ 하면서 즉시 받아야 합니다. 나름의 기준으로 국물 받을 순서를 정했을 것이니까요. 뜨거운 국물그릇은 차분하게 전하고 신속하게 받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의전으로 국물 그릇을 밀고 당기는 것은 결례입니다. 지나친 겸양지심은 의전을 흐트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매운탕의 어느 부분을 뜨는가는 개인 선호가 다르답니다.

 

결국 의전의 바른길은 의전을 받는 분이 편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름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과도한 움직임보다는 차분하게 상사의 움직임에 맞추는 흐름이 중요합니다. 엘리베이터를 미리 잡아서 긴 시각 다른 분들이 기다리게 하는 것은 불편을 주게 되고 모시는 상사도 불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도 의전입니다. 오늘 행사에서 잘된 점을 말씀드리는 기회로 삼아도 좋을 것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는다고 조급함을 나타내며 버튼을 연속으로 누르는 것도 의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액션은 의전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을 드리는 일입니다. 움직임에 맞춰서 앞서거나 따라가고, 물 흐르듯이 왈츠곡에 맞춰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소리없는 의전이 모두를 편안하게 합니다. 아첨이 阿諂(아첨)하라는 말이 아니고 無醉不歸(무취불귀)가 고주망태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처럼 과거식 의전은 부분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