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테이프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행정에서 불필요하거나 내부 조직을 운영하는데 치중하는 행정을 펴는 경우를 일러 전시행정이니, 레드테이프이라 하고 한자로 쓰면 번문욕례(繁文縟禮)가 된다.

1970년대 행정에는 형식에 치우친 이런 레드테이프가 많았다. 레드테이프(red tape)의 사전적 설명은 번거롭다, 규칙, 예절, 절차 따위가 번거롭고 까다로움을 이르는 말이다. 실전에서 보면 기관장의 연설문을 매는 끈이 있는데 이것이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기관장에 따라서는 연설문의 내용보다는 누구의 글씨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공무원들은 자신이 모시는 기관장이 선호하는 분의 글씨를 받기 위해 줄을 명필가를 초빙하고 여러 가지 대접을 하면서 글씨를 받았다. 특히 붓글씨로 쓰던 시대에는 먹을 갈고 글씨를 받고 붓글씨가 마르기를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급하면 선풍기를 돌리고 다리미로 다리고 부채로 부치면서 마른 수건으로 연설문의 물기를 말려야 했다.

그래서 공직 내내 글씨만 쓰다가 퇴직하신 분도 있고 글씨를 잘 써서 군수와 시장까지의 고위직에 빨리 오른 분들도 많았다. 한번은 농조 조합장 교육의 수료소감(소원수리)을 보게 되었는데 굵은 싸인펜으로 쓰신 글들이 예사롭지 않아 고참에게 물었다.

 

“농조 조합장님들이 모두 글씨를 잘 쓰시네요.”

“그럼, 시장·군수를 하신 분들이니까.”

당시 농조 조합장은 시장군수를 거쳐 한 2~3년 정도 농조 조합장을 하신다는 것이다. 시장·군수를 하신 분들이라면 직원시절부터 글씨를 잘 써서 시정계, 행정계, 내무과에 근무하면서 동료보다 조금 빠르게 승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장·군수중 글씨를 못 쓰는 분은 지극히 적다고 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타자기도 귀하고 하니 모든 문서를 붓으로 쓰거나 잉크를 펜촉에 찍어 ‘세익스피어’처럼 문서를 작성하였던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길을 잃었는데 형식주의, 조직 이기주의와도 유사한 번문욕례의 예를 몇 가지 예로 들어본다.

우선 출근부. 1980년대 후반경 없어진 것으로 기억되는 출근부는 아침 출근 시간마다 공무원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1년 치 출근부가 미리 인쇄되고 때로는 월 단위, 어떤 때는 조금 개선한다고 분기별 출근부가 있었고 여기에 싸인을 해야 했다.

 

총무과 직원은 8시 55분에 출근부가 놓여있는 사무실 입구에 있다가 9시가 되면 모두 출근부가 담긴 나무상자를 가져갔다. 그때까지 출근부에 서명하지 않은 곳에 “지참”이라고 고무도장을 찍었다. 만약에 출장을 가면 미리 출근부에 ‘출장’도장을 찍어야 한다. 이것은 서무담당자의 몫이었다.

 

그다음 繁文縟禮(번문욕례)는 출퇴근시간과 중식시간 준수하라는 지시사항이다. 도대체 어제밤부터 일해 새벽에 퇴근한 공무원이 아침에 조금 늦었다고 출근부에 지참을 찍는 일이나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부터 정문과 후문과 측문에서 총무과 직원이 기다리다가 이름을 적어가는 일이야말로 형식주의의 최고봉이다.

 

일이 늦어져서 12시반까지 일하였는데 구내식당의 밥은 없고 나가서 밥 먹고 더 열심히 일하려 들어오는 이에게 중식시간 미준수라는 벌을 주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조직의 경쟁력을 위함이 아니라 공무원을 기계화하는 안타까운 일이며 지금도 중식시간 준수 여부를 체크하고 싶은 관리자가 있다면 공무원 모두를 두 번 죽이고자 하는 일이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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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