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며칠전에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두집 부부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와이프는 주방에서 생태와 코다리찜 2인분, 4인분을 찌그러져 쑤세미가 닿는 부분만 반짝이고 그 안쪽은 검정색이 남아있는 냄비에 담아 애벌을 끌여서 남편에게 인계하고 남편은 즉시 악어 입 옆으로 돌린 듯 보이는 집게로 번쩍 들어서 손님상에 배달해 줍니다. 12시가 지나 들어간 식당에는 손님이 한가득이고 이미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정리하지 못한채 남자 사장 혼자서 홀 서빙하고 계산대에서 카드를 받고 친절하게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장사는 이렇게 해야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코로나19로 손님의 등락이 크다보니 종업원을 한 분 더 두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동시수용 20명 정도의 식당에서 종업원을 채용하면 한달 인건비와 함께 발생하는 잘잘한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발품을 더 팔아서 이른바 薄利多賣(박리다매)전략으로 가시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식당이 손님을 끄는 힘은 아내의 손맛인가 생각합니다. 국물과 반찬이 입에 맞습니다. 살짝 건조후 볶아낸 듯 여겨지는 어묵조림의 식감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손님이 많아서 음식을 주문하고도
공무원으로 청년과 장년시대를 보낸 후 정년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였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름 바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데, 공직자로서 도민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과천청사에 있는 기재부 사무실에 가서 이틀 이상 투쟁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2000년 전후에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의 법인카드를 들고 상경한 공무원 열사들이 기재부와 중앙부처의 사무관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의 시청과 군청의 공무원들이 당시에 서울 광화문과 과천 정부청사에 몰려있는, 예산을 쥐고 있던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투쟁적으로 예산을 따냈다고 합니다. 예산확보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실을 따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난날 호남, 영남, 충청, 강원도 공무원들은 4박5일치 짐을 미리 챙겨서 서울로 과천으로 올라왔답니다. 요즘에는 지방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공무원들은 아침과 오후에 현장으로 달려가서 중앙의 귀하신 국가 공무원에게 가난하고 인구가 줄어가는 군민 3만 규모의 기초자치단체를 살려달라며 건평 300
국토방위를 위하여 연일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번 수해복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국방부장관님 이하 장병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경기도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 이강석입니다. 지난 8월6일(1998년) 침수로 동 전체의 90%이상이 수해를 당하여 동민 모두가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고 자칫 실의에 빠져들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너무나 중요해 평소 잊고 있었던 우리의 군이 있었습니다. 침수이후에도 폭우가 계속되면서 며칠 새벽을 동두천시 신천둑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아침의 태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른아침 도착한 우리 군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불빛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방부장관님! 우리의 군인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병사, 하사관, 위반, 영관 등 모두가 수해복구에 쏟은 정열은 폭우와 강풍, 번개와 진동을 잠재웠던, 10여일 만에 길을 뚫고 골목의 아스팔트를 찾아내고 할머니의 안경과 아이들의 인형을 돌려주었으며 수재민의 아픈 가슴속에 재활의 푸른 새싹을 피워냈습니다. 주민이 건네는 음료수를
동두천시 보산동에는 동(洞)이 하나 더 있으니 그 이름은 '걸산동'입니다. 사실 걸산동은 보산동 7통지역으로 61세대 124명이 살고 있는 '걸산마을'입니다. 실거주자는 100명 내외의 장년층이고 학생은 5명으로 고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초등학생 2명입니다. 과거 이곳에 미군이 지어준 걸산분교(초등)가 있어 25회 116명을 배출했으나 1999년 폐교되었고 얼마 전 교실도 철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 마을 학생들은 매일 아침 미국을 거쳐 한국땅 동두천에 나갔다가 오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거쳐 부모님이 사시는 걸산동 집으로 돌아옵니다. 승용차, 버스, 전철을 이용해 등하교합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미국땅을 넘나드는 아이들입니다. 걸산마을 학생들은 하굣길에 시간이 남으면 미국땅에서 미군의 생활상을 구경하고 우리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으며 오가는 미군과 영어로 대화합니다. 네이티브 스피킹입니다. 그런데 부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이곳 걸산마을에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미군과 영어를 쓰는 이를 만나 대화할 수 있고 식사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카드로 계산하면 캘리포니아 가게이름이 찍힙니다.
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1919년 3월에 우리 남양주시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독립만세를 부른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1919년에 승하(昇遐)하신 고종황제는 사후에 대한민국 백성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고종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1851~1895)를 홍유릉(洪裕陵·사적207호)에 모셨습니다. 홍릉(洪陵)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셨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왕릉에 등을 기댄 듯 위치한 유릉(裕陵)에는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영면하십니다. 명성황후(明成皇后)는 고종과 국정을 논의하는 파트너였으며 당시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가문의 배경이 없는 분이라서 황후(왕비) 자리에 올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홍유릉을 지나 뒷산으로 가면 영친왕을 모신 영원(英園), 이구 황세손을 모신 회인원(懷仁園)이 자리합니다. 의친왕묘가 같은 자락에서 마주하며 특히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묘가 참으로 단아하게 우리를 맞아줍니다. 고명딸 덕혜옹주(1912~1989)의 교육을 위해 고종황제께서는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幼稚園)을 설립했다고 합니다. 정략결혼과 따님을
1980년 22세에 화성군 비봉면에서 팔탄면으로 근무지가 이동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담당 업무는 이른바 ‘주사’가 담당한다는 회계업무였습니다. 면사무소 근무자는 별정5급 면장님, 6급 부면장, 6급 총무계장, 그리고 7, 8, 9급 공무원과 보조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산업계장이 총무, 총무계장이 호병, 호병계장이 산업계장으로 자리이동, 승차하면서 동시에 공무원 3년차 신입에게는 회계담당을 맡겼습니다. 월급 50,000원대를 받던 시절인데 매달 수 백만원을 집행하는 업무는 그 무게감이 엄청났습니다. 우선 월급계산을 하여 대략 20명분 200만원 정도를 농협에서 인출하여 사무실까지 들고 오는데 강도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주변을 살핀 후 급하게 뛰어온 기억이 납니다. 1,000원권 돈다발을 서랍 속에 감추고 한 뭉치씩 꺼내어 봉급봉투에 담아 다시 다른 서랍에 넣었습니다. 봉급 지출액에서 공제액을 제하고 개별 봉투에 넣은 돈이 다 맞아 떨어져야 봉급봉투를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10원짜리까지 맞춰서 담고 나면 200원이나 300원이 남게 되는데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다시 세어보고 지출 내역서를 재삼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은
시내를 다니다보면 가끔 희한하게도 밝은 노란색으로 염색을 한 여성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염색을 마친지 5일정도 지나간 듯 속 머리에는 검은색이 올라오고 있어서 안스럽습니다. 일주일이면 속머리가 자라서 색상이 어색해지는 머리염색을 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4~5일정도 외국인처럼 멋지게 보이기 위해 컬러염색을 하는 그 마음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검은 머리가 자라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염색에 도전하는 것은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 재정과 행정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봅니다. 10억원을 들여서 골목길을 포장하고 시장, 의장, 시의원, 주민이 모여서 준공식을 하고나면 다음날부터 고가의 인근 주민 주차장이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골목길을 포장했다고 해서 교통소통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에 하는 말입니다. 버스, 택시, 승용차가 자주 왕래하는 도로 중 병목구간을 개선하는데 우선적으로 예산을 투자하고 골목길은 포장보다는 깔끔하게 정리하여 환경, 위생적인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 행정의 우순순위 목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체장과 의원들은 시민의 눈에 보이는 시설을 건설하는데 집중하는
이제는 他山之石(타산지석)이라는 말은 ‘강 건너 불’과는 다르게 해석하고자 합니다. 타산지석은 그대로 풀어보면 ‘다른 산의 돌’이라는 뜻으로 다른 산에서 나는 거칠고 나쁜 돌이라도 숫돌로 쓰면 자기의 옥을 갈 수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강 건너 불은 ‘자신에게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관여하려 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큰 강을 건너는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강 건너 마을의 집에 불이 나거나 큰 싸움이 벌어지는 등 위험에 처해도 이쪽 강 건너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할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강 다리가 서울구간에만 32개가 건설되어 있습니다. 최근 서울 강동구 고덕동~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을 잇는 33번째 한강 다리의 이름을 놓고 이웃한 자치단체 사이의 신경전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도로공사는 2016년부터 구리∼안성 고속도로를 건설 중인데, 이 다리는 올해 말 완공할 예정이어서 구리시의회는 건설 중인 교량 이름을 ‘구리대교’로 해 달라는 내용의 건의문을 국회, 총리실, 국가지명위원회, 경기도, 한국도로공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무관한 일인데 동시에 발생하여 인과관계가 있는 듯 보여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오해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이 1989년 1월 1일에 오산시로 승격하였습니다. 시로 승격하면서 오산시는 개나리, 비둘기, 은행나무를 시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당시의 화성군과 오산시의 자료를 살펴보니 화성군의 상징물도 오산시와 같은 개나리, 비둘기, 은행나무였습니다. 오산천에 개나리가 만발하고 비둘기가 날았으며 공자님을 모시는 사당 闕里祠(궐리사)에는 520살(2023년 기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오산역사에서 오산역 이름 유래를 설명하는 동판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에 까마귀가 많이 날아다녀 역명을 오산이라 했다'고 합니다. 오산역은 1904년 경부선 완공 당시 설치되었으며 이후에 설치된 오산역을 안내하는 동판이 오산역 한쪽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오산지명 유래는 오산천에 자라(鰲=자라오, 전설상의 바다에 사는 큰 거북 또는 자라)가 많이 서식해 오산(鰲山)이라 불리다가 오산(烏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지만 애초부터 까마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