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언론에 장문의 글을 쓰고자 한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공보관’, 즉 대변인이라는 직위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첫 번 소재로 삼고 싶었다. 1999~2007년까지 경기도청에서 근무하신 여섯명 공보관 또는 대변인에 대한 이야기다. 1999년에 처음 아웃소싱 공보관을 만났다. 당시에는 별정직 4급 공무원이다. 중앙에서 언론이나 언론홍보에 근무한 경력이 짱짱한 분들이 채용되었다. 그동안 공조직 안에서 상하좌우 짜임새 있는 근무 틀에 익숙한 분들과 근무해 왔는데 이분들은 파격적이었다. 민간에서 경험한 바를 행정에 성공적으로 접목했다. 화재 현장에 택시 타고 달려가는 열정을 배웠다. 도정에서 언론 관련 사건이 뜸해지면 금연에서 발생하는 '금단현상'을 겪는다고 했다. 공보관실#대변인실은 늘 언론 관련 사건들이 줄지어 들어서야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다. 민간에서, 정치에서, 행정 밖에서 행정을 컨트롤하는 황소의 고삐조차 없는 무중력의 정치적 공간에서 날아다니시던 분이 행정, 도정이라는 고삐에 묶이고 공보관, 대변인이란 공인명함을 들고 일하시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분들을 제대로 보좌하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은 행정 시스템을 민간기업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당시
경기도공무원 대부분이 근무하는 사무실, 즉 경기도청 청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됩니다. 도청의 전신인 京畿監營(경기감영)은 서울 한성부 내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청 청사가 서울시에 있는 것은 경기도민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53년 4월 15일 경기도 인천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시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存置(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병희 수원유치위원장(제6,7,8,9,10,13,15대 국회의원)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요청하였던 바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수원으로 결정되고 팔달산에 청사를 준공하여 1967년에 '서울도청'이 수원시에 移轉(이전)했습니다. 참고로 공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