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유권자의 눈/이강석 경기도2청 복지정책과장 승인 2006-04-24 공무원을 ‘공복’이라 하고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을 ‘심부름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시대의 지방의원이나 단체장은 우체국 기능이나 부름센터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을 한다. 지역의 여론수렴은 물론 정책결정, 조례의 제정 등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결정을 한다. 의원이 되면 상임위의결, 본회의 표결을 하고 단체장은 예산편성과 집행, 조직의 관리를 총괄한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의원이나 단체장이 4년간 하는 일은 단순히 4년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로부터 진행되어온 수많은 사업을 마무리함은 물론 미래의 사업을 구상하고 집행한다. 이같이 중요한 일을 하는 시의원, 도의원, 시장·군수, 광역시장, 도지사를 선출하는 선거가 5월31일에 있다. 이번 선거 과정에는 더 이상 구태가 있어서는 안된다. 유권자는 무엇인가를 받아야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선거출마자는 유권자에게 금품, 향응을 주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선거운동 과정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 선거철 후보자 연설을 들어보면 자신의 정책을 이야기하고 지역발전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천자춘추] 30년 ‘경기일보’ 1988~2018 1980년대 지방언론사는 이른바 ‘1도1사’였다. 하나의 道에는 1개 신문사만 둔다는 언론방침이었다. 그리고 1988년에 언론통제가 풀리면서 경기도와 인천지역에 인천일보(7월15일), 기호일보(7월20일), 그리고 경기일보(8월8일)가 창간되었다. 1973년 기존의 3개 언론사를 통합하여 경기신문으로 창간되고 1982년에 경기인천을 커버하는 신문사로 개칭한 경인일보와 함께 4개 지방 신문사는 지방언론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86아시안게임에 이은 88올림픽은 지방언론을 활성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88년 7월4일에 7급 공무원으로 문화공보담당관실(대변인실)에 발령을 받았다. 전임자는 경인일보 ‘1도1사’의 체제에서 일했고 발령 후 며칠간은 단순한 업무로 생각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기자실에 전했다. 그리고 오후에 자료로 보낸 도정업무 내용과 전화로 불러준 ‘가십(gossip)’ 기사가 활자로 보도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발령받고 서류 보따리를 풀기도 전인 7월에 기호일보와 인천일보, 8월에 경기일보가 창간했다. 숫자도 멋지게 1988년 8월8일에 창간된 경기일보 출입기자 두 분을 맞았다. 기존의
공직을 마친 후 조차도 경기일보사에서 이렇게 많은 기사를 실어주신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우선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어느 날 산책길에 문득 그동안 경기일보에 게재한 기고문을 정리하면 한 권의 자료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정리해 보니 한 권의 책이 두툼하게 나올 정도로 많은 기사를 실어 주시고 拙稿(졸고)를 받아 주시고 새롭게 다듬어서 기고문으로의 숙성작업을 거쳐서 신문에, 인터넷에 게재해 주셨습니다. 기고에 더하여 행정 활동에 대한 다양항 분야의 기사를 화인하였고 이를 첨가하니 제법 두툼한 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이를 자랑하는 바입니다. 사실 공직에서 일할 때는 물론 퇴직 후에도 겁 없이 끈 글을 부담없이 편집국에 들이 밀었습니다. 그리고 경기일보에서는 저의 지극히 부족한 글을 여러 번 지면에 실어 주었습니다. 편집회의에서 논란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拙稿(졸고)를 美麗(미려)하고 깔끔하게 편집하고 부족한 단어를 고치고 단련시켜서 포인트를 짚어 교정해 게재해 주셨습니다. 사실 草稿(초고)와 경기일보에 게재된 글을 법령과 조례를 심의하는 逐條(축조)심의 하듯이 字句(자구)까지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先親(선친)이 되십니다.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先親(선친)이라 부릅니다. 春府丈(춘부장)은 다른 이의 아버지 존칭입니다. 그래서 춘부장 어르신으로 호칭합니다. 조상의 묘비를 보면 이름 앞에 諱(휘=죽은 어른의 생전 이름)자를 씁니다. 후손들은 돌아가신 조상의 墓碑(묘비)에 이름을 새깁니다. 돌에 이름을 새기는 이유는 긴 세월 동안 그 자리에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집 대문에는 나무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달아둡니다. 손님이 오시거나 우체부, 택배를 받기 위함일 것입니다. 더러는 돌이나 비슷한 재질로 이름을 새겨서 대문 앞에 자랑스럽게 걸어둡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이의 양복주머니에는 명함이 들어있고 지갑에는 약간의 현금과 신용카드가 들어있습니다. 명함은 단단한 종이에 자신의 신분과 주소, 연락 방법으로 전화번호, E-Mail, 홈페이지, 카페주소, SNS 등 다양한 수단을 적어줍니다. 명함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는 예는 없습니다. 감사, 인사부서 공무원들은 명함에 사무실 전화번호만 인쇄합니다. 공직자로서 동장이 되어서는 명함에 기본사항을 넣고 말미에는 명함 제작일을 넣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자
경기도청과 화성시청에서 청년과 장년시대를 보낸 후 정년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였나를 돌이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름 바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데, 공직자로서 도민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과천청사에 있는 기재부 사무실에 가서 이틀 이상 투쟁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2000년 전후에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의 법인카드를 들고 상경한 공무원 열사들이 기재부와 중앙부처의 사무관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의 시청과 군청의 공무원들이 당시에 서울 광화문과 과천 정부청사에 몰려있는, 예산을 쥐고 있던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투쟁적으로 예산을 따냈다고 합니다. 예산확보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실을 따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난날 호남, 영남, 충청, 강원도 공무원들은 4박5일치 짐을 미리 챙겨서 서울로 과천으로 올라왔답니다. 요즘에는 지방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공무원들은 아침과 오후에 현장으로 달려가서 중앙의 귀하신 국가 공무원에게 가난하고 인구가 줄어가는 군민 3만 규모의 기초자치단체를
우선은 인사발령장을 전달하는 행사를 ‘사령교부’라고 하는 용어부터 개선을 건의합니다. 공직 내내 그렇게 발령장을 받았으면서 이제서야 개선을 건의하는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멋지고 의미 있는, 발령장을 주는 자의 입장이 아니라 받는 공직자의 시선에서 개선해 달라는 의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1977년이면 공직에서도 권위주의가 하늘에 닿아있을 시기입니다. 화성군청 군수님을 만나서 5급을류 공무원 사령교부, 오늘날 9급 공무원 발령장을 받으러 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생으로 학원을 다니는 중에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흰색 T-셔츠에 끈 없는 운동화를 신고 오산읍에 소재한 화성군청 내무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내무과장, 행정계장은 모든 ‘공무원의 헌병’이어서 이른바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던 시절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발령장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겁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상 밖의 불량하고 미흡한 발령 대상자를 본 당시의 목이 짧은 행정계장님은 ‘복장불량’을 호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뭐요?” “발령장 주신다고 해서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복장이 뭐요? 발령자 준수사항을 읽지 않았
10년 전에 재미삼아 작성해 본 나름의 전화기 사용설명서인데 2023년 오늘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는 듯합니다. 일부 부분개정이 필요해 보입니다만 개정한다 해도 더 보강할 내용이 떠오를 뿐 삭제할 곳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핸드폰 이전에 쓴 ‘자안리’ 마이크가 생각났습니다. 고향마을 1977년경에는 자안1리와 2리를 합해서 70호 200여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우체국에서 공급한 전화기는 자안2리 이장님 댁에 1대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대략 45년 전 시골마을 이야기입니다. 이장님 댁 동네 스피커 방송이 전달되는 자안2리 주민들은 도시에서 걸려온 일가친척, 형제자매의 전화를 30분 시차를 가지고 걸고 받을 수 있었지만 윗마을 자안1리 고향마을 주민들은 본인이 필요할 때 아랫마을 이장님 집에 가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석식 전화기의 손잡이를 잡고 전기를 일으키면 우체국에서 신호를 받아 통화가 되고 서울, 수원, 인천지역 번호를 신청하면 잠시 후에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고 기다리면 상대편에서 ‘여보세요’하여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빈약한 통신의 시대를 지나 1998년 동두천시청 동장으로 근무한다는 명분을 바탕으로 이동전화기를 신청하였고 사장
가정과 직장은 물론 기업이나 공장의 생산공정에서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다수가 크게 편리하고 생산성을 확충할 수 있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됩니다. 중학생 때 시골마을에서는 부엌과 안방사이의 벽을 뚫어 밥과 반찬이 드나드는 창을 내는 작업이 유행했습니다. 방에 상을 펴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올려주는 반찬과 밥, 국그릇으로 아들딸은 방안에서 상을 차렸습니다. 초창기 할아버지들은 '에헴'하며 불편해 하셨지만 수년 내에 시골동네 모든 집 주방-안방간 사이에는 이른바 음식을 위한 ‘소통의 문’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들어오고 빈 그릇을 설거지하기 위해 드나드는 것은 물론 가족 간의 소통의 창문이 되었습니다.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이 멋스럽지만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으므로 이곳에 지름길을 내는 개선안을 제안하여 공사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을 하신 분(아마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1890~1969)이 대학총장으로 일할 때 학생과 교수들이 잔디를 밟고 다녀서 징계를 하겠다는 주장에 대해 현장을 살핀 결과 그 곳이 지름길이고 이곳을 막으면 먼 거리를 돌아가는 불편함을 확인하고 오히려 그곳으로 길을 낸 사례를 참고했습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3년고개'라는 글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깨닫고 강의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3년고개'라서 3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통념을 뛰어넘어서 3년을 산다고 생각한 며느리의 적극성에 박수를 보내게 되었고 그런 생각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토리는 이러합니다. 어느 날 노인이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3년고개'에서 넘어져 3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걱정에 머리를 싸매고 누웠습니다. 건강하시던 시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아버님, 어찌하여 누워만 계십니까?” 시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내가 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저 '3년고개'에서 넘어졌단다. 이제 3년 후에는 죽게 되었으므로 이렇게 누워있단다.” 시아버지의 근심 어린 답변에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그럼 아버님, '3년고개'에 가셔서 한 번 더 넘어지시면 3년을 추가해서 더 사시겠습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말을 듣자 크게 깨닫고 '3년고개'에 가서 일부러 여러 번 넘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시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은 이 고개에서 6만 번을 넘어졌다.” 며느리의 재치로 노인의 걱정을 해
식당에서 배우는 인생 며칠 전에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두 집 부부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주인장 와이프는 주방에서 생태와 코다리찜 2인분, 4인분을 찌그러져 수세미가 닿는 부분만 반짝이고 그 안쪽은 검정색이 남아있는 냄비에 담아 애벌을 끓여서 남편에게 인계하고 남편은 즉시 악어 입 옆으로 돌린 듯 보이는 집게로 번쩍 들어서 손님상에 배달해 줍니다. 12시 지나 들어간 식당에는 손님이 한가득이고 이미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정리하지 못 한 채 남자 사장 혼자서 홀 서빙하고 계산대에서 카드를 받고 친절하게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장사는 이렇게 해야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코로나19로 손님의 등락이 크다보니 종업원을 한 분 더 두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동시수용 20명 정도의 식당에서 종업원을 채용하면 한 달 인건비와 함께 발생하는 잘잘한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발품을 더 팔아서 이른바 박리다매(薄利多賣) 전략으로 가시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식당이 손님을 끄는 힘은 아내의 손맛인가 생각합니다. 국물과 반찬이 입에 맞습니다. 살짝 건조 후 볶아낸 듯 여겨지는 어묵조림의 식감이 기분을 좋게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