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의 언론담당관, 그리고 남양주시청, 오산시청, 동두천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한 이강석 전 경기테크노파크원장이 언론 기고문 중 100개를 모아 편집한 본인의 세 번째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2020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경기도에서 42년간 재직한 공직자로 공보부서에서 1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언론과 인연을 맺었고 도청 균형발전기획실장,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꾸준히 언론에 기고했다.
또한 경기도테크노파크 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하면서 ‘언론사의 도움을 받은 바 크다’면서 신문사에 퇴임 인사를 다녀간 친 언론공무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임인사는 많이 오지만 퇴직자가 언론사를 방문한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뉴스폼에 게재하는 '이강석의 세상만사'는 책 '보리차 냄새와 옥수수 향기'를 토대로 스마트 시대를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스토리텔링을 통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코너다.
▨ 남북평화통일의 試金石(시금석)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파주시 점동면에서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248㎞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각각 2㎞씩 물러나면서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그어 놓았지만 아마도 통일의 밀알처럼 정전협정 부칙에 의해 2개의 마을을 비무장지대 안에 뒀다. 최근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기정동 마을과 대성동마을이 ‘자유의 마을’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기정동마을은 레이건 대통령 방문 시 ‘촬영장 영화세트 같다’는 말을 들었으나 2003년으로 마무리되고 이제는 실생활에 이용되는가 보다. 그런데 70년의 세월이 이렇게 속절없이 흐르고 보니 국토를 가로 지른 DMZ(Demilitarized Zone)는 없어져야 할 대상이면서 또 지켜내야 할 대상이 됐다. 살아있는 냉전사의 현장이자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이곳이 미국 타임지에서 ‘아시아에서 가 볼 만한 곳 25개소’로 선정돼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로도 유명한 현장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이곳에 북한 도발의 현장인 제3땅굴이 있다. 휴전 이후 북한의 도발이 제4땅굴까지 이어지고 남침용 땅굴이
직장동료들과 회식을 가면 서로서로 마주보며 머뭇거린다. 자리를 잡는데 1분이상이 걸린다. 내 자리가 어디쯤이면 적정할까 빠른 속도로 CD를 돌려 선곡을 하듯이 자리를 스캔하고 참석자를 분석한 후 자신의 서열을 4-5번쯤으로 정한 후 그 자리를 잡는다. 이어서 오늘의 좌장이 들어오면 모두 일어나서 서로서로 상석을 권하며 한 자리씩 물러났다가 다시 빈자리가 생기면 우두머리의 측근 자리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 그리하여 과장이 자리하고 앞에는 주무계장, 과장 좌우에 2,3번 계장이 착석하고 그 언저리는 차석의 차지이니 말석은 문 앞이나 방구석 끝자리다. 하지만 이 경우는 대단히 불합리한 좌석배치다. 더구나 삼겹살을 먹는 경우 2번 계장은 연신 고기를 굽고 가위로 잘라가며 후배들의 소주잔을 받고 다시 권하다 보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오늘 모임의 취지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 채 술에 취하고 만다. 업무보다 더 고민해서 자리를 잡았다 해도 서너잔 지나가면 네 자리 내자리가 없고 숫가락, 젓가락 수만 늘어난다. 자리를 이동할 때 수저를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장과 주무계장 자리에 서무담당을 배치하기도 어렵다. 이른바 급별로 배치되는 경우 대화의 내용은 4그룹
참 오래전의 약육강식과 수렵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지구에서 눈과 진눈개비가 구분된 이후정도의 일일 것입니다. 아니면 메뚜기와 여치가 색으로 구분되기 시작한 생태계의 고전적인 시대에 부족국가 이전의 시대일 것입니다. 한반도로 말하면 단군할아버지의 오래전 조상이 사시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왕자님이 출가하시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든 지상과 지하 세계이든 생명체가 존재하던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여러 가지 형태의 식물과 동물이 존재하고 그 동물들이 약육강식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일입니다. 그 마을은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몇 명 안되는 사람들이 몇가지 제한된 가축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30여호의 집이 있었고 가구마다 평균 9명정도가 살았습니다. 할아버지 부부, 아버지 부부, 삼촌과 고모들, 그리고 손자들을 합하면 13식구가 되는 집도 있고 1자리수 가정도 있었습니다. 가축의 대표는 무론 소이고 검은 돼지와 붉은 닭, 아무에게나 짖어대는 개, 염소와 양이 전부였습니다. 말을 본 것은 15살이 넘어서입니다. 하늘에 주인없이 날아다니는 새는 10여종입니다. 까치, 비둘기, 참새,
2012. 4. 15(일). 오전에는 천국이요 오후는 인간 세상이었다고 평가해야 할까보다. 보름 전에 예약한 KTX표를 들고 수원역에 가니 아직 30분은 족히 여유가 있다. 지난번 경북 방문때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수원역 오픈식 서점에 들러 15,000원짜리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남자의 물건.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학심리학. 김정운 저, 21세기북스. 독일 유학파인 저자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 만년필을 소개하고 이어령 선생의 책상, 소주병 상표 ‘처음처럼’을 쓰신 신영복 선생의 벼루를 소개한다. 그리고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수첩’과 차범근 선수의 ‘계란 받침대’도 나온다. 모두가 본인들을 만나 장시간 인터뷰하고 쓴 글이다. 앞부분 저자의 글에서는 깊이 있고 공감가는 평가가 나오고 유명인의 인생사에 함께하는 물건 편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한다. KTX 예약석에 앉아 커피한잔과 함께 좀 비싼 도너츠를 사 함께 먹으며 책을 읽고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면서 아주아주 편안하게 동대구를 거쳐 부산역에 내렸다. 30대 여자들은 머리를 묶을 때 그 머리 묶는 고무줄을 꼭 입에 물고 시작을 할까? 전에도 여러 번 사용한 고무줄인 것 같은데. 저러다가 할
존경하는 곽상욱 시장님과 사랑하는 600명 동료 공무원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함께 일한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어느새 1년 일곱 달이 지나갔습니다. 공직에서 1년은 참으로 귀중한 근무단위라고 생각합니다. 1년 7개월이면 결코 짧지 않은 소중한 나날이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서 우리 시에서의 공직 기간은 불과 수개월처럼 참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저는 이제 좀 다른 곳에서 색다른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우리시 오산시에 근무하면서 만난 모든 분들은 제 평생 내내 행복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젊은 도시, 교육도시, 활기찬 변화 행복도시 오산에서 제 마음이 젊어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행동까지 어려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근무하면서 작은 변화를 하고자 이런저런 노력을 해 보았습니다. 회의실을 편리하게 개선하고 주차장에 지름길 동선을 만들고 여러분이 근무하시는 사무실에 가서 함께 대화를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現答(현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뜻으로 쓰여 집니다. 사무실에서 페이퍼만 보아서는 현장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도상으로 본 ‘서울대병원부지’는 그냥 땅으로 보였습니다만, 현장에 가본 ‘외삼미동 시유지’는 참으
참으로 오랜만에 돌집풍경을 보았습니다. 요즘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되었고 사진을 인화지에 뽑지 않고 파일로 관리하면서 영상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보여줍니다. 물론 돌잔치 장소인 뷔페장 주변에 아기의 사진과 소품을 별도로 진열하였더라구요. 참 부러웠습니다. 아기의 1년 동영상을 보고 한번 더 행복했습니다. 우리 부부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더욱 기분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아이들 어려서 목욕시키고 재우고 옷 갈아입히던 기억이 새록 새록합니다. 정말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음을 미리 알았으면 더더욱 행복스럽게 그 순간들을 만끽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숲에 가서 이 공기가 몸에 더 좋다는 것을 알기에 여러 번의 심호흡을 합니다. 어느 순간이 나에게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순간임을 그때 바로바로 알아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 그때가 행복이었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약간 김이 빠진 듯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는 것은 참 야속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이 나에게도 있었다고 느끼는 것 또한 행복한 일입니다. 그전의 힘들었던 기억을 씻은 듯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식사 중에 옷에 물방울이 튀어서 마음이 조금
사람이 살아가는 일중에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는 일도 큰일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열로 며칠 버티다가 힘들다 하여 달려간 응급실인데 일단 응급실이 아니라 기다리는 '응접실'이다. 그냥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 사무장인 듯한 분들이 바쁘게는 움직이는데 응급환자와 또 응급환자의 1.8명쯤 되는 보호자와 가족으로 응급실은 말 그대로 '응급실'이다. 그러니 의사와 간호사는 바쁜데 환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의사를 만나는 것 같을 것이다. 더구나 아픈 증상을 말하면 혈액검사, 소변검사, 또 피검사, 복부내시경으로 검사를 한다. X-RAY는 첫 번째 검사항목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판독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소요시간은 담당 닥터만 안다고 한다. 요즘 '골든타임'이라는 종합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교통사고 여고생이 종합병원 과장들의 소관따지기, 수술 우선순위 정하기에 휘둘리다가 수백km 떨어진 다른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 드라마 내용에 공감이 가는 바이다. 피검사는 이상 없으니 복부촬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상판독은 응급실뿐 아니라 다른 여러 과에서 보내진 화상을
직장 상사나 동료는 1년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늘 비교되고 평가할 수 있는 파트너 이지만 부부는 평생을 함께하기에 비교될 수 없는 독점적 지위이다. 또한 공무원에게 청렴을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업무가 거의 독점적이기 때문이다. 호적, 주민등록, 인감 등 신분을 확인하는 서류는 물론 보건복지관련 자료도 동사무소나 구청 등 관공서에 가야한다. 만약에 이런 서류를 은행이나 백화점, 호텔에서 발급한다면 국민들은 행정기관에 가지 않고 친절을 넘어 고객을 감동시키는 백화점, 7성급 호텔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결국 아내에 대한 불만이 될 것이다. 아내는 유리하다. 남편과의 대화에서 유리한 것은 친구남편의 예를 들고 불리한 것은 먼 나라 딴 나라 사람의 사례를 잘도 끌어댄다. 집근처에 삼성 박사들이 많이 사는데 그들은 회사에 가서 아침을 먹는단다. 건너편 아파트 7동의 아내들은(우리 부부는 6동에 산다) 왜 ‘삼성맨의 아침식사’를 오늘아침 메뉴에 올리는 것일까? 너도 아침에 넥타이 매고 회사 가서 밥먹어라. 그러면 나는 늦잠자고 설거지도 안하고 11시쯤 친구만나 아점(아침+점심)먹고 수다 떨다가 3-4시에 집에
살다보면 ‘그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어떤 일을 거기까지만 진행한 것이 잘된 일이라는 이의미로도 들리지만 대부분은 더 나쁜 상태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그쯤에서 멈춘 것이 다행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낫지만 접촉사고 수준인 경우에 쓰일 수 있다. 또는 교통사고로 찰과상을 입었다면 팔이 부러지지 않아 다행, 왼팔이 부러졌다면 오른팔은 성하니 일상생활에 불편이 덜하다고 할 것이고 다리는 성하여 걸어 다닐 수 있어 ‘그만하길 다행’이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다리가 부러졌다면 단순골절, 복잡골절을 말할 것이고 허리가 성하니 다리 아픈 것은 시간만 지나면 될 일 아니냐면서 위로를 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먼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는 편리하고 필요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후회하고 원망하고 따지는 일이 무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발생하는 일과 사건들을 운명적으로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운명을 타개해 나가려는 의지는 사라지고 매사에 맹종하게 되는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든지 이보다 더 높은
“저승사자와 사신은 25㎝ 간격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고속도로에서 다른 버스와의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이 무섭다는 변우량 교수님의 강의내용이다. 변 교수님은 또 “깊은 산속 높은 교량에서 사고가 나서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모습을 같은 회사 다음 버스안에서 바라보아야만 했다.”고도 했다. 변 교수는 출장지에서 돌아오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줄을 서 있는데 조금 앞에서 어느 청년이 새치기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참 바쁜 일이 있으려니 하면서 눈감아 주었고 순서대로 타다 보니 교수님 앞에서 정원이 마감되고 다음 버스를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새치기 청년까지 태운 앞 버스가 저렇게 교량 난간에 대롱대롱 위태로운 지경을 맞이한 것이다. 어떤 대학교수가 조금 빨리 보직교수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약간의 개인적인 청탁이 있던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보직교수가 된 지 몇 주 만에 전국 대학 회의가 열렸고 보직교수로서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가 탑승한 헬기가 안개 속에서 무리하게 운행하다가 산 중턱에 충돌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한다. 1981년에 창문너머로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에 교수님의 강의내용이 창밖의 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