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덕혜옹주를 기억하며]

물 두 병을 등짐에 지고 가 편지와 함께 두고 출근하였습니다. 덕혜옹주님 묘역을 문화재청이 개방하였습니다. 영화 덕혜옹주 관객이 500만을 넘어서면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므로 비공개였던 덕혜옹주님 묘를 공개해 주심으로써 울타리 너머로 스마트폰을 넣어 사진을 찍던 안타까움을 해소하고 편안하게 묘역을 둘러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6년 9월13일, 추석연휴 전날의 쾌거입니다. 그래서 10,000원짜리 국화분 하나를 사들고 가서 묘소에 드리고 절을 올렸습니다.

이 국화향기가 더 넓게 퍼지고 국민들께 전해서져 아픈 역사가 보람찬 역사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더러는 덕혜옹주님, 영친왕에 대해 비판을 하십니다만 易地思之(역지사지) 생각해 보면 무조건 잘못이라 할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일본에 의해 왜곡된 기록, 잘못된 이야기만 듣고 영화의 내용에 비판을 가하는 것도 옳은 판단은 아닌 줄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이야기가 실제로 발생하였을 수도 있는데 일본이 기록을 삭제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는 것입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올린 국화는 봉우리 수준이었는데 일주일만에 먼발치로 바라보니 만개하였습니다. 분홍빛 꽃송이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지금쯤 해설사님이 편지를 읽으시고 국화난에 물을 뿌려주셨을 것입니다. 국화는 맑은 물을 마시고 더더욱 맑은 향기를 묘역 주변에 뿌려줄 것입니다.

편지를 읽으신 해설사님이 오늘 첫번째 방문객에게 국화 물주기 스토리를 설명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토리텔링이야 말로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서양의 유명 관광지는 대부분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집니다. 역사속의 이야기도 스토리를 통해 전해지고 가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덕혜옹주님의 우리말 연설장면이 떠오릅니다. 장한이 설치한 다이나마이트가 독립가옥을 폭삭 파괴하는 장면이 통쾌한 기억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열강들이 대립하던 그 시기에 옹주로 태어나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유학가고 政略結婚(정략결혼/ 가장이나 친권자가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키는 결혼)하고 이혼하고, 딸을 잃고 조현병으로 돌아온 덕혜옹주의 한 많은 생을 반추해 봅니다. 퇴직후 가족과 대마도를 여행했을때 덕혜옹주 비석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습니다.

 

[이강석 기행문] - 대마도, 쓰시마, 덕혜옹주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기획하였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꾸민 일입니다. 혹시 의미를 부여하여 해외가족여행을 잡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부는 금요일 아침에 수원을 출발하여 부산에 가서 관광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면 남매가 저녁 KTX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밤 11시경 숙소에 합류하는 가족여행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부산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1박2일 해외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권 4매를 작은 가방에 넣고 다시 큰 가방에 넣은 후에 어깨에 둘러 메는 일입니다. 이번 여행의 장소와 일정 등은 아내와 딸이 기획하고 예약하고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니 가장으로서 짐을 들고 지고 끌면서 여권을 잘 관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실무자, 담당자에서 결재권자, 공람하는 역할이 주어지더니 명퇴한 후에는 이렇다 할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서럽기도 합니다만 앞으로는 더더욱 더 많은 서럽고 억울한 일이 많을 것이라고 선배들이 조언합니다.

매탄권선역으로 갑니다. 07:40분에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 내려서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지나 대합실에서 부산행 KTX 전광판에 붉은 동그라미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불이 켜져야 내려갈 수 있습니다. 미리 내려가면 찬바람 부는 음습한 철길앞에서 더 기다려야 하니 따스한 이곳 대합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여행은 자신을 저 넓은 무대에 올리고 스스로 관조하는 기회입니다. 나를 돌아보고 다른 이를 배려하는 법을 배우는 타산지석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저렇게 사는 이가 있고 이렇게 살고 있기도 합니다. 대합실 손님에게 소주값 1천원, 500원을 달라는 노숙자 아저씨도 만나는 곳이 수원역 대합실이고 서울역 지하차도인 것입니다.

30분 넘게 기다려 KTX에 승차하니 가족석 바로 다음자리 순방향에 예약되었습니다. 우리가족이 올라올때는 이 가족석에 앉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석에는 30대 중반의 아가씨 4명이 앉아서 라면, 과자, 우동 등 다양한 상차림에서 조찬을 즐기고 있습니다. 집에서 짐만 꾸려 서울역인가 영등포역에서 탑승한 후에 곧바로 음식을 주문하여 아침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60대 기성세대는 어려서 가져보지 못한 이 시대 청춘의 특권입니다.

이들의 아침식사는 1시간 가까이 이어지고 나중에 커피를 마시고 물을 마시면서 웃고 즐기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나름 보람찬 여행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옆 가족석에는 두 딸과 부모가 자리했습니다. 이 가족도 과자를 놓고 물을 마시면서 가족여행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도착 1시간 전부터 두 딸이 경쟁하듯 화장을 시작하는데 그 손놀림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에 기초화장품으로 파운데이션을 치고 다시 볼터치를 이어가고 눈썹을 그리고 속눈썹을 붙이고서는 눈가 주변에 동그라미 스펀지로 연실 두드려 줍니다. 진정한 화장의 기법을 보여주고자 자매가 경쟁하는 것 같습니다. 年年생인 듯 보이는데 움직이는 폼새로 보아 창가가 언니, 통로쪽이 동생입니다.

우리 옆줄에 있던 손님이 동대구에서 하차하자 노부부가 승차합니다. 지팡이를 든 할머니와 얼굴에 깊은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으시더니 억양 쎈 목소리로 집안 대소사, 동네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할머니가 말하고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어휘로 일갈을 합니다. 할머니가 맷돌에 호두를 얹으면 할아버지가 망치로 깨어 버리는 형상입니다. 억양 높은 두 분의 대화는 화살이 되고 송곳이 되어 우리의 귀를 아프게 합니다.

이 부부도 신혼시절이나 연애시절에는 아이스크림 같은 부드러움으로 대화를 하셨을 것인데 거친 세월과 풍파가 이처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얼굴과 팔다리도 억세졌지만 그 이상으로 목소리도 강인해지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생노병사와 함께 나이들수록 할머니의 권력이 강해지는 신 모계사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이제는, 남편에게 경어를 쓰는 아내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존칭을 쓰든 경어를 쓰지 않아도 기차는 초봄 한반도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드디어 부산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전철을 타고 관광을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역 바로 앞 길가에 부산 관광공사가 운행하는 투어버스가 우리 부부를 유혹합니다. 15,000원에 종일권인데 KTX승객은 2천원을 할인해 줍니다. 조금 망설이다가 이내 2층버스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산이지만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데 2층 버스에 올라서 조금 견뎌보니 그 부드러움이 섞인 부산 바람은 부드럽게 다가섭니다. 복잡한 시대를 지나 부산항이 나오는 길을 지나 오른쪽에 광한대로를 세운 채 이리저리 도심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해운대 해수욕장을 지나 길가에 내려줍니다.

모두 3개 노선이 있는 버스투어의 두 번째 노선으로 환승하면 해동용궁사로 갈 수 있습니다. 국립수산과학원 바로 옆에 해안을 끼고 조성된 사찰입니다. 요즘 불교방송에 나오는 그곳입니다.

역시 현장에서 직접 보아야 그 위용을 알 수 있습니다. 1시30분이 되었으므로 집에서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2,000원짜리 어묵 2개를 놓고 국물에 김밥을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미륵불 앞에 가서 108배를 올렸습니다. 열심히 절하는 모습을 외국인이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신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미륵불앞에 절을 하는 모습이 재미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이라는 것은 누구도 意識(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儀式(의식)입니다.

보람스럽게 절을 마치고 이리저리 해동용궁사를 관광하고 정류장에 도착하니 부산관광공사 투어버스가 있고 행복스럽게도 승차한 후 3분여만에 출발하여 해운대역에서 환승합니다.

이어서 자갈치시장으로 향합니다. 5시가 조금 지났으니, 많이 걸었고 108배를 올렸으니 좀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1층에서 횟감을 점지하고 2층으로 가면 회와 매운탕꺼리를 배달해 주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그냥 2층으로 가서 5만원짜리 회와 매운탕을 주문했습니다. 이곳은 아마도 그들만의 운영 시스템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니 2층에서 주문하면 조금 더 많이 잘 조리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고 그 생각이 옳았습니다.

소주 1인1명과 4인4병은 수학적으로는 같지만 인문학적으로는 크게 다릅니다.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4명이 소주를 시작했다면 1인 2병도 가능했을 것인데 나홀로 혼술하기에는 1병도 버겁습니다.

세상만사 참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넘치는 분야가 있고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마음대로 아니되는 일들이 요즘들어 더 많아지고 늘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룸은 1인당 12,000원입니다. 부산시 동구 중앙대로 195번길 12(051-466-0060) 김치 게스트하우스입니다. 2층침대 3개가 있으니 6인실입니다만 4인만 들었습니다. 깔끔하고 침구와 침대도 좋습니다만 방음이 불량입니다.

새벽에 윗층에서 샤워를 하니 아래층 배수관에서 폭포가 요동을 치는듯 합니다. 정말로 나이아가라 폭포가 이렇게 울어댈 것입니다. 물론 잠결이어서 더 크게 들렸을 것입니다만 하수구 물소리에 잠을 깬 것은 처음인가 합니다.

그래도 숙면을 하고 아침을 먹었습니다. 돼지국밥집입니다. 구수한 밥맛이 일품입니다. 집을 끌고 지고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로 갔습니다. 11시 출발하는 배인데 9시반에 가서 기다렸습니다. 여권을 내고 배표를 받고 출국 심사를 받은 후 대합실로 나갔습니다. 이곳에도 면세점이 있습니다.

역시나 아빠는 짐을 지키고 아이들과 아내는 면세점을 돌아다닙니다. 결국 홍삼 셋트 하나를 사왔습니다. 전에는 면세점 가서 반지, 목걸이 등 귀중품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곤 하더니 부산 면세점은 별로 보이는 것이 없다했습니다.

배는 제시간에 출항합니다. 2시간 20분의 뱃길을 달리면서 점심을 먹고 또다시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도 여행은 즐겁습니다. 파도와 하늘뿐인 뱃길에 시간을 더하니 점점 섬이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도착하였습니다. 여기는 대마도입니다. 이즈하라항 입니다.

오후 일정은 도보로 다닙니다. 조선시대에 배가 표류하여 일본에 상륙하면 일단 이곳 대마도 마을에서 지내도록 한 후 1년에 한번 조선의 관리가 큰 배를 가지고 백성들을 찾아 갑니다. 일본에 돈을 주고 데려갑니다. 그 부락이 저편에 있습니다.

최익현 선생을 모신 순국비(1986년 건립)가 이곳에 있습니다. 선생님은 1833년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습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쓰시마섬에 유배되어 1906년 ‘아사순국’하셨습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수 많은 분들이 살았을 것 같은 이 골목 저 마당을 둘러보면서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입니다. 1931년10월30일에 건립되었고 2001년 11월10일에 재건립되었습니다.

대마도에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이 방치되었던 비를 제자리에 돌려왔습니다. 1912년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왔고 1931년 5월 동경에서 대마도 도주의 세손 종무지 백작과 결혼하였습니다.

1962년 1월26일 귀국하여 7년간 병을 치료받고 낙선제에서 사시다가 1989년 4월21일 일생을 마감하시고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고종황제, 명성황후, 순종황제) 인근에 모셔졌습니다.

올캐 이방자 여사님도 1989년 4월30일에 영면하시어 영친왕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한 홍유릉 인근 英園(영원)에 잠드셨습니다. 홍유릉은 홍릉과 유릉을 말하며 홍릉에는 덕혜옹주의 아버지 고종황제가 잠드셨고 그 옆에는 명성황후가 함께 하십니다.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를 뒤로하고 길을 내려와 누구나가 좋아하는 면세점을 들렀고 약국에도 갔습니다. 저녁 메뉴는 야생 멧돼지고기입니다. 새로운 맛입니다. 야채와 함께 볶아 먹었습니다. 우리와는 다르게 일본 식당은 양이 적습니다.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더 맛이있나 봅니다.

깊은 산속에 자리한 호텔로 갔습니다. 대욕장이라는데 작습니다. 객실의 목욕탕은 우리 집 탕의 절반크기이고 욕조는 더 작아서 앉기에도 불편합니다. 그래도 대욕장의 물은 뜨겁고 부드러워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땀도 내고 방으로 돌아와 숙면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섬 주변을 산책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편 바다위를 49.5km달리면 부산입니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에 가까운 섬입니다. 세종대왕 등 조상들이 조금 더 노력해서 우리의 국토로 편입하였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호텔 조식은 간단합니다. 조각생선, 계란후라이, 작은소시지, 국물, 밥입니다. 그냥 적습니다. 작습니다. 그래서 자판기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습니다. 1,500원정도 합니다.

아침 식사 후 짐을 정리하여 버스에 싣고 달리고 내리고 산에 오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바닷가를 달렸습니다. 러시아 침공을 위해 개설한 운하를 지나는 붉은 다리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주변을 살피고, 흐려서 보이지 않는 한반도 부산을 머리속에 그려보았습니다. 부산에서 이곳을 오간 조선시대 사람들의 지루하고 힘든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점심은 깔끔하고 재미있습니다. 맛있게 먹고 사진 찍고 다시 버스타고 달리고 달렸습니다. 언덕에 올라 한반도를 바라보고 러시아군 전사 추모비, 조선통신사 추모비를 방문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조선의 역사 흔적이 대마도에 남아 있습니다.

쓰시마 섬의 북단까지 올라왔습니다. 항구에 닿아 1시간30분 동안 또 다른 가게에게 이것저것 소품을 사고 드디어 배에 올랐습니다. 올 때는 2시간20분이고 갈 때는 1시간 10분입니다.

바람이 부는 듯, 인근의 배가 보내준 파고를 맞아 약간 움찍하는 순간 배멀미가 왔다가 돌아가고 몇 번 언저리를 돌다가 돌아갔습니다.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 내려 입국, 검역을 마치고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햄버거를 먹겠다하여 잠시 이별하고 부부는 짐을 끌고 나와 버스를 타고 부산역에 가서 본죽을 먹었습니다. 따스하고 시원합니다. 일본보다 양도 많습니다.

저녁 8시경 우리는 그 가족석에서 3시간을 보낸 후에 수원역에 도착하여 88번 버스를 타고 귀가했습니다. 재미있고 보람된 여행입니다.

일본 대마도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여행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외라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여권을 소지하고 한번 出國(출국)했다가 다시 入國(입국)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일본어 교사를 하신듯 보이는 50대 초반의 치아를 치료중이신 가이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야생 멧돼지고기 먹을 때 소주 한컵 넘겨주신 2쌍 부부, 대욕장에서 만난 이들 2쌍 부부의 남편 두분, 모녀 한팀, 세자매님 등 패키지 여행에 함께 하면서 늘 시간을 절약하고 잘 지켜주신 동반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가이드가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약속시간 10분전에 모두 버스에 자리하는 모습은 현대인의 에티켓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서로 짐을 챙겨 들고 열심히 따라다니고 신나게 구경해준 우리집 수고한 가족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다음에도 아빠는 여권을 가방 안쪽에 잘 간직하고 질질이와 여행가방을 잘 지키고 면세점에서 재빨리 여권을 꺼내고 입국심사때 다시 여권을 나누어주는 여행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2018. 2월 이강석 씀)

 

덕혜옹주에 대한 이야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전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어떤 상황이 전개될때 우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는 주장입니다.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되는 그 시점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덕혜옹주 묘역은 출입 금지구역일 것입니다.

남양주에 덕혜옹주의 묘역이 있다는 사실도 이만큼 알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은 움직임으로 거대한 성곽관리사무소를 움직여서 조성왕릉 사진전을 열고 묘역을 공개하게이 이른 것입니다. 조선의 역사는 왕의 역사이지만 백성의 역사이고 수많은 애국지사, 民草(민초), 백성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홍보전략은 커서 좋은 것일까, 작아서 부족한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홍보는 많을수록 좋은 일이고 작아도 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점에 큰 방점을 두고자 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