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은인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이야기의 시작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우리 팀 회식장입니다. 당시 사업소는 6급 팀장과 7급 차석, 8급서무(저요 저), 그리고 9급, 전문직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7급이 주축이 되어 일을 추진하고 연말에는 단합을 위한 회식을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서무계에는 6급 팀장이 공석이었습니다.

 

9살 위인 7급 차석은 술이 약한 편이어서 회식을 할 때면 늘 신경을 쓰게 되는 분이었는데 이날도 소주 5잔을 드시면서 취한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집까지 잘 모셔 드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25세 미혼이었고 공무원 연금공단이 지은 임대아파트에서 월세 50,000원을 내던 시절이므로 집에 일찍 가는 것은 그리 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1년을 회고하면서 현장에서 고생한 선배들을 위로하는 회식은 말 그대로 연말 강추위를 녹일 기세입니다. 더구나 당시의 소주는 지금처럼 19도 20도가 아니고 25도짜리 두꺼비 진로소주입니다.

 

정말로 소주 한잔을 들이키면 나도 모르게 꺄~~~소리가 절로나는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젊은 나이라 해도 술에 장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워낙 추웠으므로 조금 과하게 술을 마셨어도 밖에 나오니 많이 춥습니다. 그리하여 다들 잘 가라고 인사를 한 후 선배를 모시고 택시를 탓습니다.

 

그리고 차문을 닫은 것은 기억이 나는데 이후 시간에 좀 길게 빈 공간이 느껴지고 갑자기 연극의 한 장면처럼 장막이 지나간 후 다음 장면으로 길바닥에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됩니다.

 

1955년생부터 1960년대생이 가장 고생한 공직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이분들이야 말로 술 먹고 테이프 끊어진 기억이 서 너번 이상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술에 강하다 해도 당시의 선배들이 보여준 주법에 의해 강제로 쓰러진 경우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폭탄주에 소주 반잔을 타는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었고 당시에는 무조건 소주 한잔 이상을 넣은 후 맥주로 채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수소폭탄이라 해서 소주잔에 맥주를 담아 넣고 나머지 맥주컵 공간을 소주로 채우기도 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리하지는 않았고 취기가 오를 즈음에 어느 강심장 선배가 슬슬 시동을 걸면서 발생하는 엄청난 폭탄주 세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시절 음주문화가 이러하니 젊은 청춘을 자랑하며 마신 술로 인해 그 강추위에 추정하건데 아파트 공사장 인근 골목길어 내처진 두 사람의 절체절명의 운명은 마치 풍전등화처럼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수원 장안문에서 택시를 타고 연무동을 간다고 하니 거리가 가까워서 요금도 조금 나오는데 목적지를 정확히 대지도 못하고 橫說竪說(횡설수설)하므로 그냥 아무 곳에 내려 준 것으로 상상, 추정합니다.

 

두 사람은 길가에 누워있다가 시간이 지나자 술이 깨고 그래서 조금 정신을 차리게 되어서 지금까지도 짧은 기억이 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취중에도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선배의 팔장을 끼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는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운 듯 보였고 그 골목이 그곳이어서 도저히 선배의 집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느 날 한번 가본 그 집을 더구나 醉中(취중)에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리하여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동전을 넣고 전화를 하려 했지만 선배의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하였고 선배에게 물어도 집 전화번호를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집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시 걸어갔지만 지친 선배가 앞으로 넘어지므로 선배의 가방을 든 손으로 팔을 부축하며 두 사람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느만큼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아늑하고 차분하며 기분 좋은 흔들림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마치 대장내시경을 받은 후 회복실 침대에서 부시시 눈을 뜨는 기분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택시인가 자가용인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세 번째 연극무대 장면이 기억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신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누군가에 의해 들리고 업혀서 아파트를 올라가는 그런 모습입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공무원연금공단 아파트가 5층으로서 계단 양쪽에 5가구씩 모두 10가구가 살았는데 9가구의 모든 식구가 한밤중에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4층에 사는 총각(저요 저!!!)이 술에 취해서 자가용을 타고 집에 와서 해롱해롱 거리므로 1층 아저씨가 나와서 집으로 가자 했는데 무슨 사연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집에 가기를 거부하여 2층에 살았던 교도소 근무하는 고향 선배가 업어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 총각이 사는 집 바로 아래 3층에 사시는 연초제조창 다니시는 사모님이 내려가 보니 어느 젊은 분이 자가용으로 두 사람을 태워왔으므로 이처럼 고마운 분이 있느냐며 어디에 사는 누구이신지를 물었지만 끝내 답하지 않고 두 사람을 이웃집 어르신들에게 인계하고는 홀연히 떠나가므로 차량번호를 외웠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깜빡하고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연극의 네 번째 장면은 두 사람이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고 잠에서 깬 총각은 함께 자신의 집에서 자고 있는 선배 차석을 발견하게 되고 이 황당한 상황에 잠시 놀라 이리저리 살펴보니 자신은 무릎이 깨어져 피가 흐르다가 검게 말라버렸고 선배는 넘어지면서 살짝 얼굴을 땅바닥에 닿는 바람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피가 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자이크 몇 조각을 이어보니 어제저녁 일행 9명과 과음, 폭음하였고 택시를 타고나서 기억이 감감하고 다시 공사장 인근에서 집으로 가야한다고 몸부림치다 쓰러지고, 다시 공중전화를 걸려 했지만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넘어지고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고 여러 명의 주민들에 의해 올려지고 다시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져녁 7시부터 11시까지 4시간동안의 행적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불과 몇 조각이니 실제상황은 더더욱 기가 막힌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상황을 겪고나서 인생에 대한 생각이 조금, 아니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과음, 폭음을 피해야 하고 특히 추운 계절에는 집에 가는 정신 줄 몇 개는 살려 두어야 한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신 27~28세 정도 드신 그 청년의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다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랫집 사모님께서 차량번호를 외웠지만 적어두지 않으신 관계로 다음날 아침에 이슬처럼 기억을 상실하셨으니 이제는 70세 가까이 되신 그 청년, 생명의 은인을 찾을 길도, 은혜를 갚을 길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분의 은혜를 갚는 길은 혹시 어려움에 처한 분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온몸 핏속에 새로운 DNA로 장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동두천에서 동장으로 근무하면서 현장 출장을 자주 가므로 4번 어려움에 처한 분을 도운 바 있습니다.

 

[도움 하나] 어느 날 아침 9시30분경에 동장으로서 관내를 순찰하던 중에 주택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즉시 일으켜 동사무소로 데려와 세수를 시키니 어제 과음한 관계로 밤새 헤메이다가 길가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얼굴에서 피가 흐릅니다. 아이고, 남을 일이 아닌듯 보여서 자세히 물어보니 전날 어디에선가 술을 많이 먹고 지갑을 잃어버렸고 그냥 방황하다 쓰러진 것입니다.

 

당시 동사무소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분에게 구호비를 주는 제도가 있어서 집까지 가는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에 다시 이분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반갑게 통화를 하였습니다. 동장님 죄송합니다. 아, 이분이 한달전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이제 감사인사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만에 또다시 의정부에서 술을 마시고 돈을 내지 않아서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한 달전에 술에 취해 누워있던 사람을 세수시켜 차비주어 보낼 때 명함을 준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명함에 적혀있는 019-339-****번으로 전화를 해서 유치장에서 나가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사무소 트럭을 타고 의정부경찰서에 가보니 마치 동물 우리 처럼 컴컴한 유치장안에 이 친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담당 경찰관이 공중전화를 걸어서 유치장 창살안에 넣어주면 간신히 통화하는 모양새입니다. 담당 경찰관은 이 사람과의 관계를 물었습니다. 한 달전에 관내에 쓰러져 있어 얼굴 씻기고 차비들려 보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경찰관은 한 두번 눈을 들어 나의 몸 전체를 살펴보고는 '동장님! 대단 하십니다'합니다. 속마음은 오지랍이 한강보다 길고 넓다는 표현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신원을 보증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 무전취식한 돈은 집에 돌아가서 송금해 주라는 말과 함께 유치장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보니 흰 셔츠는 얼굴에서 흐른 피로 붉게 물들어서 버스를 탈 수도 없어 보입니다. 저렴한 셔츠 하나를 사서 갈아 입히고 차비를 들려 보냈습니다.

 

트럭을 타고 20km를 달려 동사무소로 돌아오면서 15년전 어느 젊은 선배가 우리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해 1,000분의 1쯤을 갚은 것인가 하는 애매한 상상을 하였습니다.

 

이 친구가 전생에 무슨 질긴 인연이 있어서 오늘 이런 두번의 상황을 마주하는가 하는 운명적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두번이나 도움을 주게 되었으니 더더욱 의미있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글로 써서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올리는 이유는 그 생명의 은인 선배를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움 두번째] 도움을 준 사례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동사무소 직원과 그 트럭을 타고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골목길에 누워있는 양주군 남면 거주 김목부씨를 조우합니다.

 

차를 세우고 가보니 역시나 술에 취해 누워있는 상황입니다. 동사무소로 데려가자고 하니 우리 직원은 이 골목이 생연3동과 4동의 境界(경계)인데 지금 누워있는 상황을 보면 옆동 3동에 더 많이 걸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먼저 발견한 우리가 도움을 주자 했습니다. 술에 취해 잠자는 이를 깨워서 自初至終(자초지종)을 물으니 양주군 남면에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차에 태우고 양주군 남면으로 향했습니다.

 

얼마를 달려갔는데 목이 마르다고 해서 슈퍼마켓앞에 차를 세우고 음료수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취중에도 "환타환타!"라고 말합니다. 주황색의 달콤한 음료 말입니다.

 

[도움 세번째] 휴일에 산길을 통해 퇴근을 하던 중 사고를 당하신 어르신을 119가 이송하므로 동승하여 병원까지 가면서 가족에게 사고경위와 현재 위치를 설명하여 가족들이 동시에 응급실에 도착하도록 도운 일이 있습니다.

 

이후부터 주민을 대하고, 특히 민원인을 만나는 자세가 바뀌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야기를 듣는 공무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해결이 쉽지 않으니 민원인 것입니다.

 

판사가 아니므로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는 일이지만 민원인은 공무원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제지 당하지 않고 끝까지 말하고 이를 3번 반복하고 나면 마음속 응어리가 풀린다고 했습니다.

 

최근 2016년 12월에 출장을 가면서 동료 공무원에게 젊은 시절에 어느 청년이 자가용으로 만취한 우리 두 사람을 태워다준 고마운 일을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역시나 우리 동료 공무원도 젊은 시절 대학로에서 만취하여 집앞에 쓰러졌는데 신혼부부가 단칸방에 재워주어 생명을 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분들은 수년전까지 1년에 한두번 통화를 하고 만나기도 하였는데 이제 세월이 흘러서 통화를 한지 6년가량 지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내일 중으로 다시 통화를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혼부부가 전화번호를 바꾸는 바람에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략 나이를 가늠해 보면 이 신혼부부의 신랑이 나와 선배의 생명을 구해주신 그 27세 청년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데 정말로 이 고마우신 청년의 선행으로 생명을 건진 동료와 내가 지금 한 차를 타고 같은 목적지에 가서 회의를 하게 되었구나 하는 운명적 인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고마우신 27세 청년과 연결하려 하고, 작은 일이라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33년전 우리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주신 그 청년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변에서 이분의 선행을 들으신 분이 있으시면 저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댓글을 남겨 주시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저의 여생을 통해 꼭 해야 할 일은 이 분을 찾아서 생명을 구해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이분의 선행을 따라서 실천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이분의 모습을 더 많이 전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