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어르신들이면 아실 일이다. 가짜 이강석 사건. 1957년 8월 30일과 9. 1. 대구, 경주 등지의 관공서를 돌며 시찰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이라는 당시 22살의 청년이 가짜로 들통났다는 이야기다. 그가 사칭한 진짜 이강석은 박마리아와 이기붕의 아들로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생일에 맞춰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리고 이강석의 가족들은 1960년 4월 28일 경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비서가 쓰던 36호실에서 이승만의 양자이자 박마리아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신 역시 자살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강석이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됨으로 타살의 의문을 남겼지만 곧바로 묻혀지고 말았다고 한다.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라고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이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시절 동네 어른들이 ‘가짜 이강석’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처음 뵙는 분에게 이름을 말할 때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마다 내 이름은 왜 가짜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
제약회사의 酒黨(주당)들이 별관 사무실에 모여서 술 먹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숙취에 좋다는 약을 만들어 매출에 큰 공헌을 한 이야기가 있다. 기업의 뒷이야기는 그 옛날 조미료 경쟁에서도 나오고 지금은 없어진 기업 총수의 시멘트 공수작전 등 거듭된 실패를 바탕으로 성공을 일궈낸 야사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기업 총수들은 기업을 일궈낸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해 인기를 얻고 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1989),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정주영,1991)는 대기업의 성공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기업인이나 경영인들은 아주 많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1개의 아이템을 성공시켜 기업을 발전시킨 사례도 많이 있다. 얼마 전 타계한 조중훈 회장도 해방직후 트럭 한대로 사업을 시작해 세계 10대 항공사의 회장이 되었다. 조회장의 기업인생에서도 많은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창업주에게 은퇴는 없다'며 넘치는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기업인들의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는 이유는 이처럼 큰 성공을 이룩한 이분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련과 실패를 겪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제약회사의 직원들이 수년간 근무하면서 회사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다가 숙
세상사는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말을 많이 하는 이에게 수다스럽다 하는가 하면 다른 각도에서는 화통하다 말합니다. 말이 적으면 답답한 사람이라 평하기도 하고 더러는 긍정의 이미지로 말하면 '참 과묵한 사람'이라는 호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음식이 입맛에 맞아야 하듯이 어떤 상황도 상대방이나 당사자의 마음에 들어야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고객을 모신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손님의 다양한 입맛과 취향에 맞춰서 상품을 준비하고 팔아서 이익을 얻어야 하는 상인의 입장에서는 늘 손님은 높은 분, 즉 고객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도 수많은 고객을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백화점 직원이 고객앞에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만 이는 갑질이라 해서 언론으로부터 질책을 받습니다. 물건하나 사는 이가 그렇게 높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이시대의 평가인가 봅니다. 백화점 매장을 휘두르면서 사장나오라, 책임자 불러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참으로 가관스러운 모습을 뉴스시간에 보게 됩니다. 그래도 인권이 있어서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험한 말은 묵음처리를 해야한답니다. 방송국 편집팀의 고생이 많습니다만 시청자들은 원문대로, 그 고객의 얼굴을 보여달
군수님 집무실을 그때에는 官房(관방)이라 불렀습니다. 관방을 “벼슬아치가 일을 보거나 숙직하던 방”이라 사전에서 풀어줍니다만 1960년대 군수실을 관방이라 불렀고 방 주인은 ‘군수영감’이라 칭했습니다. 令監(영감)이라는 호칭은 지금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쓰이는 줄 압니다. 그 관방의 부속실 벽에는 관청의 모든 부서 사무실을 밝히는 작은 5촉짜리 등불을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었습니다. (사진) 부속실 스위치에 연결된 5촉 전구는 각 과 사무실의 천정 구석에 붙어있어서 아침 8시반에 군수 출근시각에 켜지고 저녁 6시반 퇴근시에 꺼졌습니다. 주로 낮을 밝히는 전구입니다. 비서실에 스위치는 있는데 비서실에서는 불빛이 보이지 조명장치이고 각 사무실입장에서는 스위치가 없는데 알아서 켜지고 꺼지는 '공무원들의 출퇴근을 지휘하는 등대같은 등불'이라 할 것입니다. 오래된 청사의 천정에는 지금도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구(사진)의 숫자는 12가 아니고 1과 2 입니다. 1은 군수실 비서가 스위치를 내리면 꺼지는 등불이고 2는 부군수실 비서가 전원을 OFF되는 전등입니다. 저녁 6시20분부터 많은 공무원들이 저 숫자 1, 2 또는 12를 바라보면서 1번이 꺼지기를 기다렸
어린시절 동네 어디에나 맑은물이 흐르던 그 시절 동네청년들이 그물을 들고 나서면 동작 빠르게 따라가야 한다. 형들은 오늘 고기를 잡으러 가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동네 사람들의 몸속에 칼슘이 부족하다는 신호가 온 것이 분명하다. 형들이 준비한 장비들을 살펴보자. 우선 찌그러진 양동이와 대나무 막대 2개와 망으로 구성된 그물 하나가 전부다. 개천을 따라 내려가면서 고무신을 벗고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 올리면 준비는 다 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기잡이가 시작된다. 개천이 휘어져 뚝을 파고 들어가는 곳에는 긴풀이 함께 어우러져 물살에 흔들리면서도 억세게 버티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물을 대는 포인트다. 검정고무신을 양손에 든 다리 짧은 형은 아주 빠르고 능숙한 발놀림으로 고기를 몰아가고 키큰 형 둘은 장대처럼 서서 장대를 잡고 타이밍을 재고 있다. 그물을 드는 타이밍에는 대개 2가지가 있는 것 같다. 그곳에 사는 물고기 종류가 그물을 드는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이다. 보통의 붕어나 미꾸라지를 노릴 경우 그물을 올리는 일은 여유가 있고 고기잡기에 실패해도 그물 담당이 책망을 듣지 않는다. 고기를 모는 숏다리 형이 얼마나 빠르게 고기를 몰아왔느냐가 성공의 관건이기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그 내용을 널리 알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에드벌룬(adballoon)’이다.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체육대회를 하는 운동장에는 어김없이 큰 글씨를 쓴 ‘프랑카드’를 커다란 풍선에 매달아 올리곤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을 시작하려 할 때 그 대강을 알리거나 넌지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을 보고 ‘에드벌룬을 띄운다’고도 한다. 2차 대전때 어느 전장에서 심리전을 벌이기 위해 풍선에 적군의 사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의 글을 매달아 올렸다고 한다. 그러자 상대측에서 총을 쏘아 풍선을 터트리는 등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에드벌룬을 띄우는 측에서 아이디어를 냈다. 작은 수소 풍선 여러 개를 그물망에 담아 에드벌룬을 올렸다는 것이다. 여러 개의 작은 풍선은 그만큼의 총알이 날아가야 추락시킬 수 있었고 조준이 어려워 1개의 커다란 풍선을 올렸을 때보다 긴 시간 에드벌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축제나 축하행사, 환영대회에 등장하는 것이 오색풍선이다. 구호에 맞추어 풍선이 오르고 비둘기가 날고 색종이 가루와 테이프가 뿌려진다. 그러나 하늘 높이 올라간 풍선이 시간이 지나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저버리고 만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어렸을 때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가장 갈등을 느끼는 것이 숫자의 문제와 이런 저런 말씀을 전해드리라는 말의 내용이었다. 봄에 못자리에서 제논으로 옮겨심기 위해 작업(시골에선 ‘모를 찐다’고 했다)을 하게 되는데 어른들은 ‘짚단 서너개만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3개 또는 4개인데 5개를 가져가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고 때로는 2개를 가져가되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에서도 숫자의 개념을 아주 약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일을 도우면서 농사관련 숫자에서 틀린 기억이 없다. 그리고 가을에 추수를 마치면 시루떡을 만들어 집안 여러 곳에 잠시 놓아둔다. 대청마루, 우물가, 장독대, 짚으로 만든 터주대감 앞에도 놓았다가 가져오고 화장실에도 잠시 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그릇에 담아 이웃에 돌린다. 가끔 떡 나르는 심부름을 가곤 했는데 떡을 받아든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한결같이 ‘잘먹겠다고 전해라’하신다. 하지만 한번도 그분들의 당부 말씀을 어머니께 전해드린 일이 없으며 말씀을 전해드리지 않은 일로 인해서 책망을 들은 바도 없다. 사회생활 중에도 애매한 표현이 많이 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면
수해가 극심했던 강원도지역을 가보니 가을 추수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산기슭을 붉고 풍성하게 물들이고 있는 감은 아직 이슬이 내리지 않아 이를 철이기도 하겠지만, 부족한 농촌인력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주렁주렁 풍성하게도 열려있다. 태풍과 함께 밀려온 폭우로 인해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있고 개천 주변의 논과 밭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의 상황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은 파괴만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결실을 맺고 다음 해를 준비하는가 보다. 모래속 깊이 발을 담근 벼포기는 머리를 내밀어 가을을 확인하고 흙먼지 속에서도 채소들은 새로운 잎새를 하늘을 향해 펼치고 있다. 줄기가 꺽인 참깨 줄기에도 결실을 위한 몸부림이 보이고 늘어진 호박넝쿨도 새싹을 티운 애호박을 길러냈다. 작물들이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거스를 수 없는 대자연의 위세에 눌릴 일만도 아니라는 자신감도 얻었다. 자연은 스스로 파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은 동시에 스스로 치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가 또 있다. 붉은 잎새는 모두 털어내고 잔가지 농부의 등줄기처럼 휘어진 피로
아침 TV뉴스를 보니 강원도 설악산을 관광하는 것만으로도 수재민을 돕는 일이 된다는 생소한 보도가 나왔다. 수해를 입었지만 응급복구를 마쳤기 때문에 등산로도 연결되었고 음식점을 비롯한 편익시설도 새롭게 단장하고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년에는 1만5천명이 다녀간 이곳에 올해에는 수해로 인해 3천명 정도만 다녀갔다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수해지역에 관광을 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관광객이 적은 것으로 보이나 오히려 수해지역에 관광을 가는 것이 수재민을 돕는 일이라고 밝혔다. 우리는 그동안 수재민 돕기 골프대회는 안되고 수해성금 모금을 위한 축구경기는 된다는 식의 보도에 익숙해 있다. 재난이 극심해도 프로골퍼의 경기는 장시간 중계방송이 되지만 일반인의 골프는 르포나 카메라출동의 표적이 되고 있다. 골프나 축구나 스포츠인 것은 같지만 대중성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고 그래서 다른 시각으로 보이는 것일까. 여하튼 이 TV방송국의 기자는 강원도민을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강원도 관광을 홍보하는 뉴스를 내보냈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TV도 그렇고 신문도 그러하듯이 최근의 우리 언론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지면을
1970년대 후반에 시골마을에 전화가 가설되었다. 우체국에서 처음으로 시골동네에 전화가 가설된 곳은 이장님 집이었다. 리(里)단위로 1대씩만 보급되었기 때문에 이장님집에 전화기가 설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장님댁은 정보의 현장이 되었다. 서울이나 외지에 사는 친척에게 전화를 하려면 4㎞이상을 차를 타거나 걸어가야 했던 것을 동네 이장님댁에서 전화를 통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안해진 것인가? 또 외지에 사시는 친척이 전화를 해오면 10여분 이내에 받을 수 있으니 문명은 참으로 인간을 편안하게 해 주는 기기로 이해되었다. 외지에 사시는 분이 고향동네 친척에게 전화를 하려면 우선 리장님을 통해야 한다. 전화를 받으신 이장님은 전화를 끊고 동네 확성기를 통해 알려준다. “아무개는 서울의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으니 이장집으로 오기 바랍니다.” 방송을 들은 동생은 곧바로 이장님댁으로 달려가고 잠시 기다리면 서울 사는 형이 다시 전화를 걸어오면 통화가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장님은 대변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개야! 서울 형이 이번주 일요일에 벌초를 하자고 한다.” 방송을 들은 동생은 더 이상 형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일요일에 벌초를 가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