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한구석에 작은 기사지만 큰 이야기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山蔘(산삼)을 얻었다는 소식이다. 측량기사가 산삼을 캣다고도 하고 학술연구팀의 한사람이 심 봤다고도 하고 등산 갔다가 우연히 산삼을 발견하기도 한다.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백성이 보내온 산삼을 부인을 위해 쓰지 않고 적장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병을 고치는데 쓰고 결국 그를 투항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견훤에 사람을 풀어 여러 산을 더듬어서 500년 묶은 산삼을 찾아내지만 아자개에게 먼저 도착한 왕건의 1,000년 산삼을 이기지는 못하였나보다. 산삼은 신성스러운 것이어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더구나 마음씨 나쁜 이에게는 더더욱 보여주기를 꺼린다고 한다. 그 많은 산삼이야기 중에 아주 오래 전 어린시절에 어느 잡지에서 본 산삼이야기가 떠오른다. 산삼을 캔 사람은 늘상 자주 다니던 오솔길에서 산삼을 여러뿌리 캤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끔 지나는 산길은 아주 좁지만 곱게 다져진 오솔길이 생긴다. 그 길가에 뿌리를 내린 산삼은 가끔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에 채이고 5일장을 오가는 소 발굽에 밟혀서 뿌리와 줄기부분이 빙빙 꼬이고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이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이 있다. 속이 꽉찬 깡통은 깡통 값보다 비싸고 중요한 내용물이 들어 있기도 하지만 바닥에 굴러도 소리가 묵직하고 중심을 잡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검도나 태권도 고수는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대편의 급소를 알기 때문에 함부로 주먹을 쥐거나 발길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생활에서도 이 같은 사례를 많이 볼 수 있다. 좁은 골목길에 수차례 전진과 후진을 해서 차를 주차한 초보운전자는 사이드브레이크만은 아주 빠르게 당긴다. 또, 컴퓨터 키보드가 손에 익지 않은 초보자가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은 엔터키를 힘차게 치는 일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직장에서 보면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이 있다. 일하는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게 된다. 일의 중간 과정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 정책을 입안하고 검토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갈등이나 시행착오는 간과하고 결과만 놓고 공과를 따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른 일이 아니다.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은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63빌딩을 지을 때 당시의 회장님의 연세가 63세였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4월22일 제31회 지구의 날을 맞아 21세기 수원만들기협의회가 주최하고 수원환경운동센터, 수원YMCA, 수원KYC가 주관한 ‘푸른지구 녹색 수원을 향한 자전거 대행진에 참여했다. 지구의 가치를 진하게 느끼게 하는 전형적인 봄날의 오후의 날씨. 참가자 대부분이 이 지구 위 대한민국에서 꿈을 펼치며 살아갈 초등학생이었다. 어쩌면 이 행사를 준비한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현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주 담백하고 간단한 의식에 이어 시청앞 88올림픽공원을 출발한 일행은 8차선 산업도로를 시원스레 달려 200년 역사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성의 남쪽 출입구 팔달문을 지나 북쪽 장안문을 거쳐서 만석공원에 도착했다. 대략 거리는 8㎞ 정도. 참가자 모두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행복하게 보인다. 이들 500여명의 긴 자전거 행렬은 도로를 막았다. 횡단보도 앞에 아주 많은 시민들이 모여서 일행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고 사거리에서는 차량이 아예 시동을 끈채 초록불 신호등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미안한 생각은 많지 않다. 자전거 대행진은 지구를 살리자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자동차로 인한 매연은 지구를
2001년 말에 신문에 보도된 동두천시 만리향 강준기 사장의 선행에 대해 蛇足(사족)같은 添酌(첨작)을 하고자 한다. 강 사장을 만난 것은 1997년 3월경 동두천시 생연4동에 근무때다. 체육회 위원으로 참여하시면서 동시에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98년에 동두천시에 큰 수해가 발생하였고 많은 주민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가재도구 정리와 수해복구에 나서고 있을 때 강 사장은 수재민을 위해 하루 벌어 하루 무료급식을 하기 시작했다. 강사장 내외가 의견이 맞아 열심히 이웃을 돕는 모습이 참으로 좋아서 당시에 어느 월간지에 소개를 해서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선행이 기사로 나기까지 취재기자의 어려움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월간지 섭외를 위해 여러 차례 방문을 하였고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4년여의 시간을 보낸 후에 강사장의 근황을 신문에서 보게 되어 참으로 반가웠다. 더구나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좋은 일을 해오고 있다는 보도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강사장이 자장면 한 그릇마다 50원을 적립해 이웃을 돕는다. 쉬운 일이 아니다. 50원을 쌓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 같은 보도가 나가면
軍事郵便(군사우편)이라는 고무도장이 찍혀있는 노랑색 편지봉투를 접고 접어서 종이 갈피에서 먼지가 나는 편지를 들고 오신 할머니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그 편지를 세 번인가 읽어드린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머님 전상서. 不肖(불초)소생은 이곳 부대에서 몸성히 잘 있으며 열심히 군복무에 임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저는 조금도 걱정 마시고 어머님 몸 건강히 계십시오.”라는 말도 있었다. 철부지 4학년 학생은 국어책 읽듯이 편지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을 뿐 이웃집 할머니께서 이내 고개를 뒤로 돌리시고 눈물을 감추시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편지를 다시 접어 돌려 드리면 흰색 거즈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말아서는 고쟁이 주머니에 넣으시고는 잰거름에 집으로 가시곤 했다. 군사우편은 자식과 부모를 이어주던 메신져였다. 전화도 없고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에 눈에 익은 자식의 편지지 위 글씨를 보는 것은 부모님의 행복이었다.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가슴이 저리고 등이 시릴 때 어머니 장농속 한쪽구석에 밀어넣어 두었던 군대간 자식의 편지는 만병을 고치고 온갖 시름을 녹여주는 처방전이었고 그 편지를 읽어드린 초등학생은 잠시 행복을 담아내는 메신
軍事郵便(군사우편)이라는 고무도장이 찍혀있는 노랑색 편지봉투를 접고 접어서 종이 갈피에서 먼지가 나는 편지를 들고 오신 할머니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그 편지를 세 번인가 읽어드린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머님 전상서. 不肖(불초)소생은 이곳 부대에서 몸성히 잘 있으며 열심히 군복무에 임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저는 조금도 걱정 마시고 어머님 몸 건강히 계십시오.”라는 말도 있었다. 철부지 4학년 학생은 국어책 읽듯이 편지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을 뿐 이웃집 할머니께서 이내 고개를 뒤로 돌리시고 눈물을 감추시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편지를 다시 접어 돌려 드리면 흰색 거즈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말아서는 고쟁이 주머니에 넣으시고는 잰거름에 집으로 가시곤 했다. 군사우편은 자식과 부모를 이어주던 메신져였다. 전화도 없고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에 눈에 익은 자식의 편지지 위 글씨를 보는 것은 부모님의 행복이었다.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가슴이 저리고 등이 시릴 때 어머니 장농속 한쪽구석에 밀어넣어 두었던 군대간 자식의 편지는 만병을 고치고 온갖 시름을 녹여주는 처방전이었고 그 편지를 읽어드린 초등학생은 잠시 행복을 담아내는 메신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불효자가 할 말이 있겠습니까만 늘 마음만 있고 시간이라는 거대한 힘이 허락하지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넘나드는 수 만톤급 배가 아니라 차 20여대와 사람 수십명을 태워서는 갈매기와 함께 5분이면 건너가 주름진 어머님 손을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으련만. 강화도 석모도. 보문사로도 유명한 석모도 중간 허리에 서해바다 점점이 작은 섬이 내다보이는 그곳에 사시는 어머님은 오늘도 막내아들 생각을 하시며 갈매기에게 소식을 물으시고 한줄기 작은 바람에게도 손자손녀 작은 손망울이 얼마나 컷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경기미의 백미로 치는 강화 쌀, 한여름 더위를 시원히 씻어내는 花紋席(화문석), 모든 이의 건강을 도와주는 인삼,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끗한 물, 맑은 공기와 함께 영혼의 아픈 상처를 씻어줄 것만 같은 마니산. 강화는 경기도 역사의 현장이었다고 합니다.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마니산 참성단과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을 비롯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곳곳에 있습니다. 고려시대 대몽항쟁 39년간 도읍지인 고려궁지와 팔만대장경 판각지, 국보 제133호로 지정된 고려청자가 출토된 지역이며, 조선시대를 거쳐 구한말 서구열강의
7,310미터와 18줄, 105개 기둥의 예술 서해대교는 거대한 設置(설치) 藝術品(예술품)이었다.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복운리를 연결하는 국내 최대길이의 교량이다. 흔히 대교라는 말로 긴 다리를 표현하는데 서해대교는 차라리 서해 큰 다리라고 해야겠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서평택IC. 프랑카드 글귀가 마음에 든다. “평생에 단한번 마음것 다리위를 걸을 수 있다”는 말이다. 서해대교 준공을 기념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웅장한 다리 밑은 걸어서 행사장 입구에 도착하니 수천, 수만의 인파가 다리위를 지나고 있다. 먼 발치로 다리 위를 바라보니 작은 개미 머리같은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머리만 보이는데 빨리 움직이는 몇사람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을 보니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나 보다. 다리 위의 모습은 달랐다. 인파속을 비집고 다리위에 올라가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인간만이 바다 위 창공에 설치할 수 있는 상상의 비경이다. 대리석 덩어리속에 숨어있는 모나리자 상을 볼 수 있는 조각가가 있어서 우리는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 흰색 캠퍼스 위에 바다를 만들고 거대한 산을 만들고
KBS드라마 태조왕건을 보면 술상이 나온다. 반찬그릇, 술병, 술잔이 모두 토기다. 후삼국시대의 그릇은 대부분 토기였을 것이다. 색을 넣은 무늬가 없는 투박한 그릇이었나 보다. 그리고 왕건으로 이어지는 고려시대에 세계적인 수준의 청자문화를 발전시켰다. 맥이 끊긴 도자기 문화는 조선시대 백자로 다시 피어났다. 오늘 흔히 골동품을 연상하는 도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온 도자문화가 밀레니엄을 뚸어넘은 2001년에 새롭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2001년 8월10일부터 80일 간 열리는 세계도자기 EXPO2001 경기도는 우리 도자문화의 제3세대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비취보다 더 고운 비색의 고려청자, 백옥보다 우아한 조선백자 등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수한 도자기를 생산하면서도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작업하고 있는 도예가들의 근황과 그들의 작품을 세계적으로 소개하는 노력이 부족한 현실이었다. 임창열 경기도지사가 “한국의 도자기 가마 100선”을 발행하면서 역사를 향해 던진 말이다. 김종민 세계도자기에스포 조직위원회 김종민 위원장은 지난 1만년 역사를 빛내 온 우리 도자기가 새천년에도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 뜻 깊은 전기가
축제에 있어 불꽃놀이와 폭죽이 메인이벤트라면 올림픽에서의 클라이맥스는 마라톤일 것이다. 행사가 절정에 달하면 사회자의 목소리도 격앙되고 올림픽의 금메달 소식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다 보면 마라톤 경기가 열린다. 그리고 4년마다 한 번씩 인류는 마라톤을 통해 영웅을 맞이한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선수는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고 안익태 선생과 손기정선수 등 조선인 4명이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베를린올림픽은 당초 스페인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스페인에 내란이 발생하여 베를린으로 개최지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는 마라톤에서 우승하여 몬주익의 영웅이 되었다. 특히, 양궁의 여갑순 선수가 첫 번째 금메달을 명중시켰고 황영조 선수는 마지막 몬주익 언덕을 내달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황영조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의 영광이 온 국민의 마음을 들뜨게 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경기도와 스페인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선수의 조형물 건립이 추진되었다. 스페인을 포함한 외국 도심에 외국인, 특히 생존 인물의 조형물이 세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바로셀로나시에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