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원화성은 그 차제가 아름다운 성곽이고 그중 白眉(백미)를 꼽으면 화홍문과 그 위편에 자리한 방화수류정이라 할 것입니다. 화홍문 인근에는 좋은 식당이 하나 있는데 2002년경 어느 날 사무관 2명과 중견 언론인 몇 명이 자리를 잡고 도정의 홍보와 언론사의 미래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두 사무관은 물론 공보부서를 대표하는 당시로서는 그래도 젊은 공무원이고 언론인 역시 회사의 정치부를 대표하는 한참 잘나가는 기자였으니 할 말도 많고 빈 술병도 여러 개 양산하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최후의 3인이 남게 되었고 따로 소주집에 갈 여력도 휘발유도 부족하지만 단거리라도 달려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였고 아주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입니다. 해서 언론인 간부가 인근 슈퍼에 가서 소주 몇 병을 확보하고 안주꺼리 포를 사서 화홍문 달빛거리를 지나 방화수류정 별빛마을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화홍문을 지나는 물결의 일렁임 속에는 둥근 달이 붉은 구슬이 되어 물결을 만나 너울거리며 검은 밤을 밝혀주고 방화수류정 문틈을 지나 작은 고원마을에 도착하면 하늘에서 별빛이 반겨주는 곳입니다. 水原八景(수원팔경)을 한번 돌아보겠습니다. 정조
요즘 공직사회에서 갑질이라는 문제가 부상하고 있습니다. 갑질로 인한 피해는 당장 필드에서 갑질로 어려움을 겪은 이들의 고통이었고, 이를 지적하는 감사부서의 조사와 징계위원회의 논의 과정의 안타까움, 그리고 당사자가 조직으로부터 징계조치를 받은 이후의 긴 시간을 징계의 굴레를 쓰고 감내해야 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갑질에 대한 언론보도는 천인공노할 내용이어서 갑질의 피해가 크다는 생각에 공감을 하곤 했습니다만 조직내에서 논쟁이 되고 위원회에서 검토, 논의되는 갑질의 경우에는 갑질인가 아닌가의 경계선이 참으로 모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일이 갑질이 되는구나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1980년대 공직사회라면 이같은 경우의 일들은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과거 군대에서 밤 12시까지 몽둥이 구타를 당하지 않은 날은 더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했다지요. 사실 과거 공직사회의 모든 사무실에는 한두명 잔소리, 악담을 해대는 사무관 계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공무원들은 마음속으로 "저양반 또 시작이군!!!" 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면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데 게딱지 후펴파듯이 소속의 해당 공무원의 업무행태를 비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언론사는 물론 일반 네티즌에게도 기사를 제공하고 수수료 성격의 기사비용을 받는 회사를 통신사라 하고 그중 현재의 연합뉴스는 '연합통신'이라 불렀으며 약칭 '연통'이라 말했습니다. 기사에서 연기가 난다는 의미로 '연통'이라는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통신사 기자는 일반 신문사, 방송사의 마감시간보다 빨리 기사를 보내야 하는 의무와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서 참으로 부지런한 발걸음을 보입니다. 여러 유형의 언론이 매일매일 기사를 받아 쓰고 있으므로 딱히 마감시간을 정할 수는 없겠으나 신문을 기준으로 한다면 통신사가 오후 4시까지는 마감해 주어야 저녁 편집회의에 최종 정리정돈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통신사 기자들은 10분이라도 먼저 기사의 핵심을 잡아야 하고 긴급사안일 경우에는 제목이라도 올려야 하는 속보성에 생명을 걸고있습니다. 이런 언론 시스템을 알기에 행정기관의 공보실 근무자는 가장먼저 통신사에 기사를 올리려 합니다.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기사꺼리 일지라도 일단 통신사에 올리면 각 언론사 데스크에서는 통신보다 기사보고가 늦은 각 기관 출입기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에 그리 하는 것 같습니다. 사건사고도 그러하거니와 기관장의 기자회견이
TV 방송 기자에게 홍보를 위한 소재를 제공하는 경우 사안에 따라 차이가 조금은 있겠으나 일주일 정도 미리 알려야 효과적인 취재와 기대만큼의 방송편집이 가능합니다. 우선 TV는 보여주는 뉴스이기에 현장 화면이 중요합니다. 수준높은 내용이라 해도 화면으로 설명하기에 어려운 소재는 피하게 됩니다.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방송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사업을 TV를 통해 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CG(computer graphics)를 준비하거나 직접 카메라 앞에서 시연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직 진행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이러하다는 것을 그림으로, 화면으로 담아서 방송에서 보여 주어야 합니다. TV기자보다 카메라 감독이 더 바쁘고 신이나야 합니다. 월남참전용사가 군대이야기 좋아하듯이 새로운 취재꺼리를 만나면 카메라 감독 대부분은 욕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나만이 이런 멋진 영상을 담아냈다는 자부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방송기자는 기관장 인터뷰 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데스크에 들어가서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관장님들은 자신이 카메라앞에서 말만하면 무조건 방송에 나온다는 자신감에 차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며칠전에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두집 부부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와이프는 주방에서 생태와 코다리찜 2인분, 4인분을 찌그러져 쑤세미가 닿는 부분만 반짝이고 그 안쪽은 검정색이 남아있는 냄비에 담아 애벌을 끌여서 남편에게 인계하고 남편은 즉시 악어 입 옆으로 돌린 듯 보이는 집게로 번쩍 들어서 손님상에 배달해 줍니다. 12시가 지나 들어간 식당에는 손님이 한가득이고 이미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정리하지 못한채 남자 사장 혼자서 홀 서빙하고 계산대에서 카드를 받고 친절하게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장사는 이렇게 해야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코로나19로 손님의 등락이 크다보니 종업원을 한 분 더 두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동시수용 20명 정도의 식당에서 종업원을 채용하면 한달 인건비와 함께 발생하는 잘잘한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발품을 더 팔아서 이른바 薄利多賣(박리다매)전략으로 가시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식당이 손님을 끄는 힘은 아내의 손맛인가 생각합니다. 국물과 반찬이 입에 맞습니다. 살짝 건조후 볶아낸 듯 여겨지는 어묵조림의 식감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손님이 많아서 음식을 주문하고도
1988년 상반기까지 경기도내 언론시장에서 TV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았다고 봅니다. 공중파 방송국 기자가 지방단신을 보도하면 내무부에서 전화가 오고 사실 확인을 하는 감사과 직원이 현장 확인을 하는 듯 했습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지방신문은 경인일보가 유일했으며 지역방송국은 케이블TV라 해서 가가호호 연결된 통신선을 이용하여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방영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방송국 모 기자는 일주일에 1-2건 중요사항을 보도하였는데 경기도청의 기사꺼리가 마땅하지 않으면 농촌진흥청의 연구실적을 취재 보도하였고 어느 날 TV모니터 자료를 작성하고 이를 신문 스크랩과 함께 묶어서 도지사님 비서실에 오전 8시전에 넣기 위해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방송기자가 어제 저녁에 야생초 확대 재배에 대한 모니터가 빠졌다며 어필을 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정부기관의 성과를 보도한 것이 왜 도지사가 보시는 보고서에 들어가야 하는지 당시 7급 공무원으로서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니 자신이 경기도내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경기도에도 어필하고 싶었거나 보도와 관련하여 도지사님과 사전에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당시에는 중앙정부
1960년대에 농촌에서는 ‘하다 못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붓글씨는 아니어도 펜글씨를 잘 쓰면 면서기로 일하는 시절이었다. 지역의 유지가 면장을 하던 시절에 면장에게 부탁을 하면 글씨를 잘 쓰는가에 큰 비중을 두어 임시로 뽑아 쓰다가 잘 적응하면 이른바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 글씨가 중요한 이유는 타자기 보급전이었고 복사기는 물론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정을 펜글씨로 쓰고 호적등본,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에는 '기재생략'이라는 고무도장이 가득했다. 또한 당시의 호적부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가 바글바글했다. 아들이 분가를 신청해야 호적에 분리되었던 시절이다. 호적등본상 가족이 15명이나 되니 손자손녀 취업서류를 구비하려면 3일전에 예약을 해야했다. 신청을 받은 호적주임이 토요일, 일요일 여유시간에 따로 호적등본을 필사했다. 먹지를 대고 2부를 더 복제했다. 모든 일을 글씨로하니 글씨를 잘쓰면 보다 나은 보직으로 진급했다. 군청 시청과 도청의 공직에서 필체는 중요한 업무능력이었다. 인사계, 기획계, 예산계에는 명필 직원들이 발탁되고 수직승진을 거듭하여 간부가 되고 1992년 지방자치 이전까지 시장군수에 발탁 되었다. 그리고 정
공무원으로 청년과 장년시대를 보낸 후 정년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였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름 바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데, 공직자로서 도민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과천청사에 있는 기재부 사무실에 가서 이틀 이상 투쟁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2000년 전후에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의 법인카드를 들고 상경한 공무원 열사들이 기재부와 중앙부처의 사무관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의 시청과 군청의 공무원들이 당시에 서울 광화문과 과천 정부청사에 몰려있는, 예산을 쥐고 있던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투쟁적으로 예산을 따냈다고 합니다. 예산확보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실을 따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난날 호남, 영남, 충청, 강원도 공무원들은 4박5일치 짐을 미리 챙겨서 서울로 과천으로 올라왔답니다. 요즘에는 지방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공무원들은 아침과 오후에 현장으로 달려가서 중앙의 귀하신 국가 공무원에게 가난하고 인구가 줄어가는 군민 3만 규모의 기초자치단체를 살려달라며 건평 300
TV방송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카메라감독 입니다. TV에 보도되는 내용은 화면으로 설명하는 작업이기에 좋은 화면을 찍어야 하고 이를 담당하는 이는 마이크를 쥔 기자가 아니라 앵글을 맞추는 카메라 감독입니다. 그래서 TV인터뷰 전에 반드시 우리편 대장님(도지사, 시장, 군수, 사장)을 카메라 감독에게 인사를 하시도록 주선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카메라 감독은 신바람이 나서 4번 5번도 얼마든지 다시 촬영을 합니다. 삼각대에서 찍고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촬영합니다. TV방송은 2-3초마다 화면이 바뀌어야 한답니다. 같은 화면이 길게 나가면 시청자가 지루하다 하고 자주 바뀌면 어지럽다 합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화면이 바뀌면서 기자의 리포터가 없어도 무슨 내용을 보도하는가를 시청자가 알아챌 정도로 화면을 구성해야 합니다. 시청자들이 정말로 보고 싶어하는 장면을 만들어 내야 하고 리포터의 핵심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방송기자들에게 아이템을 주면 화면이 있느냐, 현장에서 시연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아무리 좋은 행정정책과 회사의 업무내용도 화면 구성이 안되는 경우에는 카메라 배정이 안됩니다. 실제로 S지사님의 사모님
국토방위를 위하여 연일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번 수해복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국방부장관님 이하 장병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경기도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 이강석입니다. 지난 8월6일(1998년) 침수로 동 전체의 90%이상이 수해를 당하여 동민 모두가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고 자칫 실의에 빠져들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너무나 중요해 평소 잊고 있었던 우리의 군이 있었습니다. 침수이후에도 폭우가 계속되면서 며칠 새벽을 동두천시 신천둑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아침의 태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른아침 도착한 우리 군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불빛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방부장관님! 우리의 군인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병사, 하사관, 위반, 영관 등 모두가 수해복구에 쏟은 정열은 폭우와 강풍, 번개와 진동을 잠재웠던, 10여일 만에 길을 뚫고 골목의 아스팔트를 찾아내고 할머니의 안경과 아이들의 인형을 돌려주었으며 수재민의 아픈 가슴속에 재활의 푸른 새싹을 피워냈습니다. 주민이 건네는 음료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