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22세에 화성군 비봉면에서 팔탄면으로 근무지가 이동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담당 업무는 이른바 ‘주사’가 담당한다는 회계업무였습니다. 면사무소 근무자는 별정5급 면장님, 6급 부면장, 6급 총무계장, 그리고 7, 8, 9급 공무원과 보조원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산업계장이 총무, 총무계장이 호병, 호병계장이 산업계장으로 자리이동, 승차하면서 동시에 공무원 3년차 신입에게는 회계담당을 맡겼습니다. 월급 50,000원대를 받던 시절인데 매달 수 백만원을 집행하는 업무는 그 무게감이 엄청났습니다. 우선 월급계산을 하여 대략 20명분 200만원 정도를 농협에서 인출하여 사무실까지 들고 오는데 강도를 만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주변을 살핀 후 급하게 뛰어온 기억이 납니다. 1,000원권 돈다발을 서랍 속에 감추고 한 뭉치씩 꺼내어 봉급봉투에 담아 다시 다른 서랍에 넣었습니다. 봉급 지출액에서 공제액을 제하고 개별 봉투에 넣은 돈이 다 맞아 떨어져야 봉급봉투를 개개인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10원짜리까지 맞춰서 담고 나면 200원이나 300원이 남게 되는데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다시 세어보고 지출 내역서를 재삼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은
1980년대 관선시절의 인사발령 징후는 몇가지가 있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경우는 인사계차석이 서류봉투를 들고 서울 광화문으로 출장을 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도청 과장은 국비공무원이어서 내무부(행정안전부)장관의 승인을 받았고 인사내용이 관보에 게재하던 시절입니다. 요즘에는 도지사가 발령하고 곧바로 인터넷 기사에 오르고 연이어 청내 인터넷망에 인사발령사항이 올라와서 대략 10분안에 전 직원이 인사발령사실을 인지하고 그 내용을 소상하게 파악하게 됩니다만 인터넷 이전 세대에게 인사발령 정보는 참으로 귀하여 접하기 어려운 보석과도 같은 첩보수준의 정보였습니다. 첩보란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못하거나 말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받은 자료이고 정보는 인사과나 국장실을 통해 전해받은 공공연한 자료를 말합니다. 그래서 간부에게 보고할때 첩보인가 정보인가를 사전에 전제하고 보고를 시작해야 합니다. 첩보를 말하는데 누구한데 들은 이야기인가 질문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사발령 징후로는 어느날부터 국장님, 과장님의 호쾌한 결재가 다소 지연되고 느슨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결재판을 가져가면 즉시 결재하시던 국장님이 자꾸만 내용을 검토하면서 사소한 이유를 들어 재검토를 요구한다는
1960년대 정부조직중 경제기획원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 추진한 곳으로서 남덕우 부총리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당시에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시책들이 3-4개 경제신문 기자들에 의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곤 했는데 초기단계의 정책들이 공식적인 발표 전에 기사로 보도되는 바람에 간부들이 곤혹을 치르곤 했답니다. 그래서 경제기획원 공보실에서 청사내에 '기자실'을 따로 만들어 놓고 여기서 기사를 쓰고 휴식도 하시도록 언론인들을 '배려'하였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관공서 기자실의 '嚆矢(효시 :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시작되어 나온 맨 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자실에 취재편의 제공을 명분으로 배치된 공무원은 경제기획원에서도 실력이 있고 눈치가 빠르며 특히 시력이 좋아서 자료를 전하거나 일반적인 대화를 하면서 기자실 책상위에 놓인 다른 자료나 원고지를 스캔하여 그 내용 중 키워드를 내부 간부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답니다. 즉, 현재 기사실에서 무슨 내용의 기사를 쓰고 있는데 어떤 분야의 취재가 진행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인간-CCTV'를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직 나가서는 불편한, 미완의
2004년 당시의 도청 기자실은 참 복잡한 미로였습니다. 중앙지 방, 지방지 방, 지방2진 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방은 일단 문을 열면 작은 방이 있고 다시 문을 열면 본방이 나오는 구조였습니다. 언론인은 지금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중앙지와 지방사 1진방, 2진방에서 50여명이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도지사는 물론 부지사, 국장, 과장 등이 현안사항을 설명하려면 3번 동일한 설명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즉 지방1진 방, 지방2진 방, 중앙지 방을 각각 돌면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어떤 경우는 기자회견 급인데도 3번 반복하기도 했고 여하튼 대화중에 나온 질문의 포인트가 다를 수 있으니 다음날 보도를 보면 서로 핵심과 주제가 약간 혼선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리하여 브리핑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많은 언론인들이 일괄 발표하는 별도의 방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자실은 그냥 넓게 쓰면서 브리핑룸이 설치되는 것은 누구나 찬성할 일이겠지만 현재의 공간에 브리핑룸을 만들고 기자실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창고형태로 버려진 면적을 조상땅 찾듯이 찾아내는 것으로 일부 면적을 보충할 수는 있겠으나 최소한의
경기도청사가 새로 지어진 광교 청사에 입주했습니다. 1965년에 법이 제정되었고 이법을 바탕으로 수원 청사를 신축하여 경기도청 광화문 시대를 마감하였고 1967년에 수원청사에 입주하여 2022년 상반기까지 팔달산 시대 55년을 마감한 후 이제는 광교청사 시대를 활짝 열었습니다. 최근에 퇴직한 공직자들이 팔달산 청사에 방문하니 청사의 썰렁한 분위기에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글을 사진과 함께 SNS에 올리기도 합니다. 그동안 여러 번 팔달산 청사를 방문하였고 아직 남아있는 도청 사무실에 가서 업무를 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역시 공무원과 도민이 떠나간 팔달산 도청의 텅빈 주차장처럼 사무실도 썰렁할 것이라 예상해 보기도 합니다. 1984년부터 수십년간 근무한 사무실이니 어느 건물 몇층에 ##과 사무실이 자리했던 모습과 계 배치까지 성성하고 3년동안 차지했던 자리에는 워드프로세스 작업을 하느라 발가락에 힘을 주어 바닥이 닳아서 생겨난 흔적조차 사진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춘을 거쳐 장년이 되기까지 일주일 내내 출근하고 점심시간에 몰려나와 식사 후 다시 들어가고 외식하고 어두운 길을 통해 올라가서 일했던 각자의 추억이 남은 손길이 기억나고 눈길을 추억하는 경기도청의
시청 신규공무원을 위한 강의를 하면서 '시보'떡 이야기를 하였는데 3시간 후에 담당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다음번 강의에서는 '시보떡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 당부를 합니다. 이날 강의에서 9급 공무원에 임용된 1977년에는 1년간 시보임용이 있었고 요즘에는 6개월로 단축이 되었는데, 이 시보기간중에는 임용권자가 역량이 미달하는 공직자는 공무원 자격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시보기간을 넘기면 공무원 자격문제는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니, 지난 1년 또는 6개월간 자신이 수습받는 어려운 기간동안 도와주신데 대한 감사의 의미로 소속 과에 '시보떡'을 돌린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동시에 첫 월급을 받으면 반드시 어머니께는 붉은 내복을 사서 드리고 아버지, 형제자매에게도 적정한 선물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관행이라는 점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인터넷 기사를 자세히 읽지 않았던 탓에 강의 일주일 전쯤에 발생한 '시보떡 사건'을 몰랐습니다. 행정안전부에서 지방자치단체 모든 기관에 시보떡 금지 공문서가 도착된 상황이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서울시의 어느 9급공무원이 공무원에 합격하여 어려운 살림을 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
기자실은 행정기관과 언론인간의 밀고 당기는 공간 확보의 현장입니다. 기자실 확보는 출입 언론인의 자존심이고 기관의 입장에서는 민의를 대변하고 소통하는 현장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공사를 하겠다며 잠시 기자실을 폐쇄한 후 장기간 신장개업하지 않은 사례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기관에서는 늘 아주 넓은 기자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합니다. 기자실 옆에는 늘 브리핑 룸이 있어서 각종 중요 현안에 대해 언론에 설명하고 때로는 시민단체 등이 찾아와서 기자회견을 합니다. 경기도의회 기자실 브리핑룸에서는 지방선거 때마다 출마 기자회견이 줄을 이어가고 국회의원 출마선언의 장으로 활용합니다. 환경단체, 경제단체, 복지단체 등의 주장을 펼치는 장소로 도의회 브리핑 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기자단은 기자실에 출입하는 언론인들의 모임입니다. 기자단에는 간사라는 총무 겸 회장의 역할을 하는 중견 언론인이 있으며 2년씩 돌아가며 담당하기도 하고 어느 기자단 간사는 10년 넘게 이어 가기도 합니다. 안정된 기자단의 간사는 장기근속을 하게 되고 심히 유동적인 기자단의 간사는 수시로 바뀌고 합종연횡을 이어갑니다. 안정적인 기자단의 간사는 1년에 2번 정도 정기회의
글 소제목이 '악어와 악어새' 입니다.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말합니다. 언론이 악어인지 공무원이 악어새인지 구별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언론과 공직사이에는 여러가지 관계설정이 혼란한 듯 보이기는 합니다만 전체를 둘러보면 그래도 상호 도움을 주고받는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적 삶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사실 1999년경 인터넷 까페에 이 코너 "언론회고록"을 만들면서 이 글을 읽은 언론인 당사자가 고맙다는 말을 해주거나 과한 지적에 대해 항의성 댓글이 올라올 것을 예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제목을 정하고 글을 쓰다보니 결정적인 상황을 쓰기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사자는 물론 주변의 관계자들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할 것이라는 걱정이 문장의 진도를 막았습니다. 특정인의 이야기를 서술하다보면 주변분들의 공감이 부족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항의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론인은 특히 다른 분야의 인사들에 비하여 자존심이 높습니다. 매사에 비판적인 직업입니다. 그래서 일반인이 언론인을 말하고 그분들의 사례를 적어 공개하는 것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긍정적인 일들을 생각해 내고 좋은 사례를 모아서 정리했습니
경기도청의 인사는 규모와 과정이 크고 복잡하다보 봅니다. 인사부서에 근무한 바가 없으니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인사부서 경험자들로부터 듣고 기억하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6월말 하반기 인사를 발표하기 까지 5월, 6월은 준비와 진행, 협의와 조정의 기간이라 할 것입니다. 5급 사무관이 되어서 시군교류로 동두천시 생연4동장으로 2년간 근무한 후 경기도청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동두천에는 다른 자원을 보내기로 협의를 마쳤는데 당초 공보관실로 배정하려던 계획이 본청내 사무관 이동배치 조율이 늦어지는 바람에 무산되어서 급한대로 잠시 비어있던 소방재난본부 상황2담당으로 보임되었습니다. 소방본부에 행정직이 근무하게 된 이유는 도청의 3교대 상황실과 소방의 2교대 상황팀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각각 정원을 살려나가기 위해 합동 근무를 하게 되었던데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4개월간 소방재난본부에서 보람차게 일하고 소방의 역량과 근무스타일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방 관련 시설투자 예산을 확보하는 로비스트 역할도 하였던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방공무원의 희생정신과 일단은 출동하는 '국민새랑' 공직관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1980년대 공무원 8급은 영화 '7급공무원'이 되기 직전의 애벌래와도 같은 입장이다. 한여름 10일정도 신명나게 울어대기 위해 8년을 물속에서 애벌래로 기다린다는 그 매미의 사연에 딱 맞는 설명이다. 8급공무원으로 일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한번 힘차게 울어보기 위해 기다리는 하안거 스님의 심정일 것이다. 100일간 좁은 두평 방안에서 108배를 수없이 올리며 시간을 불살라가는 스님들의 동안거, 또는 하안거는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가장 차원높은 수련이라고 생각된다. 100일이면 한 계절이 지나가는 길이다. 그 긴 여정을 독방에서 무언, 장좌불와, 정진, 참선하는 일이라서 10년 이상 수도한 스님들만 입실한다고 들었다. 초보 스님들은 하루를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밖에서 무쇠 자물통으로 잠그는 순간의 적막함, 고독, 폐쇄공포를 생각해 본다. 지나친 비유였다 생각이 드는바이지만 1980년대 공직사회의 8급이 만나는 고통은 스님의 번뇌 다음쯤 간다. 일단 7급 선배들은 6급들과 함께 한다. 답배도 같이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뭔 드리도 할 말이 많은가 할정도로 '토크어바우트'에 빠지는데 7급들은 8급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더구나 한 부서에 7급은 7-8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