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떤 노인이 70세를 부자로 살다가 저승에 가서 배정된 방에 들어가 보니 되지죽 한 그릇이 덩그라니 놓여있으므로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생각하면서 바로 옆방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옆방에는 16세에 요절한 규수가 들어갔는데 쌀과 과일이 수북하게 쌓여있었습니다. 노인으로서는 대단히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을 데리고 온 저승사자를 만나서 따져 물었습니다. “내가 이승에 살 때에 땅땅거리며 부자로 살았는데 내방에는 달랑 돼지죽 한 그릇뿐이니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차별이 심한 것 아니요?” 저승사자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영감님이 어찌 사신 것은 알 길이 없고 이승에 살면서 남에게 베풀어준 공덕내용대로 배정된 물품을 저승방에 가져다 놓을 뿐이오.” 저승사자가 가져온 내역서에는 달랑 2가지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노인이 70년을 살면서 딱 2번 남에게 베푼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른 아침에 돼지에게 죽을 주기위해 대문을 나서서 돼지우리로 가려는데 스님이 탁발을 왔습니다. 독경을 하면서 장시간 탁발을 기다렸지만 노인은 쌀이나 밥을 내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스님이 탁발을 기다리자 들고있던 돼지죽을 스님에게 뿌려대면서 더 이상 내집 대문에 머물지
조물주가 천하에 으뜸가는 경승을 하나 만들고 싶어 온 산의 봉우리들을 금강산으로 불러들여 심사했다고 합니다. 둘레가 4km쯤 되는 울산바위는 울산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덩치가 커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금강산의 일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울산바위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생각하고 지금의 자리에 눌러 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설악산을 방문한 울산부사가 이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신흥사를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주장합니다. “울산바위가 너희가 관장하는 사찰림에 와 있는데 땅세를 물지 않으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땅세를 내 놓아라” 그래서 신흥사 스님들은 매년 ‘울산 바위세’를 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신흥사의 똑똑한 동자승이 전면에 나섰습니다. “이제 세금을 내지 못하겠으니 이 바위를 도로 울산 땅으로 가져가시오.” 이에 울산부사가 답했습니다. “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주면 가져가겠다.” 재로 새끼를 꼴 수 없으니 계속해서 산세를 받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깊은 동자승이 사람들을 모아서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 지금의 속초 시가지가 자리한 땅에 많이 자라던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맨 뒤에
흔히 철부지란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자를 지칭합니다. 한여름에 두터운 옷을 입고있다면 계절을 모르는 ‘철부지’인 것입니다. 9급 신규공무원을 지나서 이제 막 공무원으로 세상에 발을 내딛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면사무소 직원이 도청 직원으로 가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조차도 잘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팔탄면사무소에서 경기도청 소속의 사업소인 농민교육원으로 발령을 받는 상황을 회고해 봅니다. 동동주에 살짝 취했다. 면사무소 회의실 장의자에서 널부러져 단잠을 자고 있는 서기보 이강석이를 깨우는 이가 있다. 발로 뻥 차는 느낌이 들었다. 발령이 났단다. 아 1년여 만에 나도 고향인 비봉면으로 가는구나 했다. 도청발령은 생각하지 않는 터였다. 그런데 도청소속의 농민교육원으로 발령이 났다. 도청으로 가기전에 군청에 들러 전출 발령장을 받았다. 요즘에도 가끔 연락하는 이한수 선배가 내무과에서 대기중인 나에게 다가와서는 큰 소리로 ‘이서기 축하해여!’한다. 이분이 팔탄면 출신인데 주변 사람들이 무엇을 축하하는가 묻자 “몰랐나?, 팔탄출신 이서기가 도청으로 간다네!”했다. 일어서서 수줍게 인사를 하였다. 비봉출신이고 팔탄면에서 1년6개월 근무했다. 경기도청은 팔달산에만 있
1992년 34세에 공무원 6급으로 예산부서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예산편성은 전투적이었습니다. 도의회에 예산안을 제출하는 날은 법령에 정해져 있으므로 8월부터 시작해서 11월초에 마무리되어야 하는 대 역사입니다. 큰 일입니다. 지금도 숫자로 쓰고 있는 당시의 예산규모를 외우고 있습니다. 2조1,791억원입니다. 2022년 화성시 추경예산이 4조원이라는데 1992년, 30년전에 경기도 일반회계 예산규모가 2조원을 조금 넘었습니다. 지난날의 돈과 오늘의 재산은 상호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결혼식에 10,000원을 내면서 큰 돈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100,000원을 내면서도 미안해 합니다. 금액적으로는 그러하겠지만 업무적으로는 과거나 현재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일하는 방식이 요즘의 공직사회와는 달랐으니, 당시는 마치 군부대의 중대장, 선임하사, 교관, 보초병, 소총수가 깊은 산속에 자리한 군 막사에서 벌어지는 군대와도 같았습니다. 특히, 업무에 열정이 넘치는 선임이 그런 분위기를 이끌었습니다. 이분이 떠난 후에는 일하는 방식이 변하고 주사보, 7급 중심으로 업무의 중심이 이동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무관이 팀장이 되는
우리는 매일 평균적으로 4번정도 횡단보도를 건넌다고 생각하면 1년에 1,460번을 건너고 70년동안 10만2천번 신호등을 마주하게 됩니다. 신호등에 따라 건널목을 지나갈 때 수많은 차량이 정차해서 초록신호를 기다립니다. 노련한 운전자가 많겠지만 1개월, 일주일 초보를 마주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실수로 3초 빨리 운행하거나 우리가 2초 먼저 횡단보도에 들어설 경우 우회전이나 직진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차량에 추돌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달려오는 차를 바라보면서 안전할 때 출발을 합니다. 그 출발과 차량의 위험천만한 횡단보도 달리기의 결정적 융합점에 대형 교통사고가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횡단보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여러번 신호가 바뀌어도 달려드는 차량을 만나게 되는 구간이 있습니다. 저녁식사후 공원산책을 위해 횡단보도를 건널때에는 늘 신경을 씁니다. 수원시청 방면에서 삼성연구소 쪽으로 달리는 차량중에 시급한 성격의 운전자가 많습니다. 2초 앞과 뒤에서 생사의 운명이 갈라집니다.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 산책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다치면 운동을 못하고 큰 고생을 합니다. 더 심하면 사망합니다. 생을 마감하는데 2초가 걸
원경선 원장님 기사문입니다. 2023년 추모 10주기를 그리며 2023년 올해는 풀무원의 창립자인 故 원경선 원장님의 추모 10주기가 되는 해다. 일찍부터 사람과 자연의 조화 속에서 이웃사랑, 생명존중을 말하고 실천했던 아름다운 농부, 유기농의 아버지, 그리고 풀무원의 원장님.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원장님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는 풀무원이 걸어온 길, 또 가야 할 길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가슴속에 새기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1953년 풀무원을 세우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을 상대로 토목청부업을 운영했던 젊은 시절.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옳은 삶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책을 느꼈다. 전쟁은 굶주리고 헐벗은 수많은 고아와 넝마주의들을 낳았고, 원경선 원장님은 1만평의 땅을 농토로 개간해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 ‘풀무원 농장’을 만들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사람답게 만드는 풀무질, 풀무원의 시작이었다. 1976년 유기농을 시작하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남의 건강을 해치는 농약을 칠 수 있느냐.” 1970년대는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던 시절
오늘 서울 신사역 1번출구에서 600m 거리의 한식당에서 행복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환경재단(대표 : 최열)에서 주관한 “4차산업 리더십과정”강의를 함께 듣고 중국여행을 함께 다녀온 원우회원의 정기 모임입니다. 광역버스를 타고 수원을 출발하여 양재역 인근에 하차하여 초여름의 서울 구경을 시작하였고 다시 양재역 지하의 시원한 구간으로 들어가서 신사역 방면으로 달리는 더 시원한 기차에 올랐습니다. 이제 지하철에서도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가 많아졌습니다. 3년간 지하철은 물론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마스크를 벗으면 식당 종업원에게 ‘야단’을 맞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을 잘도 버티고 살아 왔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사역에서 카드를 찍고 1번 출구로 향하면서 오늘부터 법으로 정한 만 나이로 살게되어 1살 어려졌으니 행복한 일입니다. 1958년생 생일이 지나는 연말 12월에는 나이 들었다고 국가에서 허락하는 발그레한 색상의 ‘무상교통카드’를 발급 받기위해 농협으로 달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虎視眈眈(호시탐탐)하듯이 그날을 鶴首苦待(학수고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느껴 보았습니다. 더러 혹자는 나이 든 것
어제는 일단 태행산(청요리 출신 김재엽 사장은 태항산이라 합니다.)으로 향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고 정신적 지주인 화성시 비봉면 자안1리 태행산은 주변의 쌍학리, 상기리, 청요리를 연결하는 292m높이의 산입니다. 294m라는 분도 있는데 이는 새롭게 무대를 설치하면서 2m 높아졌다 생각합니다. 경기도 수원 남부에서는 높은 산으로 생각합니다. 과천의 남태령은 한양을 기준으로 남쪽에서 높은 고개라는 의미로 노인이 급하게 작명하였다는 정조대왕 전설이 있습니다. 태행산은 태양을 향하는 산이라는 의미가 있다고도 합니다. 치바위는 산 90%능선에 자리하고 있는데 과거 이 바위에 배의 줄을 매었더라는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일단 봉담을 지나 청요리에서 올라가는 길에 도전하였으나 산기슭에 도착하니 길이 없습니다. 오른쪽 벌채한 산으로 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만 우회로로 보이므로 다시 자안이 종산길로 갔습니다. 나중에 산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아까 청요리 우회로가 지름길이었습니다. 높이 오르면 멀리 보이는 것이고 낮은 산길에서는 나무와 숲은 보이지만 산길은 가늠 할 수 없습니다. 종산에 올라 통정대부 응록(應祿) 할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등산을 시작하였습니다. 비봉면장님과
누구나 가장 높은 자리, 가장 기분 좋아하시는 위치의 호칭을 붙이는 것이 좋습니다. 시골에서 택시를 타면서 말하는 목적지에 '면장댁'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도 45년 전이거나, 1945년 경에 면장을 하신 분이 사셨던 집으로 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시골로 말하면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900번지, 청요리 858번지가 면장댁입니다. 제가 근무할 당시 홍무표 면장님은 남전리 출생이시고 윤완의 면장댁은 청요4리입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속에는 두 집 면장댁이 있습니다만, 이후 공무원 출신으로 35년 근무하고 후반부에 면장을 하신 분의 집은 아직 '면장댁'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면장을 하신 분이기에 그 역할의 중요성이 비추어 주민들이 일정 지명을 '면장댁'으로 부른 것이고, 이후에는 도로명주소가 생겨나서 딱히 면장댁이라는 지명을 쓸 이유가 사라졌고 전처럼 한분이 10년이상 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 2년이내에 퇴직을 하셨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실제로 도로명주소 제도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중입니다만, 처음부터 이 제도를 환영한 분야는 '택배'라고 합니다. 여러 집을 다니면서 소포를 전달하는 택배기사님들은 도로명주소에 익숙하
조선시대 착한 농부가 풍년을 맞아서 임금께 감사인사를 드리기 위해 수수엿을 준비하여 한양길에 올랐습니다. 며칠을 걸어서 도착한 궁궐에는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남루한 옷차림과 시골스러운 행색으로 인해 쉽게 궁궐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을 방황하던 농부는 성벽 한구석에 앉아서 슬피 울었습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임금이 농민을 발견했습니다. 임금은 아마도 정조대왕으로 생각됩니다. 선비차림의 正祖(정조)는 농부에게 다가가 울고있는 사연을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이곳에서 울고있나요?" "네, 저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농부인데요, 임금님 덕분에 농사가 잘 되어서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기위해 수수엿을 준비해서 임금께 드리러 왔지만 만나 뵐 방도가 없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선비가 가까이 다다가서 말했습니다. "만약 임금께 이 엿을 드리면 상을 내리실 수도 있을 것인데, 고을의 원님 벼슬을 내리면 받으시겠습니까?" "예, 고을벼슬을 주시면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다음으로 관찰사 벼슬도 하겠습니까?" "제가 부족하지만, 觀察使(관찰사)도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평복 선비차림의 정조와 농부의 대화를 무르 익었고 참판을 지나 이조판서를 거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