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버스는 3인조가 운영했다. 운전기사, 버스안내원, 조수 등 3명이다. 운전기사는 운전에만 집중하고 중간문은 여성 안내원이 담당하고 뒷문은 남자 조수가 문을 열고 닫았다. 앞문으로 버스를 타고 여성 안내원에게 요금을 낸다. 도심 출발지에서는 미리 차비를 받고 요금쪽지를 준다. 그래서 차표를 끊는다고 했다. 3칸까리 버스표는 원본, 차표, 영수증로 구성된다. 버스터미널에서 받은 표는 차표+영수증이므로 중간에 내면 차표는 가져가고 영수증을 내준다. 혹시 요금을 냈는가 확인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서 내릴때까지 잘 보관해야 했다. 몇 년이 지나자 뒷문을 담당하던 조수들이 사라졌다. 아마도 조수는 차량이 고장났을경우에 작업을 돕기위한 인력이었는데 차량관리가 양호해 지면서 운행전, 운행후에 잘 점검을 하면 운행중에는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운전기사와 안내양 2인조 버스는 회수권과 토큰이 생기면서 운전기사 1인 운영시스템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버스는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리는 시스템으로 개편되었다. 중간문이 앞문이 되고 뒷문이 중간문으로 개편되었다. 회수권, 토큰, 현금이 혼용되었으므로 운전기사 옆에는 돈통이 설치되고 거스름돈을
디지털 이전의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 있었다. 필름회사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디지털 카메라에는 필름이 들어가는 자리를 칩이 대체하였고 찍은 사진을 저장하게 되었다. 아나로그 필름은 한통으로 사진 24장이나 32장을 찍을 수 있었는데 디지털 저장장치는 손톱만한 크기에 수백장을 저장하고 지우고 다시 찍을 수 있어서 잘 관리하면 수년간 재활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필름으로 큰 수익을 얻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도산위기를 맞은 것이다. 필름시절 부부 단체관광을 가면 카메라를 가진 남편들이 인기가 높았다. 오전에는 명소에서 단체사진만 찍었다. 포토뷰가 좋아도 개인사진을 찍지 않았다. 부부사진, 최소 7~8인 소그룹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필름이 비싸기 때문이고 사진을 뽑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고 술 한잔을 하신 우리의 사진사 남편은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한다. 과감히 개인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풍광사진을 촬영한다. 사진사 아내는 필름값은 어찌하고 그렇게 찍어대면 다 뽑아줄 것인가 따라다니면서 따진다. 결국 사진촬영은 부부싸움으로 번지고 술취한 남편은 버스 앞자리에, 화가 난 아내는 뒷자리에 가서 몸져 눕는다.
2016~2017년에 남양주시청에서 부시장으로 근무했다. 3선 시장님이 지휘하시는 시정업무 속에서 부시장의 폭은 다소간 좁아 보였다. 다른 자치단체 동료 부시장의 의견을 이리저리 모아보아도 현재의 역할에 대한 진폭이 좁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하지만 화학시간에 배운 바로는 다양한 용액은 분자식이 달라서 그 속에 다른 용액이 들어갈 틈새가 있다고 들었다. 마찬가지로 지방행정의 달인이신 시장님 휘하에서도 이리저리 살피면 부시장의 역할은 여러 분야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6년에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되었다. 간부들과 영화를 관람하고 소감문을 모아서 영화사 허진호 감독 등 관계자, 출연 배우 손예진님, 라미란님, 박해일님에게 보냈다. 이후에 당시 공보과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감독과 영화투자자가 시청을 방문하여 시장께 감사인사를 했다. 당시 560만 관객은 큰 성과이고 남양주시 공무원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장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방문한 영화사 일행을 덕혜옹주 묘역으로 안내했다. 영화사 관계자가 묘역을 방문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홍보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사 관계자의 현장방문으로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다. 덕혜옹주 묘역
"각목 버드나무" 이야기다. 수원시 영통구청과 삼성전자 중간을 지나는 원천천 돌다리 인근에 가로세로 20cm정도의 소나무 각목이 박혀있다. 수면위로 90cm쯤 올라온 용도를 알 수 없는 각목위에 가녀린 버드나무 5줄기가 20cm정도 자라고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각목 좁은 자리에 구조헬기처럼 자리를 잡았거나, 어느 해 장마철에 상류에서 떠내려가던 버드나무 뿌리가 이 각목의 틈새에 끼어들 무렵 수위가 낮아졌고 그채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린 것으로도 보인다. 나무에 대해 비전문가이지만 뿌리가 걸려서 활착된 것으로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래서 이 상황을 "각목 버드나무"로 명명하고, 국민신문고를 통해 수원시에 이식을 건의하였다. 물 흐름에 방해가 되어서 하천변 이식은 안 된다는 답변이 왔다. 그 하천 어디에 심자는 의견이라기 보다는 시민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전하고 수원시정의 따스함과 세밀함을 자랑할 기회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는데 단순건의로 평가한 것이 아쉽다. 국민신문고를 통해 의견을 보내면서 양평군 용문사의 은행나무 사례를 들었다. 대략 1,100년전에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지난 1963년 법률 제1538호로 서울 광화문에 자리한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이 결정됐고, 1967년 팔달산에 청사를 짓고 서울에서 수원 팔달산으로 도청이 이사했다. 당시 공무원들은 289만 경기도민과 함께 산기슭에 뽕나무를 심어 그 잎으로 누에를 쳐서 고치를 수출 외화를 벌어들이고 통일벼를 심고 논보리로 이모작을 하면서 식량 증산에 헌신했다. 춘궁기를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안보적 차원에서 통일벼를 심었다. 1980년대는 공직은 물론 사회 모든 분야에 있어 변혁의 시기였다. 88올림픽은 우리 국민의 자부심이 되었고 IMF는 힘들었지만 극복의 과정에서 국민의 저력과 국가의 힘을 확인했다. 이후 2002년 월드컵, 평창 동계올림픽을 치르면서 발전하고 사회가 변화하고 공직사회에도 크나큰 변혁의 시대를 맞았다. 최근의 잼버리대회로 인한 논란도 있었지만 경기도와 광역·기초자치단체 공무원의 참여와 범정부 중심적인 대처로 오히려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고 해외에서도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와 공직사회의 저력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경기도청 청사가 광교로 이사했다. 팔달산 도청사 55년 동안 수많은 공무원이 밤늦게까지 일하고 도정을 고민하고 도민을 걱정했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기우제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가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내리니 다른 부족에서도 기우제 제관으로 초청을 받게 됐다. 주변 사람들이 효험 있는 기우제를 지내는 비법을 추장에게 물었다. 추장의 답은 간단했다. “나는 비가 내릴 때까지 꾸준히 기우제를 지냅니다.” 그는 아마 1년 내내 기우제를 지냈거나 때로는 1년 이상 비가 내리기를 소원하는 기도만 했을 수도 있겠다. 추장이 사는 동네의 건넌마을 유행어는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로 말하면 복지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일반행정은 문서 한 장을 기안한 후 여러 부 복사해 뿌리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복지는 문서 한 장에 한 사람씩 붙어 복지사무, 행정업무를 수행한다. 복지행정은 그냥 서류를 배포하면 실현되는 일이 아니라 각기 다른 복지요구에 맞게 음식과 옷을 먹이고 입히고, 편안한 잠자리에 재워야 한다. 우리나라 1970년대로 가보면 ‘마을 입구 논농사’는 온 동네 사람이 함께 짓는다는 말도 있었다. 이 말은 과거 행정력이 농촌 농사에 집중하던 ‘농정 최선의 시대’에 생겨난 요즘 청년들의
‘판장모’란 써레질한 논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설정하고 그 안에 모짐을 넣은 후 한 명씩 들어가 모내기를 하는 농사일을 말한다. 아주 고달픈 방식이다. 좁은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홀로 다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모내기 초보자에게는 이중고의 부담을 주는 일이다. 반면 작업속도가 느린 초보자는 못짐이 모자라면 여러 발짝 후진해 가져와야 하고 남아도는 경우에는 일일이 뒤편으로 이동시키면서 모내기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판장모 이야기를 현대 행정기관의 어느 부서에서 견줘 보고자 한다. 어느 기관이나 과 단위 부서에는 과장과 4명의 팀장이 있고 각 팀에는 대략 6명씩의 팀원이 근무한다. 각 팀의 하는 일이 다른 듯 보이지만 과장으로 올라가면 모두가 ‘우리 과’의 일이다. 그러니 과장은 판장모 작업을 위해 4개의 줄을 그어 놓고 4개의 팀에 각자의 업무를 부여하고 진행을 관리하게 된다. 그러니 과장이 일 잘하는 부서만 격려하는 것은 맞지 않고 일을 못 하는 부서를 질책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과장은 4개팀 전체의 고른 운영을 통해 과 전체의 원활한 진행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앞서 나가는 팀은 격려하되 이보다 늦은 부서가 있으면
“정부의 동두천 지원은 의무이자 책무, 동두천시를 응원합니다.” 최근 동두천시의 경제적 어려움을 알리는 언론 보도를 보면서 동두천시와의 인연을 회고해 봤다. 1997년 2월13일 동두천시청에 발령받았고 당시 방제환 시장으로부터 생연4동장에 보임됐다. 처음에는 빈자리 공보실장을 채우는 평범한 인사가 예정됐는데 당시 인사 담당 과장의 지인인 도청의 선배 사무관이 “이 사람은 과장보다는 동장에 어울린다”는 전언을 듣고 시장과 협의해 생연4동장에 보임한 것으로 안다. 1998년 경기 북부에 큰 수해가 발생했고 동두천시민들도 폭우 피해를 입었지만 군, 학생, 전국 단위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극복했다.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감사편지가 국방일보에 실린 바 있다. “국토방위를 위해 연일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번 수해복구를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국방부장관님 이하 장병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경기도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 이강석입니다....병사들은 시민에게 희망의 불빛이었습니다”로 마무리됐다. 다른 언론 기고문에는 걸산마을에 대한 글도 있다. ‘시간마저 멈춘 듯 평화로운 걸산마을’이라는 제목으로 동두천의 특별한 마을을 소개했다. “동두천시 보산동에는
『옴부즈만(Ombudsman)』으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민원을 접하고 이를 풀어내기 위해 공무원 조직의 여러부서를 방문하거나 합동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옴부즈만은 스웨덴어로 남의 일을 대신해서 해주는 대리인(Agent)이라는 뜻입니다. 옴부즈만은 시민의 대리인으로 행정에 대한 시민의 고충을 접수하여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를 조사하여 필요한 경우 시정조치 및 의견 표명함으로써 시민과 행정기관 양자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간이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임명된 사람 또는 비사법적 시민권익 보호제도를 말합니다. 중요역할은 시민권리 구제 기능을 수행하는데 △행정의 민주적 통제 기능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 기능 △행정개혁 기능 △갈등해결을 위한 조정 기능입니다. 고충민원이란 △위법·부당한 처분으로 인한 민원 △소극적인 처분으로 인한 민원 △불합리한 행정제도로 주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민원불합리한 행정제도로 불편 또는 부담을 주는 사항에 관한 민원 등입니다. 106만 시민을 모시는 화성특례시는 시청 4층에 옴부즈만 사무실을 설치하고 공직에서 일한 경력자 5명을 위원으로 위촉받아 근무하고 있습니다. 민원을 상담하고자 하는 시민을 직접 방문하거나 화성시홈페이지 시민참여→시민옴부즈
경기도 청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도청의 전신인 경기감영은 한성부 내에 있었다. 청사가 서울시에 있는 것은 도민의 자존심의 문제였을 것이다. 1953년 4월 15일 인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병희 수원유치위원장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요청하였던 바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수원으로 결정되고 1967년에 현재의 청사로 이전했다. 참고로 공사비 15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전 당시 도민은 289만명으로 현재는 1천353만명이니 4.7배가 늘었다. 공무원수도 늘었고 경기북부지역 발전을 위해 의정부에 북부청사를 두고 있다. 경기청사 이전에서 고배를 마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