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부대찌게가 150원이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197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9급 공무원 월급이 5만원 정도였으니 150원으로 나누면 333이 되고 요즘 9급 공무원 월급이 230만원이라면 10,000원으로 계산하면 230그릇이니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같은 저의 계산법에 이의가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첫 발령을 받은 비봉면사무소 사거리에는 청룡집이라는 정육점이 있어서 김치찌게에 밥을 팔았습니다. 단골인 면사무소 직원들은 아무 때나 가서 스스로 밥을 차려 먹었습니다. 먹을 만큼 밥을 퍼서 곰삭은 신김치 돼지고기 찌게와 함께 점심을 먹고 저녁을 해결했습니다. 누가 얼마를 먹었는지 기록도 없습니다. 윤 사장님은 월급날 밥값 내겠다고 오는 공무원들에게 알아서 내라 했습니다. 이번 달에 20번 정도 먹은 것 같다고 하면 1끼니에 얼마씩 쳐서 받았습니다. 더 먹었다 하지도 않고 공무원들이 먹은 숫자를 몇 끼니로 할까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사장님이 그냥 조금만 받으려 하시니 말입니다. 하지만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돼지고기 두부찌게를 주문해서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는 이른바 '약식회식'이 있고 그날 먹은 식대는
조선시대 임금 중 효성을 상징하는 분은 정조대왕 입니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임금에 오르지 못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입니다. 장헌세자와 정조의 능은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습니다. 왼쪽의 융릉은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와 동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고 오른쪽의 건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입니다. 장헌세자의 능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당시에는 양주의 배봉산)에 있었으며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정조 13년(1789)입니다. 그 후 한 해에 수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올랐던 정조는 때때로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비오는 날에는‘아버지가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사람을 시켜 무덤에 가 보게 했더니 전날 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능참봉이 능 앞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옮긴 후 능 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식, 솔잎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진노해 송충이를 잡아 입에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갑자기 천둥번개와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살아졌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
이 땅의 주인 지렁이를 풀섭으로 보냈습니다. 지렁이는 그 옛날 척박한 이 땅을 먹고 토해내서 옥토로 일궈낸 주인이었습니다. 인간이 지상을 차지하고 시멘트길, 아스팔트길을 내고 벽돌을 찍어내니 지렁이의 공간이 줄어들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주빅뱅으로 지구가 생성되어 태양계의 일원으로 태양주변을 365일 몇 시간만에 돌고 돌아다닐 음 어느 날 지구 화산암 부스러기를 갉아 먹는 무척추 동물이 탄생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생명체가 지렁이일 것입니다. 이 넓은 지구의 단단한 돌 부스러기를 먹고 토해내기를 반복하여 지금의 옥토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주인은 바로 지렁이 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지렁이 몸집이 지금보다 더 컷을 것입니다. 수십 배 컷을 것입니다. 그래서 좀 큰 돌 부스러기를 기계처럼 들이마신 후 녹여서 배출하고 다시 먹고 배출하기를 반복하여 수 만년 만에 풀과 나무가 융성하는 들과 산을 만들어 내고 그 자손들이 지금은 퇴화하여 작은 지렁이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렁이가 만든 옥토에 사는 인간들이 다시 모래와 자갈을 합해고 시멘트를 섞어서 길을 만들고 담장을 치는 것이지요. 지렁이는 눈이 없으니 좀 다른 곳으로 이
화성궐리사지(華城闕里祠誌) 연혁에 보면 오산시 궐동에 소재한 ‘화성궐리사’는 정조 16년 (1792년) 칙령으로 창건된 공자의 사당입니다. 정조가 왕권강화책으로 신도시를 화성에 추진하는 시기에 수원지역의 고적을 탐사하던 중 중종대에 경기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공서린 선생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를 확인한 정조는 수원부사에게 명하여 사당을 건립하게 하고 공자의 유상을 보내 봉안하도록 하였으며 ‘궐리사(闕里祠)’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봄가을에는 국왕의 이름으로 제사를 올리고 국왕이 친히 축문과 이름을 써서 지방관에게 주어 초헌하도록 명하였고 공씨 후손 중에 행실이 높은 자를 아헌, 종헌으로 삼았습니다. 궐리사는 書院(서원)입니다. 闕(궐)이란 중국 곡부(산둥성)의 지명으로 공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반 서원이 사립학교라면 궐리사는 왕립(국립)학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즈음의 공립 중고등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십수년 전부터 궐리사에서는 교육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예, 경전, 민요, 다도, 우리 춤, 사군자, 대금반이 요일별로 운영됩니다. 학생교육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60명
2007년과 2012년에 지방행정연수원에서 장기과정 교육을 받은 바 있어 연수원과 친숙한데 연수원이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시대를 마감하고 전라북도 완주군으로 이전한 이후 새로운 건물에 입주한 강의실에서 교육을 받아보고 싶었던 차에 교육 수료생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식 1박2일 교육일정이 개설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즉시 교육신청을 하였습니다. 연수원 담당 사무관께서 2012년 교육시 후반기 총무를 담당한 것을 아시고 관리하고 있는 교육수료생 전화번호를 이용하여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달라 하시므로 카피하여 올리면서 총무 아무개가 보낸다고 첨언까지 하였지만 늘 그러하듯 50대 교육동기들은 전혀 리엑션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서너명은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연수원에서 보내온 전자문서를 열어보니 아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바쁘게 일하시거나 나이가 좀 들어 교육받으시기가 즉각 수락하는 분위기가 아닌 줄 생각하였습니다. 경기도 교육생도 많은 편인데 2명이 신청하였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교육받기가 힘들었던 것이었나요. 오산시는 평생학습을 위한 여러 가지 시책을 추진하여 정부기관의 상을 받고 다양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부
2년 전 그리도 평온하게 다니던 길인데 오늘은 참으로 거칠게 다가옵니다. 아들의 두 번째 제안으로 광교산에 갔습니다. 인재개발원으로 차를 몰아가서 주차하고 찬찬히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영동고속도로 위로 나르는 듯 건너는 육교를 지나 아랫길로 차분히 걷다보면 오르고 또 내려가야 하는 광교산 길을 만납니다. 약수터 가는 길도 보이고 헬기장 가는 코스도 나옵니다. 광교산 헬기장은 2곳이 있으며 오늘 단거리로 가는 헬기장은 중간급 작은 시설입니다. 사실 헬기가 내렸는지 일지가 없어서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산불, 등반객 조난 등 경우의 수는 있으니 필요한 시설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등산객들의 이정표가 되고 목적지가 됩니다. 우리 부자도 이 헬기장을 목적지로 하여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산길이라는 것이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거리면서 인생의 한나절 축소판 처럼 여러가지 경우와 상황을 만납니다. 페이스북 글에서 보니 유학생 경험으로 여행을 떠날 때 준비물을 적어내는 그룹스터디에서 교수님의 기대치에 부응한 팀의 준비 잘한 상은 "그냥 출발한다"라는 답을 적어낸 팀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산행도 그러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답은 ‘아니오’ 입니다. 즉 산을 오르면 문명에서 멀
사무실에서 아파트로 걸어가는 길에 사회자가 "국기에 대하여 경례!!!" 멘트가 들립니다. 초등학교때부터 배운대로 잠시 멈춰서서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이어서 사회자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합니다.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행사에서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합니다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아파트 자치회의 주관행사에서 이 같은 모습은 처음이어서 반갑기도 하고 새롭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 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여기까지 사회자가 낭독하고 다음 순서 순서로 다음 분이 읽어 나갔습니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였습니다. 만세삼창은 아파트 자치회 회장님, 부녀회장님, 노인회장님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자께서 선창하십니다. 참으로 오랬만에 만세삼창에 동참하니 기분이 업되고 가슴속 뜨거운 감성이 솟아납니다. 이런 감흥에 오르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진해지는 것 같습니다. 청년시절에는 그냥 주변사람을 의식하여 태극기를 바라고보 애국
▨ 남북평화통일의 試金石(시금석)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파주시 점동면에서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248㎞를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각각 2㎞씩 물러나면서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그어 놓았지만 아마도 통일의 밀알처럼 정전협정 부칙에 의해 2개의 마을을 비무장지대 안에 뒀다. 최근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숙소로 이용되는 기정동 마을과 대성동마을이 ‘자유의 마을’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기정동마을은 레이건 대통령 방문 시 ‘촬영장 영화세트 같다’는 말을 들었으나 2003년으로 마무리되고 이제는 실생활에 이용되는가 보다. 그런데 70년의 세월이 이렇게 속절없이 흐르고 보니 국토를 가로 지른 DMZ(Demilitarized Zone)는 없어져야 할 대상이면서 또 지켜내야 할 대상이 됐다. 살아있는 냉전사의 현장이자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이곳이 미국 타임지에서 ‘아시아에서 가 볼 만한 곳 25개소’로 선정돼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로도 유명한 현장도 이곳에 있다. 하지만 이곳에 북한 도발의 현장인 제3땅굴이 있다. 휴전 이후 북한의 도발이 제4땅굴까지 이어지고 남침용 땅굴이
직장동료들과 회식을 가면 서로서로 마주보며 머뭇거린다. 자리를 잡는데 1분이상이 걸린다. 내 자리가 어디쯤이면 적정할까 빠른 속도로 CD를 돌려 선곡을 하듯이 자리를 스캔하고 참석자를 분석한 후 자신의 서열을 4-5번쯤으로 정한 후 그 자리를 잡는다. 이어서 오늘의 좌장이 들어오면 모두 일어나서 서로서로 상석을 권하며 한 자리씩 물러났다가 다시 빈자리가 생기면 우두머리의 측근 자리로 한 발짝씩 다가선다. 그리하여 과장이 자리하고 앞에는 주무계장, 과장 좌우에 2,3번 계장이 착석하고 그 언저리는 차석의 차지이니 말석은 문 앞이나 방구석 끝자리다. 하지만 이 경우는 대단히 불합리한 좌석배치다. 더구나 삼겹살을 먹는 경우 2번 계장은 연신 고기를 굽고 가위로 잘라가며 후배들의 소주잔을 받고 다시 권하다 보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오늘 모임의 취지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 채 술에 취하고 만다. 업무보다 더 고민해서 자리를 잡았다 해도 서너잔 지나가면 네 자리 내자리가 없고 숫가락, 젓가락 수만 늘어난다. 자리를 이동할 때 수저를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장과 주무계장 자리에 서무담당을 배치하기도 어렵다. 이른바 급별로 배치되는 경우 대화의 내용은 4그룹
수원 팔달산 도청 당시에 퇴직하였지만 광교청사 이사 이후에도 공적, 사적으로 방문하는 일정이 몇 번 있었다. 도청 기자실에 친구이거나 동지라고 자임했던 분들을 만나러 가는 일정도 있었다. 그런데 갈 때마다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는 경기도청 현관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야 하는 번거로움이다. 동시에 잠시 잊었던 공직에서 물러났다는 현실감이다. 두 번째 불편함은 접견한 공무원의 부서와 이름, 만나야 하는 이유를 적으라는 과도한 통제다. 해당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1층 로비의 테이블에서 담당 주무관과 1:1 면담으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마음속으로는 동료로 함께 근무했던 과장, 사무관을 만나고 모르는 담당 주무관과 업무에 대해 의논하는 그림을 그렸었기에 더욱 허무했다. 세 번째 이유를 댄다면 퇴직 이후에도 현직의 어깨 근육을 풀지 못하였음일 인정하는 일인 것이다. 마음속 한구석 어깨끈 뿌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마음을 삭히지 못하였음을 절감하곤 한다. 자주 듣는 말로 골프와 공직은 어깨의 힘을 빼야 잘 할 수 있단다. 어깨에 힘이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