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 눈보라에 시계가 제로라는 말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만 어느날 문득 생각제로를 느꼈습니다. 전에는 그냥 키보드를 잡으면 어떤 문장이 시작되고 30분안에 글 하나를 완성하기도 했는데 오늘 낮에는 키보드를 잡고 글쓰기에 도전했지만 한줄도 적어내지 못하고 들어왔던 파일의 공간마져 삭제하고 말았습니다. 지난날의 자만심인가 반성하면서 동시에 이제는 생각의 인자들이 많이 사라지고 그냥 백지상태로 정체되는 뇌활동의 마비를 겪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이같은 증상을 나이 후유증으로만 돌리기에는 머슥함이 남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나이가 된 것인가 반성해보면서도 유명작가 중에는 70세 이후에 역사에 남을 작품을 집필한 사례가 여러번 있으니 이 또한 타당한 변명꺼리가 되지 못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최근들어서 글쓰기에 집중하지 않은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색 다른 업무에 열중하다보기 그리된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써둔 글을 바탕으로 가필해서 재활용하는 재미에 빠진 것이라는 점도 게으름의 이유이고 이를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되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년시절, 장년시절에 맑은 호수의
자동 세차기에 라디오를 켠채 들어갔던 관계로 라디오 안테나가 부러진지 벌써 4년이 되었다. 자동차는 브레이크가 생명이라는 평소의 신조를 잘 지킨 탓인지 아직도 새 안테나를 달지 않아 라디오를 듣는데 다소 불편이 있다. 관심 있는 기사나 토크쇼를 듣는 중 방송이 잘 잡히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고 지인과 함께 차를 탈 때 안테나가 부러진 것을 보고는 게으름을 꼬집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오는 날 아침 출근길에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자동차 윈도우 브러쉬가 올라올 때는 라디오가 잘 나오고 내려가면 칙칙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브러쉬를 고속으로 작동하였더니 라디오는 아주 정상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윈도우 부러쉬가 라디오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구나 비가 와서 물에 젖어있는 브러쉬와 차량 외부가 도체가 되어서 전파를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예민한 전류로 생각되는 전파가 윈도우 브러쉬를 타고 들어와 자동차 라디오 음질을 아주 맑게 해주고 있다는 가정도 가능한 것이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미한 전파를 발산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상대방의 주파수에 맞는 초단파 전류를 보내 짜릿한 기쁨을 주는 이들이
<힘든 공무원 시절> 1960년대 신참 공무원의 9시전 임무는 철끈 40개를 마는 일이었다고 한다. 미농지를 잘게 썰은 후 손가락으로 비벼서 서류를 꿰매는데 쓸 철끈을 만들에 계장 책상에 10개, 차석과 고참의 책상위에도 각각 10개를 상납(?)해야 하는 것이다. 업무가 시작되면 기안지에 기안을 하고 관련서류를 첨부해 철해야 하는데 이때 문서 왼쪽 위를 송곳으로 뚫고 신참이 준비해준 끈으로 서류를 꿰매는 것이다. 그리고 서류철에 쓰이는 송곳의 손잡이는 6.25이후 이곳저곳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탄피였으며 기관총 탄피기 제격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행정기관에 스태플러(세칭 : 호치키스)가 보급되면서 신참의 ‘끈말이’ 사역은 사라지게 된다. 그후 또다시 문명의 기기인 계산기가 주판의 기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사과 상자만한 크기의 계산기가 있었지만 희소해서 한번 빌려 쓰려면 밤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복잡한 계산을 많이 하는 회계부서와 당시로서는 중요부서인 양정부서(쌀 관리)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행정사무의 혁신적 기기는 복사기였다. 1970년대 후반에 읍면동에 목사기가 배치되면서 ‘인간복사기’를 대신하는 혁명이 발생했다. 당시에는 호적부
광교산은 넓은 가슴으로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 아침 버스를 타고 상광교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필 것도없이 걸음을 재촉한다. 가파른 산행으로 가슴이 뻐근해지고 이내 등줄기에 온기가 불면서 등산의 즐거움이 시작된다. 지난주 눈이 많이 내린 후 일요일 산행을 거슬러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는 것은 또다른 묘미가 있다. 우선 절터를 올라 약수터에서 사람들은 만나는 것이 행복하다. 모두 같은 마음일 것 같은 중년층 남녀들의 다채로운 등산복을 보는 것도 즐겁고 서로 양보하며 줄서있는 그들만의 질서가 흐믓하다. 패트병 8개에 약수를 받아가는 이가 있어도 기다림이 편안하다. 많은 양의 물을 받기 위해 함께 보내는 휴식시간이 줄을 선 모든 이에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좀 늦어면 어쩔 것인가. 빨리 간다고 해서 감독관이 체크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광교산이 좋고 산행이 즐겁고 등산이 필요해서 온 사람들 아닌가. 그러는 중에도 줄 뒤에 선 ‘작은 병 들고온 청년’에게 패트병 2개짜리가 순서를 양보해 주고 시청에서 준비해 둔 현대식 표주박(스텐레스)에 물을 떠서 처음 본 나에게 주는 내 또래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심장의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올 즈음 다시 산행은
(금강산에 다녀와서, 1999. 7. 20) 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 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
2012년6월18일, 새벽 5시20분까지 연수원에 가야합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역사현장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인천공항에서 8시20분에 출발하면 2시간반안에 중국에 도착합니다. 중국에 가면 버스타고 4시간, 기차타고 5시간 등 장거리 여행이 많고 우리나라보다 약간은 이른 봄날씨라고 합니다. 가서 많이 보고 느끼고 고구려 역사의 숨결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백두산과 고구려/발해의 땅』 [시작하는 말] - 교수님 강의자료 “빼앗긴 땅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빼앗긴 역사까지 망각할 수는 없다. 그 역사에는 지금 우리라는 존재의 근본이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만주는 우리가 처음으로 역사를 탄생시킨 터이고 그 태가 묻힌 곳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만주가 어디이며, 어떤 역사를 지녔으며, 한민족에게 무엇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 백두산은 북한의 양강도 삼지연과 중국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진 사이에 있다. 높이는 2,774m(공인)로서 최고봉은 장군봉이다. 해발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가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호(caldera lake)인 천지가 있는데 면
19번째 책에는 산과 섬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2008년경 경기도의회사무처 근무 때 그동안 이리저리 출장 다니면서 만난 현장 이야기를 파일에 정리해 두었던 것을 이제야 출간합니다. 평소에 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책을 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었는데 드디어 부크크(BOOKK)사가 꿈을 이룩해 주셨습니다. 임직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제목을 가지고 이런저런 행정적인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공무원의 1970년대 모습과 1980년 이후 실제로 겪으면서 만난 상황을 가볍게 정리했습니다. 이런 작업이 훗날에는 작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 봅니다. 후반부에 올라있는 편지 몇편도 인터넷과 에스엔에스로 우표가 팔리지 않는 이시대의 젊은이에게 작은 종소리를 울려주고 싶습니다. 편지지에 적어서 봉투에 담아 정성스럽게 보내고 받는 편지의 시대를 다시 열었으면 합니다. 모든 분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2021년 9월 10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강석 서재에서 드림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산다는 것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 해서 칠십세 생신 잔치를 古稀宴(고희연)이라한다. 당나라의 시성 두보(杜甫)의 곡강시에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이 나온다. 어려서 본 기억으로 61세 회갑을 맞으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흰 머리카락에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많았다. 회갑 잔치상을 받은 분들은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로 느꼈다. 하지만 요즘에는 69세에도 할머니라 하면 싫어하신다. 사모님, 여사님으로 호칭되기를 원하신다. 아마도 1990년대까지 회갑잔치가 있었고 10년을 기다려서 칠순잔치를 여는 분도 많았다. 회갑잔치에는 부조금을 가져갔다. 그런데 칠십 고희를 맞은 잔치에서는 봉투를 받지 않는 분들이 많았다. 결혼해서 살아오는 동안 신세를 진 분들에게 70세 장수를 하였으니 감사의 잔치를 베푼다는 해석을 들었다. 하지만 요즘의 신세대 어르신들은 회갑을 부부여행으로, 칠순은 집안잔치로 치룬다. 그래서 칠순잔치에서 신명나게 노래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팔순잔치를 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르신의 나이를 표현하는 한자가 재미있다. 傘壽(산수)는 80세다. 傘자를
글을 쓰고 교정보고 신문사에 보내는 일도 매주 건수가 늘어나니 일이 되고 부담이 됩니다만 그래도 다른이의 글을 보고 부러워할뿐 시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것이 고맙습니다.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고 고치고 첨삭해 보아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말하면 덫칠이고 결국 호랑이도 고양이도 떠나간 텅 빈 캔버스가 남습니다. 글은 어느 순간 포인트가 잡힐 때 훅 써 내려가는 경우에 秀作(수작)이 나옵니다. 의무감으로 쓰려하면 의무는 책임을 지라하고 책임지기 싫으니 의무없는 이야기만 나열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각자 돌아다니는 월남 안남미 밥처럼 빙빙돌아 가니 융합이나 조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시작은 창대하고 결과는 미미한 용두사미가 됩니다. 용의 머리를 그렸으나 꼬리는 뱀이 되었다는 말이니 출발점에서의 큰 포부는 사라지고 아주 조악한 결론을 맺고 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다가 뱀의 그림에 다리를 그리는 사족이 늘어납니다. 정해진 원고맷수가 있으니 부족한 생각으로 한두장 부족하게 되므로 문장 중간을 다니면서 부연달 생각을 합니다. 부연이란 며느리의 창의적인 생각에 포인트를 두어야 하는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불필요한 추가
생연4동장으로 일하다가 3, 4동이 통합되면서 시민회관, 도서관, 운동장을 관리하는 시설사업소로 전근되면서 동단위 유지분들께 보낸 150여장의 편지중 아마도 유일하게 남아있는 7통 김방남 통장님의 편지를 기증받았습니다. 어제 동두천시청에 업무차 갔다가 잠시 생연로에 어르신을 뵈러 갔습니다. 말씀중에 1998년에 받으신 편지를 보여주시므로 반갑게 읽어보고 아예 내어주시므로 봉투에 담아 품에 간직해 집으로 돌아와 밤새워 필사하고 통장님께 감사장을 만들어 오늘 발송하고자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야 그냥 종이한장이겠지만 목숨을 걸고 일했던 동장 2년의 추억이 이 편지한통에 올옷이 담겨있는듯 하여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감사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단편의 글로 정리했습니다. 다른 이의 편지를 가지고도 이렇게 글을 쓰는 능력과 역량이 있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지내용] 안녕하십니까? 그간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생연4동이 중앙동으로 거듭나는 경축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인사 드리게 되니 1년10개월 근무기간 동안의 기억들이 한 번에 머리속에 떠오릅니다. 그 기억속에서 가장 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지난해 8월의 수해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밤낮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