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신규공무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퇴직공무원 이강석입니다. 저의 고향은 우리 화성시 비봉면 자안리입니다. 태행산 자락에서 태어나 하늘과 산과 논밭을 보고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처음으로 비봉면 소재지를 다녀왔고 초등학교 3학년때 수원 영화동을 가 보았으며 6학년때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이모님댁에 가서 마침 치과의사를 하시는 이모부님으로부터 초등학교 3학년때 부러진 앞니를 무료로 끼워넣었습니다.
이후 비봉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마친 그해 1977년 2월에 여러분과 같이 9급 공무원 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5급을류 공무원이라 했습니다.
현재의 8급은 5급갑, 7급은 4급을, 6급은 4급갑, 5급은 3급을, 4급은 3급갑입니다. 이후 지금처럼 공무원 급수가 9단계로 바뀌면서 5급 공무원 들어와서 25년만에 다시 5급 공무원이 되었다는 농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할 제목은 적극행정과 공직생활 길라잡이입니다. 길라잡이란 길을 인도하는 사람, 길앞잡이, 길나장이가 섞여서 이루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길나장이는 옛날에 수령이 외출할 때에 길을 인도하던 나장(관아에서 심부름 등을 맡아보는 사람)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재미있는 대사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동별, 우영우. 드라마에 출연한 덕에 팽나무는 문화재청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언론기사] 문화재청, 지정 예고 결정…드라마 나온 뒤 명소 부상/ 드라마 '우영우' 속 팽나무 인기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전국적 열풍을 불러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와 화제가 된 경남 창원 팽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24일 "창원시 보호수로 지정된 '창원 북부리 팽나무'를 이달 30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날 오후 열린 천연기념물분과 문화재위원회 회의 결과를 토대로 이같이 결정했다.
팽나무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포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패구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오랜 기간 크게 자라면서 마을 지킴이인 당산나무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열매는 철새들의 먹잇감이 된다.
지금까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오래되고 큰 나무) 중 팽나무는 경북 예천 용궁면 금남리 황목근(팽나무), 전북 고창 부안면 수동리 팽나무 등 두 건이다.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북부리에 있는 팽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이 탁 트인 마을 산정에 위치했는데 높이가 16m, 일반 성인의 가슴 높이(약 1.2m 기준) 둘레가 6.8m에 달한다. 2015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특히 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린 최대 폭을 일컫는 수관폭이 27m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같은 종류의 팽나무 중에서도 비교적 크고 오래된 나무에 속한다.
요즘 언론에 잇슈가 된 심심한 사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자어를 한글로 받아들이면서 왜 심심한가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한자어 몇 개를 소개합니다.
심심(甚深)한 사의(謝儀) → 깊은 고마움
이견(異見) → 서로 다른 생각
일언지하(一言之下)에 → 한 마디로
일익(一翼) → 한 부분, 한몫
진면목(眞面目) → 참 모습
차제(此際)에 → 이 기회에 이때
초치(招致)해 → 불러들여
토착화(土着化) → 뿌리내리기
다음 자료사진은 태양계입니다. 행성중에 화성과 지구가 있습니다. 지구에 아시아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화성시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화성시청 공무원입니다.
화성시의 시정구호는 ‘내 삶을 바꾸는 희망 화성’입니다. 민선 8기 중점가치인 ‘균형·기회·혁신'을 바탕으로 시민이 원하는 삶의 가치를 존중하고 현재보다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 시민과 함께 협력하는 혁신 도시로서의 미래상 제시하고 있습니다.
3대 중점가치는 균형, 기회, 혁신입니다. 균형은 과거 도시개발과 인구유입 과정에서 유발된 다양한 갈등과 불균형의 해소를 통해 상생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기회는 성별, 연령, 계층 등과 관계없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혁신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미래가치 산업, 인재육성과 이에 부응하는 서비스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대 비전은 균형발전 특례시, 스마트 미래도시, 포용적 복지도시, 친환경 생태·문화도시, 지역상생 기업도시입니다.
o 균형발전 특례시 : 도시·농어촌 등 지역별 맞춤형 균형개발을 통해 시민간 갈등을 해소하고 시민 공동체의식을 고취함과 동시에, 균형발전 도시로의 도약
o 스마트 미래도시 : 첨단기술을 활용한 행정 서비스 제공(행정, 안전, 공간정보빅데이터 등) 및 스마트 인프라 구축을 통한 편리하고 안전한 스마트 도시 구현
o 포용적 복지도시 :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복지서비스를 구현함과 동시에 시민의 자존감과 화성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높이는 복지도시 구현
o 친환경 생태·문화도시 : 천연 생태 인프라(습지, 갯벌, 갈대숲, 화석지 등) 보전과 생활권 그린인프라 확대를 통해 자연이 주는 치유와 휴식 확대 및 시가 보유한 문화 자원의 고유한 특성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살림으로써 특색있는 문화관광 활성화 및 창의인재 교육 기반 마련
o 지역상생 기업도시 : 화성시에 기반을 둔 기업들의 다양한 산업간 융·복합을 지원하여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고, 이를 다시 지역사회로 환원할 수 있는 기업 환경 조성
시정구호 글씨는 정조체입니다. 화성시에서 서체를 개발중이고 완성되면 모든 국민들게 무료로 드릴 것입니다. 정조가 세손시절에 외숙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글씨를 바탕으로 정조체가 개발될 것입니다.
개혁군주 정조는 한양 遷都(천도)를 추진했습니다. 1795년 정조는 화성(華城)에서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열었습니다. 회갑연은 8일간 열렸습니다.
8일은 아버지 장조(장헌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만에 돌아가신 역사적인 사건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융건릉 이야기 인터넷]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현륭원 자리를 정할 때 신하들이 한성에서 수원까지의 거리가 88리라서 임금이 원행을 나갈 때 80리 밖을 나갈 수 없다는 법도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자 정조는 "앞으로 수원을 80리로 정하노라" 라고 말해 자신의 성묘(誠墓)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현륭원의 정자각을 지을 때 다른 왕릉과는 달리 능상 바로 아래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서 지었는데, "뒤주 속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앞을 막아서야 죽은 뒤에도 얼마나 답답하시겠느냐"라고 해 신하들이 통곡했다고.
정조는 부친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아버지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 그런데 막상 갈 때는 신하들을 독촉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현륭원이 있는 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쉬었던 고개를 지지대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한편, 사도세자 묘로 가는 길목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보게 되었는데, 그 무덤을 지날 때면 항상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길을 만들어 일부러 피해갔다고 한다.
야사로 무덤 근처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 꼴을 본 정조가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이후에 백성들이 흉년으로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상황이 벌어지자, 정조는 처벌 대신 콩주머니를 나무마다 매달게 하여 나무껍질 대신 먹도록 한 일도 있었다.
저는 1958년생으로 1977년부터 2017년까지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경기도 공기관인 경기테크노파크에서 중소기업 지원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공무원을 퇴직하고 정부로부터 2017년에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습니다.
저는 공직생활중 받은 발령장을 꾸준히 모아 관리하였고 경기도청에 기증하면서 사본을 인쇄하여 소장하고 있습니다. 발령장은 44매입니다.
발령을 받고 소속 기관에 가면 부서배치를 하게 되어서 발령장이 중복됩니다. 중복을 빼면 25매이니 근속기간은 평균 19개월입니다.
특히 공보관실에서는 사무관으로 7년간 내리 근무했습니다.
오늘 제가 드리는 이야기는 참고사항입니다. 솔직히 1977년~1986년까지 9급, 8급으로 근무했으니 2022년의 공직 문화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거기다 새로운 것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으로, 어디라도 자신이 본받을 만한 것은 있다 하시니 甘呑苦吐(감탄고토)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삼년고개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노인이 장에서 오는 길에 절설의 3년고개에서 넘어졌습니다. 이 고개에서 넘어지면 3년밖에 살 수 없다는 전설이 있지요. 그래서 3년내에 죽을 것이라는 걱정에 몸져 누웠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한번 넘어지면 3년을 사신다는데 3번 넘어지면 9년을 살 수 있겠군요. 그래서 삼천갑자 동방삭이 이 고개에서 6만번 넘여졌다고도 합니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좀더 깊이있게 분석하고 살피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행정의 목적이 시민을 위한 일이라는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부연이란 추가로 보충해서 말하는 경우로서 추신(postscript)을 의미합니다. 책 등의 후기라고도 합니다.
며느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해서 婦椽(부연), 부가하는 말이라 해서 附椽(부연)한다고 합니다. 添言(첨언)과도 통할 것입니다.
궁궐을 짓기 위해 3대 80년동안 목재를 모았습니다. 드디어 임금님이 새로운 궁궐 짓기를 시작합니다. 내로라하는 대목장이 모여들었습니다. 목수로 살면서 궁궐을 짓는 일에 책임자가 되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대목장은 우선 석가래 자르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다 자르고 다듬다보니 궁궐 설계보다 짧에 잘라낸 것을 확인했습니다. 대목장은 즉시 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수건으로 싸매고 몸져 누웠습니다. 이제 삼족이 멸할 일만 남았습니다.
궁궐짓던 시아버지가 갑지가 몸저누워버리자 막내 며느리가 귀찮을 정도로 물어봅니다.
“어찌 궁궐을 짓지 아니하시고 집에 머무시나요?”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왜 일을 않하시나요?”
막내며느리의 성화에 시아버지가 사실을 말합니다.
“내가 실수를 해서 석가래를 짧게 잘랐단 말이다. 우리 가문은 삼족이 멸할 일이다.”
삼족이란 부(父)·자(子)·손(孫)을 이른다 합니다. 본인으로 치면 본인, 아버지, 할아버지까지를 칭합니다.
하지만 막내 며느리는 차분하게 답합니다.
“석가래가 짧다면 남은 것으로 이으면 되겠습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틀린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고정관념으로 생각하니 삼족을 멸할 일이지 짧은 목재를 깎아서 이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궁궐터로 달려간 대목장은 즉시 기술자들을 불러모아 지시를 합니다. 자! 석가래 자르는 작업을 마쳤으니 오늘부터는 짧은 나무를 네모로 깎아서 석가래에 연결해 주시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아마도 당대에는 기다란 석가래를 추녀끝까지 내리고 그 위에 기왓장을 올리는 공법이 일반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석가래를 올리고 네모난 석가래를 덧대어 추녀를 완성하였습니다.
공사를 마치고보니 일반적인 추녀보다 이번에 세운 궁궐의 추녀는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목재에 아름답게 채색을 하니 더더욱 웅장하고 멋있습니다.
신하들과 함께 궁궐을 살펴본 임금은 그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대목장과 기술자, 인부들에게 큰 상을 내렸다합니다.
그리하여 이처럼 아름다운 한옥 추녀는 부연이라 불렸고 부잣집을 일러 부연달린 집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부잣집은 물론 사찰의 대웅전은 부연을 달고 丹靑(단청)을 해서 아름다움의 極致(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천갑자 東方朔(동방삭)은 3,000년을 살았다 합니다. 크게 계산하면 3,000×60년=180,000년이라 하기도 합니다만 甲子(갑자)는 1년으로 보아서 3,000살이라 본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동방삭이 이처럼 오래 산 이유는 동방삭이 몰래 염라대왕 저승사자 명부상 살 수 있는 나이는 三十(삼십)이었는데 그 위에 삐침 하나를 넣으니 三千(삼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입니다.
그리하여 명부를 확인하던 염라대왕이 60년도 아니고 3,000년을 사는 자가 있으므로 당장 잡아들이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저승사자도 급수가 있어서 神出鬼沒(신출귀몰)하는 동방삭을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이에 에이스 저승사자 고참이 동방삭을 저승으로 데려오는 重且大(중차대)한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저승사자밥이라 해서 몇가지 단촐한 음식을 울대 옆 한적한 자리에 베풀어 줍니다.
먼길 오느라 수고한 저승사자를 대접하고 저승의 좋은 곳으로 망자를 데려가 달라는 간곡한 정성이 담긴 음식입니다.
에이스 저승사자는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의 탄천 상류에서 숯을 물에 세탁을 했습니다. 검은 숯가루가 개천물로 함께 흘러가니 지역 사람들이 궁금하여 몰려들었습니다.
상류에는 흰 수염이 긴 노인이 검은 숯을 물에 닦고 있습니다. 숯을 수세미로 문지르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검은 숯을 물에 씻는 이유가 있나요?”
“검은 숯을 흰 숯으로 만드는 중이오”
이 소문이 근동이 퍼져나갔고 동방삭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소문을 들은 동방삭은 참 이상한 노인이구나 해서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동방삭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검은 숯을 물에 넣고 수세미로 문지르는 것이요?”
“검은 숯을 물로 씻어서 흰 숯을 만드는 중입니다.”
“거참, 내가 3,000년을 살았지만 검은 숯을 흰 숯으로 만든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바이요.”
이 말은 들은 백발의 노인은 문득, 저승사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동방삭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방삭은 3,000년을 살고 저승사자와 동행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무원과 골퍼는 어깨의 힘을 빼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골프채로 운동을 할 때 팔을 휘둘러 치는 것이 아니라 어깨의 힘을 빼고 부드럽게 몸통을 돌려서 공을 맞춰야 원하는 방향, 필요한 거리만큼 공이 날아갑니다.
공무원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감점이 됩니다. 어느 시민도 어깨에 힘을 주는 갑질하는 공무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공무원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보다는 생색을 내는 공무원은 조직에서 배척당합니다. 민원이 발생하고 조직문화를 와해시키는 원인자가 됩니다.
공직자는 늘 겸손하고 봉사정신으로 무장해야 하며 알아도 안다 하지 않고 차분히 업무를 추진합니다. 특히 젊은 여러분은 상사나 선배보다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활용 등은 물론 SNS에 강합니다.
선배들이 잘 모르는 것을 질문하면 차근차근 눈높이를 맞춰 설명해 드리기 바랍니다. 이것도 모르느냐 식의 핀잔을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자존심 강한 선배, 팀장에게 미움을 사기에 가장 쉬운 분야가 여러분이 잘 아는 최신의 문화입니다. 잘 알지만 아는 것을 자랑하면서 가르치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실 선배들은 초중고때 이만한 IT환경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조금씩 단계적으로 설명하고 가급적 선배가 직접 驅動(구동, 동력을 가하여 움직임)하도록 배려하시기 바랍니다.
독수리가 70년을 사는 비법은 자기혁신입니다. 보통의 독수리는 40년을 산다고 하는데 목숨을 걸고 혁신에 임하면 30년 수명을 연장합니다. 독수리가 37세 쯤에 설산에 올라가서 깃털, 발톱, 부리를 뽑아버립니다.
하늘을 날기에 무거워진 깃털을 스스로 뽑고 무디어진 부리는 스스로 바위벽을 쪼아서 뽑고 마지막으로 발톱은 바위를 긁어서 모두 뽑아버린 후에 추위와 굶주림속에 한 달을 버티면 깃털이 나서 창공을 훨훨 날아가게되니 새로운 30년을 힘차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공무원이 되었으니 새롭게 출발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더 발전해야 할 분야, 개선해야 할 점, 혁신하고 도전할 분야를 생각해야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독서를 하고 좋은 자료를 모으고 축적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1977년 면사무소에는 책상, 서상함, 주판, 자석식 전화기, 그리고 새마을모자가 있었습니다. 공무원들은 출근하면 출장을 나갔습니다. 통일벼, 논보리, 그린벨트 단속 등 모든 일이 현장에서 진행되는 업무였습니다.
사무실 일은 호병계 직원 3명이 주민등록, 인감, 호적등초본을 발급하는 일입니다. 병사담당은 매일 출장입니다.
당시에 정부에서는 병사담담에게 별도의 부가업무를 하지 말라 지시했습니다. 군인을 양성하여 국가를 지키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선배들이 말했습니다.
“이 서기, 술 잘 먹는 공무원이 일도 잘하는 것이네.”
저는 이 말씀을 100%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마시다 깨달았습니다. 선배들이 술 잘먹는 공무원이 일을 잘하는 공무원이라는 말은 참고적인 이야기입니다.
술을 먹지 않고도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술을 즐기는 분들이 스스로 소통의 한 방식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봅니다.
저에게 강의를 청탁한 분야는 공직가치, 업무역량, 조직적응, 효율적인 업무추진 중 적극행정과 공직생활 길라잡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양한 공직경험을 전하고 여러분이 공감하는 내용을 取捨選擇(취사선택)하도록 하고자합니다.
공무원으로 일하고 퇴직하니 짧은 대화중에도 저도 모르게 “自畵自讚(자화자찬)”을 합니다. 그래도 몇가지 말씀을 드리면 △생활관 보수를 위한 벽체 철거작업, △전임지 팔탄면 봉급계산을 위한 야근, △회의실 참석 체크장비 개선, △주차장 동선 직선화 등의 성과를 냈습니다.
1983년경 제가 경기도민 새마을교육과 농민기계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8급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선임 7급, 6급, 4급 기관장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선배 공무원들이 교육중 야간 사감근무시 사무실이 습기가 차고 불편하다는 토론을 했습니다.
이에 6급 팀장님의 허락을 받고 건물 1층의 벽채를 헐고 그 위에 세멘트작업, 벽지도배, 바닥 장판을 한 후에 2층 침대 3개와 이불 3조를 구매하여 새로운 사감실을 완성했습니다.
7급 이상만 참여하는 회의에서 소장님이 저 사람 만큼만 열심히 해도 칭찬하겠다면서 월급만 타 먹는다고 강하게 비판을 하셨다면서 저에게 앞으로는 조금 살살 일하라는 충고 아닌 충언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 기관으로 오기전에 근무한 곳이 화성시 팔탄면입니다. 올해 여름에 당시 총무계장이시고 나중에 면장을 하신 선배님을 만나서 곰탕 한그릇을 먹으면서 추억의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회계를 담당하는 9급 공무원이었는데 얼결에 경기도청으로 전출 발령을 받았고 후임이 오지 않았으므로 8월분 급여를 지급해야 하니 저녁에 사무실로 와서 일하고 출근했다가 다시 와서 월급계산을 했습니다.
요즘에야 월급계산은 전산이 하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진행하였습니다. 급여, 수당을 계산하고 소득세, 주민세, 공제비, 기타 비용을 따진 후에 가로세로가 맞아야 출금을 합니다. 현금을 월급봉투에 담아서 개개인에게 전달했습니다.
여러분, 봉급을 개개인 통장에 넣어주는 제도는 민선 2대로 일하신 전 부총리로 IMF극복당시의 주인공이시기도 한 임창열 경기도지사님이 전방 군부대에 장교로 일할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군부대 장교로 일하면서 보니 직업 군인들이 월급날 술값 등으로 미리 지출하고 있어서 월급날이면 식당, 술가게 주인들이 군부대 앞에서 퇴근하는 부사관, 장교들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당사자가 아닌 배우자, 대부분 아내 통장에 입금해주는 제도를 고안했던 것이 오늘날 급여 이체의 효시가 되었다 합니다. 嚆矢(효시)란 첫 번째로 쏜 화살을 의미하니 어느 일에서 처음 시작된 것을 지칭합니다.
며칠간 야근을 해서 봉급을 지급하고 9월분도 역시 후임자가 없어서 같은 방법으로 일했고 이를 당시 총무계장님이 크게 칭찬을 하시고 나중에 20년간은 그 칭찬을 지속하신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가 근무하면서 산업계장에서 총무계장으로 오실 때 사비로 회계 결재용 도장을 하나 새겨드린 것이 참으로 인상적었다고 하십니다.
회의실 참석장비 개선은 간단한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시청 3층 회의실에서 직원 전체 회의를 하는데 공무원증으로 참석을 체크하게 됩니다.
이때 체크기를 벽채에 매달아놓고 한명씩 체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회의실 문을 활짝 열어둔 그 틈새에 체크기가 있으므로 다수 공무원들이 동시에 사용하기에는 불편이 컷습니다.
이에 기계의 전선을 6m정도 늘려서 회의실 통로 중앙에 지하철 들어가듯이 양쪽으로 줄을 서서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평소에는 줄을 말아서 벽에 걸어두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선 체크기를 설치하였다면 더욱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주차장 동선 직선화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만이 개선할 수 있는 과제였습니다. 청사 2층에서 뒤편 주차장을 바라보니 주차장을 가로질러 키 작은 조경수를 심었는데 흰 원피스를 입은 민원인이 나무틈새 지름길로 오다가 옷이 걸렸습니다.
이쪽을 떼면 제쪽이 걸리고 저쪽이 빠져나오니 다시 뒤편이 걸립니다. 그 모습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흰 나비와도 같습니다.
그 순간 번뜩 아이디어, 혁신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주차장의 구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설계자는 멋을 우선시 했는지 ㄷ자 형태로 공사를 했고 주차자리에 따라서는 S코스를 돌아야 청사 현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지름길로 오고 싶어하는데 이를 나무가 막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공간으로 길을 내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침 회계과장님과 민원인의 불편사항을 보았으므로 그 자리에서 청사팀과 회의를 하였고 주차장 두곳에 지름길을 열었습니다. 공사는 간단해서 주차면 1개소의 경계석과 나무를 이전하고 주차선위에 보행로 표시의 흰색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출근시간에는 보도로 쓰다가 주차장이 다 차면 나중에 온 민원인의 주차장으로 전환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함께 공사를 추진한 공무원은 이 건물을 짓고 15년정도 근무했어도 민원인과 공무원의 불편함이 보이지 않았는데 근무한지 수개월만에 이를 발견한 것은 참으로 탁월하다며 나름 칭찬을 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칭찬은 코끼를 춤추게 하고 물속의 돌고래가 조련사를 태워 풀장을 한바퀴 돌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밤새워 일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들은 [이규환 교수 강의]를 소개합니다.
친정에 오는 기분이다. 가장 젊은 시절에 이곳 개발원에서 일했고 그래서 여러차례 교육과정에서 만난 공무원들이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진수가 쓴 삼국지가 있다. 삼국지에서 조조는 A학점, 손권은 B학점, 유비는 C학점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 인종때 나왔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충열왕때인 1281-1284년에 나왔다. 삼국사기는 단군에서 출발한다. 신화적이다. 그리고 중국 사마천의 사기를 참고하였다.
사기는 BC110-90년 사이에 중국 사마천이 옥중에서 쓴 역사서 130권이다. 춘추시대는 78개국이 있었으며 전국시대는 7개국이 있었다. 진시황은 49세에 사망했다. 그는 분서갱유, 아방궁의 주인공이지만 중국을 통일한지 15년 만에 망하고 만다. BC 207년의 일이다. 한나라 유방은 항우와 싸워 이겨 한나라를 세웠는데 항우장사는 칼 한방에 20명이 쓰러지고 10리 밖의 사람 귀청이 떨어지는 큰 목소리를 가졌다.
우리가 임기응변이라는 말을 쓰는데 제나라의 어진 정승 안자가 세상을 보니 대변혁이 올 것 같은데 제나라가 제일 어려우니 합종연횡, 군사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힘이 센 초나라에 군사동맹을 맺기 위해 찾아갔다. 초나라 궁궐 앞에서 초나라 왕이 궁궐문을 열지 않고 옆 개구멍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는데 안자가 말하기를 초나라는 개구멍 문화라 하지 어찌하지 못하고 열어준다.
이어서 작은 인물(키 1m정도)을 어찌 특사로 보냈느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제나라는 착한나라에는 착한 사람을 보내고 큰 나라에는 큰 사람을 보내는데 작은 나라에는 그래서 작은 사람을 보낸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와서 도둑질을 하여 잡혀가는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니 귤나무가 강남에서는 귤이 열리는데 강북에서는 탱자가 열린다면서 초나라 문화가 도둑질을 하도록 조성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이라는 고사가 나온 것이다.
40만의 군사를 가진 항우는 명문가 출신이지만 독단적 결정으로 수하의 장수들이 유방에게로 건너갔다. 10만도 안 되는 군사를 가졌던 유방은 그 이후 5년간의 전투에서 항우를 이긴다.
유방이 신하들과 천하를 얻은 힘이 어디에서 나왔나 생각해 보았는데 신하들은 전리품을 부하에게 나누어 주고 덕을 베풀었기에 그리 된 것이라 하였다. 유방은 나에게는 천리를 내다보는 장량이 있었고 소하가 백성을 먹이는 능력이 있으며 한신이 나를 도왔기에 천하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방은 2년 내에 2인자를 죽인다.
한신은 토사구팽이라는 고사를 만들었다. 장량은 통일 후 3년 안에 도망가 장가개에 피신하였다. 그가 바로 장자방이다.
BC184년 장각의 난이 일어났지만 24세의 무명장수 조조가 이 난을 제압하였다. 이때 원소가 권력을 장악하지만 이어 통탁과 여포에게 빼앗기고 이어서 조조에게 빼앗긴다.
조조의 위나라는 BC220년에 건립되고 유비의 촉나라는 BC221년, 손권의 오나라는 222년에 건국된다. 그리고 265년 사마역이 3국을 통일하고 진나라를 세우기까지 삼국지의 기간은 약 45년에 들어있다.
유비는 三顧草廬(삼고초려)의 주인공으로 제갈공명을 얻지만 유비의 아들 유선때의 제갈공명은 지회관이 되어 전투에 나가지만 패한다. 제갈공명이 참모 일때는 그 역량을 발휘했지만 지휘관이 되어서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한다.
수나라는 隋나라이다. (隨 가 아니다) BC581-BC618년간 운영된 나라다. 양견, 양제로 이어지는데 300년 만에 통일을 하였지만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영화) 아무도 모른다. 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면 참선을 하고 득도한 후 스스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BC612년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과 대접전을 벌인다. 이연+이세민 부자가 달마와 손을 잡고 당나라를 세웠다.(BC618-906)
도지사격의 관리의 딸이 16세에 궁녀로 들어가 왕의 이부자리 담당하는 숙원으로 일하다가 황후가 되니 측전무후다. BC690-705년까지 여성황제로 통치했다.
노자의 이름은 李耳이며 도교의 중심이다. 당현종은 56세에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하니 그가 양귀비다.
송나라는 960-1271년 주자학을 중심으로 유교는 선이고 불교는 악이라며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을 만들었다. 흑백논리다. 이 유교가 고려와 조선에 들어왔다.
원나라는 1271-1368년 쿠빌라이칸(몽고족)이 세웠으나 혼혈정책을 거부하면서 곧 멸망하고 말았다. 주원장는 1368년 명나라를 건립하고 1644년까지 이어진다. 청나라는 누루하치가 1636년 세우고 1912년 망한다.
조선은 27명의 왕이 재임했으며 세습왕이 있고 태종, 수양대군 같은 혁명을 통한 왕이 있고 중종이나 선조처럼 당쟁이나 우연한 상황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태원, 還鄕里, 호로자식.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벼루를 얻어와 왕에게 자랑하였으나 그 벼루를 맞고 병들어 죽었으며 봉림대군은 백성 3만 여명을 청에서 데리고 왔고 효종으로 왕이 되었으나 독살 당했다.
양명학 = 실학은 실사구시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남인들을 모두 죽이는 등 쇄국으로 인해 대한민국 발전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유방이나 아이젠하워는 상황론적 지도자이다. 자질론적 지도자는 활력, 지식, 범상치 않음을 가지고 있으며 항우, 맥아더 등이 해당된다.
맥아더는 모든 과목을 A+를 받은 수재이고 중고생부터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소위에서 18년 만에 장군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생활이 어려워 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전방에 배치되지 못하고 후방에서 주민, 어린이에게 운동을 가르치며 근무했다. 소대장, 중대장을 하지 못하고 소령으로만 13년을 근무했고 28년 동안 참모로 일하다가 2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2차 대전 연합군을 구성하면서 영국, 프랑스에서 미국의 참모출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참모들이 말을 잘 들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젠아워 사령관은 2차 대전 말미에 노르망디 작전에서 노르망디로 공격하자, 야전사령관은 몽고메리 장군으로 하자는 2개의 건의에 YES를 두 번 말했을 뿐인데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야기. 독일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데 모두 죽거나 자살하여 항복문서에 서명할 자가 없었다. 연합군은 독일포로중 제일 계급이 높은 해군소장의 서명을 받기로 하였는데 그 해군소장은 서명하는 조건으로 “독일 애국가를 인정하고 교육제도를 그대로 유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연합군은 간단한 조건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는데 독일은 전후 14년만에 새로운 부흥을 이룩했다. 독일 애국가를 통해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담임이 진학을 결정하는 효과적인 교육제도를 통해 나라를 바로 세웠던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견제했다. 아젠하워는 예편을 지원했으나 별 5개☆☆☆☆☆를 달아준다. 하지만 아젠하워는 예편하고 컬럼비아대학교 총장으로 가서 인기 있는 총장이 되었다. 그는 교수와 갈등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수의 요청을 모두 받아들이고 별도의 주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52년 대통령이 되었는데 과거 장교로 참모로 일할 때 야구와 운동을 가르친 어린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원봉사에 나서는 등 큰 힘이 되었고 연임 대통령을 했다.
우리나라 어느 교수가 대통령은 대학을 나왔으면 좋겠다는 컬럼을 써 파장이 있었는데 대학 졸업장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140학점을 따기 위해 6,800시간의 강의를 들어야 하는 대학생활의 의미를 피력한 것이라고 한다.
즉 지휘관은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중요한 덕목이다. 고교는 고향친구 중심인데 비해 대학은 전국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모이고 만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부하들의 창의력을 키우는 상사의 덕목이 필요하다. 부하의 사기를 높이는 능력, 창의력, 분위기를 조성하여 나가야 한다. 교육수료 후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공직자가 되기를 바란다.
공직사회는 크게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1977년에 공직사회는 서정쇄신의 영향으로 매우 경직된 모습이었습니다.
군청에서는 읍면을 과하게 통제하고 무슨 지침을 암송하라 했습니다. 공직에서 시청 행정계장이 제일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1988년 올림픽이후 공직사회의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서는 기업의 노조활동이 본격화된 듯 보이고 공무원들도 군대 조직같은 분위기에서 탈피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1997 IMF로 공직에 직장협의회 도입되면서 더 큰 변화를 맞이하였고 2002월드컵 이후 실무자 중심으로 공직사회 분위기가 변하더니 2022년 오늘날에는 IT사회, 소통, 변화, 적극적 자세로 공직분위기를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공직에서 上下左右(상하좌우)간의 조율에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퇴직후 민간인으로 5년을 살아왔으므로 공직 내부를 알 수는 없지만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이야기 중에 부정적인 이야기만 종합해보면 경기도청에서 국장이 업무를 받으면 어느 과장에게 이 업무를 주어야 하는가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는 부장이 이사님 회의에서 업무를 받으면 부서원 전체가 박수를 치고 환호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소속된 부서의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공조직은 조례개정, 시행규칙 결재 등 조직 유연성에 결재과정이 필요하고 시간이 소요되는 반면 기업이나 일반 사회에서는 그날 오전, 오후에도 조직을 바꾸고 인력배치를 다시 할 수 있다고 하니 공조직과 일반 조직은 인력관리 측면에서부터도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일반사회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나 신규업무를 받으면 전체 조직원이 크게 환호를 하게되는 것에 반해, 사조직 보다는 더 조직의 존재감을 보호받는 공조직에서는 새로운 업무를 거부하거나 추가적인 사업 추진의 경우에 크게 많이 불편해 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 업무가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주장하지 못한 국장, 과장, 팀장은 부서원으로부터 원망을 듣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일은 안 하고 대우는 다 받겠다는 이른바 oo기업의 귀족노조와도 같아진다면 그것은 공조직에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이 변하고 바뀌어도 공무원의 국민을 위한 봉사자라는 말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요즘에 들리는 공직내부의 이런저런 상황을 분석해보면 큰 일을 해내기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集團知性(집단지성), 공무원의 큰 힘을 신뢰하는 한구석이 있기는 합니다.
전통적으로 공무원은 어려움을 타개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공무원조직에 근무하면서 그런 내성이나 저항성같은 긍정의 힘이 생겨난다고 봅니다.
그 정도와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공무원이 월급만 보고 자신의 청춘을 다 바치는 것은 아닐 것으로 봅니다.
[인터넷] 팬덤은 문화적 실천을 통해 집단지성을 구현하는 공동체다. 팬덤 구성원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팬덤 대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협력적으로 생산하고 공유한다. 자신들의 이상과 판타지에 기반하여 집단적으로 의미를 해석하고, 토론하고, 공유하는 모습은 집단지성의 현실적 구현 방식을 보여 준다.
[인터넷]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은 수많은 개인들의 협동과 집단적 노력으로 생성되고 공유되는 집합적인 지성을 말한다. 레비(Pierre Lévy, 1997)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협력 방식을 통해 지식을 공동 생산하고 호혜적으로 공유하는 새로운 지식 공간이 등장할 것으로 보고 이러한 이상적 사회의 도래를 집단지성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는 집단지성의 근간이 되는 사회는 개별 구성원들이 지닌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공동체 전체의 지식 생산력을 증강시키며, 나아가 새로운 지식 공간 등장으로 기존의 지식과 권력 구조의 변혁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한다. 흔히 위키피디아(Wikipedia)는 인터넷 공간에서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 주는 대표 사례로 인용된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모토처럼, 집단적 참여와 협력 방식을 통해 지식을 생산하고 토론하고 활용하는 상황을 창출해 내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집단지성 (팬덤문화, 2014. 4. 15., 홍종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여러분에게 공무원의 급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의 지방공무원, 국가공무원의 급수는 9급부터 1급까지 있고 정무직으로 도지사와 시장, 군수, 구청장이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등 광역자치단체의 구청장은 경기도내 시장·군수처럼 민선으로 뽑습니다.
그런데 수원시, 고양시 등의 구청장은 시장이 임명합니다. 화성시의 동부출장소장, 동탄출장소장 역시 화성시장이 임명하는 4급 서기관 공무원입니다.
9급은 서기보라 하고 8급은 서기, 7급은 주사보, 6급은 주사, 5급은 사무관, 4급은 서기관, 3급은 부이사관, 2급은 이사관, 1급은 관리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기보는 9급, 서기는 8급, 주사보는 7급, 주사는 6급입니다. 사무관은 5급이고 서기관은 4급이며 부이사관은 3급, 이사관은 2급, 관리관은 1급입니다.
시청에서 주사보 7급은 차석이라 합니다. 6급은 팀장, 계장이라 부릅니다. 7급, 8급, 9급은 급수를 표현하지 않고 일괄하여 ‘주무관’으로 호칭합니다. 주무란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 담당자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시청에서 사무관 5급은 과장입니다. 課長(과장)이 있고 科長(과장)도 있습니다만 통상은 課長(과장)이 대부분이며 부서의 책임자로서 결재의 최소단위입니다.
과장의 결재는 계선으로서의 결재가 있고 시장의 위임전결규정에 의한 전결 결재가 있습니다. 專決(전결)결재를 하면 행정기관의 의사결정이 확정되는 것이고 대외적으로 문서를 통해서 의견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공문서가 발송되는 것입니다. 1970년대에는 ‘과장전결’, ‘국장전결’로 표기되었습니다만 요즘 발전한 공문서에는 기관의 주소, 담당자의 전화번호, 이메일 등 상세한 정보와 함께 결재한 공무원의 이름까지 공문서에 기록됩니다.
과거에는 기관명과 직인, ‘과정전결’정도만 기재되었습니다. 한때는 공문서 발신기관명 윗줄의 끝부분에 실무자의 작은 도장을 찍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광역자치단체인 도청으로 가보면 시청의 6급 주사가 주무관입니다. 흔히 차석이라 부르고 자기들끼리는 ‘차관’이라고도 합니다.
공무원 내부에서는 공무원 6급이니 ‘次期(차기)에는 사무관’이라는 의미에서 次官(차관)이라 합니다만 중앙부처의 長官(장관)다음으로 보임되는 次官(차관) 명칭과 충돌하는 면이 있으므로 자치단체에서의 차관이라는 표현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19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직업 공무원이 되어서 39년8개월 근무하고 58세에 명퇴하였습니다. 퇴직후 2년간은 경기도의 공공기관에서 중소기업 지원업무를 했습니다.
2019년 1월에 42년간의 모든 공직을 마치고 이제는 민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민간인이 된지 4년가깝습니다. 공직을 나와서 느끼는 바를 후배들에게 말합니다.
“공직을 즐겨라”
민원, 조직내 갈등이 제아무리 어려워도, 밤새워 일을 해도 현직만한 것이 없습니다.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고정관념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이제 64세인데 공무원으로 근무한 지난날의 영광은 역사속으로 지나가고 나이 들어가는 장년의 모습만 보인단 말입니다.
모든 공직 선배, 인생 선배들이 나이먹는 것을 불편해 하겠으나 생각해보니 자연스러운 세상사이고 인간사이니 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면서도 그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처럼 후배 공무원을 위해서 감히 강의를 한다고 새벽시간에 강의원고를 정리하는 자신에게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에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여러번 승진을 하고 부서를 이동하고 화성, 수원, 동두천, 의정부, 서울 광화문 인근, 오산시, 남양주시에서 근무했습니다. 공무원이 승진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근속해야 합니다.
지방공무원임용령 제33조(승진소요 최저연수) ① 공무원이 승진하려면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른 기간 동안 해당 계급에 재직하여야 한다.
1. 3급 이상: 2년 이상
2. 4급 : 3년 이상
3. 5급 : 4년 이상
4. 6급 : 3년 6개월 이상
5. 7급 : 2년 이상
6. 8급 : 2년 이상
7. 9급 : 1년 6개월 이상
여러분은 1년6개월(18개월)후에 8급에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급수별 승진소요 최저연수를 모두 합하면 18년만에 2급 공무원이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은 나옵니다. 하지만 이 규정은 ‘승진소요 최저연수’입니다.
승진후보자 명부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명부인데 여기에서 상위에 올라야 승진대상자가 됩니다.
승진후보자 명부 상위에 랭크되기 위해서는 근무기간을 계산한 경력평정, 훈련성적, 표창 등 가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상사의 평점이 있습니다.
공직생활을 통해 직접 경험하거나 들은 이야기중에 승진에 얽힌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많이 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술 한잔 한 후 많이 취하신 국장님을 업다시피 관사에 모셔드린 8급 공무원이 수개월후 다른 동료보다 빠르게 7급에 승진하여 훗날에 고위직에 이른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퇴근하여 술 한잔 하다가 돈이 모자라서 사무실에 들어와 책상속의 비상금을 챙기던 중에 야근하고 퇴근하시던 국장님 눈에 들어서 다음 주에 7급에 승진한 경우도 있습니다.
경쟁자 다른 7급은 이번에 당연히 승진되는 줄 알았는데 다른 방을 쓰시는 국장님은 그날저녁 비상금 챙기는 다른 직원이 열심히 일한다고 인사부서에 추천을 했다는 후일담이 나왔습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술값을 현금으로 내던 시절에나 가능한 비상금 꺼내러 갔다가 국장님 눈에 들어 승진한 케이스입니다. 열심히 일해도 재수 좋은 공무원 동료를 이기지 못한다는 당시의 조크가 이제는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장에 승진했다가 기관장간의 不協和音(불협화음)으로 후진했다가 6개월후에 원위치된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인연으로 빠르게 승진했다는 후일담에 시달린 공무원도 더러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正道(정도), 事必歸正(사필귀정)은 살아있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교육받을 때 성실하고 공부하고 주변의 선후배들과 원만하고 적극적인 공직자세를 지속하는 공무원은 빠르게 승진합니다.
공직에서도 부지런한 자가 앞서고 성실한 공무원이 승진합니다만 그중에서도 재수좋은 공무원을 당할 수는 없으니 재수가 좋은 것인지 인맥이 탄탄한 것인가는 알 수 없는 물음표에 담아둡니다.
그래서 현직을 즐기고 민원을 반기라 합니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의 지방행정동우회지 기고문을 소개합니다.
현직을 즐기자! 1 민원을 반기자!
경기도지방행정동우회 이강석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힘이 든다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이는 3가지 정도로 힘든 원인을 구별해 봅니다. 첫째는 업무가 많아서 힘이 든다고 합니다.
민원실 근무는 늘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고, 환경 건축 토지민원 등은 현장에 여러 번 출장하는 등 건별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힘이 드는 업무입니다.
복지분야에 근무하는 경우에도 복지대상자 한분 한분이 원하시는 바에 적절히 대응해야 하는 고된 업무입니다.
둘째로 공직이 힘든 이유는 어려운 상사와 피곤한 후배, 애매한 동료를 만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업무량이 많은 부서에서 일하고 싶어집니다.
코드가 맞지 않는 상사와 일을 하다 보면 쉬운 길도 구비구비 돌아 돌아 가야 합니다. 준비를 마친 행사장에서 다시 정리하라 합니다. 문서로 결재를 받아 정해진 무대를 행사 직전에 재배치하라 지시를 하는 억지스러운 공직 간부가 더러 있습니다.
셋째로 부서간에 업무조정이 되지 않으면 힘이 들고 업무처리도 늦어집니다. 더구나 민원 처리기한이 촉박한데 회신을 받지 못하면 부서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결국 부서장, 과장이나 국장간에 조율을 하도록 미리미리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부기관장이 주재하는 민원처리 조정회의를 여는 것도 해결책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직 공무원이라면 이 같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슬기롭게 처리해야 합니다.
선배 공무원들은 35년 이상을 신명나게 일하고 이제는 정말 잘할 수 있고 민원도 시원하게 처리하고 부서간의 협조문서도 아침일찍 답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명퇴 권고를 받습니다.
정말로 공직의 사명을 알고 공직자의 자세를 올바로 판단하고 정신무장을 갖췄다 생각하는 그 시기에 명퇴대상자가 됩니다.
우리는 ‘경력자 우대’라는 기업의 직원 채용 공고문을 보면서 모순점을 발견하곤 합니다. 모든 회사가 경력자만 채용한다면 그 경력은 어느회사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습니까. 모든 창을 막아내고 모든 방패를 뚫어버린다 하는 矛盾(모순)이라는 말이 탄생했습니다.
경력자만 뽑는다면 정말로 모순된 공고문인 것입니다. 공무원도 신규 채용되어 선배에게 배우고 스스로 터득하고 연수를 받으면서 일합니다.
그 경력이 쌓여서 일좀 할 즈음에 부서를 이동하고 경력을 쌓아서 비중있는 공직자가 되면 명퇴, 정년퇴직의 나이가 됩니다.
그래서 공직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현직일 때 온몸이 바스러지게 일 하라"고 말합니다. 명퇴하고 정년퇴직하면 싸울 상대도 없어지고 업무처리를 비판하던 그 미운 상사도 옆에 없습니다. 1년 내내 지각하고 ‘음주 결근’으로 속을 썩이던 후배도 내 앞에 없습니다.
퇴직하면 자신만 남습니다. 복권당첨으로 5년 만에 있던 재산까지 함께 날려버렸다면 조건없이 당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퇴직 공무원도 35년 공직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로 돌아가라면 당장 뛰어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電鐵(전철)과 버스를 되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공무원이 현직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바를 후회하는 前轍(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지금 달려가 버스를 타고 전철에 올라 신명나게 출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직장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든 내가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청소를 하고 복사지 박스를 정리하는 일도 담당자가 따로 없다 할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안타까워하는 이가 공무원만은 아닙니다.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지금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 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였음을 자각합니다.
그래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지금 현직 공무원이라면 현재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바쁨을 즐기고 민원발생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적극행정을 펼치는 공무원은 주변동료는 물론 층이 다른 사무실에서 일하는 타부서 과장, 국장이 알고 부시장이 파악합니다.
더러는 시장님이 8급 공무원의 성실한 사례, 적극행정의 실태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 수도 있으나 열심히 일한 것을 자신이 알고 PC가 담고 있으며 사무실 천정, 바닥, 책상, 전등불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밤새워 일하고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도 다른 분이 알아주나 기대하지 말고 자신의 자존심에 무게를 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7급으로 팀장(6급)으로 근무하는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고 조금 훗날에 사무관이 되어 과장이 되고 국장 서기관이 되어서 나만의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결재하는 모습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공직을 나오고서야 공직의 길과 세월이 중국의 ‘차마고도’를 오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려서의 경험과 공직의 과정을 정리하여 ‘공무원의 길 차마고도’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한누리미디어, 484쪽) 책 출간당시 언론 기사입니다.
[책 – 차마고도] "기자와 말할 땐 감정을 담지마라“
…공무원이 본 언론
(수원=연합뉴스) 김광호 기자 = '기자를 만나 이야기할 때는 감정을 담지 말아야 한다." 40년 공직생활을 하고 지난 1월 명예퇴직해 현재 경기도 산하 경기테크노파크 원장으로 재직 중인 이강석(59)씨가 최근 발간한 '공무원의 길 차마고도'에 담은 내용 중 한 부분이다.
이 원장은 이 책에서 언론인 응대 요령에 대해 "언론인의 취재에 응할 때 결정적인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원론적인 이야기를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후배 공무원들에게 충고했다.
고교 졸업 이후 9급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한 이 원장은 이 책에 이같은 내용과 함께 40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겪은 많은 에피소드를 실었다.
특히 7급, 5급, 4급 때 총 11년을 공보부서에 근무하면서 지켜본 언론, 언론인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담았다.
후배 공무원들을 위해 언론인의 생활, 기사의 종류, 보도자료 작성 요령, 뉴스통신사와 종이 신문 및 방송의 차이점 등도 수록했다.
그는 "언론인과 공무원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라며 언론에 대해 "고등어가 상하지 않고 더욱 맛있게 숙성되도록 도움을 주는 사회의 '간잽이'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후배 공무원들의 공직생활 자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 원장은 "공무원 6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는 과정은 모든 공직자에게 '드라마틱'한 일이라면서, 5급 사무관이 되면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또 "부시장은 게으르지만 소통해야 하고, 동장은 부지런해야 한다"면서 "부시장이 부지런하면 결국 본인이 힘들지만, 동장이 업무를 세세하게 챙기는 것은 사무장이나 주무관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주민과 소통, 시의원과 기관장 간 원활한 업무진행에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2017)
일반 기업이나 단체 근무자와 마찬가지로 공무원으로서도 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업무분야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고 법령과 제도에 대한 연찬에도 힘을 다해야 합니다.
더 큰 미래를 위한 공부와 함께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공직에서도 인생을 배우고 치열한 삶의 현장, 사파리 정글과도 같은 弱肉强食(약육강식)의 치열한 경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適者生存(적자생존)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멸망하는 현상으로서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제창하였습니다.
그런데 적는 자가 생존한다는 공직 조크가 있습니다. 공무원은 적어야(메모) 살아남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공무원에게는 회의용 큰 수첩과 출장용 작은 수첩이 지급됩니다.
수첩을 잘 활용하는 공무원은 흥하고 소홀히 하는 경우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천재의 기억보다 둔재의 기록이 정확 합니다.
저도 열심히 적었습니다. 공무원 장기교육을 두 번 갔는데 강의 대부분을 메모해서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2007년 장기교육기간중에는 볼펜으로 강의내용을 적어서 워딩하여 자료집을 동료들에게도 나눠주었고 2012년에는 수업중에 노트북으로 정리한 내용을 수록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 몇 권의 수필집을 내게 되었고 지금 화성시청 공무원을 위한 강의를 준비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수필 형식으로 작업하는 중입니다.
직장에서의 상사는 나의 스승입니다. 상사에게서 배우고, 상사가 나를 키워주고 보호하며, 나의 승진, 좋은 보직을 응원하고 있으며,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느티나무, 어려울 때 우산이 되는 선임이 됩니다. 군대로 말하면 병사들을 지근거리에서 챙기는 주임상사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이 복이고, 친밀한 동료를 만나는 것이 행운이며 착하고 성실한 후배를 만나니 기쁨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만나는 경우 공직은 힘들고 감사에서 확인서를 쓰고 승진 속도가 느리고 매일매사가 힘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분들을 만나는 것이 반드시 행운, 재수만은 아닐 것이고 스스로 성실하면 그만한 부서에 배치되어 나보다 더 훌륭한 선후배를 만나고 서로 돕고 힘을 모아서 큰일을 추진하게 됩니다.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9급이 아닙니다. 월급날인 매월 20일에 잠시 동안만 9급입니다. 공무원에 합격하는 순간에 9급이고 곧바로 8급에 승진할 것입니다.
그리니 오늘은 8급으로 일하고 내일은 7급으로 고민하면서 우리 조직, 화성시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100만 시민이 사시는 화성시의 미래를 내가 책임진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머지않아 7급 공무원이 됩니다. 열정의 공무원 7급입니다. 부서 책임자급이 됩니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7급의 생각이 6급의 동의를 받고 과장의 결재를 받으면 시장의 이름으로 시민에게 우리의 의지가 전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7급이 되면 가정의 주체가 됩니다. 그래서 공무원 여러분에게 결혼을 권장하고, 출산을 장려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가정은 공직발전의 에너지를 주는 곳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가족과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자녀는 우리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입니다. 삶의 의미이고 행복의 원천입니다.
自身(자신)의 인사는 本人(본인)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의 인사는 인사계, 총무과, 자치행정국장, 부시장, 시장, 그리고 인사위원회가 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자신이 자신의 인사를 한다’는 말은 지금 국회의원이신 박수영 전 경기도행정1부지사의 말씀입니다.
부지사로서 간부 공무원을 배치하다보니 세평을 듣게되고 쉽게 부서결정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당사자가 실력을 키우고 주변과 소통하면서 어느 부서, 어느 시군에서나 환영받는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인사작업이 어려운 이유는 100명을 100개의 자리에 배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00명을 놓고 100자리만 채우고 나머지 200명은 풀로 관리하는 방식이라면 인사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숫자 500명 안에서 직급, 승진, 전보를 동시에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니 인사불만을 가질 수 없는 구조입니다. 누군가는 奧地(오지, 깊을오, 땅지)마을로 가야하는데 자신이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인사부서에서도 대단히 미안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누군가를 배치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사무관에 승진한 후 시군 교류인사에서 100km를 달려가야 하는 경기 북부의 동두천시청에 배정되었습니다. 알고보니 당시에 도청자리가 몇 개 동두천시청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청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도자원 누군가가 가야했습니다. 동일자 발령에서 수원사는 다른 동료는 수원시청에 발령이 되고 저는 수원에 살지만 동두천시청에 발령되어 100km를 달려갔습니다.
인사는 이런 어려운 작업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사부서 직원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그대로 긍정의 마인드로 동두천시 생연4동에서 열정으로 일했던 바 이를 지켜보신 오세창 3선 시장님이 부시장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동료보다 18개월 빠른 부시장 발령이었고 어느 순간에 국장급 공무원이 되어서 큰 역할을 하였고 공직 후반의 발전을 이룩하는 礎石(초석)이 되었습니다.
역사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과거 중앙청이라는 석조건물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쓰던 건물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제안하여 이를 철거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일제강점기의 조선 경성부에 설치한 통치 기관입니다. 한·일 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에 설치되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고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1945년 미군정에 행정권을 이양하면서 총독부 조직은 해체되었습니다.
[사진은 말한다] 중앙청 기념촬영, 1983년 6월 9일
<매일경제> 김상협 총리 내각이 일제강점기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을 배경으로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다. 중앙에 김상협 총리, 총리 오른쪽에는 노태우 올림픽조직위원장이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중앙청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로 건립하기 위해 독일 건축가가 10년의 공사 끝에 당시 동양 최대의 석조건물로 완성(1926)한 건물이었다.
광복 후 미군정청 존 리드 하지 중장이 집무실로 사용했는가 하면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 취임식(1948)을 거행했던 역사적 장소였다. 또한 제헌국회와 제2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는가 하면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청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일제의 굴욕을 청산한다고 갑자기 중앙청을 철거(1993)하겠다는 발표를 하면서 2년 후 완전히 돌가루로 부숴 없애 버렸다.
당시 일부 역사학자들과 정치인들이 역사적인 의미로 보존을 건의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한마디로 '민족정기 회복인데 무슨 씰데없는 소리'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전민조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앙청 건물의 중앙을 장식한 구조물을 첨두라고 부르는데 철거하면서 이를 보관하다가 독립기념관에 반지하를 파내고 배치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백성들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던 구조물인데 이제는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기획을 한 분이 누구인가를 역사에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공무원의 적극행정이라고 봅니다. 일본의 잔재라 해서 일부 반대에도 김영삼 대통령이 철거를 하라 했다면 철거과정에서 상징적 부분인 첨두를 잘라내어서 가장 의미있는 獨立記念館(독립기념관)에 배치한 것은 적극행정, 공무원 정신의 승리라고 봅니다.
저도 작은 일을 해낸 바가 있습니다. 제가 작성하여 언론에 배부한 보도자료입니다.
[보도자료] 『경기도 역사』 보물 2개
경기도청 광교 이전에 따라 ‘경기도의 보물이라 평가할 수 있는 팔달산 도청에 있던 도청과 도의회 현판을 광교청사 현관에 배치하고, 서울 광화문 구 경기도청 터에서 가져온 측백나무 역시 광교 도청사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견서가 경기도에 제출됐다.
경기도에서 40년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퇴직한 경기도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강석 전 남양주부시장은 김동연 경기도지사에게 국민신문고를 통해 제출한 건의서에서 “1967년에 현재의 자리에서 출범한 경기도청 정문에는 두 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를 새긴 동판 문패가 있었고, 서울 광화문 경기도청 자리에 있던 측백나무가 지금 광교 역사공원에 이식되어 광교신청사 제자리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경기도청(박정희 대통령 글씨), 경기도의회(김영삼 대통령 글씨) 동판이 고철로 사라질 위기에서 자신이 구해냈다”고 전하고 “도청, 의회 현판으로 쓰인 동판은 광교신청사 현관에 설치하고, 1910년부터 서울 광화문 도청을 지키다가 2017년 남경필 도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협의로 광교 역사박물관에 이식된 측백나무는 경기도청내 공원 중앙에 이식해서 경기도의 역사성을 이어가는 축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고 김동연 도지사에게 건의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그동안 언론에 동판 이야기와 측백나무의 스토리를 여러 번 전했다”면서 “동판과 측백나무는 100년 경기도 역사를 이어가는 경기도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며 김동연 도지사님이 제자리에 자리를 잡아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서 “어렵게 지켜낸 경기도청, 경기도의회 동판을 광교청사의 현관에 아름답게 배치하여 도청과 의회를 방문하는 도민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일익을 담당하도록 해 주시기를 건의했다”며 “광교역사박물관에 이식된 측백나무 역시 100년 경기도 역사를 이어가는 의미에서 광교청사 중앙에 자리한 공원에 이식하고 그 역사를 널리 알리는 것이 도민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도지사 건의문에서 밝혔다고 말했다.
[언론기고] 경기도청 청사 이전을 보며
경기도 청사는 서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도청의 전신인 경기감영은 한성부 내에 있었다. 청사가 서울시에 있는 것은 도민의 자존심의 문제였을 것이다. 1953년 4월 15일 인천에서 먼저 ‘경기도청 유치위원회’가 발족되자 1주일 뒤 수원에서도 ‘경기도청 수원 존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존치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수원에 경기도 감영이 있었고 6.25전쟁 당시에도 임시도청이 설치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2년에 수원의 지역 유지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도청을 수원으로 이전하자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1963년에 박창원 경기도지사는 청사를 시흥군 안양읍에 이전하자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병희 수원유치위원장이 도의 발전과 미래를 생각하며 삭발까지 감행해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도청 이전을 요청하였던 바 1963년에 법률 제1538호가 제정되어 수원으로 결정되고 1967년에 현재의 청사로 이전했다. 참고로 공사비 15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전 당시 도민은 289만명으로 현재는 1천353만명이니 4.7배가 늘었다. 공무원수도 늘었고 경기북부지역 발전을 위해 의정부에 북부청사를 두고 있다.
경기청사 이전에서 고배를 마신 인천시는 오히려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는 추진력을 얻었다는 것이 당대 행정가의 평가다. 그리고 도청을 인천시로 이전하였다면 교통상황이 불편하여 도민과 공무원의 고생이 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14년만에 또 다시 청사를 지어 이사를 하는 말 그대로 ‘탁상행정’의 상황이 발생할 뻔했다.
◇ 100년 역사의 측백나무
1910년경 서울 광화문 앞 의정부(議政府) 터에 경기도청사가 건립되면서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측백나무는 높이 13m에 가지 양끝 길이가 13∼15m로 성장했다. 이 나무는 1967년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 때까지 57년간 광화문 청사와 함께 했다.
그리고 도청 수원으로 이전한 후에 홀로 남겨졌다. 그 후 대략 50년간 서울의 청사철거, 주변 개발 등 격동의 삭풍 속에 용하게도 견뎌내던 중 서울시가 ‘의정부’터 발굴조사계획 추진하면서 베어지거나 이식해야 하는 위기를 맞는다.
2017년 8월에 서울 박원순 시장과 경기도 남경필 지사가 논의한 끝에 경기도에 기증된다. 도는 즉시 이 측백나무를 광교역사박물관 부지에 가이식하고 광교청사 준공되면 옮겨 심기로 했다.
◇ 55년을 함께한 경기도청 동판
김문수 경기도지사(32~33대, 2006. 7 ~ 2014. 6)는 2006년 도지사에 취임하면서 도청주변의 철조망을 걷어내라고 지시했다. 도민과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2009년에는 정문과 후문의 철제대문도 철거했다.
철문을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경기도의회 공보과장으로서 도청 청사를 관리하는 회계과에 의견을 냈다. 경기도청·경기도의회 동판을 살려내자고 말했다. 동판이 박힌 시멘트 구조물을 통으로 뽑아 화단에 옮겼다가 광교청사 준공시에 이전하자고 건의했다. 담당자도 사무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예산이 없단다.
다시 문화재과에 의견을 냈다. 아직 50년이 지나지 않아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답이다. 태어나면서 자격증을 들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없다. 도청에 1967년에 입주하였으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경기도청’은 2008년도에 41년을 맞는다. 9년이 지나면 50년을 충족한다. 2021년에는 54살이 된다. 하지만 더 이상 논의가 이어지지 못했다.
정문을 철거하는 토요일에 양복을 차려입고 현장으로 나갔다. “저는 도청 과장입니다. 이 동판은 소중한 역사물이니 흠결없이 떼어내서 넘겨주십시오.” 경기도청 현판은 총무과로 보내고 김영삼 대통령이 1992년말에 경기도의회 이달승 의원의 청을 받아 써준 ‘경기도의회’ 현판은 의회 총무담당관실로 보냈다.
그리고 2018년말 공직 42년을 마감하면서 oo일보 기자와 점심을 먹으면서 공직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경기도와 도의회 현판을 지켜낸 일화를 소개했다. 함께한 젊은 기자가 즉시 취재를 시작했다. 어렵게 구해낸 동판이 공무원의 관리소홀로 사라졌다는 기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점심을 함께한 그날 오후 5시가 지나지 않아서 문자와 사진을 받았다. 경기도인재개발원 행정자료실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희소식이었다.
경기도청이 2022년 초에 광교청사로 이전한다. 이에 도민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 측백나무는 100년 넘게 경기도청의 상징이므로 광교청사 중심부에 이식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경기도청과 경기도의회 현판(동판)은 현재의 팔달산 청사의 중심부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광교청사 로비에 설치하는 안도 제시한다.
◇역사발전을 위한 작은 노력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지난 6월에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경기도청이『이건희 미술관』입니다’라는 청원을 올려 159명의 서명을 받았다. 현재의 도청 청사는 리모델링 공사 6개월후에 미술관 개관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직 42년이 훅하고 지나갔다. 경기도의 역사는 쉼 없이 이어진다. 도민은 물론 후배 공무원들이 역사를 가꾸고 이어가는 작은 날개짓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광교청사로 이사 간 경기도청에서 더 큰 경기도 역사를 줄기차게 이어가기 바란다. 이강석 前 경기도의회 공보담당관
[보도자료] 경기도청 광교 이전에 따라 ‘경기도의 보물이라 평가할 수 있는 팔달산 도청에 있던 도청과 도의회 현판을 광교청사 현관에 배치하고, 서울 광화문 구 경기도청 터에서 가져온 측백나무 역시 광교 도청사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견서가 경기도에 제출됐다.
경기도에서 40년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퇴직한 경기도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강석 전 남양주부시장은 김동연 경기도지사에게 국민신문고를 통해 제출한 건의서에서 “1967년에 현재의 자리에서 출범한 경기도청 정문에는 두 분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를 새긴 동판 문패가 있었고, 서울 광화문 경기도청 자리에 있던 측백나무가 지금 광교 역사공원에 이식되어 광교신청사 제자리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경기도청(박정희 대통령 글씨), 경기도의회(김영삼 대통령 글씨) 동판이 고철로 사라질 위기에서 자신이 구해냈다”고 전하고 “도청, 의회 현판으로 쓰인 동판은 광교신청사 현관에 설치하고, 1910년부터 서울 광화문 도청을 지키다가 2017년 남경필 도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의 협의로 광교 역사박물관에 이식된 측백나무는
경기도청내 공원 중앙에 이식해서 경기도의 역사성을 이어가는 축의 하나로 삼아야 한다”고 김동연 도지사에게 건의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그동안 언론에 동판 이야기와 측백나무의 스토리를 여러 번 전했다”면서 “동판과 측백나무는 100년 경기도 역사를 이어가는 경기도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며 김동연 도지사님이 제자리에 자리를 잡아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서 “어렵게 지켜낸 경기도청, 경기도의회 동판을 광교청사의 현관에 아름답게 배치하여 도청과 의회를 방문하는 도민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일익을 담당하도록 해 주시기를 건의했다”며 “광교역사박물관에 이식된 측백나무 역시 100년 경기도 역사를 이어가는 의미에서 광교청사 중앙에 자리한 공원에 이식하고 그 역사를 널리 알리는 것이 도민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도지사 건의문에서 밝혔다고 말했다.
2008년8월에 의원님을 모시고 독도에 가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는 결의대회를 열었습니다. 목, 금요일 2박3일 일정인데 미스매칭으로 금요일 배표가 없습니다.
울릉도 여행사는 일행이 토요일 오후에 일정을 마치는 것으로 알고 배표를 예약한 것입니다. 금요일 오후에 항구에 나갔다가 다시 그 숙소로 돌아와 하루 더 묶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행은 다른 부서에서 준비한 일정이었고 담당 과장님이 여름 휴가일정을 잡았으니 지난주에 휴가를 마친바 그냥 인솔담당 공무원으로 참여하였던 사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착오, 미스매칭, 1박이 추가되는 대형사고를 접하고 처음에는 잘못이 없다고 항변할 생각이 들었지만 마이크를 잡고 제가 잘못이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이 사과를 깃점으로 공직을 잘 마무리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날 나는 잘못이 없고 옆의 부서에 책임을 돌리려 했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고 조직은 물론 개인도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내가 잘못이고 제대로 일정을 챙기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실 비행기표, 배표를 받으면서 일자와 시각을 체크하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 울릉도 여행에서도 오가는 과정에 의원님들 불편함이 없도록 소통하는 역할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써둔 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살펴야 하는 일이 많겠습니다만 우리가 해외여행을 갈때 항공권을 읽어보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도의원님을 모시고 울릉도와 독도에 다녀오는 배표를 미리 확인하기는 여행사 운영구조상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행사들은 다양한 단체손님들의 일정을 제1일차, 제2일차로 적고 ( )안에 요일을 넣는 방식을 많이 쓰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겪은 여행사간 미스매칭으로 인하여 발생한 일정차질은 공직의 이후 상황을 좌우할 대 사건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였으므로 공직의 후반부가 편안하고 작은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2008년 8월에 울릉도와 독도 여행을 하였습니다. 여행이지만 어려운 도의원 중진들을 모시는 행사였습니다. 일본의 교과서 망언을 규탄하는 행사입니다.
버스를 이용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달려가 강원도 묵호항에서 1박하고 울릉도에 도착하여 배를 바꿔타고 독도에 다녀온 후 1박하고 금요일 오후에 귀가하는 스케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회측 여행사와 울릉도 여행사간 미스매칭으로 사건이 크게 발생한 것입니다. 울릉도 여행사는 울릉도 2박3일로 받아들여서 목금 2박에 토요일 오후 귀가로 일정을 준비하였으므로 토요일 귀가 배표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럼 목요일 저녁 숙식은 묵호항에서 진행하였으니 울릉도에서는 하루가 비는 것인데 이를 크로스 체크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울릉도 여행사는 일정 차질에 대해 대표가 사과하거나 직원이 일행에게 달려오기는 커녕 다음날 토요일 오후에 배표를 인질처럼 잡고 대치하는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돌발 상황으로 발생한 금요일 저녁 숙식과 아침식사 비용을 내야 배표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의회측 안양 여행사와 울릉도 여행사, 그리고 의회사무처 관계부서의 착오와 미스매칭으로 발생한 사건이니 누군가의 잘잘못이 나중에 가려질 것이고 우선은 서비스업 여행사 대표가 달려와 사과를 하고 수습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여행사 직원이 주인 정신과 애사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우선 항구로 표를 들고 달려와서 일일이 나눠주면서 사과를 하고 추가로 발생한 여행경비는 실무적으로 조율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담당관 대신으로 이번 여행에 합류하였으므로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자는 마음속 검은 마음이 움직였지만 공식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루 더 묶으시고 의회로 돌아가서 벌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의원님 중에 그대는 전체일정을 수행하는 책임이 있을 뿐 여행일정을 관리하는 것은 다른 부서의 일이라는 판단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여행을 진행하는 실무책임자로서 잘못은 있고 한번 더 송구하다 말씀 드렸습니다. 이렇게 사과를 함으로써 더이상 의원님들의 일정 미스매칭에 대한 논란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혹시 만약에 "저는 代打(대타)이고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다면 사태는 크게 번지고 더 큰 어려움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그런 자세를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 임했던 기억을 오늘 다시 마음에 새기면서 주인정신의 중요성, 민첩한 상황파악과 처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저와 차석이 농협 ATM기에서 서비스로 400만원을 인출하여 숙식비를 지불하고 배표를 받아 묵호항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신없는 상황속에서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일행이 술을 드실 수 없도록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저녁을 드시도록 한 것은 잘했지만 라면과 우동을 주문하면서 의원님 우동을 먼저 내도록 주방에 당부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공무원들은 팅팅 불어버린 라면을 먹으며 속을 달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의원님이 주문한 우동이 나올때까지 공무원들은 라면 젓가락을 움직이지 못했거든요.
다음은 의사봉 이야기입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보안관, 갱단, 군인들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싸워야 할 상대가 나타나면 권총을 빠르게 뽑아야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회의실에 10분 일찍 가서 위원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의사봉이 준비되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담당 팀장에게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위원회 시작 5분전에 벌어진 상황입니다. 깜짝 놀란 팀장은 급하게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회의 시작전에 의사봉이 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해프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봉을 두드리는 이는 위원장인데 그것을 비치하는 것은 담당팀장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서부영화 결투 장면에서도 권총은 주인공의 허리에 준비된 것이지 그 옆의 부관이나 병사가 관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원장이 의사봉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새로 구입한 의사봉을 책상위에 놓고 일정을 나갈 때마다 살펴보고 의사봉이 필요하면 가지고 갑니다. 봉은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가서 어떤 외부위원님과 눈인사를 나누면서 불쑥 꺼내듭니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권총을 뽑는 시늉을 하는 것입니다. 위원장(부시장)의 재미있는 추임새에 교수님,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들은 기분이 좋아집니다.
10분 일찍 도착하여 의사봉쑈를 보여주는 부시장에게 보내는 찬사, 칭찬의 말씀을 다른 시군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퇴임 발령시 짐을 정리하는데 함께 일하는 동료가 議事棒(의사봉) 일체를 가져가라 합니다. 후임으로 오는 어느 부시장도 이 의사봉을 들고 다닐 것 같지 않다는 판단을 했다고 합니다.
이 의사봉을 지금도 잘 간수하고 활용합니다. 후배 공무원을 위한 강연을 가면 반드시 들고가서 두세번 두드리면서 집중을 유도하기도 하고 당시의 경험을 설명하는 교보재로 활용합니다.
직접 교육생에게 의사봉 3타를 시연하기도 합니다. 아주 재미밌게 의사봉을 두드리고 만져보고 동참해 줍니다. 성인 교육은 역시나 참여식 교육이 중요하고 효율적입니다.
盆栽(분재)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분재의 眞面目(진면목)을 보려거든 고개를 숙여서 뿌리와 줄기부분을 보라고 합니다. 위에서 보는 분재는 아름다움이지만 바닥에서 올려본 분재는 고통과 아픔의 결정체입니다.
진주조개가 있습니다. 몸속에 모래가 들어오면 막을 쳐서 부드럽게 관리하면서 공생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년을 살아남은 진주조개는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약으로 청심환이 있습니다. 면접을 볼 때 긴장을 풀기 위해 먹기도 하는데 이 약의 성분은 소가 암과 싸우면서 생성된 물질입니다.
소가 움매하고 우는데 그 소리에 떨림이 있으면 牛黃(우황)이 들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장황스럽게 떠들어대면 어른들은 ‘우황떤다’고 조크를 하기도 합니다.
소의 고통에서 생성된 산물인 우황이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약품이 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고통은 참아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나온 성분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공직생활도 진주주개가 진주를 만들고, 황소가 병들어 우황을 생성하는 과정과도 같다고 봅니다. 차마고도 길에서 매순간 危機一髮(위기일발)의 순간을 걸어가는 것과도 같고 3보1배로 6개월을 직선으로 나가서 불교성전 라싸에 도달하여 흰색 천으로 만든 목도리하나 받아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다시 걷거나 지나가는 트럭 적재함에 올라가서 비포장 도로를 달려가고 고향에 도착하여 승려가 됩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죄를 속죄받고 도시로 나가 돈벌이에 나서기도 합니다.
차마고도를 지나가는 이들의 심정으로 우리의 공직을 견뎌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정년에 이르고 퇴직후 6개월 안에 헌법에 의한 홍조근정훈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茶馬古道(Tea-Road) 차마고도
중국의 차(茶)와 티베트의 말(馬)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교역로로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육상 무역로다. 이 길은 실크로드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존재한 고대의 무역로로 알려져 있다.
해발 4,000m가 넘는 험준한 길과 눈 덮인 5,000m 이상의 설산과 아찔한 협곡을 잇는 이 길을 통해 차와 말 외에도 소금, 약재, 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물품교역 외에도 여러 이민족의 문화와 종교와 지식이 교류되었다.
공직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시는 여러분의 앞날에 큰 영광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갑게 만난 여러분과의 대화를 마치고자 합니다.
원고가 필요하신 분은 stone9158@naver로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파일을 첨부하여 답장을 드리겠습니다.
<원고지 182매분량 28,419자 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