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에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고 6년후인 1970년에 인천~서울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여행용 가방이 없어서 이웃집 누나의 것을 빌려 간단한 소지품을 넣어 등에 메고 학교에 모여서 버스를 타곡 인천으로 갔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혹시 數學(수학)여행을 가는 것인가 생각했던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한자를 배우면서 修學(수학)여행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학여행에 대한 정확한 기억이 없으므로 2022년 12월 초등생 청룡초등학교 22회 동창생 모임에서 이야기를 꺼내자 김재엽 친구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인천에서 1970년 기준 20년전인 6.25때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나라를 구해준 맥아더장군을 동상으로 만나 인사드리고 항구에서 큰 배를 구경하였습니다.
이어서 서울시내로 가서 창경궁에서 코끼리 등 외국에서 배타고 온 동물들을 다수 만났고 남산 타워에서 서울시내를 구경했습니다.
시골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서울은 신천지였습니다. 거리마다 돌출간판이 가득하고 전기불이 반짝이는 불야성의 서울은 신기한 세상이었습니다.
서울 청계천2가 광산여관에 들어가 한방에 8명씩인가 끼어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윤재후 선생님이 수학여행 오리엔테이션에서 서울의 화장실에는 水洗式(수세식)이라는 것이 있어서 줄을 잡아당기면 물이 내려온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수도관이 터진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실제로 구시대의 양변기는 시골 무지랭이 소년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시골의 집과 학교에서는 이른바 푸세식이어서 곧바로 처리되는데 서울식은 일단 바닥에 집결했다가 물을 내리면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신 문명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은 적응이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위생적이라 하니 그리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서울에 수학여행 간다고 어머니가 사준 콜라병은 하루종일 가방속에서 이리저리 뒹굴어 맹꽁이 배처럼 팽창해 있었나 봅니다. 여인숙에 오프너가 없으므로 벽에 박힌 못을 빼서 뚜껑에 대고 다른 물건으로 망치질을 하였습니다.
결정타를 맞은 콜라는 탄산의 거품 압력으로 힘차게 물줄기를 뿜어냈고 급한 나머지 이 병의 물줄기를 창문으로 가져가서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용암분출이 끝나자 다시 방안으로 들여와서 한모금씩 단맛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맑은날 저녁길에 하늘에서 비가내리자 행인 몇명이 하늘을 쳐다보더라고 다른 친구가 전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하고 다음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서울 한복판을 시골 아이들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서울 구경을 많이 하고 다시 집으로 오기위해 기차를 탔습니다. 친구들에게 물으니 야목역에서 하차했다 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학생 70명을 삼륜차 트럭에 태웠습니다. 일어서지 말고 앉아있으라는 안전조치만으로 8km를 달렸습니다. 비봉면 소재지를 지나 부리고개, 재양고개를 내려가서 자안1리, 2리 학생들을 내려주었습니다. 아마도 방아다리에서 자안2리 학생과 하저1,2리 학생이 내리고 학교에 도착하여 청요리, 상기리 학생들이 모두 하차하여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전화도 동네 전화도 없던 시절이니 학생들이 안전하게 귀가하였는가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밤중에 길가에 내려주고 귀가하신 줄 압니다. 1965~1971년 시골의 아이들은 밥을 먹었는가 걱정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관리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성회비, 육성회비 밀렸다고 수업하지 않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려보냈고 집에서는 돈이 없으니 농사를 지어서 쌀, 보리를 팔면 내준다 하시므로 엉엉 울면서 다시 학교로 가서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질타를 받는 입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종례를 하시는 선생님의 구호에 따라서 내일 가져와야 할 학비의 금액을 復命(복명) 復唱(복창)하는 일이었습니다.
연구회비 20원, 육성회비 200원, 저금 50원!!!
선생님이 선창하시면 학생들은 복창을 했습니다. 대략 1966년 초등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의 구호로 기억합니다. 계란 하나를 가져가면 연필, 지우개, 도화지를 사고 몇원을 거슬러 받았습니다. 아마도 당시 계란 한 개가 10원 내외였나 봅니다.
그리고 학제가 바뀌면서 청룡초등학생 80여명은 그대로 비봉중학교에 무시험 입학하였고 비봉중학교에서는 남학생반, 여학생반, 남여혼성반 3반으로 편성되어 공부를 했습니다.
남학생은 유도를 배우고 홍건표 교장선생님은 조회 훈화말씀 대신에 중1~고3까지 모조리 왕자봉 정상으로 내달리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스커트를 입은 여성 선생님도 먼지가 풀풀 나는 왕자봉 산을 올라갔고 2년여 후에 이만치에서 바라본 왕자봉은 속알머리 없는 대머리 산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학부모와 지역의 주민들이 학생들에게 과도한 '조회등산'이라는 민원이 있었지만 운동을 좋아하시고 유도를 발전시켜 5단을 지나 명예 8단에 오르신 홍건표 교장선생님의 강하게 학생들 키우려는 교육열은 식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에 가거나 사회에 나가서 나름의 길을 걸어온 청룡초등학교 22회 졸업생 30명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무한리필 참치집에서 소맥을 겸하여 한 잔 하면서 지난날의 이야기를 꽃피웠습니다.
쉽지 않은 시절에 유년을 보내고 이후 오일쇼크, 북한 무장공치 침투, IMF, 88올림픽, 2002년 월드컵,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싸스, 코로나19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모여서 서로의 얼굴에 즉시즉시 이름을 붙여가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친구들의 기억으로 2002년에 봉담 왕림고개에서 만난 후 20년만에 다시 본 친구들 중에는 졸업 후 처음만난 학생도 있고 평소에 몇번 만나는 친구도 있는 바이지만 만남은 새롭고 반갑고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질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학여행을 마치고 야목역에서 트럭에 태워 집으로 보내졌던 아이들이 사고없이 학교를 다니고 성장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형성한 모습을 보니 참으로 잘된 일이고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초등학생때 우리곁을 떠난 친구도 기억나고 60을 넘기면서 더이상 모임에 나오지 못하는 친구도 몇명이 있으니 아쉬움이 겹치게 됩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아보니 해외에 사는 동창도 있고 비봉면 자안리, 청요리, 상기리, 팔탄면 하저리에서 살고있는 이도 더러 몇명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뒷모습을 돌아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국민학교 동창이 반갑고 그 당시의 기억을 교류하는 대화는 끝이 없겠습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가 있고 운전으로 안 먹는 친구가 있고, 아예 맘먹고 한잔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모임에 가면서는 과묵하게 말을 조금만 꺼내려 마음 먹었지만 막상 초등학생 시절의 모습을 얼굴에 절반 이상 관리하는 친구를 만나는 순간 64세 나이가 10살로 젊어지면서 당시처럼 당대처럼 재잘거리는 초등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화를 통해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고 새롭게 기억나게 해준데 대해 재미있다 말해주는 친구들 덕분에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그 가지수가 늘었고 개인에 대한 좋은 기억도 말해주니 이 또한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쉽지 않았던 세월의 풍파를 잘 이겨내면서 살아온 '58개띠'는 당시에 전국에서 100만명이 태어났다하고 애가 우니 개가 짖고 개가 떠드니 아기가 깨나서 운다고 해서 다른 개띠는 별말없이 나이를 재는 띠인데 유돌 오늘 모임의 1958년생은 [58년개띠]라고 강조해서 설명한다 들었습니다.
6.25전전후 4년만에 태어난 것이니 어려서 전쟁의 현장에서 자라고 성장했으며 1967년 전후 농촌에서 젊은 부부가 도시로 이사를 가면서 98명 입학생 2반이 70여명 1반으로 줄었던 격동을 겪은 바도 기억해 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절체절명의 위험한 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나서 오늘 만난 반가운 친구들이 더욱 더 건강하고 사업 발전하고 가족이 모두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친구의 기억1] 초딩동창모임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쉽다고 친구가 커피한잔 하고 가자고 하여 그 마신 커피가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꼴딱 새워 주일 예배드리는데 완전 비몽사몽, 말씀은 듣는듯 마는둥 집에가서 빨리 잠자야 된다는 생각뿐이다.
자고나니 친구의 옛야기 보따리 읽으니 웃음이 절로 터져나와 혼자 배꼽을 쥐고 웃어보기는 처음 눈이 침침 해 글씨를 키워가며 읽는다. 아니 어쩜 어제 일어난 일들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가 있어 정말 자랑스럽네.
여행중 여학생들 방에서 친구 한명이 아프다고 하므로 친구들이 모여 앉아 아픈 친구 낫기를 기도했던 일~ 엄마가 삶아주신 달걀 내일되면 상한다고 그 저녁에 억지로 다 먹고 다음날 아침 썩은 방귀 내 뿜던일 지금도 까스냄새 나는듯.
어제 친구들 이야기 듣느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참 잘왔다 생각했지. 어제는 고향에 다녀 온 느낌 오늘까지 그여운이 남아 마음이 흐뭇하네. 친구들 모두 건강관리 잘하고 다음에 만날때까지 건강하길.
[친구2] 친구가 기억을 더듬어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약간의 수정을 가하자면 1971년도에는 중학교 1학년 시절이니까 서울 여행은 1970년도 4월 하순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봉까지 걸어간 것이 아니고 첫날에는 대절버스로 청룡초등학교에서 이동하여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에서 단체사진 찍고 곧바로 서울 창경궁으로 가서 식물원 구경하고 식물원 마당과 계단 등에서 싸간 도시락을 먹었었죠.
당시에 우리 어머니께서 김밥을 난생 처음으로 싸본 실력이 참으로 어이없었다고나 할까요. 쌀밥에 그냥 구운 김을 둘둘 말아서 잘게 썰지도 않고 새로 나온 나무 도시락에 하나 가득 담아주셨죠.
그야말로 반찬 하나 첨부되지 않은 순수김밥을 먹으려니 참으로 싱거워서 하나도 못 먹고 있었는데 마침 지호친구가 하나 바꿔먹자고 제안해 와서 계란부침도 들어가고 시금치나물도 들어간 진짜 맛있는 김밥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리고 역시 맛없는 내 김밥을 억지로 먹으면서도 맛있다며 밝게 웃어준 지호 친구가 참으로 고마웠고요.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삼일빌딩 옆 삼일고가도로가 그대로 내다보이던 청계천2가 관철동 소재의 광산여관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남산중턱에서 생전 처음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꼭대기 팔각정 앞에서 단체사진 찍고 또 내려오면서 야외음악당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 앞에서도 단체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당시 처음 본 하드가 10원에 두 개였는데 음악당 광장 한 귀퉁이에서 살까말까 오래도록 머뭇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전날 묵었던 여관 바로 옆 블럭에 있던 31층짜리 삼일빌딩이 그 당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고요.
암튼 야외음악당에서 험악한 계단길을 타고 회현동까지 내려와 서울역으로 향한 다음 그곳에서 다시 인천 송도를 거쳐 야목까지 기차를 타고 온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야목역에서는 버스가 대기하기로 약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회사사정으로 다른 곳에 투입되어 많이 늦은 저녁시간에 아쉬운 대로 삼륜차를 급히 섭외했었던 것 같고, 그 조그만 짐칸에 50명 가까이 승차했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네요.
그리고 1971년 2월에 78명이 졸업했는데 비봉중학교에 42명이 입학하고 상기리 송재일, 이상원 친구가 봉담쪽으로 진학했었죠.
1965년 3월에 93명이 입학해서 입학 다음날에 북양리 광산 주인집 윤인섭 친구는 자퇴하고 3학년 올라갈 때 김순중 교장선생님 아들인 김선엽 친구는 4학년으로 월반해 가고 상당수의 친구들이 전학가거나 자퇴하더니 상기1리에서 정찬현 친구가 유일하게 전학와서 졸업식 때는 78명이 졸업했죠.
그러고 보니 65입학 동기들 중에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 적지 않네요. 이동순, 이나규, 이찬원, 노순호, 조성상, 조성열, 이우원, 이영항, 이은희, 김양겸 등 10명이나 되네요.
이들 친구들께 다시금 명복을 빌면서 우리 친구님들 건강관리 잘 하고 체력유지 잘 해서 오래도록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친구3] 와!!!! 정말 대단하다. 그 머리와 내 머리는 분명 다른구조 다른 재질로 만들어 진것은 아닌가? 싶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수많이 적어놓은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 머리에서 기억 나는건 단 몇가지~
남산에 올라가서 친구들 몇명과 찍은 사진보며 수학여행을 생각하는 정도였는데 기막힐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을 적어준 글을 보면서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네그려.
수학여행 갈때 김밥을 싸준 우리엄마의 솜씨를 자랑해 보면 간장에 깨소금 넣어서 비빔밥을 김에 도르르 말아주셨는데 그것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새로웠다.
너무 재밌어서 웃고 있노라니 우리서방님 "왈, 뭔데 그렇게 재밌냐고 묻길래 이것 좀 읽어보라며 보여줬더니 읽은 후에 하는말 ~
참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라며 감탄하는 남편에게 초딩시절 참 훌륭한 친구라고~ 자랑할만하다며 칭찬하는 울 서방님과 서로의 수학여행이야기 보따리 풀어서 열심히 대화를하고 저녁 맛나게 먹었네요.
친구들이 너무 좋은 추억들 소환 시켜줘서 감회가 새로웠고 너무 너무 감동이었다 감명깊게 책 한 권 읽은 기분좋은 저녁시간을 선물해 준 친구야 고맙데이.
좋은 기억 소환해서 자주 올려주시게나 우리 친구들!!!! 모~두 모두 행복한 저녁시간 되이소.
[친구4] 친구들 마다 나름 기억하는 부분들이 다양하니 더 재미가 있다^^ 너무 재밌는데 나는 기도한 기억도 전~혀 안나니 내 머리는 연구 대상인듯 싶다 ~^^
[친구5] 역시 기억력이 대단한 친구들이여 놀랍고도 신기한 친구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
[친구6] 인생의 잔칫날이 많이 있었다 그날은 언제나 준비하며 기다리게 된다. 잔치 당일은 몸과 마음 심지어 얼굴 머리까지도~^^ 가장 근사한 잔칫날을 기대하며 맞는다.
역시 동창들을 만나는 날도 무척 기다려지는 날 중에 한날이다. 평생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든 반갑고 즐겁고 마냥 행복하다.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너무 정겹고 즐거워서 이야기를 잘~들려 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행복해진다. 듣기만 해도 신나고 과거의 추억들이 슬라이드 필름 지나가듯 떠오르면서 순수했던 동화속 주인공들이 머리속에서 톡톡 튀어나온다 기나긴 시간.
긴~ 공직자의 삶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나와 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시절 유독 딸을 사랑했던 나의 아버지를 많이 생각나게 해 주었다 너무 행복했다.
하사 출신의 계급으로 장기근무하셨던 아버지는 휴가를 자주 못나오셨던지? 제대하시고 이듬해 5년만에 나를 낳으셨다고 했다.
너무 예뻐서 동물원에 갖다 놓으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씀하시던 우리 아버지셨다. 당신 눈에 오랜만에 얻은 딸의 예쁜 모습만 기억하셨던 덕분에 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던 어린시절이 떠올려졌다.
엄마는 뒷전이었고 오로지 나만 예뻤던 아버지는 내 결혼식날 아침에 나오려는데, 잘 살아라~며 뒤에서 눈물짓던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 같이 울었다 멀리가서 사는것도 아니면서 父女(부녀)는 그랬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술을 유독 좋아하셔서 그 부분이 늘 아쉽고 속상했던 기억도 있지만 그일 외에는 너무 좋으신 아버지셨다.
노래 잘~한다고 돈 주시고 예쁘다고 돈 주시고 상 타와서 돈 주시고 익재네 가게 사탕이나 껌은 아마도 내가 다 사먹었을것 같은 기억이다. 그래서 매일 밥 안먹는다고 엄마는 나를 구박했다 그러면 아버지 할머니한데 일러서 엄마 혼나고.
무시해도 되는 엄마와는 반대로 나에게 너무 좋은 할머니와 아버지는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던 무한사랑 그 자체였다. 그덕분에 군것질로 인해서 키가 못컸나? 라는 생각에 가끔씩 내가 하는말은 ~ 자고로 엄마 말 잘듣고 여자 말 잘 들으면 세상이 편해진다고 했던가?
ㅎㅎㅎ~~ 내 아버지를 친구도 좋은 기억으로 이야기 해 주어서 너무 행복했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동창들을 만나면 참 기분이 좋고 늘 힐링이 되는 좋은 시간이다.
다양하게 모임이 많이 있지만 초딩 모임이 제일 좋은 이유는 이렇게 순수한 동심을 자극해 추억을 소환해 내는 덕분에 이야기꺼리가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다 .
멀리있는 근희야 어제 네 이야기도 했단다. 공부시간에 가끔씩 키 시원하게 큰 근희가 옛날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들려줘서 재미있었다고.
근희 네 얘기를 하면서 또 감회가 새로웠다. 같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아쉬움도 있었지 친구야 그래서 내가 대신 들려주는 거란다.
사랑하는 우리 친구들!!!! 부디 바라기는 지금처럼 이렇게 건강하게 살면서 만나면 힐링되고 행복한 좋은시간이 되길 바라며 좋은 소식 많이 들려주길 바랍니다.
박상철의 노래 가사처럼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 갈수 있도록 모두모두 항상 건강하길 소망하며.
울 친구들 !!!!! 오늘도 파이팅입니다 ~^^
단톡방이라는 것이 있어서 긴 문장 100원, 단문은 50원이라는 방송 멘트처럼 여러 명이 글을 올려주어서 여기에 추가해 봅니다. 훗날에 이 책을 읽을 친구가 몇명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기대를 하면서 문장을 조금 정리하고 마침표도 찍고 띄어쓰기도 맞추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글이 모이고 쌓이면 중학생 졸업 즈음에 만든 '초석'이라는 글짓기 모음집처럼 새로운 수필집이 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자료이든 역사의 사료이든 당대에 남겨야 후대에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실록을 정리하고 역사가들은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인쇄이든 인터넷 글이든 남기고 관리하면 후대에는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초등학교 입학생 숫자와 졸업생 수를 기억하는 김재엽군은 그래서인가 지금 출판을 하고 대한민국의 불교문학을 이끌어가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달달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에도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라'는 대목이 나와있고 이세상 대한민국의 글 중 명문이라 생각하는데 어느 해에 이를 폐지하였고 또다른 교육의 지침은 나온것인가 모르겠습니다.
정치와 행정이 새로움만 추구한다면 역사와 전통과 경험은 그 자리를 잡지 못할 수도 있고 그리되면 창의력도 약해지고 발전의 원동력도 쇄락할 것이라는 우려를 합니다.
우리의 삶이나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중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이끌고 그 속에서 미래를 추구하는 노력을 원합니다.
이날의 초등학생 동창모임이 밥을 먹기위한 것이 아니라 이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밥이야 집에서도 먹고 가족도 식탁에서 만납니다.
이날의 모임의 밥은, 참치 무한리필은 만남의 매개체이고 만남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살고있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고 미래를 향해 나갈 방향을 정하는 기회를 갖자는 말입니다.
국민교육헌장이 폐기되었다면 이를 대체, 대신할 그 무엇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글이 난무하는 시대, 정보의 홍수로 그 지식속에 빠져서 허벅거리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을 이끌어줄 이정표, 향도, 방향타를 정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 과거사를 통해서 미래로 나가는 동력을 불어넣어 나가자는 주장을 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