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사 이약동(李約東, 1416~1493)선생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인 하로촌(賀老村)에서 금오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절개가 곧았으며 김종직, 조위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1441년 진사가 되었으며 36세가 되던 1451년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사헌부감찰을 거쳐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면서 청백리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약동 선생은 1470년에 제주목사가 되었습니다. 부임하여 행정을 살피던 중 백록담 산신제를 지내는 산천단이 한라산 정상부근에 있으므로 추운 겨울에 제기와 제물을 짊어진 백성들이 어렵게 산을 오르다가 미끄러져서 다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약동 목사는 한라산 중턱 이라동으로 제사장소를 이동하였고 그 자리에 지금도 백성을 사랑하는 목사님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선생이 청백리로 불리우는 여러 가지 스토리텔링중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궤편암과 투갑연입니다. 먼저 궤편암(掛鞭岩)은 말재칙을 반납한 바위위에 새겨진 이야기입니다.
1474년에 경상좌도군절도사가 되어 제주도 근무지를 떠날 때 평소 착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그대로 관아에 두는 것은 물론, 말채찍조차도 관물이라는 이유로 성을 떠나면서 성루에 걸어두었다고 합니다. 타고 온 말은 뱃전에서 다시 돌려보내면 될 일이었고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뱃길에서는 ‘주마가편’할 일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후임자들에게 아름다운 경계가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채찍이 없어진 후에는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이를 기리고자 하였으니 그 바위가 바로 괘편암 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모습이 지금은 사라졌겠지만 아름다운 모습은 글을 통하여 후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투갑연(投甲淵)입니다. 이약동 목사님 일행을 태우고 제주도를 떠난 배가 갑자기 풍랑으로 파선의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는 물살에 쓸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약동 목사는 이것이 하늘을 속인 벌이라 여기고 배 안을 살펴 자신도 모른 채 실려 있는 갑옷을 찾아냈습니다. 갑옷은 부하들이 전별 선물로 몰래 실은 물건이었습니다.
군사가 말하기를 “착한 백성이 목사님께 드리라면서 전해온 갑옷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서 배에 실었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목사님은 갑옷을 강물에 던졌습니다. 갑옷을 바다에 던지자 회오리 물결은 사라지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배가 육지까지 평온하게 당도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투갑연(投甲淵)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실려 전한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관직생활 내내 청렴하였고 오직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지만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정도였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으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78세가 되던 1493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여생을 마치기를 이약동같이 한 사람도 세상에 드물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시대의 공직자 누구라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