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4 고향마을 한바퀴 돌아보다

집을 나설 때는 광교산행으로 준비했었다. 그런데 집과 버스 정류장 중간쯤을 걸어가던 중에 고향이라는 화두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두엽을 거쳐 대뇌로 들어온 그 고향 화두는 오늘의 여행 방향을 180도 바꾸어 버스를 타게 되었다. 즉 83번을 타고 13번을 타고가는 광교산이 아니라 51번을 타고 다시 99번을 타면 가는 비봉면 양노리 방면이었다.

 

 

G20 의장국 대한민국의 교통체계는 무한한 변신을 거듭하여 경기도내 모든 지역을 환승 할인권역으로 구성해 놓았다. 경기도의 광역교통망 정책이 성공한 일면이 환승 할인과 심야 광역권 버스노선 설치일 것이다. 역시나 광교산 코스처럼 양노리 코스도 환승할인이 되는데 약 200원 더내면 되는 조금 먼 거리다.

 

o... 51번 버스안에서 임선배를 향수함

토요일 오전인지라 오가는 행인이 많다. 다문화 아저씨 아가씨도 많이 지나간다. 우리나라가 이제 다문화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단계에서 숙성단계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내버스 안에서 갑자기 메모지를 꺼냈다. 51번 버스 안에서 수첩에 적은 메모는 지금 살펴보니 “글을 버려야 산다는데 버릴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너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라고 적혀있다.

2010년 팔달문학에 깜도 안되는 詩 몇 줄 올린 것에 대한 반성이다. 한번 쭉 써놓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다가 원고 제출 기한이 임박하면 파일로 긁어서 李兄에게 보내고 그러면 책에 나오는 것에 대한 죄송스런 말이다.

정말로 반성할 일이다. 작고하신 동아일보 소속 ‘영원한 기자’ 任 선배를 생각해 보라. 원고지 2매도 안 되는 기사를 쓰기위해 오전 4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을 헐어가며 팩스로 원고를 보낸다. 오전 내내 기사 쓰는 모습을 보라. 100자 원고지에 검정색으로 쓰고 청색으로 고치고 적색으로 교정을 본후 다시 정서를 한다. 또다시 붉은 색으로 수정하고 팩스 보낸 후에는 전화로 고친다.

뭐 세상 바꿀 일이라고 기사 하나에 하루를 소비한다. 석간동아일보는 오후 5시 전에 오는데 팩스로 보낸 수정 많이 한 기사를 식자 뽑아서 판뜨고 돌려서 인쇄를 하여 이곳까지 보내는데 4시간이면 된단 말인가. 동아일보사가 임선배 400자 기사 때문에 있는 것인지.

그런데 정말로 석간 동아일보가 오면 지방판 아래부분에 횡으로 난 1단기사, 기사와 기사 사이를 골목골목 누비는 임 선배의 기사내용은 정말로 ‘금과옥조’ 그 자체인거라.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확실한 내용 전달과 양측의 주장과 평가가 그 짧은 기사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마치 수필을 시처럼, 소설을 시조처럼 표현하는 임선배의 그 모습이 성성한데 이제는 그분의 기사문을 만나기 어렵다. 인터넷을 뒤져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1988년 부터 1991년까지 바라본 일이니 말이다.

 

o... 시골길이 아니더라

1968년에 비봉면 자안리를 떠나 수원역을 거쳐 지금 장안문 밖 영화동에 온 것이 시골에서 신작로를 타고 대처(도시)에 온 첫 기억이다. 흔히 말하는데 신작로에는 재래종 포플러나무가 가로수라는 명찰을 달고 서 있는데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가로수가 뒤로 밀려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번 버스를 타면 그 느낌이 바뀌어 버스가 앞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오목천동쯤에서야 비포장이 끝나고 지금의 아스팔트길을 들어서는데 그 승차감이 정말 달랐다. 아!!! 도시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속도를 낸 버스는 남문과 북문사이의 차고지에 도착하였고 버스를 내려 얼마를 걸어서 도착한 집 대문은 쪽문이다. 인사를 하고 들어가야 했고 나올대도 앞집 대문에 인사를 한다.

밤 전기불은 시골사면서 방아다리 가설영화관이 왔을 때 보았던바 있지만 온통 시가지의 상가와 집에 불이 켜있는 야경은 또다른 감흥을 주었다. 이 많은 불을 누가 켜고 끌 것인지가 걱정이고 어디서 이 에너지가 오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한번은 시내가 온통 정전인데 버스와 택시들은 불을 켜고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학교가서 친구들과 수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집 정전때 버스 불켜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주변 친구들은 걱정조차 않는다며 오히려 말하는 이쪽을 위로하는 분위기더라.

 

o... 고향길을 향해서

한 40년도 더 이전의 그 도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미루나무 가로수를 뒤로 밀면서 밤길에 올라왔던 그 길의 주변에는 아주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유학시절 토요일에 집으로 가던 이 길에도 건물은 적었다. 특히 비봉길은 그린벨트로서 건축이 제한되는 곳인데도 주택은 아니고 공장건물, 창고 같은 건축물이 많이 늘었다.

하지만 비봉면 소재지는 그 좁은 채로 버스를 맞이한다. 경찰파출소도 그렇고 우체국도 그 모습이다. 밥집 이름이 청룡집에서 비봉정육점으로 바뀌었고 34번이던 전화번호는 ***-0034로 족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반가웠다. 안에서 일하는 분은 바뀌었다. 청룡집 아저씨 빈소에 분향한 것이 한 1년 되었나보다. 지금은 큰 사위가 운영한다고 했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은 중학교때 다니던 길과 거의 비슷한데 일부 구간이 추가공사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차량이 속도를 내면서 먼지를 내고 불안감을 준다. 중학교 시절에는 사색의 오솔길이어서 많은 생각들을 얻고 버리고 다시 줍고 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사색이 가능한 코스였는데 이제는 트럭과 승용차가 소리소리 지르며 달린다.

그래서 매연과 소음을 피해 바리골 장고개를 거쳐 멍우리 방면으로 가기로 했다. 혼자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했다. 그 길가에는 존경하는 趙선배의 집이 있다. 처음 만나 뵈었을 당시에도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신다고 생각했다. 두 번인가 가서 밥을 먹고 술도 먹은 기억이 있다. 내 겨울잠바를 빌려드린 분이고 나중에는 책을 빌려드리기도 했다. 나에게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주신 분이다.

그런데 장고개 올라가는 길이 심상치 않다. 시멘트 포장이고 이쯤이면 산속이어야 하는데 건물이 나온다. 가축없는 축사가 나타났다. 벽을 임시로 가린 비닐막이 바람에 펄럭일뿐 인적도 가축도 보이지 않는다. 축산농가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저 산자락에는 전원주택이 보인다. 깔끔하고 아름답다. 일견 저쯤에 집을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바로 그런 삼각형 숲속에 자리잡았다. 다만 안타까운 일이 있으니 2개의 고속화도로가 지나간다. 차량의 속도감 있는 소리와 화물차의 무게실린 엔진소리가 쉼없이 지붕위로 떨어지고 있다. 이집을 먼저 지었는지 도로가 지나가는 그 사이에 집을 지었는지는 궁금한 일일 뿐 알아볼 수 없는 의문이다.

이제 장고개가 나와야 할 시간인데 갑자가 높은 망루에 로프가 보인다. 크게 찍은 별돌이 보인다. 일정하고 줄지어진 작은 조형물이 보인다. 군부대 훈련장이다. 예비군도 훈련을 받을 만한 곳이다. 그래도 대략 35년전 기억을 살려 오른쪽으로 난 길로 향했다. 이쯤으로 가면 장고개가 나올 것이다.

땀이 날 정도로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저만치 군부대 위병소가 보인다. 혹시 총이라도 겨눌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손을 크게 돌리면서 인기척을 보내고 그냥 지나가는 행인1 정도라는 표시를 하였다. 더 이상 들어가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서니 검은테 안경을 쓴 초병이 나온다. 일병(=)이다.

여기서 멍우리로 가는 길이 있는가요? 여기는 군부대 입니다. 가실 수 없습니다. 아 예. 이 부대안으로 가려면 군입대를 하든가 방위협의회위원이 되어야 하겠군요.

미련없이 돌아섰다. 어차피 장고개를 걸어 넘어가려 한 것은 아니었다. 추억의 길을 걸어본다는 애초의 컨셉은 있었지만 반드시 강행할 일은 아니었다. 한 10키로 걸어본다는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광교산 가파른 봉우리들이 약간 무서웠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라.

그래도 발이골까지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고 삼각형, 델타급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다만 장고개 정상까지 온 길은 평온하였으나 되돌아간 부리고개 길은 불편하였다. 차량의 먼지와 소음이 심해서 등산길이 아니었다. 고행길이다.

두 번 고개를 넘어 휴게소를 지나 호젓한 산기슭에 접어드니 봄 기운이 돈다. 정말로 양지바른 곳이다. 인간의 삶은 비교의 연속인 것인가보다. 트럭과 버스가 굉음을 내며 달리는 길을 통해 평온한 오솔길에 접어드니 이곳이 천국이다. 마른 풀이 등산화에 걸리고 거친 자갈길과 비탈고 미끄러지는데도 이곳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o... 시골동네 신아니 (할아버지를 만나다)

힘들다. 잠시 쉬면서 사과 2-1을 먹었다. 집에서 나올 때 점심밥과 함께 사과 2개를 가지고 왔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집에서 사과 1개를 먹고 왔는데 2개째다. 가방에는 1개 더 있다.

보살핌을 받은 묘소는 평온하다. 인근 상석에 비문까지 큼직하게 써 붙힌 묘소는 억새풀과 가시나무가 무성하다. 한 15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손들이 이민을 가셨는지 보살피는 이가 없는가 보다.

40대후반, 정조대왕 만큼 사신 宇할아버지 곁에서 점심을 먹었다. 무장아지, 김치, 멸치에 콩밥인데 한 5키로 걸어온 터라 밥맛이 좋다. 쑥쑥 넘어간다. 물도 시원하다. 탁트인 앞자락을 막는 고압철탑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산업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참아야 할 일이겠다.

 

o... 우리동네 모습

다시 길을 나서 동네 뒤쪽길을 택했다. 저만치 우리집 용두새가 보인다. 젊은 시절 어머니 다음으로 부녀회장을 하신 그 아주머니가 알타리무를 손질하시다가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누구냐고 물으신다. 한참 동안 여러사람 이름을 대고서야 신상 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신다.

옛날만큼 재미있었으면 하는데 실상은 그러하지 않으시단다. 그 이유가 서로 내 것을 주장하신단다. 각종 농산물을 소매로 팔게 되면서 인심이 각박해진 것이라고 진단하신다. 그옛날 함께 살았던 분들이 그립다 하시는데, 정말로 이곳은 사람의 흔적이 그리운 곳인가 생각된다.

도심에서는 사람과 차량이 치여사는 것이 불편한데 이곳은 주변에 인적이 끊기고 매일 함께있는 4-5인 가족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니 반복되는 일상에 재미가 없다는 말씀이 나올 법도 하겠다.

다시 會할아버지를 뵈었다. 지난번 종중 벌초행사를 마치고 와서 벌초를 하였지. 상수리나무 잎새가 초콜릿 색으로 덮고 있다. 갈퀴를 가져왔으면 쓰임새가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깔끔하여 보기에 좋았는데 그 옆에 비석을 세우고 비문의 자손들이 아는 이인데 벌초를 하지 않았다. 마치 이성계 할아버지 봉분이다. 이방원은 아버지가 함흥의 억새를 보시라 해서 봉분이 옮겨 심었고 후대에 봉분의 억새는 벌초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해서 지금도 가을이 되면 머슴아 머리처럼 갈대머리가 휘날린다.

 

o... 1965년 초등학교길을 추억함

이번에는 초등학교 다니던 안산 고개를 향했다. 구불구불 논길을 지나 개울을 만나면 참죽나무 2그루 베어만든 쌍나무 다리를 지났었다. 동네 후배녀석이 네발로 울면서 기어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굽이굽이 흐르던 개울은 직선으로 흐르고 좁은 나무다리 자리쯤에는 시멘트 교량이 설치되었다. 승용차는 편안하게 다닐 길로 확장되었다. 잘 된 일이지만 추억을 찾아온 나그네에게는 조금 아쉽기도 하겠다.

빈도시락 달그락거리며 내달리던 고갯길은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것 같다. 마른풀과 낙엽이 차지한 원시림 지대로 가고 있었다. 왕벌이 살았던 왕소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가을 등하교실에는 정말 큰 알밤을 줍곤 했는데 니키다소나무 40년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왕소나무 할아버지의 행적을 물으니 자신들은 일본에서 이민 온 처지라 잘 모른다 했다.

고개를 거의 다 올라가면 멍우리로 직행하는 길이 나오는데 이 또한 흔적 뿐이다. 이미 도저히 걸어갈 길이 아니다. 그 자리에 5학년 4명이 반공호를 팠었다. 그 당시면 1968년쯤인가에 김신조와 31명이 청와대 습격조로 북악산을 넘어왔다고 했다. 그리하여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곳곳에 목진지가 설치되었던바 우리 4인조는 학교에서 작업을 마친 하교길에 이 자리에 방공호를 팠던 것이다. 제법 넓게 파고 그 위에 나무를 베어 덮은 후 뗏장으로 위장도 했다.

다음날 멍우리 친구집에 하숙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우리 4인조를 지목하여 일어서라 했다. 그리고 누가 방공호를 부수었는지 말하라 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판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시고 훼손한 것은 우리짓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파고 설치하였으며 다시 부순 것이라는 답에 선생님의 머쓱해 하시던 모습이 지금 눈에 선하다.

청룡초등학교는 그 자리에 있다. 문이 잠겨 교정에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 틈으로 내부를 들여다 보았으나 옛추억이 보이지는 않는다. 졸업후 운동장을 파내고 교정을 넓혀서 옛날 기억이 남은 부분이 적고 주변에는 공장과 창고가 들어서있어서 옛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6년을 다녔던 길과 주변의 모습을 다시한번 머릿속에 간직했다.

 

o... 봉담읍 상기리에서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다. 집으로 가야 하는데 버스 시간표를 보니 한 3시간 후에나 온단다. 청요2리를 지나 요골까지 갔다. 그래도 2시간반후에나 버스가 온단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지나가는 차량을 얻어탈 요량으로 손을 들어 보았다.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전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보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이 보이고 손만 들면 태워줄 것 같았는데 말이다.

실제로 만의사에서 오는 길에 할머니 한분을 태워드렸는데 동탄에서 오겹살집을 하신다더라. 딸자랑을 어찌나 하시던지, 아마도 아들은 없으신가보다. 하지만 내가 힘들고 다리아프로 버스 시간표가 맞지 않아 얻어 타고 싶은데 차는 바쁘게 달린다.

사실 지나가다가 차량이 멈출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는 곳에 서서 손을 들고, 나중에는 모자를 벗어 흔들어도 모두 쌩쌩 지나가신다. 조금 더 버티면서 손을 흔들어야 하는가 하다가 이왕 추억여행으로 나온것이니 더 걷기로 했다.

이제 상기리 저수지다. 1977년경엔가 자주 왔던 곳으로 이 저수지는 그당시에 없었다. 다만 저만치 산 계곡을 막으면 물이 많이 오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바는 있다. 이제와서 주장해도 인정해줄 사람은 없겠지만 당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사실이다.

그래서 저수지 수몰전에는 저 물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물속에 한 6-7가구가 살았었다. 차길이 좁으므로 저수지 물가로 걸었다. 모두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짧은 구간에서는 바닷가 모래밭을 연상할 수도 있다. 저수지뚝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려보았다. 무었인가 추억꺼리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배낭에서 사과 2-2를 꺼내 한숨이 먹었다. 여행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먹는 일이다. 더구나 시골 여행에는 먹을 것을 가지고 가야한다. 사과가 실하기도 하지만 여행중 먹는 맛은 집에서와는 많이 다르다. 즐겁다. 행복하다.

저수지 상류를 지나서는 아예 동네 안길로 들어섰다. 이쯤에 초등, 중학교 친구 宋군의 집이 있었는데 하고 가까이 가니 요란한 개짓는 소리에 주인이 쳐다본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이 집에 송군이 사시는가 물었다. 아니란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새로 지었다. 30년전 그집이 아니고 집터도 조금 더 위쪽인 듯하다.

 

o... 1977년을 추억함

상기2리 그때 이장님 집을 찾을 수 없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입구는 생각이 나는데 말이다. 마른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서정적이다.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도 만나볼 일이다. 바람을 맞아 억새가 고개숙이는 쪽에서 보니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모질게 바람맞는 쪽을 보니 애초롭다. 같은 억새가 보는 방향에 따라 서정과 다큐가 겹친다는 것이 이채롭다.

이제 상기1리로 향한다. 당시 이장님댁을 가보니 문패가 아니다. 이씨성의 이장이신데 그집 문패가 백씨다. 상기리는 이씨와 백씨 집성촌이다. 강씨도 있기는 하다. 윗동네는 백씨가 많고 중간에 이씨가 산다.

농로에서 대내무 지팡이를 얻었다. 가늘어서 하늘 거리는데도 쉽게 부러지지 않을 듯 팽팽하게 탄력감을 준다. 동시에 손에 느껴지는 대나무의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재미있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길을 타닥타닥 두드리며 걷는데 비둘기 수백마리가 날아 오른다.

오랜만에 이 길로 나그네가 지나가는 것인가 보다. 더구나 대나무 지팡이가 시멘트 바닥을 긁고 때리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나 보다. 미안했다.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가을 설겉이 후 남은 나락 몇 개 먹고자 하는 것을 방해했으니 말이다. 사실 비둘기들이 1미터 옆에 있다고 잡을 일도 아니고 잡았다 해서 어찌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o... 비둘기를 보다

인간들도 비둘기 마음인가 한다. 미리 피하지 않아도 될 일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 말이다. 걱정이 필요한 것인지를 조사한 미국 기업인은 한 일주일 적은 걱정꺼리중 한 2-3%만이 진정 걱정의 필요성이 있었다고 했다지. 또한 걱정을 한들 대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과 걱정하는 것은 다르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노파심’은 차이가 있다고 본다. [노파심 [老婆心] [명사]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 그래서 집비둘기는 사람이 다가오면 모이, 먹이를 줄 것을 아는데 들비둘기는 대나무 지팡이 소리만 듣고도 퍼러럭(펄럭펄럭) 날아오르는 것인가? 하긴 비둘기중에도 노파심이 많은 애가 있고 겁 없는 집 비둘기과도 더러 있더라.

 

o... 상기1리 백씨 집성촌

이제 저 고개를 넘으면 신작로가 나온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수시로 올 것이다. 그런데 청룡초등학교에서 이곳 상기1리 왕림 근처를 오는 동안 상기리에서 자안리로 향하는 버스는 3대를 보았으나 자안리-상기리 행 버스는 한번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못보았다. 그냥 한쪽으로만 도는 버스는 아닌 줄 아는데 말이다. 머피의 법칙처럼 정말로 내가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시내 버스인가 보다. 82번타고 광교산 가려 할 때는 51번 도청행 버스가 먼저 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그리하여 정말로 왕림가는 길에 들어섯다. 옷과 신발을 사러 온 차들이 가득하다. 어떤 엄마와 딸은 큰 봉투에 옷을 사들고 신이나서 걸어온다. 표정에 자신감이 있다. 내가 고른 옷을 아빠가 카드로 박박 긁어 주었나보다.

 

o... 한 12km 정도

버스를 탔다. 봉담 휴게소 근처까지 지하도를 거쳐 도착한 정류장에서 잠시 기다려 수원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밀린다. 5시반이니 밀릴 시간이다. 잠깐 졸기도 하고 차장 밖을 보면서 사념에 잠겨보기도 하다가 수원 세무서 앞에서 내려 다시 환승하여 집으로 향한다.

지난번 광교산 종주 12키로 이후에 평지로 다녀온 장거리다. 대략 12키로가 넘을 것 같다. 양노리에서 버스 하차하여 걷다가 장고개에서 초병만나 되돌아온 길이 3km, 부대에서 신아니 휴게소까지 2km, 다시 청룡초등 학교 3km, 상기리까지 3km 등 합하면 11km인데 이리 저리 이장님댁 다녀오고 산길로 오고가고 상기리에서 봉담휴게소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간 것 다 합하면 12km라고 하겠다.

 

o... 추억을 신선하게

추억은 아름답기는 한데 쓸쓸하다. 그래도 추억이 있으니 갈길이 있고 올래길도 있다. 둘레길도 있고 고향길도 있다. 오늘 하루를 세내어 고등시절, 중등시절, 초등시절의 그 길을 걸어보았고 사회 초년병 시절의 동네도 잘 살펴 보았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머릿속 추억은 그대로인 채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추억을 넣어둔 머릿속을 잠시 비우고 현장을 살핀 후 다시 정돈하여 신선하게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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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오산#남양주 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