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방남 통장님 영전에 ▩ 2023. 12. 28
1997년 지방행정사무관, 5급에 승진하여 시군교류로 동두천시 생연4동 동장으로 근무했습니다. 8급 서무, 7급 공보실 보도자료 담당자, 6급 인재개발원 교관, 도시개발과 차석, 예산부서 차석을 거쳐서 다시 인재개발원 5급요원 교관으로 근무 중에 문득 어느 날 동두천시청에 발령된 것입니다.
살고있는 수원집에서 동두천시청까지는 98km입니다. 쉽게 100km를 출퇴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대책없이 발령지로 달려가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동장 환영식 후 어두운 밤에 어딘가에 도착하여 짐을 들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텅 빈 방 한가운데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동사무소 동료들이 시청의 동의를 얻어 비어있는 관사를 숙소로 제공해 준 방인데, 시청 과장들이 비상근무시에 간헐적으로 쓰는 방으로 어찌보면 공가에 해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매일 출퇴근하게 되면서 방 청소를 하고 집기도 정리정돈한 후 아침과 저녁을 챙겨 먹는 부엌까지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수원 사는 상수도사업소장, 군포사는 생연1동장이 들어오고 가끔 비상근무시에만 이용하던 부천에 사는 토목직 사무관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1호실은 생연4동장, 2호실은 상수도사업소장, 3호실은 생연1동장이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3인은 훗날에 찰떡 호흡을 자랑하면서 3기관 단합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상호 방문하는 등 시청 시정계에서도 동향차원의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장이 되어서 아무일 없이 한 달여를 근무하던 중에 동정자문위원회 주관의 설악산 1박2일 여행을 다녀와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동정자문위원회, 통장협의회, 방위협의회, 새마을지도자협의회, 부녀회, 체육회, 방범후원회 등 동단위 기관의 대표들이 의견을 모아서 동장 거부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시장실을 방문하였고 부시장을 만나서 동장인사발령을 돌이켜 달라 청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전임 백종범 동장님이 생연4동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왜 우리 동의 동장을 시청으로 올리고 외부에서 전입한, 이른바 낙하산을 시험삼아 우리 동에 배치했는가라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시청 시정계나 당시의 부시장님, 기타 누구로부터도 전해듣지 못하였고 동사무소의 사무장, 총무, 회계 등 동료 공무원들도 쉬쉬 하였던 것입니다. 명함을 들고 각 단체 위원님집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는 방법 뿐이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사무장의 안내로 명함을 돌렸습니다.
나중에 2022지방선거 예비후보를 돕다보니 후보자 명함을 돌리는 연습을 이 때에 마스터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동정자문위원회의 위원들과 소통을 거쳐서 비공식적이지만 동장으로 인증을 받게 되었고 설악산 여행 다음 주에 "축 취임"이라는 리본이 나부끼는 대형 난을 받게 됩니다.
공직에서 승진, 전보, 영전, 영진하는 공무원에게 난을 보내는 이유는 아마도 선비의 기상을 발휘하라는 의미와 난을 닮아서 청렴하라는 뜻일까 생각합니다. 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난은 사악한 것을 쫓아내고, 맡은 자리에서 고고한 향기를 풍기면서 그 직장과 주위 사람을 덕화시키기를 바란다는 마음에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난을 받는 이도 이와 같은 뜻을 명심하면서 감사와 겸손의 마음으로 축하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더 큰 발전을 다짐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축전을 보내주신 분에게는 문자, 메일 등 SNS로 감사 인사를 전했고 난을 주신 분에게는 전화로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금액면에서도 난은 최소 5만원이고 축전은 3천원 정도이며 축전은 공공요금에서 지불되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난은 이를 보내는 당사자의 개인비용으로 처리되었을 것이기에 난에 대한 예우를 높게 평가했던 면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받은 난은 다른 화초와 함께 관리되었는데 이들 난이 두 달을 버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중에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귀가 쫑끗했습니다.
게으른 선비가 난을 잘 키운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물을 자주 주지말고 연명할 정도로만 관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척박하여 더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느낌이 들때에 난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꽃을 피운다 합니다.
참으로 의미있는 이야기이고 상황입니다. 난을 보낸 분의 마음도 직장의 업무를 발전시키고, 공직자라면 정치와 행정을 신장시키라는 뜻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받은 이가 잘 키운다고 물을 주고 잎에 물을 뿌리고 간섭을 하거나 부담을 주면 스스로 야위어가더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네 스스로 성장하라, 발전하라, 바라만보고 있으면 난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잘 자랐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공직도 마찬가지인듯 여겨집니다. 기본적인 급여와 수당으로 생활을 하면서 공직을 건전하게 운영할 수 있는 있을 것인데 주변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골프접대, 식사대접, 촌지 등으로 과도하게 물을 주거나 농도가 높은 비료를 첨가하니 난은 오히려 야위어가고 화분속에서 뿌리부터 썩어나가는 경우를 목도하였습니다.
난에 대한 생각과 이유를 더 꺼내고 싶지만 글을 쓰는 방향에서 정한 바는 '2개월 여간의 동장생활'이기에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동장을 인정하는 난을 받으니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다른 시군에서는 동장 취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고 언론에 보도가 되는데 도청 선배들이 정의하는 바 "먼 곳"인 동두천에 발령을 받고 동장으로 일하면서 난분 하나를 받음으로써 동장으로 인정, 인증받은 기분이 들었던 상황이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다.
동장 취임 초기의 과도기를 부드럽게 넘기고 연착륙하면서 동장이 해야할 임무와 내용에 대해 스스도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화성시청의 여러부서에 원효대사의 '오도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만 원효의 숨결은 동두천 소요산자락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신라 29대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전설은 이곳 소요산에도 전해집니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어울렸다는 의상대가 소요산 정상에 있습니다. 정말로 의상은 축지법을 쓰는지 전국 여러곳에 의상의 지명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과 인연은 다른 동단위 기관단체에서도 부드럽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장은 내근보다는 외근으로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출근하면 동행정을 서류로 살피고 곧바로 동 관내를 순찰했습니다.
그리고 오전코스를 마치면 모이는 장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생연로의 양복점 2곳, 인쇄소, 건강원입니다. 동장으로 발령받고는 원로 양복점 사장님께 인사드린바 있는데 이분은 당시 시장님과 통하고 생연4동장으로 근무하기 직전에 동정자문위원장을 하신 지역의 어른입니다. 양복점 여러 집이 생연로에 집중되어있고 1960년대에는 성업하였던 곳인데 1997년 동장으로 근무할때에는 가끔 양복을 가봉하는 모습을 보는 정도로 경기가 쇠락했습니다.
더러는 민방위복을 만드시는데 그 수익율은 낮다 하십니다. 그리고 양복점은 공무원 현장근무복, 청경복 등 기성품을 납품하는 일도 당시에는 일부 있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분들 양복 전문가는 청년시절 서울 학원에 가서 바느질을 배우신 선각자들입니다. 인쇄물을 납품하면서 행정을 알고 공무원의 역할을 파악하신 분입니다.
통장으로써 통민을 위하고 동사무소와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잘 관리 해 주신 분입니다.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약재를 관리하신 분입니다. 상인들의 권익과 전통시장의 발전을 선도하는 분입니다. 동정자문위원회 위원, 미군부대에 근무하면서 시정을 돕는 분도 많았습니다.
동장의 순찰로에 위치하신 이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어느덧 그 멤버는 8분이 되었습니다. 1999년 동장을 마치고 집 근처로 근무지를 이동하였지만 동두천 생연4동 주민들과의 교류는 이어졌습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서 2011년에는 부시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동장 재직시에 도의원을 하시는 등 동두천에서 정치를 하신 오세창 3선 시장님께서 부시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지금은 대학 부총장을 하십니다.
당시에 부시장으로 추천하는 말씀을 지역 정치권 언저리에서 수집해 본 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 부시장은 조금 더 젊은이로 해서 부시장을 마치고 (경기도청에) 돌아가서도 동두천을 지원하고 보탬되는 자리에서 길게 일하면 좋겠다. 동두천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파악하고 오는 부시장이 필요하다."
나이 19세에 공직에 들어와서 39세에 동장으로 근무하였으니 비교적 젊은 편이고 2년간 동두천시에 근무하였으니 대략적으로 시정을 파악한 바입니다. 답정너입니다. 혹시 시장님께서 1997~1999년 동장으로 근무할때에 행동거지를 살피시고 추가로 난분 하나를 보내주고 싶으셨나봅니다. 부시장으로 시 발전을 위해 노력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당시 부단체장 인선은 2급, 3급 대상자의 결정이 중요해서 초저녁부터 도지사 공관에서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특히 서기관에 승진할 당시에는 손학규 도지사님이 참모들과 심야회의를 하곤 했는데 서기관급 부단체장은 새벽이 되어야 테이블에 올라왔고 피로감으로 격론을 벌이지 못했다 들었습니다. 그 당시 공보관 등 간부들이 강력히 추천하여 서기관에 승진하였고 서기관으로 여러부서를 다니다가 공보과장으로 재임중에 동두천부시장 발령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동두천시에서 시장님 명의로 추천을 하였고 그 결정은 아마도 새벽 시간이었을 건인데 김문수 도지사님께서 그리하라 하시고 새벽에 오세창 시장님께 전화로 동의를 구했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도지사 전화를 받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으신답니다. 그리고 다음날 부시장 요원이 발령장을 들고 시장실에 들어오더라는 조크가 있기도 했습니다.
인사는 정해진 인원을 정해진 자리에 배치하는 바둑 고수들이 진행하는 기보와도 같은 정치적인 작업입니다. 그래서인가 인사 초안을 작성하면 '바둑돌을 놓았다'고 말합니다. 바둑알을 반상에 올리고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바둑의 수를 따지게 됩니다.
흑백돌을 하나로 붙여서 해설에 활용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리하면 저리도 편리한 것을 바둑 해설 50년동안 흑백을 따로 담아놓고 꺼내쓰는 불편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 바가 있고 그 심경을 글로 적어 언론에 올린 바도 있습니다.
인사 바둑돌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수없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인사라인이 있어서 앞 서열의 누군가를 국장으로 하거나 부시장으로 하면 그 다음에 매달린 공무원의 자리도 수시로 바뀐다고 합니다.
실제로 인사대상 당사자를 운동장에 모이게 하여 이리저리 바둑알 옮기듯이 인사작업을 한다면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짜증이 날 것입니다. 한밤중에 도청 운동장에서 예비군 훈련, 민방위 훈련을 하는 것이나 같았을 것입니다.
좋은 자리로 가면 얼굴에 웃음꽃이 필 것이고 다시 인사안이 조정되어 불편한 자리로 가면 그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희일비인가 일비일희인가는 몰라도 그 얼굴에 울그락 푸르락하면서 마음졸임이 심해서 심장병이라도 도질 듯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서면으로 밀실에서 진행되는 것이 오히려 공무원 건강관리에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내용을 이른바 '지라씨'(문서)로 만나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사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했다가 금방 국장 한 말씀에, 부지사의 의견 개진에, 도지사의 기침소리에 낮은 자리, 불편한 부서로 갔다고 얼마 후에 다른 이의 자리를 누군가가 차고 들어오고 그래서 어부지리로 우리 라인이 좋은 선을 타게 되기도 하는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염보현 도지사님 시절의 인사계 차석은 인사바둑판 종이위에 도지사가 굵은 싸인펜으로 공무원 이름을 감아돈 후 휙 하고 이리저리 배치한 결과지를 놓고 다시한번 사다리를 타는 모습을 본 기억을 전해주십니다.
이재창 도지사님은 승진후보자 명부에서 승진자숫자에 해당하는 후보자 이름 아래로 싸인펜 선을 긋고 서명했다 하십니다. 도지사가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서류에 기준하여 승진자를 낙점한다는 의미입니다. 인사권자의 싸인펜이 권력이 되어 '펜이 칼보다 강하다'며 인사권을 휘두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인사에서는 기관장을 낙점을 받습니다. 승진인사를 말합니다.
경력, 평점, 상훈 등으로 평가되어 매겨진 석차순을 승진후보자 명부라 합니다. 그 자료를 보고 비고란에 기관장이 점을 찍어줍니다. 점을 받으면 승진하고 빈칸이면 다음을 기약해야 합니다. 어느 기관에서는 사전에 승진대상자를 미리 내정하여 낙점을 받고는 그 서류를 인사관련 서류에 첨부해 두었다가 담당 공무원이 징계를 받은 바도 있습니다. 기관장이 내정한 곳을 공식 문서로 보관하는 실수를 한 것입니다.
낙점은 조선시대 여성의 글 '조침문'에서 나옵니다.
정조대왕의 대를 이은 23대 순조(1800 ~ 1834)대에 양반가의 유씨부인이 쓴 조침문에 '연전에 우리 시삼촌께오서 동지상사(冬至上使) 낙점(落點)을 무르와'라는 글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해마다 동짓날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등의 우두머리가 되어'로 풀고 있습니다. 당시 인사부서에서 동지상사로 갈 인물을 천거하면 왕이 붓을 들어 대상자 명단에 점을 찍었다 합니다.
왕이 점을 찍었다는 이야기에서 유추되는 암행어사와 고을 수령이야기를 듣고 가겠습니다. 곳간관리가 부실하다는 암행어사의 지적을 받은 고을 수령은 자신의 결백함과 이방(吏房)의 부정임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창고의 물품을 관리하는 수불부의 결재중 본인이 결재한 것과 결재없이 이방이 불법으로 반출한 내역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은 것입니다.
고을수령은 평소 소모품 수불부 결재를 붓을 들어 점 하나로 처리하였습니다. 이를 본 이방이 부당하게 관가 창고의 물품을 빼돌리고 자신의 붓으로 수령의 결재를 대신한 것입니다. 물품잔량과 소모품 대장상의 숫자는 맞지만 실제로 백성에게 전달되지 않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에 수령이 다시한번 수불부를 검토한 후 암행어사에게 고합니다.
결론은 수령의 결재용 붓속에는 송곳이 감춰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결재난에 점을 찍은 것이지만 수불부의 결재된 점 부분을 빛에 비추어 보면 수령이 결재한 정상적인 부분에는 송곳에 의한 눌림이 나타나고 이방이 대리로 결재한 부분에서는 송곳자국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령은 책임을 면하고 이방이 그 죄값을 받게 되었다는 권선징악의 옛날 이야기가 완성된 것입니다. 물론 총체적인 관리책임은 면할 수 없으니 아마도 '기관경고'를 받았을 것입니다.
기관경고란 다수의 공무원이 종합적으로 잘못을 범했지만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특정하여 책임을 묻거나 벌을 내리기에 모호한 경우에 행하는 감사관의 조치인줄 압니다. 현대적 해석을 하면 다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대략 1982년경에 수원 파장동 소재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역시 암행어사인 감사부서에서 감사한 결과 부실한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감사관은 결재를 한 과장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에 과장은 문서를 살펴본 후에 본인은 잘못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고을 원님과 같습니다. 과장의 결재는 동그라미였습니다. 누구나 표기할 수 있는 동그라미인데 늘 결재를 하고나서 가느다란 핀으로 결재시각을 표기했다는 것입니다.
동그라미 결재를 시계로 보고 결재한 시각 부분에 핀을 이용하여 작은 구멍을 뚫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원님의 송곳 결재와 과장의 핀 결재가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과장님이 한학에 조예가 깊어서 조선시대 관리의 송곳결재를 응용하여 핀결재를 생각해 낸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올바른 결재문서에는 결재시각을 핀으로 찌른 작은 구멍이 보였고 실무자가 대리 결재한 문서에는 없었다는 것을 감사관이 확인했다고 합니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연4동 통장님, 위원님, 유지분과의 소통은 부시장에 보임되는 영광스러운 결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역분들의 평가와 인정도 오세창 시장님의 부시장 결정에 힘을 실어드렸을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인연은 동장과 사무장으로 만난 두사람은 시설사업소 소장과 운영계장으로 일했고 훗날 부시장에 취임할 때 시정계장이었고, 부시장 재직중에 시정계장을 사무관에 승진하는 인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의사봉을 탕탕탕 내리쳤습니다.
결국 빠르게 부시장이 되어 국장급 반열에 오르고 국장반 교육 1년을 수료한 후에 수도권교통본부장으로 일한 후에 고향 오산시 부시장이 됩니다.
수도권교통본부에는 경기, 서울, 인천의 공무원 49명이 일했는데 소속기관이 다른 공무원을 화합시키기 위해서는 타기관 공무원을 더 대우하는 책임자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전임, 선임의 업무차질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간부와 주무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공식적으로 결재문서로 남기고 책임자인 본부장과 짐을 나누자 했습니다. 서울시 직원은 다시 돌아가는 날 회식장에서 고마운 인사를 했습니다. 참으로 의미있는 대화이었고 주무관은 지금쯤 중앙부처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말했습니다.
오산시 부시장이 되었습니다. 고향인 화성군의 오산읍이 승격하여 오산시가 된 것이니 오산시도 고향마을입니다. 이 같은 반전과 행운과 성원으로 오산시청에 근무한 후 국장급으로 공직을 마무리하는 타이밍에 또 다른 인연으로 실장급으로 영진영전하면서 몇개의 난을 더 받고 난을 보내주신 분에게는 전화를 드리고 감사편지를 썼으며 축전을 주신분에게는 감사편지를 우편으로 보내는 기쁨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23년 12월28일에 통장으로 일하시면서 늘 고맙게 동장을 응원하시고 덕담을 해주시던 어르신이 별세하셨다는 전화를 받습니다. 동장 근무중 휴가를 받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내일 놀러갈 곳을 의논하는 시점에 동두천시에 수해가 심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가에서 들으니 어르신들이 동장 부재중에 수해가 났으니 휴가 중이라도 귀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셨다고 합니다. 별세하신 김방남 통장님께서 의견을 가장 먼저 꺼내셨다는 사모님의 말씀을 빈소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쇄소 목영달 사장님이 휴가중인 동장에게 전화를 하셨던 것입니다. 수해가 크게 발생하였으니 동장이 휴가를 중지하고 귀청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셨고 즉시 차를 몰아 의정부를 거쳐 양주를 지나 동사무소에 복귀하였습니다.
정말로 의정부까지는 비가 소강상태였는데 양주를 지나면서 동두천까지 폭우가 내렸습니다. 그 비는 그날에 연천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수해복구에 나서서 젊은 마음에 시민과 고통을 함께하겠다면서 동장실에서 노숙했습니다. 한달반 가량을 그리하였지요.
수해발생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아내가 내복과 양말과 다른 옷을 두 가방 가득 들고 재난현장을 뚫고 생연4동 사무소에 왔습니다. 난리통이라 먼길을 달려온 아내에게 밥도 챙겨주지 못하여 미안했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밀린 빨래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아내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신랑 고생한다고 전쟁터 같은 수해현장을 여러 번 환승해서 버스타고 당도한 것입니다.
얼마전에 부부가 관람한 '서울의 봄' 영화에서 장태환 장군역의 정우성 부인이 내복과 목도리를 챙겨서 부대를 방문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차분한 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건강과 식사를 걱정하는 대사가 좋았습니다. 아내가 가져온 그 목도리를 목에 감고 격정의 현장으로 출동하는 모습을 영화로 보면서 지난날 동두천시 생연4동 수해현장을 내달렸던 청춘의 자신감을 잠시 회상해 보았습니다.
그 부부가 오늘은 통장님 어르신의 부음을 듣고 달려갑니다. 부부가 차를 타고 가면서 차안에서 저녁밥으로 유부초밥을 먹었습니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차량이 여러 줄 겹친 고속도로의 체증을 뚫고 달려갔습니다. 1998년 수해발생 당시에 전화를 받고 달려가던 모습이 오늘 가는 길과 겹치면서 묘한 '데자뷰'현상을 느꼈습니다. 수해가 나서 달려가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잠시 돌아보았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한 고마움도 생각했습니다. 처음으로 부음을 알려주시고 빈소를 다녀오신 목영달 사장님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두번 상가를 방문하고 집으로 오셨다는 전언입니다.
그런데 조문을 하고 상가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니 다시 오늘만 세번째로 오셨습니다. 목영달 사잗님이 집에 돌아가서 홀로 생각해보니 멀리 100km를 달려온 동장부부가 눈에 밟혔다 하십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세상살이가 생노병사라지만 좋은 분이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고인 김방남 통장님은 중후한 분이고 인생관에 스토리를 가지신 분입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기억하시고 챙기시고 스토리텔링을 하십니다. 선거에 나선 예비후보의 명함을 보관, 관리하면서 선거운동 이야기, 당선후 이야기, 낙선상황 등을 설명해 주십니다. 지난날 동장시절의 에피소드를 기억하시고 가끔 만나 뵐 때마다 소환해 주십니다.
동장으로 일하던 중 시설사업소로 발령될 당시에 동의 유지분들께 편지를 드린 바가 있는데 20년이 지난 어느날 김방남 통장님댁을 방문하였을때 그 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원본을 받았고 몇달후 다시 방문하여 감자탕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 스토리를 말하고 개인명의로 감사장을 드리는 이벤트를 한 바가 있습니다. 어색해 하시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감사장을 받으시던 모습이 선한데, 오늘 그 영전에 절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내는 사모님과 손을 잡고 동장으로 일할 때, 부시장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상가에서는 말이 많아야 합니다. 3일, 4일동안 가족을 보내야 하는 슬픔에 찬 유족들이 잠시라도 고인의 삶을 추억하면서 이별의 아픔을 잊게해 드리는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 하는 조문객의 사명이 있습니다.
바늘이 부러진 것을 가족이 별세한 것처럼 의인화한 것처럼 조문은 밤새우고 다음날 새벽에도 함께해야 하는 것인데 현실, 현대에는 그리하지 못합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함께하면서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결혼식장은 1시간 일찍가야 봉투내고 식사하고 다시 신랑신부 입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상가는 늦게갈수록 의미를 더하고 아예 발인 직전, 새벽에 가면 상주들은 더더욱 기억납니다. 전날 조문을 한 공직상사 사모님의 발인 날 아침 출근길에 다시 방문하여 영구차 떠나는 대목을 함께한 바 지금도 기억해 주시고 그 자녀들도 고맙다 합니다.
저녁 6시에 출발하여 러시아워 파고를 넘고 8시경에 조문하고 9시까지 대화하고 다시 100km를 달려 12시 직전에 귀가했습니다. 평소 일찍 잠드는 습관은 잠시 미루고 오늘의 슬픔과 회고로 12시가 지나도록 그 소회와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으로 쓰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청아하신 어르신들 덕분에 동장의 소임을 잘 마치고 성과 이상의 고평가를 받아서 훗날에 부시장 발령을 받고 그 추진력으로 나름 공직을 아름답고 보람차게 완성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모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은 조문객"인지는 몰라도 스스로는 반드시 조문해야 하는 명단 윗부분에 올려져 있다는 자부심으로 고인께 거듭 인사드리고 명복을 빌고 어른께서 부족한 후배의 앞길에 좋은 이정표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소망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내는 장거리 운전에 졸지 말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고 평소보다 긴 시간 단둘의 공간에서 단둘의 대화를 하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운전 중에 밥을 먹으니 김치를 먹여주고 음료수 빨대를 셋팅하여 건네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운전을 하면 더 큰 대우를 받습니다.
상가를 나와서 목영달 사장님을 모시고 생연로로 갔습니다. 2년의 추억과 인연의 기억이 있는 생연로의 돌아가신 김방남 사장님의 삼성양복점 앞에 주차하고 내려서 건너편 대영인쇄소 앞에서 인사드렸습니다.
조금전 목영달 사장님께 드리던 소주 반병을 챙겨와서 드렸습니다.
집에 올라가셔서 잠이 안오시면 한잔 더 드시라 했습니다. 통장님 부음을 26년 전 동장에게 연락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셨다 합니다.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은혜를 다 갚지 못하지만 빈소에 인사드리고 명복을 빌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린 동장을 부시장으로 성장시켜주신 생연4동의 어르신 모두가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무병장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동두천시의 발전, 시민의 행복, 선후배 공직자의 건승을 기원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김방남 통장님 어르신의 명복을 빕니다.
이강석 올림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