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8월 3일에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하였습니다. 남양주시청에 근무면서 숙소에서 사무실까지 아침에는 3.5km우회하며 걸어가고 퇴근길은 2.5km 지름길로 다녔습니다. 어두운 밤에 묘역주변 산길을 걷기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1년 동안 봄 여름 가을 겨울까지 걷고 또 걸어서 꼭 366일 근무기간 동안 280번 가까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 출근길에서 매번 만나는 분이 덕혜옹주였습니다. 1912년에 고종황제의 고명딸 옹주로 태어나 19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해방 후 한참이 지나 1962년에야 환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사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결혼과 이혼, 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남양주 묘역에 영면하셨습니다. 덕혜옹주의 일생이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된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움직였습니다. 간부 공무원들과 버스를 타고 영화관 인근에 가서 저녁으로 갈비탕을 먹고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다음날 오전 12시까지 소감문을 제출해 달라고 간부들에게 요청하여 그 내용을 정리한 후 감상문을 만들어 영화사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시면 남양주시청과 덕혜옹주 묘역을 방문해 달라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무관한 일인데 동시에 발생하여 인과관계가 있는 듯 보여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오해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이 1989년 1월 1일에 오산시로 승격하였습니다. 시로 승격하면서 오산시는 개나리, 비둘기, 은행나무를 시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당시의 화성군과 오산시의 자료를 살펴보니 화성군의 상징물도 오산시와 같은 개나리, 비둘기, 은행나무였습니다. 오산천에 개나리가 만발하고 비둘기가 날았으며 공자님을 모시는 사당 闕里祠(궐리사)에는 520살(2023년 기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오산역사에서 오산역 이름 유래를 설명하는 동판을 발견했습니다. '하늘에 까마귀가 많이 날아다녀 역명을 오산이라 했다'고 합니다. 오산역은 1904년 경부선 완공 당시 설치되었으며 이후에 설치된 오산역을 안내하는 동판이 오산역 한쪽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오산지명 유래는 오산천에 자라(鰲=자라오, 전설상의 바다에 사는 큰 거북 또는 자라)가 많이 서식해 오산(鰲山)이라 불리다가 오산(烏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지만 애초부터 까마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김희겸 재난안전실장님(전 경기도행정2부지사)께 드린 안전모가 언론에 많이 나왔습니다. 안전을 총괄하는 자리로 영전하신 부지사님께 북부청 간부들이 정성스럽게 비용을 捻出(염출=필요한 비용 따위를 어렵게 걷거나 모음)하여 만들어 드린 것이기에 '국민의 안전'을 지켜 달라는 소망과 함께 이임을 아쉬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담겼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부들이 만들어 드린 이 안전모에는 당시의 국민안전처 로고와 함께 경기도에서 함께하신 것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로 경기도 로고(넥스트경기, 굳모닝경기, 세계속의 경기도)가 새겨졌습니다. 경기북부청에서 다양한 분야를 총괄하는 부지사로 일하셨지만 특히, 세월호 사고, 의정부 화재, 고양터미널 화재,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등 언론에 크게 보도된 사건마다 때로는 수개월간 사건이 마무리 될때까지 현장을 지켰습니다. 사건이 없을 때에는 재해안전 현장을 점검하는 발로 뛰는 "현장 부지사"의 役割(역할)을 수행한 결과를 보도한 기사를 안전모 여백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단단한 플라스틱에 움직이는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앙지와 지방지에서 여러 문장을 길게 동원하여 다양하게 설명해 주고 나아가서
경기도행정역사관에 참 좋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언론에 보도하기 위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작은 관심이 큰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대해 자랑을 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기도청 현판, 김영삼 대통령의 경기도의회 현판이 나란히 정리 보존 중입니다. 두 기관의 명칭이 새겨진 동판을 보존하는데 一翼을 담당하 였던 바 이에 대한 자랑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65년경에 서울 광화문에 소재한 경기도청 청사를 수원으로 이전 결정을 합니다. 처음에는 인천시로 간다 했습니다. 도청이 이전하려면 문방구, 설계사무소, 건설사, 식당 등 어느 정도 인프라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수원으로 경기도청이 이사를 온 1967년에 수원시내 택시가 10대 내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정부의 관리들은 경기도 땅 서쪽방면으로 치우쳐 있는 인천시로 경기도청을 이전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수원으로 경기도청이 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당시 이병희 국회의원이 삭발투쟁을 벌이는 등 많은 인사들의 노력으로 수원 이전이 결정되었고 1967년에 지금의 팔달산 중턱에 경기도청 본관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에 인천시로 경기도청을 이전했다면 또다시
홍보의 맥은 타이밍입니다. 이른바 계기 홍보가 중요합니다. 언론에서 기관장 취임 100일 기념 인터뷰를 하는 것도 홍보의 계기를 만들어 기사를 쓰면 '누이좋고 매부도 좋은 일'이기에 필요한 전략입니다. 경기도청에서 홍보의 진맥을 잘하는 '공보명인'으로 꼽는 선배가 있습니다. 공직에서 두 번을 전입자와 후임자로 만났습니다. 이 분이 신문에 기고한 내용과 타이밍을 소개하겠습니다. [아침단상] 경기도청 이전 후를 생각한다/ 경인일보 2019-11-06 제22면 경기도청은 수원화성이 있는 팔달산자락에 자리 잡고 지대도 높아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잔디광장도 있고 산자락은 사시사철 다양한 색상과 다른 정취가 느껴지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도는 최고의 환경을 갖추고 있지요. 벚꽃이 필 무렵에는 청사를 개방해 수십만의 도민이 찾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30년 넘는 세월을 그곳에 몸담아 일을 했지요. 그런 경기도청이 광교신도시로 이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도청은 67년 수원으로 이전해 근대유산으로 지정된 구관만 있다가 신관이 들어서고 지방자치시대가 다시 시작되면서 경기도 의회 건물이 들어서고 잇달아 식당이 있는 제2, 제3별관이 들어섰지요. <중략> 도청이 광교 신
1985년 기억으로 경기도청에는 국가직 공무원과 지방직 공무원이 있었다. 대부분 지방공무원이고 과장, 국장은 국가직, 계장, 차석, 주무관은 지방직이었다. 양정과, 기획실 등 일부부서의 경우 주무관중 국가직이 몇명 있었다. 6급이하 주무관이 국가직이면 국비로 월급을 받았다. 지방직은 경기도청과 시군청 재원으로 봉급을 주었다. 과장, 국장, 실장, 부지사는 국가직이므로 정부에서 인건비 예산을 받았다. 그러니까 국가예산으로 월급을 받는 것은 국가사무를 담당한다는 의미였고 따라서 과장이상은 국가직으로 정부에서 보낸 공무원으로 보는 것이었다. 경기도청의 각과에는 과장 1명과 계장 4명이 있었다. 지금은 서기관 과장에 사무관 계장, 5급 팀장이 근무한다. 과거에는 사무관 과장, 사무관 계장이 있었다. 과장은 국가직이니 '행정사무관'이고 계장은 지방직이니 '지방사무관'이었다. 더러는 정부에서 온 6급 주사가 과장 직무대리를 하니 과장이고 당시 총무처에서 채용한 고시 사무관은 지방직으로 계장에 보임되었다. 6급 과장에 5급 계장이 근무했다. 6급 국비 과장은 사무관 승진시험을 통과하면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적정한 시기에 다시 내무부(행정안전부)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든 과
1988년 당시 공보실에 근무하는 홍승표 선배가 구내식당에서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합니다. 사금파리 흰 잔에 검붉은 커피 한 사발을 주는데 200원이었습니다. 5잔을 마셔도 1,000원에 해결되는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연봉이 1천만원을 넘지 못하였으니 당시 500원이면 최근 코미디에서 한때 인기를 누린 '궁금하면 500원'보다는 더 비싼 돈이었습니다. 3명이 앉아서 3잔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는 공보실에 와서 일해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제안에서 가장 의미깊은 말은 고등학교 3년동안 문예반 활동을 한 것이 1순위요. 두 번째는 전임 세정과 보다는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일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사실 지방행정주사보 7급에 승진하여 세정과에 가니 매일매일 하는 일이 전자계산기 두드리기였습니다. 36개 시·군(현 31개 시·군)의 세외수입 보고서, 하천점용료 부담금, 그리고 본청 각 부서의 세입보고서를 집계하여 안전행정부에 전화로 불러주고 다음날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공무원 7급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인데 아주 샤프한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더구나 세정과 근무기간도 2년이 흘렀으니 이즈음에 부서를 이동하는 것도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인사발령장을 전달하는 행사를 일컫어 "사령교부"라고 하는 용어부터 군대스러워서 민주적인 행정에서는 부드럽게 인사발령 행사로 개칭을 건의 합니다. 공직내내 그렇게 발령장을 받았으면서 이제서야 개선을 건의하는 점 송구스럽습니다만 앞으로는 조금 더 멋지고 의미있는 발령장 전달행사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1977년이면 공직에서도 권위주의가 하늘에 닿아있을 시기입니다. 화성군청 군수님을 만나서 5급을류 공무원 사령교부, 오늘날 9급 공무원 발령장을 받으러 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재수생으로 학원을 다니는 중에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흰색 T-셔츠에 끈 없는 운동화를 신고 오산읍에 소재한 화성군청 내무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내무과장, 행정계장은 모든 ‘공무원의 헌병’이어서 이른바 ‘山川草木(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던 시절인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발령장 받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겁 없이 호랑이 굴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상밖의 불량하고 미흡한 발령 대상자를 본 당시의 목이 짧은 행정계장님은 ‘복장불량’을 호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뭐요?” “발령장 주신다고 해서 받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 복장이 뭐요? 발
1970년대 당시 시골 어르신들 말씀에 '하다못해 면서기,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 있었고 정말로 하다못해 5급 공무원도 못하느냐는 말도 돌았습니다. 이 일도 저 일도 못하겠으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 공무원에 대한 평가, 특히 지방공무원에 대해서는 저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은 정말로 서류를 만져보지 못한 분들이 면장을 하였기에 나온 말입니다. 면장으로 발령받은 분이 취임식을 하고 면장실에서 총무계장의 보고를 받습니다. 기안 갑지에 기안을 해서 면장님 결재를 받으러 간 것입니다. 내용을 설명하고 결재판을 내밀자 면장님이 내용이 참 좋다하므로 결재를 청하자 면장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어떤 조치를 해야 하나요?” 나름 교양있게 질문을 하므로 총무계장이 설명을 했습니다. “이곳에 결재를 하시면 됩니다.” 신임 명장은 도장을 찍어야 하는지 서명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쩔쩔매기에 서명을 하도록 했던 바 이름 석자를 간신히 쓰셨다고 합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결재하기도 버거운 어르신이 면장을 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 나오고 '하다못해 면서기'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1
1960년대에는 글씨를 잘 쓰면 승진하고 출세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경기도농민교육원에서 농조조합장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저수지를 관리하면서 농사짓는데 물을 보내주고 수세를 받는 조합입니다. 이곳의 조합장님들이 일주일간 교육을 받으시고 마지막 날에 군대식 표현으로 '訴願受理(소원수리)'를 받아 이를 정리하여 원장님께 보고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자료를 종합하여 식사, 교육환경, 강사, 교직원 서비스 등을 평가하고 기타 의견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 필체가 범상하지 않습니다. 싸인펜으로 슥슥 써 내려가시는 필력이 초서도 있고 행서도 있고 추사 김정희, 떡장수 아드님 한석봉입니다. 작업을 마치고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농조조합장님들이 어찌 이리도 하나같이 글씨를 잘 쓰시나요. 농조라 하면 농사짓는 분들이신데 한문 공부를 엄청 하셨는지 다들 명필이십니다." 선배가 말했습니다. "이분들이 누구신지 그대가 잘 모르는가 보네. 어르신들은 직전에 군수 영감, 시장을 하신 분들인데 정년 2년 전에 물러나서 농조 조합장으로 일하면서 정년을 맞이하시는 거라네." 요즘 공로연수에 해당하는 기간에 농조 조합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35년 40년 전에 공직